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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중국 역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많다. 한고조 유방(漢高祖 劉邦)은 황제가 된 후 통치를 위해 자신의 내력을 포장해야 했던 바, 스스로 “赤帝之子”(적색 황제의 아들)로 자칭. 이때부터 중국인은 빨간 색을 숭배한 나라가 되었다. 그중 한무제는 아주 독특한 인물로 중국 역사상 진 시황제·강희제 등과 더불어 중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한 무제는 유가 사상이 자신의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계를 공고히 하는 데 부합된다고 여겼다. 특히 그는 동중서의 춘추공양학을 중심으로 하는 유가 사상에 주목하여 오직 유가만을 국교로 인정했다. 또한 무제는 유가의 효과적인 보급을 위해 유학자 관리 임용을 원칙으로 삼아 유학의 대유행을 불러일으켰다. 무제 사후 유가가 국교로 정착되면서 유가는 중국 봉건 시대의 정통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뿐이나리 그는 해외 원정을 펼쳐 흉노를 크게 무찌르고 남월, 위만조선 등을 멸망시켜 당시 한족 역사상 두번째로 넓은 영토를 만들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韓半島)에 한사군을 설치한 장본인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일이 있다. 동서양의 문화와 문물 교류의 창으로 유명한 실크로드는 거의 1500년 이상 이어지면서 동서양의 관문 역할을 톡톡히 했다.주로 중국에서 서양으로 수출하는 역할로 많이 쓰였는데 실크로드란 말 답게 비단이 주 수출품이었다. 서양에선 중국의 비단 등의 상품이 고가품으로 큰 인기를 누렸고 중국은 이런 상품을 판 대금으로 국가 경제를 꾸려나갈 정도로 대단했다.대표적으로 당나라 현종 시절 정부의 양대 자금줄은 걷어들인 세금이 아니라 실크로드 무역과 소금전매였다.
오이시스 도시들이 이 실크로드가 열린 후 이 중계무역으로 먹고 살았고 이슬람 세력이 그 오랜기간동안 강력한 세력과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실크로드로 인한 자본의 축적이었다.지금은 잊혀진 고도가 되었지만 팔미라, 부하라, 사마르칸트 등의 도시들은 지금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사람들이 북적대는 대도시였다. 실크로드 하면 우리는 혜초를 떠올린다. 실크로드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면 혜초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함을 자연 알 수 있다. 1100년간 11개왕조를 꾸린 시안의 장안성,그곳 개원문은 먼길 떠나는 시작을 알리는 문이다. 그곳 가까이 혜초가 묵은 선유사(지금은 진펌땜으로 수장)와 신라국소승 혜초란 기념비 정자가 있다. 그리고 시안 가까이 흥교사라는 사찰에는 현장법사의 수제자 원측의 측사탑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막고굴과 왕오천축국전으로 유명한 둔황을 거치면 옥문관이 나온다. 이곳에서 갈라져 한쪽은 인도로 향하는 호탄, 또 다른 한쪽은 투루판을 향하게 된다. 길목에 악마의 늪이라는 백룡퇴가 있다. 얼마나 험악한 곳이면 우리 판소리 열녀춘향 수절가에 그 지옥의 터 백룡퇴가 등장할까. 이윽고 낮은 사막분지 투루판, 불과 모래와 바람이 합쳐져 문명의 용광로를 만든 곳이다. 이곳에서 서방종교도 중국문명도 스스로 용해되었을 뿐 전파가 더 이상 되지 않았다. 투루판 가까이 자리한 토욕구 천불동 그리고 베제클리크 석굴. 시대역사의 대도둑들이 회치듯 모두 뜯어간 벽화 흔적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투루판의 명물 인공수로 카레즈 그리고 그 혈맥으로 우려낸 포도. 그곳에서 위로는 우루무치 아래로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텐산산맥을 낀 쿠처가 있다.
왕오천축국전에서 묵은 시간을 밝힌 유일한 곳이다. 악기와 음악을 사랑한 동네인 그곳 근처에는 키질 석굴이 있다. 곳곳에 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음이다. 신장의 중심부로 텐산이북의 초원의 길의 관문인 우루무치를 지나면 신라의 금관과 너무도 닮은 황금인간이 모셔져 있는 카자흐스탄이다. 이웃한 키르기스스탄은 고선지 장군의 전투현장인 탈라스가 있다. 당군이 패하고 포로들 덕분으로 그곳에서 서방으로 종이가 전래된 역사적 사실이 있다. 늘 서역길에는 말이 있었다. 한혈마,카자흐스탄에는 바로 명마들이 산다. 이슬람 르네상스의 성도 타슈켄트, 중앙아시아의 풍운아 티무르가 명마를 타고 천하를 호령한 적이 있다. 아프라시압 동성의 사마르칸트 그리고 2천5백년 영욕의 터전으로서 이슬람 과학의 메카 부하라, 불교 전파의 서쪽 끝 투르크메니스탄의 메르부를 거치면 헬레니즘의 산실인 파르티아제국의 니사가 나온다.
당시 그 제국에는 바빌론, 크레시폰, 그리고 페르세폴리스가 함께 했다. 과연 서역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왕오천축국전에는 파사국(이란), 대식국(아랍)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곳 까지를 다 훓어 페르시아까지 갔다는 말 아닌가. 시아파의 성지 마슈하드, 문명의 모임 터 페르세폴리스, 페르시아의 말쑥한 얼굴 시라즈, 석류의 고향 시르쿠후. 세계종교의 원형이라는 조르아스터교의 성지 야즈드를 넘어서면 아라베스크의 극치 이란의 이스파한이 나온다. 과연 페르시와 왕자와 신라의 공주가 이곳 까지 와서 결혼을 했을까. 그리고도 이스탐불까지는 길은 계속된다. 4천년 고도 시리아 다마스쿠스, 로마도 탐냈던 4천년 교역도시 팔미라를 지나면 지금의 터어키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들이 살았다는 터키 성지 하란, 성스러운 안식처 넴루트산, 그곳 헤라클레스상이 신라의 사천왕상을 그대로 닮았다. 요즘의 터어키 관광 필수 코스인 자연과 인간의 조화상 카파도키아를 지나 드디어 이스탐불이다. 토인비는 이스탐불을 인류문명이 살아 있는 거대한 노천극장이라고 말했다. 파미르 고원이 뚫린 이래 동과 서는 그렇게 오가며 살았다. 당시 실크로드의 위력은 대단하여 중계무역의 중심지라는 이유만으로 그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서하같은 경우도 실크로드를 장악했기 때문에 그렇게 강했던 것이다. 실크로드의 전성기는 당나라 현종시대라고 보는 설이 많지만 혹자는 몽고시대라고 하기도 한다. 몽고시대가 더 활발했다는 설의 근거는 몽고제국이 세계제국에 워낙 기동력이 있는 민족이라서 서로간의 움직임이 활발했다는 것이 그 근거일 것이다.
실크로드는 몽고제국이 분열된 후 서로간의 견제로 교류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급격하게 쇠퇴한 것은 사실이다.몽고군의 원정으로 중계무역을 하던 오아시스 도시들이 황폐해졌고 이름 그대로 실크로드의 최대 무역원이었던 비단이 서양에 전래가 되면서 독점이 사라진 탓도 있다.
그리고 명나라 시절이 되면서 실크로드는 사실상 폐쇄되며 영락제 시절 정화의 대항해의 목적 중에 하나가 바닷길을 뚫는 것이었으니 이때부터 실크로드는 사실상 바닷길로 위치를 옮긴다. 그리고 실크로드의 결정타를 먹인 것은 바로 유럽국가들이 대항해시대에 동양까지의 직통노선을 열어버린 것으로 이때부터 실크로드의 존재 의미는 아예 사라진다. 이에 따라 과거 실크로드를 따라서 흥망성쇄를 거듭했던 수많은 도시와 국가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며 그 강력했던 이슬람세력이 쇄퇴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천년이상 동서양의 문명의 통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는 어떻게 개척되었을까? 한무제 시절 한나라의 최대 목표는 흉노를 치는 것이었다. 참 알아 둘 것이 중국은 영어로 China로 쓰는데 이는 Chin에게서 변형된 말로 실크로드가 열리기 전에도 중국 서부북에 위치해있던 진나라가 수백년간 서방과의 간접적인 교류를 해왔던 결과이고 증거라고 말들을 한다. 아무튼 흉노를 이기기 위해 갖은 생각을 다하던 한 무제는 특단의 조치를 한다. 기원전 139년 한나라 건원 4년, 당시 한 무제는 변방을 어지럽히는 흉노에 대항하기 위해 대월지에 대한 동맹을 맺으려 사자를 모집하였다. 그때 장건이 지원을 해서 지원자 100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서역으로 가서 대월지국으로 향한다.
이전에 대월지는 월지라고 불리었는데, 흉노의 묵돌 선우와 그 아들 노상 선우에게 패한 후, 서쪽으로 옮겨 이름을 대월지로 바꾼 나라다. 특히 노상 선우는 월지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으므로, 월지는 흉노를 원망하고 있었고, 한나라는 흉노 서방의 대월지와의 협공을 위해 장건을 대월지로 파견한 것이다.당시 서역 지방은 흉노의 세력권이었으므로, 장건이 한의 세력권인 감숙성으로 나가자마자 흉노에게 잡히고 만다. 흉노의 군신 선우는 장건이 대월지로 가는 사자임을 알아채고, “월씨는 우리들의 북쪽에 있다. 어떻게 한이 그곳에 사자를 보낼 수 있는가? 만약 내가 한의 남쪽 월나라에 사자를 보낸다면 한은 그것을 허용할까?”라고 말하며, 장건을 십여 년동안 구류하였다. 흉노에서 장건은 처도 얻고 그 사이에 아이도 낳았지만, 한나라의 사자로서의 임무는 잊지 않았다.
그 후 장건은 흉노의 땅에서 탈출에 성공하여 흉노 서쪽에 있는 대완에 이르렀다. 대완은 익히 한나라의 강성함을 알고 있었기에 장건을 환대하고 대월지까지 길을 안내해 주었다. 대월지는 흉노에게 패배한 연후에, 오손에 쫓겨서 더욱 서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장건은 강거로 들린 후에 드디어 대월지에 도착하였다.장건은 흉노와의 원수지간인 월지의 왕에게 한과의 동맹을 설명하였지만, 월지 왕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월지는 새로운 땅에 정착하여 풍부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동쪽으로 돌아가 흉노와 싸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흉노에 대한 복수심은 이미 과거의 일이었다. 실의에 빠진 장건은 귀향 노선을 곤륜산맥을 타서, 강 일족의 지배지를 통과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또 다시 흉노에게 붙잡힌다.
일 년 남짓 지나 군신 선우가 사망한 틈을 타서 탈출, 기원전 126년에 마침 한나라로 귀환했다. 출발할 때에 100명 남짓 있던 수행원은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동맹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장건이 가지고 돌아온 서역에 대한 지식은 지극히 귀중한 것이었고, 그때까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서역의 사정을 듣고, 한무제는 장건이 실패했지만 그의 이야기에 엄청난 흥미를 보인다. 미지의 세계인 서방 오아시스 국가들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중에 무제가 가장 흥미를 끈 것은 피와 땀을 흘린다는 대완의 한혈마다. 대완의 한혈마는 중국에선 오랫동안 명마의 상징으로 불렸는데 중국의 말에 비해 훨씬 크고 강한데다가 달릴 때 피같은 땀을 흘린다고 알려져 있는 말이다. 실제로 삼국지의 유명한 명마인 절영이 바로 한혈마다.
무제는 군마로서의 한혈마에 욕심이 나서 대완과 교역을 하기 시작하지만 우호적이던 대완이 무제의 지나친 요구에 화가 나서 교류를 끊는다. 무제는 대완 원정을 결심하는 데 첫번째는 대실패를 한다.몇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거리가 워낙 멀어서 보급 문제가 심각한데다가 총사령관인 이광리는 무능했다. 앞서 말했지만 이광리는 무제가 사랑했던 여인의 오빠다. 무제 성격에 실패는 용납이 안되고 다시 이광리를 총사령관으로 해서 2차원정을 감행하는 데 워낙 대규모 군대에 보급품도 엄청나게 준비해서 이번에는 성공을 한다. 단 총사령관의 무능 탓인지 절반 이상이 죽었는데 그 이유가 굶어 죽은 것이다. 보급품은 충분한데 고급장교들이 다 빼돌렸다고 한다.
그 이후로 무제시절에는 대완을 중심으로 실크로드 경영을 시작하지만 무제가 죽은후에는 다시 시들해지고 만다. 본격적으로 중국이 실크로드 경영에 나서는 것은 후한시절 다시 서역경영에 나선 후부터다.이때의 서역을 홀로 개척한 영웅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반초다. 원래 한나라의 서역경영은 단지 흉노를 상대로 보조공격을 한다는 의미가 강했는데 반초시절에는 의미가 바뀐다. 반초는 무려 31년간 서역에 머물면서 구자, 선선, 언기 등의 오아시스 국가를 정복하면서 흉노의 세력권에서 멀리 떼어 놓는다. 언기공략은 참 잔인한 전투였는데 복수전의 의미가 강한 전투라서 인구의 1/3을 학살했다고 한다. 반초는 최초로 서방세계와의 무역을 직접 할 것을 생각했다. 그 일환으로 부하인 감영을 서쪽으로 보내서 직항무역로를 열 생각을 한다. 당시 서쪽의 주 고객이라면 바로 그 유명한 로마다.
하지만 감영은 지중해 근처까지 왔다가 안내원의 협박으로 포기를 한다. 감영의 실패에도 반초는 서역도호로 부임하면서 무역루트로서의 실크로드에 공을 들인다. 그 후 실크로드는 천 년간이나 지속된다. 장건은 서역을 여행하는 도중에 촉(사천) 명산의 대나무와 옷감을 현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손에 넣었는 지 묻자, 인도의 상인으로부터 샀다고 했다. 이것에 의해 촉으로부터 윈난 → 미얀마를 통하는 인도로 연결된 루트가 있는 것을 알고서, 장건은 무제에게 윈난을 한에 복속시키라는 건의를 몇 번이나 한다. 이 루트를 통하여 서역으로 연결된 루트를 개척한다. 바로 이 길이 천산남로다.
아무튼 한무제는 말을 지극히 사랑했고 그가 그토록 한혈마에 집착한 것은 북방 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였다. 무제는 기마민족인 흉노를 누르기 위해서는 흉노의 말보다 더 강하고 빠른 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무제가 한혈마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장건 덕분이다. 무제는 흉노를 압박하기 위해 서역 나라들과 동맹을 원했고 장건을 특사로 파견했다. 장건은 서역과 동맹을 맺지는 못했지만 다양한 서역의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때 한혈마의 존재도 알려졌다. 장건은 서역의 대완국에는 하루 1000리를 달리고 피같은 붉은 땀을 흘리는 말이 있다고 소개했다. 처음 무제는 일반적인 통상 교섭을 통해 한혈마를 손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완국은 금으로 만든 말 모형을 가지고 찾아간 한나라의 사자를 죽였다. 이에 분노한 한무제는 군사를 일으켜 대완국을 정벌하고 한혈마를 빼앗기로 마음을 바꿨다.
1차 원정에서는 기병 6000과 수만의 보병이 원정에 나섰으나 보급이 부족해 원정에서 실패했다. 1차 원정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는 20%에 불가했다. 2차 원정에서는 원정군의 규모를 늘렸다. 총 6만명의 병사와 말 5만 마리 소 10만 마리가 원정에 참가했다. 원정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대완국 정벌로 한나라는 한혈마 암수 3000마리를 얻었고 매년 상위급 말 암·수 한 마리씩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6만의 병사중 살아 돌아온 병사는 1만에 불과했다.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가혹한 사막기후에 군사들은 목숨을 잃었다. 1차 원정에 출전한 병사의 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1차 원정군이 2차 원정의 절반인 3만명이라 가정하면 한무제는 1~2차 원정에 무려 9만의 대군을 파견한 것이다. 그러나 살아 돌아온 병사는 1만6000여명에 불과하다. 7만4000여명은 사라졌다. 그러나 한무제는 1~2차 원정을 이끈 이광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한혈마를 얻었으니 그것으로 모든 잘못을 불문에 부친 것이다.
얼마나 좋았으면 한혈마를 칭송하는 시까지 지었을 정도다.역사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한혈마는 1981년 다시 태어났다. 이전까지 한혈마의 현실적인 이미지가 없었다. 그러나 1981년 무제의 묘인 무릉에서 도금된 청동마상이 발굴됐다. 한무제는 워낙 말을 좋아하다보니 말을 돌보는 마부에게 각별했다. 더욱이 흉노 출신 마부라 하면 이는 스승같은 존재다. 그런고로 한무제는 본의 아니게 신라와도 인연이 깊다. 다음은 그 이야기를 해야 할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