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시인을 좋아한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시인이 어디 있으랴. 또한 사람을 사랑하는 시인이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그런 시를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알아본다. 이를테면 정호승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처럼 그늘이 있는, 그늘이 느껴지는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어둠 속에서 외로운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 크고 화려한 꽃 보다 쇠별꽃처럼 작은 풀꽃을 노래하는 시, 뜨거운 볕 아래에서 바닷물을 대파질하는 염부의 이마에 불어오는 바람 같은 시, 차가운 골목에서 길 잃은 강아지를 안아 토닥여주는 다정한 손길 같은 시.
가끔은 내방 책꽂이 앞에 기대어 서서 시집들을 하나씩 꺼내서 넘겨본다. 읽는 것이 아닌 손으로 만지며, 내가 그었던 밑줄을 되새김한다. 신기한 것은 그때 내 마음에 들어왔던 그 시구가 지금도 여전히 좋다. 시인들도 그렇다. 스물에 좋아했던 시인의 시가 여전히 좋다. 내 곁에서 나를 이끌어준 세 명의 시인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내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아니 세월이 흐를수록 그 마음이 더욱 깊어지고 있다.
정호승 시인의 시는 노래 가사처럼 잔잔하게 가슴에 스며드는 시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연인에게 가만히 다가가 부르는 세레나데처럼 읽을수록 마음이 저절로 열리는 시다. 그래서인지 이별 노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시가 노래로 만들어져서 시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어렵지 않게 다가간다.
<맹인가수 부부>는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로 시작한다. 맹인이라서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다고 한다. 맹인부부는 눈 내리는 겨울 거리에서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래를 부른다. 눈사람을 왜 기다리는 걸까. 눈사람이란 어떤 존재일까를 궁금하게 한다. 그러면서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래한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에게 길이 되기 위하여 먼저 앞질러 간다.
맹인가수 부부는 눈사람을 기다리다가 눈사람이 된다.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된다. 눈사람이야말로 그의 시<내가 사랑하는 사람>에서 말하는 그늘과 눈물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눈사람이 된 맹인가수 부부는 시인의 또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상상한다.
정호승 시인의 또 다른 시 <이별 노래>는 가수 이동원이 노래로 만들어서 시보다 먼저 알려졌다. '떠나는 그대를 위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려 한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라'고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다. 추운 밤, 길에서 길을 잃은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 길을 잃은 사람의 길이 되는 것은 시인의 마음이고, 시인의 길이다.
정호승 시인이 어느 강의에선가 자신의 시 <이별노래>가 노래가 된 과정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가수 이동원이 찾아와서 <이별노래>를 노래로 만들고 싶다고 했단다. 시인은 '그러면 좋지요.' 아무 조건 없이 허락했단다. 1984년 이동원의 1집에 수록된 곡이니 무명 가수를 단번에 알려준 노래가 되었다. 정호승 시인은 그 시가 노래가 되어 그렇게 히트할 줄 모르고 그냥 줘서 아쉽다는 농담 같은 진담을 했다. 하지만 덕분에 그 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시인 김용택은 섬진강의 잔잔한 물가로 마음을 이끄는 시인이다. 그의 시들은 섬진강에서 태어나,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는' 섬진강을 따라 펼쳐진다. 섬진강이 어디쯤에 있는지 몰라도, 눈을 감으면 매화꽃이 피고 산수유가 지는 섬진강 풍경이 그려질 정도로 섬진강을 전 국민에게 알린 시인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특유의 동화적 감성이 느껴지면서도 전라도 사람들의 저항의식이 느껴지는 시들이 많다. 그 중 <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는 한 바탕의 씻김굿을 보는 것처럼 또는 한편의 판소리를 듣는 것처럼 마음속에 말(言)들이 와서 박힌다. 시의 형식이지만 문자가 아닌 말(聲)로 전해진다. 이 시의 또 다른 매력은 시인의 일장연설을 전라도 사투리로 절절하게 풀어놓았다는 데 있다. 표준어가 아닌 생활인의 말(言), 땀 냄새가 나는 말(聲)이어서 더욱 감동이 있다.
시의 첫 행부터 '환장허겄네. 환장허겄어.'하며 불편한 심정을 드러낸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노고를 너무 헐값으로 치는 쌀값에 대한 불평부터 던진다. 쌀값이 싼 이유를 따져 묻는다. 제 땅 제 국민을 돌보지 않고, 코쟁이나 왜놈의 비유를 맞추는 이유를 묻는다.
쌀 한 톨은 '농부의 피땀'이라고, '밥이 나라'라고 주장한다. 이 장면에서 백남기 농부의 죽음이 떠오른다. 권력 앞에서 자기주장 하다가 물대포를 맞고 힘없이 죽어간 농부. 묵묵히 일만 하는 선한 농부의 마음을 그대로 전한다.
흔히들 일이 잘 안되면 무엇이든 탓한다. 그러나 농군은 땅을 탓하거나 날씨를 탓하지 않고 씨를 뿌리고 거둔다. '만백성 뱃속 채워주고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고 논두렁은 삐뚤어졌어도 농사는 빤듯이 짓는 전라도 농군'이라고 못을 박는다.
김용택 시인은 농사를 짓지 않지만 사람을 키운다. 사람을 키우는 교육자 또한 농부와 다르지 않다. 마당이나 논두렁은 농부가 농사를 짓는 땅이다. 교육자에겐 학교나 아이들이 마당이고 논두렁이다. 삐뚤어진 세상에서 제대로 된 아이들로 성장하게 하는 진정한 교육자의 삶을 살아 온 시인의 시다. 그런 점에서 농부의 마음을 잘 대변하는 시라고 생각한다.
시인 안도현은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단 세 줄의 시로써 전 국민을 향하여 물음을 던진<너에게 묻는다>의 시인이다. 연탄재처럼 누군가를 위해 내 몸을 뜨겁게 불사르고, 차가운 재로 남기 위해 겨울 골목길에 버려진 연탄재를 어찌 함부로 찬단 말인가.
시인이 우리에게 물었듯이 시인의 사명은 그러해야 한다. 시인은 연탄재인 것이다. 나를 불태워 너를 따뜻하게 데우고, 마지막까지 골목길을 지키는 존재이다. 안도현 시인의 삶과 시가 연탄재이다.
안도현 시인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그 시대의 연탄재였던 전봉준의 투쟁을 시로써 표현한다. 왜세에 맞서 싸우다가 죽음의 길로 이끌려 가는 혁명가의 마지막 모습을 시로 승화했다. '눈 내리는 만경 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전봉준이 서울로 가는 참혹함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처럼 그대로 보여준다.
다리가 다쳐서 들것에 실린 채로 호송 중인 한 장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녹두처럼 작은 그의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혁명가의 결기, 그리고 강렬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전봉준의 의지가, 그의 삶이 어떠하였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서 풀잎들은 민중으로 대변한다. 그리고 민중을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며,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 하던 잔뿌리' 라고 표현한다. 하늘을 보기가 두려워서 차가운 땅 속으로 깊이 내려간 잔뿌리들이 있었기에 역사는 이어져왔다.
바람 부는 들판에 핀 이름 없는 풀꽃들의 삶이 민중이다. 마지막 연에서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노래한다. 물결소리마저 깨어나라고 철썩철썩 제 몸을 때렸을까. 전봉준은 척왜척화를 외치는 동진강 물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뜨겁게 울부짖었을 것이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의 마지막 눈빛이 그렇게 타올랐을 것이다.
정호승의 시는 그의 시를 노래한 가수 이동원이나 안치환의 노래를 사랑하게 했다. 김용택의 시는 섬진강을 품은 지리산과 강 따라 펼쳐진 구례, 남원, 곡성의 마을과 들판을 사랑하게 했다. 그리고 안도현의 시는 그가 필사한 백석의 시들을 사랑하게 했다.
내 마음을 뜨겁게 하는 시들이 앞으로도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한 순간 나를 달뜨게 하다가 불행하게도 언젠가는 기억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지금껏 사랑해온 시인들은 내 언 가슴을 덥혀주는 시들을 써 왔다. 오래도록 읽어왔고, 오래도록 내 속에서 묵혀온 시였기에 그런 시를 내게 보낸 시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아궁이의 군불처럼 새벽녘까지 따습게 하는 구들장 같은 시를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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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려고 노력하는한 쓰게 되겠지요
단 하나의 시라도^^
다른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시인이 되는군요... 휴대폰으로 글을 잘 안 읽는 편인데 병원에서 1시간 이상 대기하며 잘 읽었습니다 ~
어쩐일로 병원이신지요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
다 좋아하는 시인들이네요.
옛날 문학예술대 입학 면접에서 누구를 좋아하냐고 하길래 김용택이라고 했었죠.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아버지(농민)의 한숨이 들어있었던 것 같아요~
현존하는 시인들 중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분들이죠
저역시 누구랄 것 없이 모두 사랑하는 시인입니다
시를 잘 모르지만.. 정호승, 김용택, 안도현을 좋아하지요..
정호승의 시 같은 동화, 동화 같은 시는 가슴을 적시지요..
윤슬 시도 참 흐뭇합니다..
감사합니다.
시평 중에 흐믓은 처음이지만
들어보니 흐믓하네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이동원님 이별노래는
참 많이 들었었는데 ~
안치환의 앨범 '정호승을 노래하다' 찾아서 들어보세요. 모두 좋습니다.
어찌 이리도 비슷한 느낌인지. 풀어 쓰니 더 닮은 것 같습니다. 다음에 이동원의 '이별노래' 한 곡 부르겠습니다.
어머나... 넘 좋아요...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