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천문, 지리, 역수(曆數), 점산(占算), 측후(測侯), 각루(刻漏)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삼국시대 이후 천문관측기구는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설치했다.
백제에는 누각박사(漏刻博士)·역박사(曆博士)·일관(日官) 등의 관직이 있었고, 고구려에는 일자(日者)라는 관직이 있었으며, 신라에는 누각전이 설치되고 천문박사가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점서(占筮:점치는 일)를 주요업무로 하는 기구로 초기부터 있었던 태복감(太卜監)을 계승한 사천대(司天臺)가 있었고 실질적으로 천문관측의 업무를 담당한 태사국(太史局)이 있었다.
그런데 태사국은 사천대보다 관부로서의 지위가 낮고 사천대에 종속되었으므로 점서적 측면이나 천문상의 이상현상에 집착하게 되고 천문현상에 대한 법칙의 탐구가 결여되었다. 이후 사천대는 사천감·관후서(觀候署)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1308년(충렬왕 34) 태사국과 병합하여 서운관(書雲觀)으로 발전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서운관은 고려의 제도 그대로 이어졌다. 서운관은 천문·재상(災祥)·역일(曆日)·추택(推擇)의 일을 맡았는데 정3품에서 종9품의 관원 34명으로 구성되었다.
1466년(세조 12) 관제개정에 의해 관상감(觀象監)으로 개칭되고 구성 인원도 대폭 증가되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원은 65명이 있었는데 최고책임자인 영사(領事:정1품)는 영의정이 겸임하고 제조(提調) 2명, 전문직인 정(正:정3품) 1명, 부정(副正:종3품) 1명, 첨정(僉正:종4품) 1명, 판관(判官:종5품) 2명, 주부(主簿:종6품) 2명, 천문학교수·지리학교수(종6품) 각 1명, 직장(直長:종7품) 2명, 봉사(奉事:종8품) 2명, 부봉사(副奉事:정9품) 3명, 천문학훈도·지리학훈도(정9품) 각 1명, 명과학훈도(命課學訓導:정9품) 2명, 참봉(參奉:종9품) 3명, 이밖에 임시직이 다수 존재했다.
1506년(연산군 12) 잠시 사역서(司曆署)로 개칭했다가 중종 때 다시 관상감으로 환원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관상감을 관상소(觀象所)로 격하하고 기구를 축소했다. 조선시대의 관상감은 국가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의미를 가지므로 역대 왕들이 중요시했다.
그 이유는 농업국가에서 농업생산이 국가경제를 좌우하는 관건이 되므로 역법(曆法)의 확립이 무엇보다도 필요했고, 유교의 정치사상에서 천(天)은 만물의 주재자이므로 천의 의사표시로 나타나는 천상(天象)의 변화를 주시해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