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얼굴 가리고 손·발 테이프로 묶은 후 훔쳐
1989년 복면 쓴 강도들이 무량사 침입…산소용접기로 금고 해체
행방묘연했던 아미타불좌상은 2016년 송암미술관 수장고서 발견
긴 세월 방치돼 도금 벗겨졌으나 앉아있는 자태서 예스러움 가득
사진1) 무량사 금동아미타불좌상, 조선 초, 높이 33.5cm. 필자 제공.
부여 무량사 금동아미타불좌상은 도난된지 28년 만에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사진1>. 이를 계기로 무량사 5층석탑에서 발견된 조선 초기의 아미타삼존불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89년 7월13일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있는 무량사 주지실에 복면을 쓴 강도 두 명이 침입했다. 이들은 주지스님의 얼굴을 가리고 손과 발을 테이프로 묶어 움직일 수 없게 한 뒤 산소용접기로 금고를 해체해 보관중이었던 금동아미타삼존불상과 금동보살좌상, 청동사리구, 청동합, 보살문원판, 동경 등 여덟 점을 모두 훔쳐갔다.
다행히 아미타삼존불상 가운데 협시보살상과 금동보살좌상을 포함한 불상 세 구는 2001년 2월29일에 되찾았으나 본존인 금동아미타불좌상과 청동사리구 등 다섯 점은 행방이 묘연했다.
2016년 인천시립박물관 분관인 송암미술관의 수장고를 정리하다가 도난된 불상으로 의심되는 무량사 아미타불좌상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해 8월 불상의 도난유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필자가 자문의뢰를 받았을 때만 해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사진상으로는 신체비례나 녹상태 등이 도난 불상과는 차이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실제 불상을 봤을 때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오랜 세월 수장고에 방치되어 온 탓인지 불상의 도금은 군데군데 벗겨지고 검은 색의 녹이 드러나 볼품이 없었으나 앉아 있는 자태에서는 예스러움이 남아 있었다. 이 불상은 송암미술관을 설립한 동양제철화학 회장이 평생을 모은 문화재 8400여점 가운데 하나로 구입 과정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선의취득한 도난 불상으로 확인된 후 기증 절차를 거쳐 현재는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도난당한 아미타삼존불상은 1971년 8월 무량사 극락전 앞에 있는 5층 석탑을 해체·복원했을 때 초층탑신에서 나온 것이다. 금동보살좌상 한 구는 최근 2층 탑신의 출토품으로 확인됐고 청동사리구 등은 5층 탑신에서 발견됐다. 석탑에서 발견된 8점의 유물은 일괄하여 1983년 9월 충남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됐다가 금동불상 네 구만 지난해 2월 보물 제2060호로 승격됐다<사진 2>.
사진2) 무량사 금동보살좌상 및 금동아미타삼존불상, 고려 전기 및 조선 초. 문화재청 제공.
부여 무량사에 대해 자세한 연혁을 알 수 없지만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을 비롯해 고려시대의 5층석탑, 조선 중기의 극락전, 17세기 전반의 대형 소조아미타삼존불상과 괘불 등이 보물로 지정되었을 만큼 연륜이 오래되었다.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아미타삼존불상은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이 배치된 것으로 조선 초기에 유행했던 아미타삼존불상의 형식이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아미타불과 관음, 대세지보살상으로 구성된 아미타삼존불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그 성격과 역할이 뚜렷하지 못한 대세지보살의 자리에 지장보살이 배치되면서 관음보살상과 함께 새로운 형식의 아미타삼존불상이 등장했다.
본존 아미타불좌상은 높이 33.5cm로 머리를 약간 숙인 자세이며 다리에 비해 상체가 좁고 빈약해 비교적 안정감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이마가 각이 진 역삼각형이다. 머리 위 육계(肉髻)는 뾰족한 편이며 그 위, 아래로 작은 계주(髻珠)가 장식됐으나 중앙 계주는 없어진 상태이다. 특히 팽이 모양 육계를 중심으로 2개의 계주가 장식된 것은 중국 원나라 때 유입된 티베트 불상양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조선시대 불상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법의는 양쪽 어깨를 덮은 통견식으로 입었는데 수평으로 입은 내의 위로 띠 매듭과 늘어진 가슴이 표현되었다.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아미타불의 설법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스타일의 아미타불좌상은 전남 강진 무위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이나 경기 양평 수종사 탑에서 발견된 금동불좌상 등과 같은 조선 초 불상에서 볼 수 있다.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은 높이가 각각 26cm, 25.9cm로 크기도 거의 같고 얼굴표현이나 앉아 있는 자세, 착의법, 손모양 등에서도 매우 유사하다. 관음보살상은 보관에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고 지장보살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는 것만 다를 뿐이다. 원래 지장보살은 지옥에 빠진 중생들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서약한 부처로 삭발한 스님이나 두건을 쓴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은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에 유행했던 형식으로 중국 중원지역이나 일본에서는 그 예를 볼 수 없고 중앙아시아의 투르판과 중국 돈황, 사천성, 운남성 등과 연관성이 있다.
무량사 금동아미타삼존불상은 본존불의 높은 육계와 뾰족한 정상계주 등에서 중국 원나라 티베트 불상에 영향을 받은 고려 후기의 작품이라는 설과 강진 무위사 목조아미타삼존불상과의 양식비교를 통해 15세기 말의 조선 초 불상으로 보는 설이 있다. 특히 아미타불상의 법의에 나타나는 직선적이면서 선각적인 옷주름 표현이나 보살상의 무릎을 감싸고 있는 영락장식 등은 조선 초기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지장보살상 역시 이마를 두른 좁은 띠가 어깨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 점이나 수평으로 입은 내의와 띠매듭, 세 줄로 늘어진 목걸이 장식 등에서 조선 초기 불상의 특징이 엿보인다.
2층 탑신에서 나온 금동보살좌상 한 구는 높이 36.5cm로 머리에 쓴 보관과 두 손이 파손된 상태이다. 상체가 긴 신체비례와 머리카락을 틀어올린 보계, 통통한 얼굴, 이중의 목걸이 장식, 착의법 등으로 보아 고려 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아미타삼존불상과는 도상이나 양식에서 차이가 있고 조각솜씨도 다른 것으로 보인다.
무량사 금동아미타삼존불상과 금동보살좌상, 청동사리구가 어떤 구성으로 조성되어 각 층의 탑신에 안치되었는지 그 의미를 알 길이 없다. 다만 불상을 탑에 봉안하는 전통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랫동안 이어져 왔지만 시대가 다른 불상을 함께 봉안한 예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조선 전기에는 탑 안에서 작은 불상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순천 매곡동 석탑 금동아미타삼존불상를 비롯하여 익산 심곡사 칠층석탑 불보살상,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불보살상, 양평 수종사 오층석탑 금동불상군 등이 있다.
봉안된 불상은 대부분 아미타불상이라는 점에서 살아서는 수명장수와 복을 누리고 죽어서는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듯, 15세기 후반의 조선 전기에 아미타신앙에 의해 탑 안에 불상을 봉안하는 풍습이 한때 유행했다는 것도 하나의 시대양식일지 모른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출처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