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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김삿갓 집터와 묘
황원갑 <전 서울경제신문 문화부장>
나는 1981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일보와 서울경제신문에서 기자로 일했다. 그 20여 년 동안 낮에는 기자로, 밤에는 작가로 나라 안팎을 많이도 돌아다녔다. 주로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며 선현들의 학문과 예술과 군사적 업적, 풍류의 멋과 슬기, 용장한 기개가 서린 유적과 유허를 취재하고,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하여 답사 기사와 역사소설, 역사칼럼을 집필하고, 역사적 명인들의 일대기를 저술했다.
언론사는 12년 전에 문화부장을 끝으로 떠났지만 나는 아직도 국토의 편답은 멈추지 않고 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나라 안팎을 돌아다녔지만 그래도 못 가본 곳이 더 많고, 아직도 쓸 것이 많이 남았다.
김삿갓이 강원도 영월에서 방랑을 떠난 것은 22세 때였다. 그는 57세로 전남 화순에서 세상을 뜨기까지 35년간 풍자와 해학과 기지와 전설을 남기며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김삿갓은 금강산은 해마다 봄 ․ 가을로 찾았어도 백두산은 먼발치에서 보기만 하고 올라보지 못했다고 탄식한 시를 남겼다. 나는 다행히 기자 시절에 백두산 정상과 천지에도 올라가보았고, 비록 제한이 따르기는 했지만 금강산도 가보았다.
인생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하지만 길어도 백 년에 불과하다. 동서고금의 영웅호걸 ․ 기인재사 ․ 절세미인이 모두 백 살을 채우지 못하고 죽었다. 나도 이미 70고개에 이르렀으니 살아갈 날들보다는 살아온 날들이 훨씬 많다. 돌이켜보니 지난 세월 동안 나라 안팎을 많이도 돌아다녔다. 기자로, 소설가로, 전기 작가로 답사여행을 많이도 다녔다. 그 결과 1988년부터 2014년까지 <역사인물기행><경제사의 현장><역사인물유적순례><민족사의 고향을 찾아서><고승과 명찰><한국사 여걸열전><한국사 제왕열전><민족사를 바꾼 무인들><부활하는 이순신><전쟁으로 읽는 한국사><한국사를 바꾼 리더십> 등 10여 권의 역사서를 펴냈고, <비인간시대><나를 여왕이라 부르라><연수영-불멸의 전설><불패-이순신의 전쟁><황혼의 분기점><단심-포은 정몽주> 등 여섯 권의 소설집을 펴냈으며, 여러 신문 ․ 잡지에 기고도 많이 했다.
역사의 현장에 선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역사는 지나간 것, 죽은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을 바라볼 생생한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적 인물에 관한 일대기를 쓰기 위해서는 그의 출생지부터 무덤까지 답사하는 것은 기본이다. 물론 출생지나 무덤 같은 중요한 유적이 역사의 기록에서 영영 사라진 경우가 많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보통 사람들보다는 더 많은 답사여행을 다닌 것을 내 인생에서 보람으로 생각한다.
언젠가 온달(溫達) 장군의 일대기를 쓴 뒤에 한 독자의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그가 궁금스러워 한 점은 온달에게 과연 후손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의 글을 읽고 <삼국사기> ‘온달열전’을 다시 한 번 찾아보았는데,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 부부에게 자식이 있다는 대목은 없었다고 했다.
역사에 아무리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구걸하던 바보였으나 하루아침에 평강왕의 사위가 된 고구려의 용장 온달과 평강공주의 유명한 러브스토리, 극적인 로맨스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달을 도시조(都始祖)로 모시는 문중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듯하다. 온달을 도시조로 모시는 사람들은 봉성 온씨(鳳城溫氏) 문중이다. 봉성은 오늘의 전북 김제시 금구. 온달의 후손으로서 고려 공민왕 때 우부시랑을 지낸 온신(溫信)이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봉성으로 내침을 당해 그곳에서 세거하게 되었으므로 그 후손들이 온달을 도시조로, 온신을 제1세조로 모시고 본관을 봉성(금구)으로 삼았다. 그렇게 온달을 조상으로 모시는 후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그 독자도 그제야 납득이 간다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내가 온달의 후손인 봉성 온씨를 처음 만난 것은 30년 전인 1984년이었다. 그때 온달의 일대기를 쓰기 위해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산성을 처음으로 답사했는데, 당시 봉성온씨종친회장이던 온명오(溫明五)씨, 그리고 영월의 향토사학자 박영국(朴泳國)씨 등과 동행했다. 그날 답사를 하면서 온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온명오씨가 이런 말을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가끔 다니면서 보면 온달식당이니 온달주점이니 하는 간판이 눈에 띄는데, 그런 걸 볼 때마다 우리 온가들은 기분이 안 좋지요. 아, 자기들은 자기네 조상 이름을 식당이나 술집 상호로 삼으면 기분이 좋겠어요?”
나도 수십 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온달식당이니 온달주점이니 온달반점이니 하는 간판을 본 적이 있어서 그냥 웃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만약 김수로왕과 김유신의 후손인 김해 김씨들이 수로식당이니 유신반점이니 하는 간판을 본다면 기분이 편치 못할 것이다. 또한 원효사란 이름의 절은 많지만 원효식당이니 원효주점이니 하는 간판을 본다면 원효대사(元曉大師)와 설총(薛聰) 부자의 후손인 경주 설씨와 순창 설씨들의 기분이 불유쾌할 것이다.
그 동안 온달이 신라에 빼앗긴 한강 이북을 탈환하기 위해 영양왕 1년(590년) 출정했다가 전사한 곳이 서울 광진구 아차산성(阿且山城)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광진구는 아차산생태공원에 온달과 평강공주의 동상까지 세워 놓았다. 광진구 중곡동에는 평강공주의 동상도 있다.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달이 전사한 곳은 아차산성이 아니라 아단성(阿旦城)이라고 했다. 온달이 신라에 빼앗긴 고토를 수복하고자 출정한 것은 영양왕 즉위 직후인 590년 10월. 온달이 수복하려던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은 현재 강원도 지방 대부분이다. ‘온달열전’은 ‘신라군과 아단성 밑에서 싸우다가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아단성을 아차산성으로 비정해온 것이 학계의 정설이 되다시피 했다. 아차산성을 아단성으로 추정한 이유는 첫째, 아단의 단(旦)과 아차의 차(且) 두 글자의 모양이 비슷한 데서 비롯된 착각과 견강부회의 결과요, 둘째는 위치가 한강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즉, 온달의 말 가운데 ‘신라는 우리 한수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라는 구절을 들어 온달의 마지막 싸움터를 오늘의 서울 한강 북쪽 아차산성으로 추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삼국사기>를 비롯한 어느 사서나 지리지를 찾아보아도 아차산성이 곧 아단성이란 대목은 없다.
또한 ‘한수 이북’을 두고 말하더라도 한강 하류인 오늘의 서울 강북만이 아니라 남한강 상류 이북은 모두 해당된다. 즉 온달이 가리킨 한북의 땅은 죽령 이북, 고현 이내의 10군인 오늘날 강원도 대부분과 충북 일부를 가리킨 것이다. 이 가운데 충북 단양군 영춘면은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이니, <삼국사기> ‘지리’편에 따르면 아단 두 글자가 붙은 지명은 오로지 이곳밖에 없다.
옛 지명이 을아단인 영춘면에 가면 성산이 있고, 그 정상부에 온달이 쌓았고, 온달이 이곳을 되찾기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전설에 따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온달성’이라고 부르는 고구려 산성이 있다. 온달성 근처에는 온달의 묘라고 전해오는 고구려식 대형 적석총도 있으며, 활고개 ․ 진거리 ․ 쉬는돌 ․ 비마루 ․ 대진목 ․ 군관나루 등 온달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서린 지명이 많다. 북한 평양시 역포구역 용산리 동명왕릉 인근에 진파리 4호 무덤이 있는데, 북한에서는 이것이 바로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합장묘라고 주장하고 있다.
광진구는 395억 원이나 들여 고구려역사문화관 건립을 추진하면서 온달의 묘까지 재현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하는 것도 좋지만 있지도 않았던 묘를 만들어 우리 스스로 역사를 왜곡하거나 날조하는 일은 삼가야겠다. 아차산성은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이 아니다
김삿갓의 유적 답사도 잊을 수 없다.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죽장 짚고 미투리 신고 한평생을 떠돌아다닌 천재시인 김삿갓, 풍자와 해학과 기지로 어우러진 파격적 시풍(詩風), 보통 사람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기행(奇行)으로 가는 곳마다 전설을 남기고 사라진 방랑시인 김삿갓, 그는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결처럼 이 땅의 산수와 저자 간을 마음대로 넘나든 영원한 자유인이요 풍류가객이었다. 강원도 영월 땅에 그의 일가가 숨어살던 집터가 있고, 김삿갓의 묘도 그 근처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불과 30여 년 전인 1982년 10월이었다.
이는 오로지 영월의 향토사학자였던 고 박영국(朴泳國)씨의 오랜 현장답사와 자료를 통한 연구의 결실이었다. 박씨는 1974년부터 김삿갓의 발자취를 추적하기 시작하여 1982년 10월에 마침내 영월군 하동면 와석1리 노루목에서 김삿갓의 묘와 어둔리 선락골의 집터를 찾아냈을 뿐 아니라, 그 뒤 1994년 세상을 뜰 때까지 사재까지 털어가며 김삿갓 유적지 보존운동을 벌이고, 곳곳에 묻혀 있는 김삿갓의 미공개 시와 일화를 발굴해내는 데에 심혈을 쏟았다.
내가 박씨와 함께 처음으로 김삿갓 묘와 집터를 답사한 것은 한국일보 월간편집국 기자였던 1984년 여름이었다. 그때 이미 오래 전에 폐가가 되어버린 김삿갓의 집터에서 그의 어머니와 부인과 며느리 등 여인 3대가 눈물과 한숨을 섞어 곡식을 빻았을 디딜방아를 발견하여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새롭다. 또 그날 영월군청에서 지프를 빌려 김삿갓 유적을 찾아가는데, 너무나 산길이 험악해 머리에 혹이 여러 개 생겼던 것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지금은 그때 길 같지도 않던 7km의 진입로가 매끈한 아스팔트 포장길로 변했고, 골짜기 이름도 와석리계곡에서 김삿갓계곡으로 바뀌었으니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평안도 용강 사람 홍경래(洪景來)가 썩은 세상 둘러엎고 새 세상을 만들겠다며 무리를 모아 떨쳐 일어난 것은 순조 11년(1811). 조선왕조 개국 이래 23왕 418년 동안 내내 멸시당하고 천대받아오던 서북 사람들의 원한과 울분이 마침내 홍경래라는 당년 32세 젊은 혁명가의 영도 아래 활화산처럼 무섭게 폭발한 것이었다. 당시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은 선천부사 겸 방어사였다. 홍경래 군이 인근 고을을 휩쓸고 선천에 쳐들어왔을 때 겁쟁이 김익순은 반란군에게 항복하고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더 살아보려다 영원히 욕된 이름을 남긴 셈이 되었다. 이듬해 봄, 난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모반죄로 처형당하고 그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했다. 이것이 미완의 정치적 혁명가 홍경래와 문학상의 혁명적 이단자 김삿갓 사이에 얽힌 비극적 운명의 사슬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일가는 당대의 세도가문 안동 김씨 일족이라는 덕분에 부계․모계․처계 등 삼족을 멸하는 화는 면했지만 역적의 자손이라 고향에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때 김삿갓은 겨우 다섯 살짜리 철부지였다.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순조 7년(1807) 3월 15일에 김안근(金安根)과 함평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양주시 회천읍 회암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망하자 병하와 병연 형제는 김성수라는 종이 데리고 황해도 곡산으로 도망쳤고, 부모는 아우 병호를 데리고 경기도 광주로 도망쳐 숨어살았다.
2년 뒤 병하와 병연은 아버지가 보낸 사람을 따라 광주로 가서 가족이 다시 합쳐졌다. 아버지는 식솔을 이끌고 양평으로 들어갔는데, 병약하던 막내 병호가 죽어버렸다. 문중에서는 역적이 났으니 가문의 치욕이라면서 족보에서 지워 없앤다는 소리가 나왔고, 그런저런 이유로 쌓이고 쌓였던 수치심과 분노가 울화병이 되어 아버지마저 그만 39세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병연이 일곱 살 때였다.
37세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경기도 가평을 거쳐 강원도 두메산골로 들어갔다. 평창 미탄에서 조금 살다가 다시 영월 삼옥리로 이사했다. 병하와 병연 형제가 장가를 든 곳이 바로 이곳이고,
김삿갓이 방랑을 떠난 곳도 바로 이 영월 땅이었다. 병연이 장가든 것은 그의 나이 16세 때였다.
김삿갓은 어찌하여 방랑길에 나섰을까. 최근까지는 김삿갓이 21세 되던 해인 순조 27년(1827)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할아비 김익순을 욕한 시를 지어 장원한 것이 가출 ․ 방랑의 계기라는 설이 정설처럼 굳어져왔었다. 하지만 이는 사리에 맞지 않는다. 비상한 천재였던 김병연이 나이 스물이 되도록 치욕스러운 집안의 내력을 전혀 몰랐을 리가 없다. 할아비가 역적으로 처형당하고 집안이 망할 때 김병연의 나이 다섯 살이었으니 어렴풋이나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했을 것이고, 그 뒤 이리저리 떠돌며 숨어살던 일이며, 아버지가 울화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은 이유도 알고 남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병연이 자신의 할아비를 ‘만 번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매도했을 리도 만무하다. 그리고 방랑길에 나선 곳도 동강변 마을인 삼옥리가 아니라 영월읍에서 남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어둔리에 살던 때라고 추정된다.
김삿갓의 가출과 방랑은 빼어난 재주를 타고났건만 출신성분 때문에 구만리 같은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이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인생과 장래를 두고 수년간 고민하던 김병연은 가출을 단행했다. 그것이 맏아들 학균(翯均)이 태어난 직후인 22세 때라고 전한다. 대삿갓 쓰고 대지팡이 짚고 미투리 신고 방랑길에 나선 김삿갓은 어제는 저 고을 오늘은 이 마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집도 처자도 버리고 길 떠난 김삿갓의 발길은 먼저 금강산으로 향했다. 김삿갓은 22세에 가출해 57세로 전라도 화순에서 죽을 때까지 35년을 방랑하면서 특히 금강산을 좋아하여 여러 차례 찾았다고 한다. 빈털터리로 집을 떠난 김삿갓은 정해진 곳도, 오라는 곳도 없이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발길 닿는 대로 나라 안을 떠돌아다녔다. 그런 신세를 읊은 대표적 작품인 <대시(竹詩)>를 소개한다.
-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 바람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이대로 /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붙이는 저대로 / 손님 접대는 가세대로 / 시정 매매는 세월대로 / 만사가 안 되네 내 마음대로 / 그렇고 그렇고 그런 세상 지나가는 대로 -
(此竹彼竹化去竹 / 風打之竹浪打竹 /
飯飯粥粥生此竹 / 是是非非付彼竹 /
賓客接待家勢竹 / 市井賣買歲月竹 /
萬事不如吾心竹 / 然然然世過然竹)
그렇게 주유천하하던 김삿갓은 2년 뒤에 잠깐 돌아와 후사 없이 일찍 죽은 형 병하에게 자신의 맏이 학균을 양자로 입양시키고, 둘째아들 익균(翼均)이 태어나자 다시 방랑길에 나섰다.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도는 인생, 세상잡사 초탈하여 풍류 한마당으로 천지간을 배회하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신선도 지상에 머무는 동안은 먹어야만 했으므로 때로는 마을에서 문전걸식도 했고 때로는 산사에서 공양 신세를 지기도 했다. 어쩌다가 운율깨나 아는 주인을 만나면 제법 그럴듯한 환대도 받았을 것이고, 또 기막히게 운수대통한 날이면 풍류를 알아주는 어여쁜 기생으로부터 아래위로(?) 극진한 사랑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동안 양자로 간 학균 대신 집안의 대를 이은 익균이 아비를 찾으려고 여러 차례 집을 나서 풍문이 들려오는 곳마다 쫓아다녔다. 결국은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시신을 모시고 돌아왔다. 철종 14년(1863년) 3월 29일 57세로 한 많고 파란 많은 삶의 막을 내린 김삿갓은 제2의 고향인 영월군 하동면 와석1리 노루목에서 외롭고 괴로웠던 유랑의 발길을 멈춘 채 영원한 휴식에 들어갔다. 22세에 방랑길을 떠난 지 35년 만이었다.
나는 고 박영국 선생과의 교분 덕분에 박 선생이 발굴한 김삿갓의 미공개 시 20여 수를 보도하여 특종상을 받기도 했다. 김삿갓 일대기를 취재하기 위해 여러 곳을 답사했는데, 그의 고손자가 양평에 살고 있기에 가서 만났다. 김삿갓의 고손자는 다방을 하고 있었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 고조부는 평생 전국을 떠돌면서 술을 얻어 마시고 다녔는데, 당신은 한 자리에 앉아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마실 것을 팔고 있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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