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신앙인은 담대하게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합니다.(마3:7-12)
2024, 4/21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마3:7-12절 말씀으로“신앙인은 담대하게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합니다.”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함께하길 원합니다.
날씨도 점점 더워지고 있고, 엊그제 벚꽃이 만개하더니 금방 떨어졌습니다. 세월 참 덧없이 빠르게 지나가는데 가는 세월 잡을 수 없고 오는 백발 막을 수 없다는 말처럼 세상 참 빠릅니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할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우리의 신앙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신앙이 현재의 우리 삶과 미래는 물론, 죽음 이후의 삶까지 보장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오직 참된 믿음 속에서 올바른 신앙, 건강한 신앙으로 한 세상 살아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2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신앙인은 불의를 불의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7절)
둘째로, 나는 죽고 주님만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합니다.(11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생각보다 더 추하고, 부도덕하며, 더 더러운 것 같습니다. 이 악한 세상을 살아갈 때 저들 속에 동화되어 저들과 똑같이 살면 전혀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고, 나름 죄악이 주는 쾌락도 누리며 살 수 있는데,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그럴 수가 없어서 상대적으로 고립감과 박탈감을 느끼며, 또 대부분 손해도 감수하며 살아야하니 그 자체가 고난이고 고통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해도 불의를 보고 불의하다고 말하고, 정의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손해가 되지만 그래도 기꺼이 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모든 걸 하나님께서 보고 알고 계시기 때문에 결국은 남는 장사입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나는 죽고 내안에 계신 주님께서 높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만 생각하며 우직하게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본문말씀을 따라가면서 불의를 보고 불의하다 말하는 것이 어떻게 주님을 높이는 것이 되는지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신앙인은 불의를 불의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7절)
본문 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아멘.
세례요한이 베뢰아지방 요단강근처에서 사역할 때 그가 먹는 음식과 독특한 행색, 그리고 선포하는 말씀이 예사롭지 않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혹시 그동안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야가 아닌가하여 그에게로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그 몰려드는 무리들 가운데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본 세례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렇게 강하게 질책하고 나섭니다.
여기서‘독사’는 팔레스틴 광야에서 흔히 보는 뱀으로 납작한 머리에 길이는 약 70-80cm, 몸통은 2.54cm 내외로 잿빛 혹은 갈색을 띠고 있는데, 독성이 매우 강해서 물리면 온몸이 부어오르고 대부분 생명을 잃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때문에 이방족속이나(렘8:17) 사악한 자들에게 독사라고 지칭했습니다.(시140:3)
여러분!!! 세례요한이 왜 저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를 퍼부었을까요?
당시 바리새인들은 엄격한 종교생활과 율법준수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지도자로 섬김을 받았는데, 주님도 저들의 이런 열심을 인정할 정도였습니다.(마23:23)
반면 사두개인들은 부활도 천사도 영적세계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대 제사장직을 물려받으며 로마와 결탁하여 당시 유대사회의 최상층으로 돈과 권력을 누리며 호의호식하던 매우 세상 타협적이고, 세상 지향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계층은 여호와신앙을 빙자하여 이스라엘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독차지하며 유대사회의 실제적인 권력자가 되어 겉으로는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 행세했지만, 겉과 속이 다른 위선과 탐욕으로 온갖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며, 목적을 위해서라면 하나님도 팔아먹을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수님도 이들에게‘화’를 선포하고 준엄하게 꾸짖었던 것입니다.
사실 세례요한이 오늘 이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퍼붓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판에 세례요한 하나쯤 처리하는 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그럼에도 세례요한은 저들의 위세에 굴복하지 않고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내 뱉었는데, 이건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흑을 흑이라 백을 백이라고 말하고, 불의를 불의라 말하는 것이 쉽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믿음의 선배들은 성경 속에서 역사 속에서 정의를 외치고 진실을 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오늘 세례요한도 제수씨를 빼앗아 아내로 삼은 헤롯왕의 잘못을 비판했다가 목이 잘리는 순교를 당합니다. 나단도 다윗왕이 밧세바와 간음하자 목숨을 내놓고 다윗을 찾아가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그를 죽인 불의한 짓을 준엄하게 책망하였습니다.
또 아합왕이 북 이스라엘에 있던 신앙인들을 잡아 죽이는 엄혹한 시대에서도 엘리야는 목숨을 걸고 담대하게 나서서 아합왕과 이세벨의 잘못을 꾸짖었습니다. 또 유다왕국 말기의 예레미야도 애굽을 따르지 말고 바벨론를 따르라는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로 인해 지하감옥에 갇혀 죽을 뻔했지만 그럼에도 굽히지 않고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에 붙을 것을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12사도들을 비롯해 수많은 믿음의 형제들이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고, 잘한 것을 잘했다고 말했다가 불이익을 당했고, 한 번만 예수를 부인하거나 십자가를 밟고 지나가면, 또는 묵례만 해도 살려주겠다는 회유를 거부하고 기꺼이 신앙양심을 지키며 의로운 길로 갔습니다.
겔3:17-18절에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을 예약해둔 신앙인으로서 불의를 불의라 말하고, 의로운 것은 의롭다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앞으로는 더욱 불의와 불법이 춤을 추며, 많은 사람들의 가치관이 왜곡되어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여 도덕과 양심이 마비된 범죄자와 도둑놈들에게 표를 주며, 불의가 정의를 억압하고, 죄인이 벌을 받지 않고 오히려 의인을 협박하고 압제하는 이런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죽을 수도 없고, 도망가서 숨을 수도 없는 불법의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때에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우리도 저들처럼 도덕과 양심을 저버리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불법과 탈법을 일삼으며 살아야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이 일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고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히9:27)
그래서 우리는 저들과 다르게 바르고 정직하게,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아야합니다. 비록 따르는 이가 적고 그 길이 좁고 협착하여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렇게 살아가야합니다. 물론 그 과정이 만만치는 않습니다.
연어가 먼 바다로 나갔다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거센 물살을 헤지고 강 상류로 올라갈 때 온몸이 찢기고 상처투성이가 되지만 연어는 끝까지 목숨을 걸고 강 상류로 올라가 알을 낳고 죽습니다.
이 과정이 얼마나 큰 고통이고 아픔이겠습니까? 한낱 미물인 연어도 많은 물고기들이 물살에 몸을 맡기고 편하게 하류로 내려갈 때 이들은 맡은 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강물을 거슬려 상류로 올라가는 아픔을 감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고난과 아픔을 회피한다면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때문에 우리 신앙인은 불의한 것은 불의한 것이라 말할 수 있어야하고,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부 고발자는 사회의 존중을 받아야하는데 우리나라의 민도(民度)가 워낙 떨어져서 왕따를 당하고 불이익을 당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나서라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에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설 때 움직이시고, 확신이 없다면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시대에서 노아처럼 의로운 삶을 살라고 부름 받은 신앙인입니다. 그러므로 부름 받은 하늘의 시민권자답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판단하여 도덕과 신앙양심을 저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바르고 정직하게, 진실하고 성실하게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길 축원 드립니다.
둘째로, 나는 죽고 주님만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합니다.(11절)
본문 11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아멘.
세례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회개를 선포하며 강하게 책망하면서 무리들에게 한 말이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또 눅3:16절에는 나는 그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이 나온 배경은 무리들이 심중에 세례요한이 혹 메시야일까? 라는 생각에 대한 답이었는데,(눅3:15) 사실 세례요한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대한 선생이나, 선지자 혹은 메시야로까지 추앙을 받는 상황에서‘나는 선생도 아니고 메시야도 아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와 비교자체가 안 될 정도의 위대하신 분이다.’고 고백하는 것은 정말 겸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지역 특성상 오늘날의 샌달과 같은 신을 많이 신고 다녔는데, 이 샌달이 매우 가볍고 시원했지만 대신 신이 발에서 분리되지 않도록 여러 겹의 끈으로 발과 신을 묶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서 종들이 이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자신을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신발 끈을 푸는 종보다도 못한 아주 하찮은 존재로 평가했고, 대신 예수님은 한껏 높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러분!!! 세례요한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이었고,(눅1:15) 말라기이후 400년 만에 등장한 선지자로서 그의 주변에는 구름같은 인파가 몰려들어 세례를 받는 등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게다가 당시 유대사회 권력자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할 만큼 강력한 카리스마도 있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그에게‘당신이 메시야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권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세례요한은 자기는‘물로 세례를 줄 뿐이지만, 뒤에 오실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다’며 자기의 한계를 알았고,‘그는 흥하고 나는 쇠할 것이다’고 철저하게 자기는 낮추고 주님은 높이는 겸손한 태도를 취했습니다.(요3:30) 참으로 자신의 한계와 본분을 바로 아는 겸손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례요한을 통해서 신앙의 교훈을 얻게 되는데, 현대사회는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해야할 필요성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불편할 정도로 드러내거나, 남에게 상처까지 주면서 드러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가 우리의 본능이라 탓할 수만은 없지만, 그러나 상대에게 불편함과 상처를 준다면 이건 교만이고 불신앙입니다.
정치인들처럼 자신을 드러내는 부류도 없을 겁니다. 어떤 정치인은 법카로 매달 수백만 원씩 국민세금을 쓰면서도 30년 된 냉장고를 가져다 현재 사용 중인 것처럼 보여주고, 또 반찬이 없을 때는 소금으로 밥을 먹는다며 소금을 처먹는 위선을 떠는데, 이것 또한 사악한 방법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 신앙인은 주님을 드러냄으로 나를 드러내는 방법을 써야합니다. 왜냐면 겸손하게 주님을 드러내면 주께서 우리를 높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소처럼 나를 높이면 주님이 낮아지고, 나를 낮추면 주님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잠4:8절에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노회가 두 달에 한번 월례회를 하는데 월례회 때마다 별 문제가 아닌데도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하고, 사안마다 손을 들고 따지는 분이 있어서 회의가 지체되고 다른 분들이 불편해하는데, 왜 그럴까? 아마도 그걸 통해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존재감을 부각시키려고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과연 그분에게 이익이 될까 싶었습니다. 잠29:23절에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을 드러내려는 본능이 나온다면 오늘 세례요한처럼 주님을 드러내면 어떨까요? 세례요한은 주님을 높임으로 주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들었습니다.(마11:11)
세례요한이 그토록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임으로 주님께 인정을 받았다면 우리 또한 나를 낮추고 주님을 높여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은 내가 가만히 있으면 모를 거라고 생각해 나팔을 부는 것인데, 그러나 주머니 속에 숯불과 송곳을 감출 수 없듯이 가만히 있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겸손하고 진짜 실력이 있는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금방 드러나게 됩니다. 조급해도 그때까지 참으셔야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절대 나를 높이고 주님을 낮추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늘 세례요한처럼 나를 낮추어 주님을 높이는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우리 주님은 자신을 높이고자 주님을 낮추는 자는 한없이 낮추시지만, 주님을 높이고자 자신을 낮추는 자는 한없이 높여 주십니다.
이걸 기억하여 여러분은 바르고 정직하며, 항상 겸손하게 주님과 형제들을 높임으로 내가 높아지는 지혜로운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