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내용 |
평북 위원(渭原) 사람이다.김창균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김창균이 활동한 이 단체는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결성되었다. 의병장들은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서간도 지역에서 보약사(保約社)·향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역량을 기르던 중 3·1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기존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대한독립단 창립총회에서는 창립선언문과 함께 전문 22조의 규칙을 통과시키고 다음과 같이 임원을 선정하였다. 도총재 박장호, 부총재 백삼규(白三圭), 자의부장(諮議部長) 박치익(朴治翼),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참모장 윤덕배(尹德培),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참모 송상규(宋尙奎)·강규묵(康圭默)·조응걸(趙膺杰)·이정근(李廷根), 총단장 조맹선, 부단장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부총무부장 강유상(康有常), 총무원 김 일(金鎰)·한관모(韓寬模), 재무부장 전덕원(全德元), 재무 이병기(李炳基), 회계 홍 주(洪疇), 사법부장 이웅해(李雄海), 교통부장 양기하(梁基瑕) 등이다.김창균이 활동한 대한독립단에서는 이 시기 만주지역 대부분의 독립운동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무장투쟁을 통하여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무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는 것은 절대적이었다. 이를 위해 군자금의 모집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대한독립단에서는 유하현 삼원보에 위치한 본부 및 국내, 서간도의 각 지단에 재무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또한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만주와 국내에서의 일본인 및 친일파 숙청 그리고 일제의 기관 파괴 등도 전개하는 한편 국내에 대한독립단의 지단을 조직하고자 노력하였다.김창균은 1922년 봄 대한독립단 백광운(白狂雲)의 부하로 군자금 모집차 국내에 진입하여 강계(江界) 청풍동(淸風洞)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과 교전하였으며, 동지 신영숙(申永淑)·현성희(玄成熙)·김종호(金宗浩) 등과 함께 위원군 송면(松面) 석포동(石浦洞)에서 밀정 송의봉(宋義鳳)을 사살 처단하였다.1923년 음력 정월에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의용군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대한통의부는 1923년 8월 23일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와 그에 참여하지 못한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이루어진 1920년대 전반기 남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이다. 이 단체의 주요 간부로는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재 채상덕(蔡相悳), 비서과장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웅해(李雄海), 검무부장 최명수(崔明洙), 교섭부장 김승만(金承萬),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사판소장 이영식(李永植),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식산국장 박득산(朴得山), 권업부장 강제하(康濟河),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교통국장 황동호(黃東浩),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 등을 들 수 있다.대한통의부는 1923년 12월에 조직을 개편하여 보다 군사적인 면에 비중을 두었다. 당시 개편된 조직을 보면, 총장 김동삼, 비서과장 고활신, 민사부장 이웅해, 군사부장 이천민, 의용군 사령관 김창환(金昌煥), 부관 김창훈(金昌勳), 군수국장 맹철호(孟喆鎬), 군무국장 이종건(李鍾乾), 호위국장 문학빈(文學彬), 재무부장 오동진, 학무부장 이병기(李炳基), 법무부 검무국장 김신택(金信澤), 사법국장 현정경, 교통부 교통국장 황동호, 실업부장 변창근 등이었다.김창균이 소속된 통의부 의용군은 이 때 대대, 중대로 편성되었는데, 간부 명단을 보면 제1대대장 강남도(姜南道),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1소대장 김보국(金保國), 제2소대장 전봉도(全奉道), 제3소대장 김기준(金基準),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1소대장 김 전(金田), 제2소대장 이규성(李奎星), 제3소대장 신태봉(申泰鳳), 제3중대장 최시흥(崔時興), 제4중대장 홍기주(洪基柱), 제1소대장 장세룡(張世龍), 제2소대장 김국보(金國輔), 제3소대장 신홍영(申洪永) 등이었다.김창균은 이 대한통의부의 소대장 참위(參尉) 전세웅(田世雄)의 부하가 되어 국내에 진입하여 강계군 어뢰면(漁雷面) 풍룡동(豊龍洞) 골짜기에서 평북 경찰부 수색대를 저격하기도 하였다.김창균은 1923년에는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참의부는 대한통의부가 이념문제로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었을 때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통의부 의용군내 제1·2·3·5 중대가 임시정부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