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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2일 수요일 [(자) 성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의 종은 주 하느님께서 그를 도와주시기에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제1독서). 유다는 수석 사제들에게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님을 넘길 기회를 노린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파스카 음식을 나누시다가,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신을 팔아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근심한다.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는다(복음).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9ㄴ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8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우리 함께 나서 보자. 누가 나의 소송 상대인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9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을 안타까워하시면서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제자로 부르지 않으셨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 계획 안에서 유다의 삶과 그 종말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해 숙고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의로써 인간을 구원으로 초대하셨지만 인간은 그 초대에 응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빈부귀천을 떠나 누구든지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욕과 수난을 겪으시면서도 언제나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각자의 처지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시면서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세속적인 욕심에 따라 살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우리는 자주 예수님을 배신하고 맙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구원 계획과 예수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응답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앞서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가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나약한 인간이었지만 끝까지 예수님의 자비를 간청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열려 있는 마음을 간직하였습니다. 자신의 죄악과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겸손과 자유 의지를 올바로 사용하는 지혜가 우리 영혼에 가득 차야 하겠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관점 유다라고 해서 처음부터 배반자의 길을 가겠노라고 마음먹었을 리가 만무합니다. 처음 예수님과의 만남을 갖고, 또 그분에 매료되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따라나섰을 때만 해도 유다는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적극적이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예수님을 사랑했고, 신뢰했었습니다. "이 분이야말로 내 인생을 걸만한 분이야! 내 삶을 송두리째 맡겨도 후회하지 않을 분이야!" 라고 생각했기에 최선을 다해 예수님과 제자단의 살림살이를 위해 헌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그런 열정과 적극성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유다가 지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추종의 대상,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성취의 도구, 입신출세의 발판으로 여겼던 유다였습니다. 그러한 그릇된 관점과 노선이 어느 순간 수정되고 쇄신되었어야 했는데, 유다는 끝까지 자신의 노선을 버리지 못했기에 제자직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한 때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군중이 구름처럼 몰려들던 시절,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던 시절, 계속되던 치유와 기적의 시절,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것 같던 해결사의 시절이 그리웠습니다. 치유의 은총을 입고 수백 번도 더 감사의 인사를 하러오던 사람들, 덩달아 우쭐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죽었던 사람조차 다시 일으켜 세우던 시절, 끝도 없이 접수되던 기부금과 감사헌금, 군중들의 환호와 따뜻한 시선... 유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야말로 흠모와 투신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때, 수난의 때가 다가오자 군중들의 환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갔습니다. 이 총체적 난국을 어떻게 설명하실까 예수님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더욱 한심합니다. 하신다는 말씀이 고작 "자신을 죽여라! 자신을 낮춰라! 서로의 발을 씻어줘라!"는 등 쓸데없는 말만 쏟아놓습니다. 전처럼 능력의 예수님, 힘 있는 예수님, 과감하게 적대자들을 물리치던 승리의 예수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죽음 앞에 피땀 흘리시며 번민하시는 약자 예수님의 모습만이 남아있습니다. 유다는 작정합니다. 이제 떠날 때가 왔구나. 더 이상 내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구나. 떠나는 길에 사업자금이라도 마련해야지 하면서 제자직을 접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유다에게 있어 예수님은 더 이상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는 존재가 되었기에 유다는 과감히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심각하게 점검해보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선택했습니까? 도대체 왜 세례를 받았습니까? 왜 신앙생활을 지속합니까? 오로지 예수님을 내 인생의 만사형통을 바라는 마음에서 선택하지는 않았습니까? 머지않아 사라질 육신의 안위와 건강만을 위해서 선택하지는 않았습니까? 내 가족의 창창한 앞날만을 위해서 선택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머지않아 우리도 예수님을 떠날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끔씩 만사형통도, 인간적인 성취도, 삶의 기쁨과 보람도 주시는 분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약속하지는 않으십니다. 언젠가 우리가 그토록 추구하던 그 모든 인간적인 것들, 육적인 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진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웃사랑과 헌신, 희생정신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저는 요즘 성체조배하면서 안 좋은 버릇이 생겼습니다. 스마트폰으로 매일미사나 다른 묵상정보를 찾아보기도 하지만, 쓸데없는 기사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아침도 오늘 복음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상에서 그날 밤 당신을 배신할 사람이 있음을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유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시려고 하시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굳이 유다라고는 말하지 않으면서도 “나는 네가 오늘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길 것을 안다. 그러나 너를 사랑하여 그것이 바로 너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돌아설 수 있을 때 너의 영혼을 위해서라도 돌아서라.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배반할 것을 알고도 어린양처럼 당하고 있을 것이라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과 동료 제자들을 속이려고 합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다른 제자들은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지만, 유다만이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팔아넘기는 마당에 양심의 가책을 줄이기 위해서 “주님”을 팔아넘기기 보다는 “스승님”을 팔아넘기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의 이 말에 이미 예수님의 값을 아주 싸게 매기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시 제자들이 그를 끝까지 보호하면서도 다 알고 있다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렇게 대답을 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유다는 은전 30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깁니다. 마치 에사우가 장자권을 붉은 콩죽 한 사발에 팔아넘겼듯이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분을 양 한 마리 값으로 팔아넘긴 것입니다.
묵상하다보니 유다와 가장 가까운 이들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했으면서도 세상의 돈이나 명예, 혹은 쾌락 등을 더 쫓아 예수님을 버리고 성당에 나오지 않는 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스마트폰으로 여기저기 쓸데없는 기사를 읽으며 묵상시간을 소비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다른 값싼 것으로 팔아넘기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장 내 앞에 계시고 나에게 말씀을 하려고 하시는데, 나는 다른 것에 신경이 팔려 예수님을 혼자 버려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시간이 얼마나 많을까요? 이는 예수님을 그만큼 귀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한 재벌 아버지가 위독하게 되어 재산을 외아들에게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재벌은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들은 놀기만 하지 일은 하지 않는 백수건달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설득에 아버지는 만약 아들이 자기 힘으로 일을 해서 돈을 조금이라도 벌어오면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어머니가 아들에게 조금 돈을 주어서 벌어온 것이라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돈을 받더니 그냥 난로 속으로 던져버렸습니다. 다시 벌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머니가 돈을 주었더니 이번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받아 벽난로 불속에 던져버렸습니다.
이에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처음으로 아들이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땀으로 번 돈을 아버지에게 주자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것을 난로 속에 던졌습니다. 그것을 본 아들은 갑자기 뜨거운 난로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돈을 빼내려 했습니다. 이것을 본 아버지가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같은 돈이지만 누군가 거저 준 것은 나에게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신 가치를 알라고 모든 진리를 일순간에 깨닫게 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당신 수난의 고통으로 우리를 얻으셨듯이, 어쩌면 우리도 우리 피와 땀으로 그분을 얻기를 원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얻은 그리스도는 내 안에서 너무나 소중하여 그분을 잃는 것보다는 불에 팔이 데일지라도 손을 뻗어 그분을 다시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일상이 하느님께서 당신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 우리가 당신의 아드님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시험하는 장인지도 모릅니다. 그분을 잃느니 차라리 우리 목숨을 잃는 편이 나을 정도로 그분을 사랑합시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분을 내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귀한 것일수록 얻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돈, 명예, 애정, 쾌락보다, 예수님을 알기 위해 희생하는 것이 더 적다면 그것이 예수님을 세상 것에 팔아넘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우리 목숨까지 바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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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2일(수) 음3/16 성인 의사 요셉 모스카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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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셉 모스카티(Josephus Moscati)는 책임자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된 모스카티는, 1927년 4월 12일 병원에서의 오전 진료를 마치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후에 자신의 집에서 환자를 진료하던 중 갑작스런 발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나폴리 각계각층의 시민들은 달려와 “의사 성인, 쥬세페 모스카티가 죽었다”고 애도하였으며, 그를 추모하고 그의 전구를 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주 누오보(Giesu Nuovo) 성당에 안치된 그의 무덤은 항상 꽃으로 덮였다
* 자료집에서 발췌 |
어려서부터 깊은 신앙을 지녀 대학생활 중에 매일 미사참례를 했고 가난한 사람들의 치료와 자선에 정성을 다하면서 주님 사랑을 일깨우며 영혼치유까지 애썼던 나폴리의 성인 의사 요셉 모스카티 님이시여
님을 기억하는 모든 의료인들과 선교의 일선에서 노력하는 저희 모두에게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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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성주간 수요일, 베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