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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묵상글 들 ( - 닫힌 말문이 열리기까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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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닫힌 말문이 열리기까지
지난 17일 이후 복음을 유심히 읽은 분들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한 분들
가운데서 오직 즈카르야만 말문이 막히고 그래서 찬미할 수 없었음을
보셨을 텐데 그것은 즈카르야만 성령에 이끌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즈카르야의 아내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하지요.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같은 부모인데 즈카르야의 찬미는
엘리사벳의 찬미와 시차가 있고 오늘 비로서 성령에 가득 차 외칩니다.
"그때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가 다른 사람과 달리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았고 말문이 막힌 이유는
그의 합리적인 생각이 믿음보다 강해 믿기보다 의심케 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러니까 의심이 성령이 들어올 문을 막았고,
성령께서 들어오실 문을 막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찬미의 말문뿐 아니라 아예 모든 말문을 막으신 겁니다.
그렇습니다.
불신이 더 그렇지만, 의심도 말문뿐 아니라 모든 것을 막히게 합니다.
불신과 의심은 나의 문을 모두 걸어잠그게 하잖습니까?
나 외에 모든 사람을 도둑으로 의심하거나 불신하면
모든 문을 걸어잠그겠지요.
반대로 누구나 믿으면 문을 활짝 열어놓고요.
그런데 그 의심엔 하느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니, 하느님을 더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아예 존재 자체를 불신하거나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교만한 사람은 성령 대신
불신과 의심의 망령妄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즈카르야의 경우에는 그런 의심은 아닐 것이고,
보통 사람의 그 합리적인 생각 때문이고 그러므로
그 의심은 병적인 의심이 아니라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의처증처럼 병적인 의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의심이 인간적으로는 병적이지 않더라도
영적으로는 병적이거나 적어도 장애가 있는 것이지요.
인간의 능력으로는 안 되는 것,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생각은 물론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그것을 하는 것이 하느님의 능력이고 가능성이고 구원인데
합리적인 생각에 갇히면 하느님의 능력과 가능성과 구원을 믿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합리적인 의심이 깨지는 데 시간이 필요하고,
이것이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의 시차인 것입니다.
얼마 전 제가 아들처럼 생각하는 형제가 외국에서 살다가
아주 큰 병이 들어 돌아왔습니다.
그 부모도 제가 같이 잘 알고 있는데 아버지는 말을 듣고
고칠 수 없다고 체념하고 대비하는 데 비해 어머니는
단순해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고 그 형제가 말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맞다고 제가 말해주면서
형제도 어머니처럼 믿으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의사도 손 놓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는 어머니의 단순성은
한편으로는 믿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입니다.
아무튼, 즈카르야는 합리적인 의심이 깨지는 데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 말문이 막히는 고통을 겪은 다음 구원을 체험하고 찬미하는데
우리도 즈카르야와 다르지 않다면 말문이 열리는 그 날을 고대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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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오늘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더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즈카르야의 노래에서 따온 이 구절은 바로 이 시대의 희망이요, 바로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여전히 어둠과 질곡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짙기에 우리는 빛을 더더욱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다윗 가문에 영원한 왕좌가 약속되고, <복음>에서는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합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기도> 때 드리고 있는 이 찬가(Benedictus, 찬미받으소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반부>(1,68-75)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로 선조들과 예언자들에게 약속하시고 예언한 구원을, 아기 예수님을 통해 실현하심을 찬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음을 노래합니다. 특히 여기에서는 구원받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 지녀야 할 두 가지 덕목을 ‘거룩함’과 ‘의로움을’으로 노래합니다.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입니다.”(루카 1,75)
<후반부>(1,76-79)는 어제 <복음>의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일 될 것인가?”(루카 1,66)에 대한 답변으로 태어날 아기, 곧 세례자 요한이 장차 어떤 일을 할 것인가를 노래입니다. 여기에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은 하느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은 예수님을,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로 세례자 요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곧 세례자 요한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선구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의 ‘끝부분’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78-79)
여기서 “크신 자비”라는 말의 직역은 ‘자비의 내장으로’ 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그 크고 깊으심에서 그리스도 오시어, 어둠과 죽음에 앉아있는 이들, 곧 이방인들을 비추고 평화로 이끌 것입니다. 결국, 빛이 오면, 어둠은 물러날 것입니다. 아무리 어둠이 기승을 부려도 어둠이 짙으면 새벽이 멀지 않듯, 빛은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힘으로 오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타오르는 빛이 우리의 발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세주께서 이 어두운 이 세상에 곧 오시어, 참 빛을 밝히실 것입니다. 어둠 속 우리를 당신 빛 속, 평화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오늘 밤 우리는 그 빛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은 등불을 밝혀들고 참 빛을 맞이할 태세를 갖추어야 할 때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으로 샘 솟은 기도 -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되어 우리를 찾아오시어~”(루카 1,78)
주님!
제 안에 오신 빛, 자비시여. 저를 비추소서.
당신 마음으로 저를 채우소서. 제가 자비로워지겠나이다.
당신 얼굴로 저를 비추소서. 제가 평화로워지겠나이다.
제 안에 오신 별, 빛이시여. 밝히소서. 제가 환해지리이다.
그 크고 깊으심으로 저를 어루만지소서. 제가 새로워지겠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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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예언자가 되어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으로, 사물의 선후, 경중, 본말이 서로 뒤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지도자의 위치가 있고 권위와 모두를 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백성은 백성의 자리가 있고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의 권위가 사라진지 오래고 그러니 존경과 사랑도 없습니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부분과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아기의 장래를 축복하는 부분으로 구별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시는 해방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주님을 섬기도록 해 주셨습니다(루카1,75). 이것이 해방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요한이 제 몫을 감당하여 주님의 길을 닦고 알려주는 것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루카1,78)덕분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기3,1).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사40,3).고 외치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마침내 요한은 오시는 주인의 길을 닦고 자신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만한 자격도 없다는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주인의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큰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자기 몫을 알고 그것에 충실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언자들이 닦은 길을 바탕으로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오신 분은 지배하려하지 않고 오히려 섬기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간절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 하나의 예언자가 되어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어둠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도 마침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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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
오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의 독서와 그 약속이 실현된 데 대한 감사로 거룩함과 의로움의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의 복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독서는 시나이 계약을 보충하는 시온 계약이고, 복음은 즈카르야가 노래하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이 두 꼭지의 말씀 사이에는 매우 깊은 통한의 골짜기가 파여 있습니다.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나서 하느님께서는 파라오 밑에서 우상을 섬기던 이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내용은, 하느님께서 히브리인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보호해 줄테니 히브리인들은 파라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보호와 섬김의 조건으로 이루어진 이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중재인으로 해서 시나이 산에서 맺으셨다 하여 ‘시나이 계약’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시나이 광야에서 40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250년을 지낼 무렵까지 이스라엘을 이끌어주신 목자이시오 다스리시던 왕은 오직 하느님뿐이셨습니다(시편 23편). 하느님만을 목자요 왕으로 모실 수 있으려면 그 신앙이 매우 충실하고 성숙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판관이던 사무엘 시절에 신앙이 극도로 쇠약해진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에게도 다른 이방민족들처럼 왕을 세워달라고 떼를 쓰다시피 졸랐고 결국 하느님께서 양보하셔서 왕국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그때 하느님께서는 왕을 세우되 당신의 뜻을 대리하여 다스리도록 다짐을 받는 의식으로 축성된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울이 첫 왕위에 올랐고, 우여곡절 끝에 그 다음에 즉위한 다윗이 하느님께 죄송스런 마음에 성전을 세우려고 하자 하느님께서 또 다시 사양하시면서 맺어주신 계약이 오늘 독서의 내용입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6). 다윗의 궁전이 세워진 시온 언덕에서 이 약속의 말씀이 내려졌기에 ‘시온 계약’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그 당시까지처럼 다윗과 그리고 그 후계자들이 시나이 계약 정신을 충실히 지킨다는 묵시적인 전제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성전보다 신앙이 더 중요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화려하게 세웠지만 그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계약 조건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나라가 갈라졌고 백성은 포로로 잡혀 끌려가거나 흩어졌으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이민족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동안 다윗과 같이 하느님을 섬기고 시나이 계약에도 충실한 지도자는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통한의 역사를 잘 알고 있던 즈카르야 사제는 아나빔으로서 줄곧 열심히 기도해 왔으나 막상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시기로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약속을 실현해 주신 데 대해 뜨거운 마음으로 감사의 찬송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당신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루카 1,68). 그러니까 이 찬송은 자신에게 태어난 아들 요한이 아니라 메시아 탄생을 앞두고 바친 찬송이었습니다. 그 덕분에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도 애초에 하느님을 섬기겠다고 약속해 드린 대로, 거룩하고 의롭게 살겠다는 다짐을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루카 1,73-74). 실로, 성덕과 의덕의 삶이야말로 약속을 실현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로 바쳐야 할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에게 오실 메시아가 오실 길을 닦을 예언자로 늘그막에 얻게 된 자신의 아들이 선택된 데 대하여(루카 1,76), 즈카르야는 그저 감사드리는 마음뿐이었고 그래서 아들에게 진작부터 그의 소명을 일러주고 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했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는 소명입니다(루카 1,77).
우리도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찬미가로 바치는 이 기도는 그 옛날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만을 기억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어김없이 찾아오시는 그분을 알아보고, 그분 앞에서 의롭고 거룩할 수 있는 덕행을 궁리하자는 다짐이기도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마치 어제 미사에서 들었던 성모 찬송을 매일 저녁 성무일도의 찬미가로 바치면서 공동선에 헌신함으로써 하느님의 최고선이 드러날 수 있도록 다짐하는 것과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성서가 상기시키는 과거 역사는 오늘날 여전히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손길과 발자취를 알아보라는 촉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이미 하느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바쳐 드려야 할 성덕은 우리의 역사와 현실 속에 드리워진 하느님의 손길, 즉 신성을 알아보는 데에 발휘되어야 하며, 우리가 동시대인들 사이에서 증거해야 할 의덕은 그 신성에 따라 우리도 메시아적 백성으로서의 의로움을 실천하되 그저 자기 몫을 차지하려는 세상의 정의 수준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몫을 이웃에게 되돌려주려는 하느님의 정의 수준으로 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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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매사에 긍정적이고 얼굴에 늘 웃음을 머금고 있는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밝게 웃으며 일하는 형제님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도 즐거워했지요. 그래서 한 후배가 선배인 이 형제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선배님은 늘 행복하시죠? 걱정이 하나도 없으실 것 같아요.”
이 말에 형제님은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게 행복하지 않아.”라고 대답하십니다. 얼마 전에 어머니께서 병원에 가셨는데, 말기 암 판정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머니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으로만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절대로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자신의 불행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행은 수치상으로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는 커다란 불행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면서 힘차게 살아가고, 누구는 자그마한 불행에도 쉽게 좌절하고 절망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외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불행을 불행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바라볼 수 있는 변화된 우리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이를 즈카르야가 불렀던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묵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십니다. 잘못을 벌하시기도 하지만, 그 잘못을 용서하시고 은혜까지 내려 주십니다. 즈카르야는 믿지 않은 탓으로 벙어리가 되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계획이 이루어질 때가 되자 혀가 풀렸고 성령까지 받아 예언의 노래를 오늘 복음과 같이 부를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노래의 시작을 우리는 유의 깊게 바라봐야 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성경을 보면 많은 찬미의 노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노래가 즈카르야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시작합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찬미와 감사가 우리 모든 기도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시작할까요? 찬미와 감사보다 불평과 불만의 기도로 더 많이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오늘 밤, 주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십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기도가 찬미와 감사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찬미와 감사를 통해 우리는 새 하늘 새 땅을 희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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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재능의 부족보다 결심의 부족으로 실패한다(빌리 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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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 망쳤어.
자수성가로 엄청난 성공을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시애틀을 통째로 사고도 남을 만큼 큰돈을 벌었지만, 그는 이러한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I blew it! (내가 다 망쳤어)"
그가 이런 유언을 남긴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날 당시의 유산이 약 1,500억 달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병상에 누워서 생각해 보니 회사 일에만 빠져 정작 가족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고, 심지어 손자들의 이름도 잘 외우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에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병석에 누워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인생이 성공이 아닌 실패라는 의미로 "I blew it! (내가 다 망쳤어)"라고 외쳤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부를 얻고서도 스스로 실패했다는 슬픈 유언과 함께 세상을 떠난 남자, 그는 바로 미국 최대의 마트인 '월마트'의 창업자인 '샘 월튼'입니다.
지금 가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는 몇 명이나 되는지도 생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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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가 있는 부르클린 교구에서 새로운 교구장을 위한 ‘착좌식’ 미사가 있었습니다.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에서도 새로운 교구장을 위한 ‘착좌식’ 미사가 있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의 착좌식은 함께하면서 축하드렸습니다. 서울대교구의 착좌식은 방송을 통해서 함께하면서 축하드렸습니다. 두 교구의 착좌식을 보면서 약간 다른 점을 보았습니다. 서울대교구의 착좌식은 전례의 엄숙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의 착좌식은 전례의 친숙함이 드러났습니다. 전임 교구장을 위해서 모든 사제와 교우들이 기립해서 박수를 쳤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교구장을 위해서도 모든 사제와 교우들이 기립해서 박수를 쳤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그렇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미사 행렬에서 서울대교구는 서품 기수별로 입장하였습니다. 젊은 사제들이 먼저 입장하고, 선배 사제들은 나중에 입장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는 그냥 오는 대로 어우러져서 입장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는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교구답게 신자들의 기도를 20개 언어로 하였습니다. 각 나라의 전통의상을 입고 신자들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한국은 한복을 곱게 입은 자매님이 하였습니다. 약간의 다른 점은 있었지만 이임하는 교구장에게는 그동안 수고하셨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었고, 새로운 교구장에게는 기대와 희망을 담은 축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두 교구의 착좌식을 보면서 이제 곧 우리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착좌식’을 생각해 봅니다. 화려한 성전의 우뚝 솟은 자리는 아니셨습니다. 많은 사제들과 교우들이 함께하는 성대한 착좌식도 아니셨습니다. 신문과 방송으로 착좌식을 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착좌식은 베들레헴 들판의 작은 동굴에 있는 ‘구유’였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예수님의 구유를 만들어 제단에 놓은 이래로 지금 모든 교회의 제단 앞에는 ‘구유’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엄숙함과 친숙함은 없었지만 거룩함이 충만한 착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이었습니다.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들에게는 평화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성전을 허무십시오. 내가 3일이면 다시 세우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땀으로 세우는 성전이었습니다. 구리 뱀이 높이 들려서 사람들을 살렸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온 세상을 구원하는 그런 성전이었습니다. 집짓는 자들이 버렸던 그 돌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2021년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마리아의 노래와 함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노래가 오늘 복음에서 읽은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매일 아침 성무일도에서 묵상하는 노래입니다. 오늘 하루 이 노래를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나의 마음을 예수님의 탄생을 받아 주었던 베들레헴의 구유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기쁜 성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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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 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 -
“떠오르는 별, 영원한 빛, 정의의 태양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어둠 속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소서.”
어제로 끝난 “오” 후렴의 대미를 장식하는 듯한 오늘 복음 환호송이 참 은혜롭습니다. 주님 탄생을 목전에 둔 우리에게 기쁨을 가득 선사합니다.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선교활동”
“우리 조상님”
“나의 뿌리”
“신부님의 본관은 어디세요?”-
어제 최씨 성의 자매로부터 카톡을 받고, “전주 이씨, 세종대왕의 17째 아드님, 영해군 자손”이라 대답해 놓고, 새벽 다시 보는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나의 영적 뿌리, 영적 본관은 그리스도 예수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좌파나 우파, 진보파나 보수파가 아닌 그리스도파입니다.
오매불망, 학수고대하던 주님께서 오실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세 번째 코로나와 함께 하는 주님 성탄입니다. 올해는 성탄의 기쁨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노래도 츄리도 거의 볼 수 없는 그저 평범한 일상처럼 생각됩니다.
“주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미사 경문중 제가 참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특히 “항상”이란 말마디에 늘 힘을 줍니다. 코로나와 함께 하는 암울한 시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과 평화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도 주님과 항상 함께 하는 우리 삶임을 분명히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말미에서 분명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그리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주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내 삶의 성경의 렉시오 디비나-”로 정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성경책을, 삶의 문장을 깊이 잘 들여다 보면 주어는 주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일례로 우리가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수도원에 우리를 보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파견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파견받은 섭리의 존재, 은총의 존재, 유일무이한 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바로 우리를 오늘 지금 여기 삶의 자리로 파견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성경의 주어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매해 만날 때 마다 새롭게 확인하는 깨달음의 진리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다윗의 무지를 일깨우는, 하느님께서 늘 함께 하셨음을 환기시키는 나탄의 신탁을 들어보세요. 다윗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로 이끄는 나탄 예언자입니다. 다윗 삶의 문장의 주어는 온통 하느님입니다. 바로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라는 고백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나는 양 떼를 따라 다니던 너를 목장에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문장들의 주어는 다윗이 아니라 하느님이요 하느님께서 친히 다윗을 위해 활동해 주신 동사의 나열들입니다. 동사의 주어는 온통 하느님입니다. 이렇게 이어지던 신탁은 주님의 위대한 약속으로 끝맫고 마침내 예수님의 출현을 통해서 완료됩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다윗에 대한 신탁은 그대로 탄생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현재 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의 아버지가 부르는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가 2천년 동안 끊임없이 함께 마음을 모아 아침성무일도 시편 말미에 불렀던 노래입니다.
한나의 노래, 마리아의 노래, 즈카르야의 노래등 모두가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이 불렀던 아나뷤의 노래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 한민족처럼 ‘노래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한맺힌 노래가 아닌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였다는 것이 결정적 차이입니다. 화답송 후렴이 이를 요약합니다.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바로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는 주님의 자애를 위업을 노래합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이 할 자랑은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으로 가득차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삶에 대한 렉시오 디비나가 즈카르야의 노래입니다. 찬미와 감사의 마음이 가득 담긴 참으로 겸손한 찬가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향한 겸손한 사랑은 이렇듯 아름다운 찬가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다윗의 신탁처럼, 즈카르야의 찬가 역시 주어는 즈카르야가 아닌 하느님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바로 제1독서 나탄의 다윗에 대한 신탁이 이뤄졌음을 고백하는 즈카르야입니다. 이어 주님께서 주어가 되어 행하신 위업의 문장들이 계속되는 찬가는 말미에서 아름다운 고백으로 끝납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코로나와 함께 하는 암울한 시대, 우리에게 주시는 오늘의 복음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코로나로 인한 우울의 어둠은 말끔히 걷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백배하여 희망찬 기쁨과 평화, 빛의 삶을 살게된 우리들입니다.
우리 삶의 성경책에 주어는 하느님입니다. 죽어야 끝날 아직은 미완의 내 성경책이지만, 마음이 혼란하고 어두워질 때 내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하시며 위로와 힘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살아 감으로 내 삶의 성경책에서 주어主語인 하느님이 실종失踪되고 내가 주어가 될 때,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의 어둠이 우리를 덮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흔적 없이 몰아 내시고 당신의 기쁨과 평화의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찬미받으소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셨네.”(루카1,6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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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이병우 루카 신부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루카1,68)
'즈카르야의 노래'
오늘 복음(루카1,67-79)은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령으로 가득 차 노래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의 전반부는,
힘센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원수들과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언으로써, 힘센 구원자를 보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감사 찬미가'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의 후반부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신 예수님의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렇게 끝맺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카1,78-79)
주님의 성탄이 임박해 있습니다.
오늘 밤에 우리의 구원자께서 보잘 것 없는 우리 안에 탄생하십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혹시,
"나는 판공성사도 보지 않았고, 죄가 많은 죄인이어서 주님성탄대축일 미사에 참례할 자격이 없는 몸"이라고 자책하고 있는 나는 아닌지요?
판공성사와 죄가 본질이 아닙니다.
부족함이 많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죄가 많은 나를 구원하시려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탄생하시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조건 없이, 기쁘게 주님의 성탄을 맞이해야 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앞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허물이 많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주 하느님의 크신 자비의 힘입어 깨끗해진 몸으로 주님의 성탄을 모두가 함께 기쁘게 맞이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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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아버지가 부르는 ‘즈카르야의 노래’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노래를
루카 복음사가가 수집하여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기리는 노래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노래는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성령으로 가득 찬 즈카르야의 대답입니다.
성령께서는 그 사건을 밝히심으로써 그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 주셨을 뿐 아니라,
그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활동이 드러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또한 그 사건들의 의미를 아시기에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즈카르야의 노래 전반부는 원수들과 미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박해를 받아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 앉아 있다가,
구원자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두려움 없이
거룩하고 올바르게 하느님을 섬기고
평화의 길로 들어선 이들이 부르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찬미받으소서.’ 하고 시작합니다.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느님께서
다윗 집안에서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시어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고 속량하셨기 때문입니다.
‘속량’은 노예 제도 시대의 개념으로, 노예의 몸값인 속전(贖錢)을 내고
노예를 해방시키거나 포로를 석방시켜 자유인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셨다는 말은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자비를 베푸셨다는 의미로, 장차 오실 메시아가 원수들을
쳐서 승리한다는 말입니다(유충희, 『루카 복음』, 68-69면 참조).
노래의 후반부는 세례자 요한의 앞날과 역할을 예언하는 시구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장차 예수님께서 오심을 준비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아 구원받으리라는 사실을
주님의 백성에게 알려 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린 즈카르야는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합니다. 나의 혀와 입은 무엇을 노래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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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즈가리야의 노래
성령께서는 즈카르야를 사로잡으시어 아홉 달의 침묵을 깨고 요한이 할례 받던 날, 예언하게 하셨다. 즈카르야는 노래 첫머리에서 장차 요한이 준비할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해 이야기한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68-69절)
주님께서는 당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우리에게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찾아 의롭게 만들기로 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뿌리 깊은 병인 교만을 치료하고자, 의사가 환자를 찾아가듯 우리를 찾아오셨고, 당신의 겸손을 그 본보기로 보여 주셨다. 그분은 당신의 피를 대가로 치르고 우리에게 자유를 찾아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분은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로마 1,3)이며, 다윗 집안에서 일어난 구원의 뿔이셨다.
그것은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71절) 그리스도는 자비요 정의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자비를 입었고 의롭게 되었으며, 그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사악함의 때를 씻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73절)는 어떤 일에 대한 보장이다. 반드시 당신 말씀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맹세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 각자에게 당신의 약속이 틀림없이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그분 자신의 말씀이다.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74절) 이 원수들은 육체의 원수들이 아니다. 그들은 영의 원수들이다. “싸움에 용맹하신”(시편 24,8) 주 예수께서는 우리 원수를 멸망시키고 그들의 올가미에서, 즉 모든 원수의 손에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71절) 우리를 해방하고자 오셨다.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72절) 주님께서 오셨을 때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 그들은 그분의 날을 미리 보고 즐거워하였다(요한 8,56 참조)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72-75절)라고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76절)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예언자의 하느님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었다. 유대인들은 잠시 그에게 모여들어 세례도 받고 그의 생활방식에 감탄도 했지만, 영원히 타오르는 등불을 끌려고 별짓을 다 하다 결국 그를 죽음의 잠자리에 들게 하였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78-79절)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을 알게 하는 참 빛을 우리에게 주셨고, 오류의 어둠을 거두어 가셨으며, 하늘로 가는 길을 열어주셨다. 그분은 우리의 발을 이끌어 당신이 보여 주신 진리의 길을 걷게 하셨고, 당신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평화의 거처로 들어가게 하셨다.
이제 우리는 “높은 곳에서 온 별”을 맞이하게 된다. 이런 복된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를 위하여 아무런 명성도 떨치지 않으신 분, 하느님의 모습과 종의 모습을 함께 지니신 분, 그러나 어둠 속에 갇혀있던 우리 세상을 위해 빛처럼 해처럼 솟아오르시는 분, 우리는 그분께 무릎 꿇고 절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삶으로 구원을 체험하면서 하느님께 감사하고, 또한 주님께 매 순간 영광과 찬미를 드릴 수 있도록 주님의 은혜를 청하고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 아름다운 예물로 바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이 순간들이 모두 감사와 찬미의 순간들이 되어, 주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의 참모습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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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4일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그리스도께 관한 모든 것은 신비이다. 오늘 우리는 그분이 사람이 되심을 지내고 있다. “사람이 되셨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이다. 왜 하느님이신 분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는가 말이다. 성경은 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여러 관점에서 다루고 있지만,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신비는 아무리 설명을 하려 해도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한 아기”는 “임마누엘”(이사 7,14)과 같은 아기이며, 이 아기를 통하여 놀라운 해방과 평화와 정의의 왕국이 세워진다고 한다. 이러한 왕국은 어두움 속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에게 비쳐오는 “큰 빛”과 같다. 그 “아기”의 탄생은 그 아기가 곧 정의와 평화의 왕국을 세움으로써 해방을 실현하는 사람으로서 “해방”과 밀접히 관련된다. 이 해방은 인간의 전인적인 차원을 온전히 포용하는 근본적인 해방이다. 이 아기에게 수많은 명칭을 준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이사 9,5) 이 아기는 그 외에도 솔로몬의 지혜, 다윗의 힘과 신앙, 모세와 모든 성조의 훌륭한 덕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 아기는 과거의 모든 것의 종합이며 동시에 모든 것을 능가하는 분으로, 성탄의 전례는 그 모든 명칭을 그리스도께 돌려 드리고 있다.
복음: 루카 2,1-14: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가 태어나셨다.
오늘 복음에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예수께 관한 이야기는 신화나 공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제 예수의 탄생으로 역사는 다른 의미를 가지며, 다른 운명을 향해 가게 됨을 말하고자 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10-11절)라고 천사가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다. 그리스도라는 분이 목자들이 기쁨과 놀라움으로 경배하게 될 “구유에 누워 있는” 그 보잘것없는 “아기”라고 한다면(16절) 하느님의 구원은 바로 비천함에서 그리고 무능력에서 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은 역사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새롭게 변화시키며, 영적인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이렇게 해서 인간들이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 행복”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이 예수의 새로운 구원역사는 다윗과 연결되고 있다. 요셉과 마리아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에 따라 걸음을 재촉해 갔던 베들레헴이 바로 다윗이 태어난 곳이다. 바로 구약성서의 내용이 그리스도 안에 완성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과거의 모든 중대한 사건들이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보잘것없는 “아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천사들의 노래에 담긴 깊은 의미를 알 수 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14절) 이제 구원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열렸다. 그 구원을 얻게 되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과 사랑을 받아들여 평화를 이루는 모든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평화는 바로 구원이다. 이 평화를 위해 인간은 올바른 응답과 책임을 다해야 한다. “영광”과 “평화”는 서로 밀접한 관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광”은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에 지상에서 하느님께로 올라간다. 그리고 “평화”는 그리스도의 선성으로 충만하게 된다. 선성에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인류에 대한 계획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인간들 사이의 화해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화해를 통한 평화를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탄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한 신비이다.
그래서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성탄의 신비를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감동적인 신비”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과 역사를 쇄신시키며 변화시킬 힘을 감지할 수 있는 아주 세련된 귀와 그리고 잘 준비된 마음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티토 2,11-13절) 라고 한다.
우리가 성탄을 지내면서 깊이 새겨야 할 것은 구세주의 탄생이 ‘하느님께는 영광’이며 ‘땅의 평화’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언제나 강생하시어 현존하시는 주님은 구원계획의 실현으로 하느님께 영광이 되며, 우리의 사랑의 삶으로 하나가 된 우리 사이에는 진정한 하느님의 ‘평화’가 있게 될 것이다. 이 평화가 바로 우리가 바라고 있는 구원이 아니겠는가? 성탄의 신비를 잘 묵상하면서 이 ‘성탄의 신비’가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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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루카 1, 78)
기다림 너머엔
탄생이 있습니다.
길을 만드는
탄생이 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의 빛을 기꺼이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탄생을
보게됩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달려옴과
기다림 사이에서
마침내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사랑을
어디에 두어야할지를
오시는 성탄을 통해
만나게됩니다.
우리도
예수님같이
사랑이 될 수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살아가는 삶이
사랑이길
기도드립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오시는
주님의 성탄에서
비로소 우리는
삶이 선물임을
깨닫게됩니다.
성탄처럼
가장 기쁜 사랑이
됩시다.
뜨겁게 자신을
버리고 내려놓는
사랑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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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루카 2,1-14)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4-7).”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9-14)”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라는 말은, 예수님이 외양간에서 태어난 일은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표징’으로 삼으려고 일부러
예수님을 외양간에서 태어나게 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장 낮은 곳’으로 예수님을 보내셔서, ‘가장 작은 이들’도 구원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계획이고 섭리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나타내는 표징이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입니다.
<요셉과 마리아 입장에서는, 외양간으로 간 것은 어쩔 수 없이 한 일입니다.
그때에는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를 알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들에게는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외양간에서 낳아서 구유에 눕히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좀 더 좋은 방에서 출산을 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리고 좀 더 좋은 곳에 아기를 눕히고 싶었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이
표징이 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원래 ‘섭리’는, 처음에는 그렇게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왜 일이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가?” 라고 묻다가,
나중에 “그게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 것.
요셉과 마리아 경우에는 목자들이 전해 주는 말을 듣고서(루카 2,17),
예수님의 탄생 과정에서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든 요셉과 마리아가 외양간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이 방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이라고 해서
인간들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 베들레헴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산모를 위해서 방 한 칸 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보는 것과 같은 친절과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 당시의 베들레헴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변명을 하든지 간에,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로 오신 구세주를 ‘밀어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목자들이 ‘구세주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첫 번째로 들은 사람들이 된 것은,
그들이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고(하느님 마음에 드는
착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일 것이고),
그리고 예수님 곁에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목자들이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외양간의 주인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말로 외양간의 주인들이었다면, 그들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기들이 숙소로
사용하던 외양간을 내주고, 자기들은 들에서 야영을 했을 것입니다.
목자들은 구세주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첫 번째로 들은 사람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기 예수님을 첫 번째로 뵙게 된 사람들이 되었는데,
그들의 이야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만나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된 마리아 막달레나가 연상됩니다.
‘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구세주 강생’ 소식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되는’ 소식입니다.
(온 백성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여기서 ‘온 백성’은 ‘온 인류’입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신앙인들에게는 구세주 강생의 기쁨을 독점할 권한이 없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는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은, 온 백성을 초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기뻐하자고 초대할 때,
어떤 사람은 무시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비웃을 것입니다.
초대에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지만,
응답하기를 거부해서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은 그들 자신들의 책임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라는 천사들의 찬미는 ‘예수님 탄생’이 어떤 일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요한 17,4).”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탄생부터 승천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전부 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인류 구원 사업이고,
인류 구원 사업 자체가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일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기쁨으로 가득 차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서 구원받을 자격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구원,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 영원한 기쁨’ 등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탄절이 참으로 기쁜 날이 되려면, 즉 성탄절을 참으로 기쁘게 지내려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는 노력부터 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주도하는 세속의 들뜬 분위기는
성탄절의 ‘참 기쁨’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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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비우고 낮추어 만나는 말구유 ♣>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루카1,78)
오늘 제1독서는 다윗 가문의 영원한 왕위를 보장해 주시리라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예언자 나탄을 통해 알려준다. 나탄은 다윗에게 다음과 같이 주님의 뜻을 전한다.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2.14.16) 이는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본디 유다계 가난한 이들(아나윔) 가운데서 메시아 예수님의 구원을 체험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부른 감사가였을 것이다.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다윗 집안에서 탄생할 구원자에게 감사의 노래를 부른다. 구원을 위해 태어나실 아기는 우리를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빼내어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79).
아기 예수님은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거룩하고 의롭게 하느님을 섬기도록 해주시며,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시려고’(1,75. 77) 우리에게 오셨다. ‘거룩함’과 ‘의로움’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인간이 지켜야 하는 두 가지 덕목이다. 거룩함과 의로움을 지니지 못한다면 평화 안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 그분이 이끌어주실 평화란 하느님 앞에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아 그분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될 때에 주어지는 선물이다.
얼핏 보면 다윗이 하느님께 보인 헌신은 참으로 대단한 듯 보인다. 하지만 더 깊이 살펴보면 그는 하느님과 자녀로서의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았다. 다윗은 그저 양치기일 뿐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임을 망각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1,68)라고 하며,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해 주셨다”(1,68)고 고백한다. 이처럼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태도야말로 하느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그분의 종임을 고백하는 겸손한 이의 자세이다.
하느님께는 인간의 찬미나 도움이 결코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고 무엇인가를 이웃과 나눌 때 참으로 겸손의 바탕 위에서 행하는 것인지 살펴보아야겠다. 재물, 재능, 선행, 기도 등 그 무엇이든 그분 앞에 그분의 이름으로 마땅히 되돌려드려야 할 그분의 것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탄은 바로 이런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자신을 비우며 사랑의 혼을 지니고 자신을 내놓는 작고 낮은 말구유를 향한 순례이다. 이 순례길에서 우리는 즈카르야와 더불어 메시아를 통하여 주어진 구원에 대해 감사드리자!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주도권을 철저히 인식하였고, 모든 움직임이 그분을 향하고 있었으며, 모든 선을 그분께 되돌리는 겸손을 항구히 사셨다. 성인은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육은 항상 모든 선을 거스르기에, 주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어떤 선을 행하실 때, 그의 육이 그 때문에 자신을 높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더 비천한 자로 여기며 다른 모든 사람보다도 자신을 더 작은 자로 평가할 때 알 수 있습니다.”(권고 12) 자신을 낮추고 비워 모든 것을 주 하느님께,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되돌리는 것이야말로 말구유의 아기 예수님께 드리는 가장 합당한 선물이리라! 이런 이들에게 높은 곳에서 별, 곧 메시아가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어주실 것이다(1,7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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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24일 [주님 성탄 대축일] - 밤 미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나를 위해 탄생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빅매치 중에 빅매치라고 할 수 있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리버풀대 파리 생제르망의 경기를 현장에서 직관할 수 있는 입장 티켓과 왕복 비행기 표를 보내 초대한다면, 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뛸 듯이 기뻐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 가방을 준비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밤에 주님의 천사는 몇몇 사람들에게 탄생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직관할 수 있는
초대장을 보냅니다. ‘메시아 탄생 현장 직관!’ 이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 그 값진 티켓은 로마 황제나 황비, 유다왕이나 왕비, 수석사제나 율법학교 교장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에게? 놀랍게도 학벌은 전무하고, 가문도 보잘 것 없으며, 하루 온종일 양들과 붙어 다니는 일이 전부인 들판의 목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 조직 안에서 목자들은 하위 그룹에 속하는 신분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목자, 하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 말도 섞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자들 역시 우리 처지가 그렇지 하고, 자포자기하며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하느님, 가장 존귀하신 그분의 외아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곳에 탄생하시며, 요셉과 마리아 외에 최초로 목격을 허락한 사람들이 가장 낮은 곳에 살아가던 가장 보잘 것 없는 삶의 소유자
목자들이었습니다.
탄생 때부터 나자렛의 숨은 생활, 그리고 활기 넘치던 공생활, 마침내 골고타 언덕 위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께서 일관되게 보여주신 모습은 낮은 자의 모습, 작은 자의 모습, 지극히 겸손하신 모습이었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작고 낮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명료합니다.
우리도 당신의 모범을 따라 작아지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은총은 또한 작은 자들, 낮은 곳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 은혜로운 성탄의 밤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하는 말씀 또한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복음 2장 10~12절)
“너희를 위하여!” 주님께서 다른 세력가들과 잘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목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동시에 오늘 갖은 세상의 고통과 상처로 고생하는 또 다른 작은 자들인 우리를 위하여 탄생하셨답니다.
바로 나를 위하여!
이 경이롭고 축복 된 성탄의 신비 앞에 천사들과 한목소리로 감사와 찬미, 영광의 노래를 힘차게 불러야겠습니다.
구세주께서 바로 나를 위해 탄생하셨다니, 내 안에서도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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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전삼용 요셉 신부님.
‘즈카르야의 노래’ 부를 자격; 내 자녀가 세례자 요한이 된다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는가?
오늘 복음은 즈카르야가 요한을 낳고 입이 풀려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입니다.
즈카르야의 찬미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루카 1,68)
그리고 자기 아들이 메시아의 예언자가 될 것을 기뻐합니다.
메시아의 예언자가 되는 운명은 실로 세상에서 가난하고 박해받고 고통과 십자가의 삶인데 아버지가 이런 삶을 살게 될 아들을 두고 기뻐하는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도 자녀가 세례자 요한의 삶을 살겠다고 할 때 기뻐 주님을 찬미할 수 없다면 아직은 즈카르야처럼 혀가 묶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의 예언자입니다. 메시아의 예언자가 되는 기쁨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예언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언자는 누군가의 말을 전해서 그 사람을 알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언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놓아 예언하는 대상을 위해 살도록 가르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대표적인 예언자입니다. 엘리야는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께 돌렸습니다.
바알이 아닌 하느님을 위해 살도록 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살아야만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욕망을 손에 쥐는 순간 욕망의 대상은 저만큼 물러난다.
대상은 허상이 되고 다시 욕망만 남는다.
그리고 욕망이 남아있기에 한 인간은 또 살아간다.”라고도 했습니다.
인간은 어떤 대상에게서 나오는 욕망을 충족시켜주며 사는 존재란 뜻입니다.
우리는 ‘타자(他者: 나 외의 다른 이)의 욕망을 충족시켜 타자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을 이해 해야합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신 안에서 생존 욕구 외에 어떤 다른 욕구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물론 생존 욕구도 창조자에게서 주어진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란 아이는 절대 두 발로 서서 걷고 싶다는 욕구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두 발로 걷게 된 것은 두 발로 걷고 싶은 마음을 타자, 곧 부모에게서 그 욕구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의 ‘뜻’을 따라주면서 우리는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의 뜻을 따라주는 것은 누군가에게 ‘영광’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의 뜻을 따라주는 자녀는 부모에게 영광을 올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물론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것들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그러니 타자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동물은 인간으로 말하면 자아와 자기 자신이 곧 하나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자아와 자기 자신이 다릅니다.
자기 자신으로서는 자아가 타자입니다.
그것도 모른 채 타자인 자아의 뜻을 따라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산다면 절대 모기나 기생충과 같은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났었더라도 다시 그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영광을 돌리려는 대상과 한 몸이 되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뜻을 따라 그 영광을 위해 살아 그 사람과 한 몸이 되고 그 사람의 세상에 속하도록
인도하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예언자에 의해 어떤 세상에 속하게 되어있는데, 빛과 어둠 두 세상밖에 없습니다.
영화 ‘저스티스리그: 스나이더컷’(2021)은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등의 히어로들이 우주의 악당 다크사이드와의 싸움에 관한 내용입니다.
허황한 내용 같지만 사실 이런 영웅 장르들 안에도
우리 삶이 반영이 안 된다면 아무도 그런 영화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다크사이드가 지구를 침공하자 영웅들이 뭉칩니다. 여기에서 대장은 배트맨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힘을 감당하기에 지구의 영웅들은 턱없이 힘이 부족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유일한 희망인 죽은 배트맨을 살려내려고 합니다.
지구를 지키려는 목적에서 허락되지 않은 일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슈퍼맨은 살아나고 싸움에서 이겨 일단은 다크사이드의 공격을 막아내기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우리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미래의 일을 보여주는데 지구는 다크사이드에 의해 황폐해졌고 슈퍼맨이 배트맨과 자신의 옛 동료들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왜 슈퍼맨은 다크사이드편에 서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슈퍼맨의 아기를 가진 아내 루이스 레인이 배트맨의 방치로 고통스럽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슈퍼맨에게 지구를 지켜야 하는 어쩌면 가장 큰 원인은 루이스 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구인들은 자신의 아내와 아기가 죽는 것을 내버려 둔 것입니다.
이때 그를 위로해 준 것이 다크사이드였습니다.
슈퍼맨은 다크사이드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더는 ‘누군가를 위해’, 곧 누군가에게 영광을 주려는 대상이 사라졌고 다만 원한만 쌓이게 되었기 때문에 그 복수심이 다크사이드편에 서게 만든 것입니다.
이때 또 하나의 반전은 배트맨의 부모를 죽인 영원한 원수, 곧 조커가 배트맨 편에 선다는 것입니다.
배트맨은 슈퍼맨도 적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지금까지 자신의 적이었던 조커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지구를 지켜내야만 한다는 ‘뜻’ 때문에 원수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배트맨과 슈퍼맨이 갈라지게 되는 이유는 슈퍼맨이 더는 지구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사라진 데 있고,
배트맨과 조커가 친구가 되는 데는 지구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 누군가가 없을 때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갑니다.
복수심을 위해 살아갈 수도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결국 어떻게 됩니까?
어둠의 세력이 됩니다.
하지만 조커도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뜻에 합류한다면 빛으로 나오게 됩니다.
조커에게 배트맨은 빛으로 나아오는 예언자였고, 슈퍼맨에게 다크사이드는 어둠으로 가는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곧 그 세계의 문입니다.
빛이건, 어둠이건 우리를 그 빛과 어둠의 세상에 머물게 만드는 것은 바로 빛과 어둠에서 오는 ‘뜻’에 의해서입니다.
어둠은 피조물로서 피조물은 피조물을 희생시키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자아건, 부모건, 선생이건, 다크사이드건 상관없습니다.
피조물에서 오는 모든 뜻은 피조물을 파괴합니다. 세상을 보존하려는 뜻은 세상을 만든 창조자에게서만 옵니다.
이것이 빛의 세상입니다.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이 있지 않으냐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어차피 그 율법을 가지고 내려온 모세도 인간입니다. 모세가 가지고 온 율법을 지킴은 곧 모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결국엔 피조물에 영광을 돌리고 피조물을 위해 사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에서 빛의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빛 자체이신 분이 당신을 위하고 당신께 영광을 드리며 살라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름은 모세의 십계명을 따름과 다릅니다.
조커가 빛으로 나아오게 되는 이유는 배트맨의 뜻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알지 못하는 지구를 지켜내야 한다는
창조자의 뜻입니다.
인간의 뜻이 아무리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해도 그 인간을 위해서 살면 그 사랑은 이기적인 것에 머뭅니다.
오직 빛의 예언자,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만이 구원에 다다릅니다.
이것을 이해해야만 우리도 혀가 풀려 즈카르야의 노래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즈카르야의 노래를 부르려면 주님의 예언자가 되는 기쁨을 충분히 묵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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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대림 시기 12월 24일 금요일-묵상과 기도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면서 믿음과 희망 가지고 자선을 식별하고 봉헌합니다. 거룩한 성탄 전례에 참석하여 대림 시기 동안 준비한 거룩한 사랑의 예물을 봉헌합니다.
사무엘서에서 나탄 예언자는 주님께서 목동이었던 다윗을 이스라엘 영도자로 삼았다. 그를 세상의 위인으로 만들어 준다. 또한 그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겠다. 주님은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아들이 된다. 다윗 왕좌가 튼튼해 진다. 예언합니다.
루카 복음에서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예언합니다. 주 이스라엘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찾아 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있는 이들을 비추고 그들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고대하며 기다립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이웃, 그들과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그리고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다윗 임금이 자기 궁에 자리 잡고, 주님께서 그를 사방의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셨을 때이다.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
나탄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엇이든 마음 내키시는 대로 하십시오.” 그런데 그날 밤, 주님의 말씀이 나탄에게 내렸다. “나의 종 다윗에게 가서 말하여라.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짓겠다는 말이냐?
나는 양 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웠다. 또한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물리쳤다. 나는 너의 이름을 세상 위인들의 이름처럼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곳을 정하고, 그곳에 그들을 심어 그들이 제자리에서 살게 하겠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다시는 전처럼, 불의한 자들이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곧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판관을 임명하던 때부터 해 온 것처럼, 나는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평온하게 해 주겠다. 더 나아가 주님이 너에게 한 집안을 일으켜 주리라고 선언한다.
너의 날수가 다 차서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네 몸에서 나와 네 뒤를 이을 후손을 내가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2사무 7,1-5.8ㄷ-12.14ㄱ.16
그때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이렇게 예언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습니다. 이 계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우리가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루카 1,67-79
실천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난 요한은 구세주 예수 아기보다 먼저 온 예언자이고, 주님에 앞서 와서 그분의 길을 준비합니다. 그는 백성들이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깨우쳐 줍니다. 요한은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차고 이스라엘 많은 이들을 주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며,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하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합니다.
예로부터 예언자를 통하여 예언대로 그리스도 메시아께서 백성들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다윗 집안에서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십니다. 구원자 그분은 원수와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십니다. 구원된 이들은 모두 거룩하고 의롭게 그분을 섬깁니다. 그분은 높은 곳에서 별로서 믿는 이들에게 찾아오시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그들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구세주 예수 아기임을 알고 믿으며, 그 평화의 주님을 찬미합니다.
마침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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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김 로마노 형제님.
대림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2사무엘7,1-5 8ㄷ-12 14ㄱ 16)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말하였다."보시오. 나는 향백나무 궁에 사는데, 하느님의 궤는 천막에 머무르고 있소." (2)
본절은 하느님의 성전을 건축할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다윗이 이것을 예언자 나탄과 상의하는 내용이다.
다윗이 하느님 뜻에 합당한 임금이 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을(2사무12,1-15)뿐만 아니라 후에 솔로몬의 왕위 계승에 있어서도 크게 기여하였고(1열왕1,8-45),동료 선견자 갓과 함께 성전 예배 음악을 도입하였던(2역대29,25)예언자 나탄의 이름이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아마도 그는 왕실 대소사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큰 영향력을 끼친 왕실 고문의 역할을 하였던 궁정 예언자였을 것이다.
여기서 '예언자' 혹은 '선견자'에 해당하는 '나비'(nabi)는 '낮은 목소리를 내다'라는 뜻의 '나바'(naba)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예언자'라는 뜻 이외에 '대변인'이라는 뜻도 있다.
이것은 예언자란 바로 하느님의 대변인으로서 하느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예언자는 하느님의 '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브리어 '나비'(nabi)가 '대변인' 혹은 '대언자'라는 개념을 가졌다는 사실은 탈출기 7장 1절에서 아론이 모세의 '나비'(nabi)가 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론은 모세의 대변자이며, 또한 모세는 하느님의 대언자였다. 이렇듯이 예언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하느님의 강력한 부르심에 의해 되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나탄'의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사무엘 하권 7장 4-17절에서 그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내려서 그것을 그대로 다윗에게 전해야 했던 것을 볼 때, 그가 하느님의 대언자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윗은 이러한 하느님의 대언자를 가까이함으로써, 사무엘 예언자를 멀리했던 인본주의적인 임금인 사울과는 달리 신본주의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다.
다윗이 예언자 나탄을 불러온 것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다윗은 먼저 자신의 거처와 하느님의 거처를 비교하였다.
다윗이 나탄에게 한 말 중에 첫 두 단어인 '레에 나'(reeh na)는 새 성경에서 단순히 '보시오'로 번역되었다. '레에'(reeh)는 '보다'라는 뜻의 '라아'(raah) 동사의 명령형이며, '나'(na)는 정중하게 요구할 때 쓰이는 불변사로서, 이러한 표현에는 나탄에게서 도움을 받고자 하는 다윗의 간절함이 잘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주어보다 동사를 앞세우는 히브리어 문법과 다르게 다윗은 '나는'과 '하느님의 궤는'이란 말을 각각 동사보다 앞세워 강조함으로써 자신과 하느님을 선명하게 비교하고 있다.
즉 다윗은 '나는'과 '하느님의 궤는'을 대비시켜 자신이 머물고 있는 거처와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거처를 비교함으로써 자신은 향백나무로 지어진 웅장한 궁에 머무는 반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임금이신 하느님은 초라한 천막에 머무르시도록 지금껏 내버려 둔 데 대한 자신의 송구스러움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다윗이 머무는 곳으로 제시된 '향백나무 궁'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티로임금 히람이 다윗에게 지어준 당시 최고의 건축물이었다(2사무5,11). 반면 하느님의 궤는 천막 가운데 있었다.
여기서 '천막'으로 번역된 '예리아'(yeriah)는 '휘장'(tent, curtain)을 의미하는데, 사무엘 하권 6장 17절에서 '천막'으로 번역된 '오헬'(ohel)과는 기본적으로 의미가 다르다.
그러나 두 단어는 여기서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서 4장 20절, 10장 20절, 하바쿡서 3장 7절에서 같은 뜻으로 쓰였다.
즉 이것은 모세 시대의 만남의 천막(성막)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궤를 임시적으로 보관하기 위해 다윗이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 하권 6장 17절에서 '천막'으로 묘사한 것과는 달리 여기서 '휘장', '커튼'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천막'('예리아'; yeriah)으로 묘사한 것은 '예리아'(yeriah)가 일반적으로 천막보다 작은 것을 나타내거나 큰 천막 안에 있는 작은 부분을 나타내는 용어라는 점과 관계된다.
즉 다윗은 자신의 궁과 하느님의 거처가 외형적으로 너무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천막'('예리아')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대림 제4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1,67-79)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68~69)
'찬미받으소서'로 번역된 '율로게토스'(eulogetos; blessed be; praise be)는 '찬양하다', '축복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율로게오'(eulogeo)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축복받은', '찬양받을 만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루카 복음 1장 42절에서 '복되시다', '복이 있다'로 번역되어 하느님의 선하심을 입은 사람에게 적용되었지만, 여기 루카 복음 1장 68절처럼 하느님의 선하심을 입은 사람이 그분께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즉 하느님께서는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참으로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즈카르야는 자신의 놀라운 체험(루카1,57~64)의 바탕 위에서, 그의 찬가 서두에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란 말은 루카 복음 1장 17절과 77절에 사용되고 있는 '주님의 백성'과 같은 의미의 단어로서, 야곱의 후손인 유대인들을 가리키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의 계약 백성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즈카르야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통해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정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이유 접속사로 쓰인 '호티'(hoti; for)로 시작되는 본절과 69절은 왜 하느님께서 찬미받을 만한 분인지 그 이유를 설명해 준다. 즈카르야는 먼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을찬미하고 있다.
여기서 '찾아와'로 번역된 '에페스켑사토'(epeskepsato; he has come; he has visited)의 원형 '에피스켑토마이'(episkeptomai)는 도움을 주기 위해 '자세히 살펴보다'라는 의미와 '직접 찾아오다', '방문하다'는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구약 70인역(LXX)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불임의 사라를 찾아오셔서 이사악을 주신 대목(창세21,1)과 판관 시대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많이 떠나버린 황량한 가나안 땅에 하느님께서 찾아오셔서 양식을 주셨다는 대목(룻기1,6)에 대표적으로 쓰였는데, 환난과 위기에 처한 당신 계약의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잘 나타내 준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즈카르야는 구세주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요한을 태어나게 하신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돌보시고 찾아오셨다는 표현으로 찬미했던 것이다.
또한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임신과 출생이 하느님의 돌보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일어났음을 증거하기 위해 '에피스켑토마이'(episkeptomai)라는 단어로 찬미했던 것이다.
그리고 '속량'으로 번역된 '뤼트로신'(lytrosin; redeemed)는 '속전을 내고 놓아 주다', '구속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뤼트로오'(lytroo)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구속', '해방', '자유' 등의 뜻을 가진다.
구약에서는 '파다'(phadah)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속량'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맏아들의 '속전'(贖錢), '대속'을 요구할 때 사용되었으며 (탈출13,2; 13,11~16), 또한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탈출21,8).
따라서 여기서 '속량'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인류 구속 사업과 관련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그 피값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죄사함의 은총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 된다.
하느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돌보시어, 그들을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그들의 죄를 대속하시기를 작정하셨다. 그리고 즈카르야는 바로 지금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과 구원의 은혜를 미리 내다보고 온 마음을 다해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루카 복음 1장 69절은 구약에 나오는 '내가 다윗에게 뿔이 돋게 하고'(시편132,17) 라는 메시야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힘센 구원자를'에 해당하는 원문은 '구원의 뿔을'('케라스 소테리아스'; keras soterias; an horn of salvation)로 되어 있다. 여기서 '뿔'에 해당하는 희랍어 '케라스'(keras; an horn)는 히브리어 '케렌'(qeren)에 대응하는 단어로서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신명33,17; 1열왕22,11; 다니8,3).
따라서 '구원의 뿔'은 구원의 '힘'과 '능력'을 나타내는 말이며, 동시에 이러한 힘과 능력을 지닌 구세주를 상징한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뿔'은 인류를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실 힘과 능력을 가진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이다.
즈카르야는 여기서 구약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자신이 말하고 있는 메시야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되어 온 바로 그 메시야이심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한편 '집안에서'로 번역된 '엔 오이코'(en oiko; in the house)에서 '오이코'(oiko)의 원형 '오이코스'(oikos)는 원래 건물로서의 '집'을 가리키는 단어이지만, 여기서는 혈연적 관계의 '가문'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다윗의 '집안'이라는 말은 다윗의 '가문'이나 '자손'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 표현은 즈카르야 당시 유대 전역에 팽배해 있던 메시야 사상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다윗 가문에서 메시야가 나와 그들을 압제와 억압으로부터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즈카르야가 노래하고 있는 메시야는 비록 다윗 임금의 가문에서 태어나기는 하지만,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정치적이며 세속적인 메시야가 아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는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 당신 백성들을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영신적인 메시야로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 또한 그는 혈통적 유대인들만이 아닌,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시기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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