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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7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6. 선악과 타락의 원죄를 믿습니다 》
창 3:6
〈 죄가 본능으로 둔갑하다 〉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적 충동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남녀가 결혼했으면, 배우자만을 상대로 성적충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결혼 이후에도 여전히 성적충동은 대상을 가리지 않습니다.
물론 인품과 자제력으로 가정을 지켜야 하지만, 일탈 현상을 흔히 보게 됩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불리는 인간의 이러한 속성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생물학적 차원에서 종족 보존과 번성을 위한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 중에도 평생 정해진 상대하고만 짝짓기를 하는 경우가 없지않습니다.
올빼미, 부엉이, 독수리는 평생 정해진 상대와만 짝짓기를 한다고 합니다.
동물 중에도 이렇게 평생 1부1처로 살다가 죽는 종류가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을 짝짓기 상대를 바꿔가며 번식하는 부류에 포함하는 것은 큰 모순입니다.
배우자가 아닌 상대를 향해서도 성적 충동이 일어나는 것은 생물학적 본능입니다.
그러나 생물학적 본능이라고 해서 죄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자신만 그런 게 아니고, 모두가 저질렀다 하여 죄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다 같은 현상이지만,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성 충동은 죄입니다.
간혹 보도되는 뉴스 중에는 유명인사의 간음 사건이 있습니다.
언론은 집중보도를 하고 사회적 지탄을 유도합니다.
배우자 이외의 성 충동이 간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말하기를, 성 충동까지는 죄가 아니고, 간음으로 이어지면 죄라 합니다.
☞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마 5:27~28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죄가 본능이 되어버렸습니다. 본능이라고 죄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 본능적 죄, 집단적 죄 〉
어거스틴은 청소년기에 친구들과 어울려 배 서리를 했습니다.
남의 과수원에 들어가 아직 덜 익어, 먹을 수도 없는 배를 땄습니다.
그 배를 돼지에게라도 줄 수 있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아무데나 버렸습니다.
모인 친구들이 함께 했다고 해서 죄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덜 익어서 먹을 수 없음을 번연히 알면서도 주인 몰래 도둑질을 했습니다.
그것을 또한 돼지에게 줄 수도 있었지만, 길가에 버렸습니다.
어거스틴인 이 죄로 인하여 괴로워했습니다. “집단적 죄”입니다.
한 유튜버가 20여 년 전의 집단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 신상을 공개한 일이 있습니다.
집단 성 폭행에 참가한 학생들 중에는 모범생도 있었고, 착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모두 성폭행에 가담했다하여 죄가 아닌 것으로 둔갑하지 않습니다.
함께 한다고 죄가 아닌 것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인류에게는 이러한 죄가 있습니다. 군중심리에 휩싸여 집단적으로 범하는 죄입니다.
이미 본능으로 격상한 죄도 있습니다. ‘본능적 죄’입니다.
그러나 본능이 되었다고, 군중이 함께 저질렀다고, 죄가 선으로 둔갑할 수 없습니다.
이 현상에 대하여 인류는 아직까지도 명쾌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그때 임시방편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면서 역사는 이어졌습니다.
☞ 성경은 어떻게 대답할까요?
창세기 3장에는 선악과 사건이 나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하와가 먼저 따 먹고, 아담도 먹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이들의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이 확 바뀌게 됩니다.
선악과를 따 먹기 이전 에덴동산의 환경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첫 사람 아담 하와 부부를 에덴동산에 살게 하십니다.
에덴동산은 숲이 우거지고 숱한 과일이 주렁주얼 열려있고, 덥지도 춥지도 않았습니다.
아담 하와는 알몸으로 지냈지만 서로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굳이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 가운데에는 매우 특별한 두 그루의 나무를 두셨습니다.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창 2:9) 약칭하여 생명과, 선악과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은 왜 에덴에 두 나무를 두어 선악과를 따 먹게 했느냐?’
☞ 그러나 여기에 ‘본능적 죄’ ‘집단적 죄’를 설명할 열쇠가 있습니다.
〈 에덴동산의 역사적 진실 〉
세상 사람들은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를 설화 혹은 신화로 치부합니다.
엿새 창조,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 생명과와 선악과, 가인과 아벨, 노아의 홍수,
여기에 아브라함 조상의 족보까지를 ‘믿을 수 없는 신화 혹은 설화’로 깎아내립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를 ‘원역사’라 하기도 합니다.
역사 이전의 역사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신빙성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12장부터를 사실로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자칭 타칭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이들 중 상당수가 이에 동조합니다.
창세기 12장이후만 가지고도 인류에게 부족함이 없는 은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성경은 단 한 구절만으로도 인류가 누리기에 풍성한 은혜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창세기 1장 1절부터 단 한 구절도 버릴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을 배제한다면, 오늘날 “세상의 범죄현상”을 설명해낼 수 없습니다.
에덴동산의 생명과와 선악과 사건을 배제한다면 “인간의 속성”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선악과 사건을 도외시하면, 세상과 인간을 성경으로 풀어낼 수 없습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단 한 구절도 버리지 않고 오롯이 믿는 자가 진정한 크리스천입니다.
하나님이 공연히 생명과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생명과 선악과를 두신 첫 번째 이유는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에덴에 생명과만 있었다면 인간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습니다.
기계적으로 생명과만을 따 먹을 수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사람을 ‘선택권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첫 번째 선택권이 ‘생명과냐, 선악과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하여” 즉, 하나님의 사랑의 파트너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도 나를 사랑하겠느냐?”
이 질문을 받은 피조물 사람은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지, 거부할지를 정해야 합니다.
아담하와는 에덴에 있는 두 그루의 나무 열매 중 하나를 따먹음으로써 대답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이 대답은 생명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이 대답은 선악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첫 조상 아담 하와는 선악과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배제하고, 매사에 자기판단으로 살며, 자신이 책임지는 길입니다.
〈 선과 악에 대한 결정권을 포기해야 〉
생명과냐, 선악과냐?
이는 인간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선택해야 하는 첫 번째 기로입니다.
생명과 선택은,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의 파트너가 되어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입니다.
선악과 선택은, 하나님 사랑의 파트너를 거부하고, 사람이 독자적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선악을 알게 한다’는 의미는 선이냐 악이냐에 대한 판단 권한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일이나 행동, 나아가서 생각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선악 간에 결정해야 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사람의 성적 충동은 자기 의지로 제어하지 못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은 인간의 성적 충동을 본능으로 규정하고, 이는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종족보존을 위한 본능이며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정의한 것은 사람의 ‘결정’입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는 성적 충동은 죄가 아니다”라는 결정권을 인류가 행사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고, 선이냐, 악이냐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인간이, 선으로 판단했습니다.
이 선택권은 어제오늘 생긴 권한이 아닙니다.
이미 아담 하와의 선악과 사건으로 시작된 선택권입니다.
인류는 이처럼 선과 악에 대한 결정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행사 할 것입니다.
☞ 예수님은 이미 간음으로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않고 생명과를 따 먹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선이냐, 악이냐를 하나님이 결정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 예수 믿기로 결단한다는 의미는 바로 선악과로 얻은 선택권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아담하와의 선악과 이전으로 돌아가, 선악과가 아닌 생명과를 선택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함은, 선이냐 악이냐를 내가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부터, 마음에 품은 것과, 말하고 행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이 예수 믿음입니다.
기독교인은 생각 속에도 죄가 무한함을 고백합니다. 생각으로 지은 죄가 주홍빛과 같습니다!
자신이 한 말에도 죄가 엄청남을 고백합니다. 말로써 지은 죄가 너무나 큽니다.
행동으로 지은 죄 또한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죄인입니다!” 고백합니다!
〈 원죄 〉
아담 하와의 선악과 사건이래 그의 후손인 인간은 대대로 선악의 결정권을 행사합니다.
사람들의 선악 결정권은 사람과 사람 사이 충돌을 불러옵니다.
형은 동생이 자기 말에 순종하는 것이 선이라고 결정하고 주장합니다.
동생은 형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악이라고 주장하고 형에게 반발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자기에게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선이라 주장합니다.
아내는 남편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악이라고 결정합니다.
필연적으로 선악에 대한 선택권 행사는 사람과 사람사이 “관계의 파괴”를 가져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것은 선이라고 결정했습니다.
우크라이는 그것은 악이라고 주장합니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지역과 지역, 국가와 국가가 동일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세상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각자가 선악에 대해서 결정권을 행사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집단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정당은 근본적으로 정권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자기 정당이 정권을 잡게되는 것이 선이고 정의입니다.
상대 당에게 정권이 넘어가는 것은 악이며 불의입니다.
나에게 유리하면 선이며 정의입니다.
나에게 불리하면 악이며 불의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선택하고, 선악에 대한 결정권을 각자가 가지게 되면서 빚어진 현실입니다.
강자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선과 정의가 되었습니다. 약육강식은 불가피해졌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곧 정의가 되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생각을 선과 정의로 만들기 위하여 패거리가 등장했습니다.
다수를 확보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자기네의 주의 주장을 선과 정의로 치장합니다.
파괴력이 더 큰 무기를 개발했습니다. 핵입니다.
핵을 보유한 국가들이 연합하여 자기네의 핵 보유를 정당화했습니다.
핵 보유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가 핵을 가지는 것은 악으로 단정했습니다.
이 모든 현상이 인류의 조상 아담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드러난 필연적 현상입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오늘날 인류는 창세기를 설화나 신화로 치부합니다.
〈 스스로 빠진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이 ‘구원’ 〉
생명과를 선택하지 않고 선악과를 택한 것이 타락임은 이미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선악의 결정권을 사람이 가졌습니다.
그 후유증이 죄악으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악을 자기가 결정하는 타락한 인류의 범죄는 대물림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의 편리를 도모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편리하면 그것이 선이고 정의입니다.
자기를 위협하는 것은 악이고 불의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선악과 사건의 후유증이 이렇게 대물림이 되고 있기에 이는 분명 원죄입니다.
갓 태어나 생각, 말,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았으나 이미 그 안에 죄의 피가 흐릅니다.
자기중심과 이기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자랍니다.
자기중심 이기주의가 선과 정의라고 태어나면서부터 결정을 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이를 알고, 인정하며, 우리 죄를 고백하는 것이 “선악과 타락의 원죄를 믿는 신앙”입니다.
나에게 자기중심, 이기주의가 태어나기 전부터 내 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매사에 선악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하려는 교만이 있습니다.
선악과 선택의 결과 인류는 도탄에 빠졌습니다. 스스로 빠진 함정입니다.
이 함정에서 벗어날 길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벗어나야 합니까?
벗어나면 이르는 곳이 어디입니까?
벗어나 진정한 선과 정의의 상태에 이르는 것,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 말합니다.
선악과를 선택한 결과 드러난 죄악의 구렁에서 인간은 스스로 나올 수 있을까요?
결코 스스로 걸어나올 수 없습니다.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 손에 거머쥔 선과 악에 대한 결정권, 이거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걸 포기하면 그 즉시 죽을 것만 같습니다. 남에게 다 빼앗길 것 같습니다.
“선악과 타락의 원죄를 믿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그럼에도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결정권을 내어드리고 생명과의 길이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이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결정하는 그 길이 있음을 압니다.
기꺼이 그 길을 선택하는 결단이 “선악과 타락의 원죄를 믿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으로 우리는 구원에 이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간에 결정해 주시는 생명과의 길로 접어드는 그 길, 구원의 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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