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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으라(마 25:1-13)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종말의 끝에 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증거는 성경에 나오는 종말의 징조가 거의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종말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인가가 신앙적인 과제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예수님께서 3가지 비유를 통하여 종말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은 첫 번째 비유인 열처녀 비유입니다.
종말을 말하면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하나는 깨어있는 것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주님과 영적인 교제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의 마음과 주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영적인 파수꾼이 되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하는 것입니다. 준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추수꾼입니다. 맡겨진 달란트로 충성을 다해서 생명을 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내게 붙혀준 영혼들, 내 사랑하는 가족들, 내 이웃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서 저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증거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꾼입니다. 내가 순간순간 예수님과 호흡함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 성품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예수님처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습속에 얼마나 주님의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는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를 위해 광야의 연단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시련을 통하여 우리 자신의 모난 부분을 깍아내고 다듬어서 연단을 만들어내고 연단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종말을 그렇게 많이 들었지만 정말 종말이 온다면 평안히 종말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영적으로 깨어 있습니까? 주님 맞을 준비되었습니까? 이것이 결국 우리의 영원을 결정하는 전부가 아니겠습니까? 마태복음 24:40,41을 보면 “그때가 되면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그때 두 사람이 밭에 있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아처럼 방주를 준비하고 깨어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치 않으면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저들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뭐라고 했습니까? "깨어 있으라."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 잠자지 말라, 지금은 자다가 깰 때요, 적당히 살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영적으로 준비되어 있습니까?
1-2절,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있는 자라”. 여기서 천국을 어떻게 비유하고 있습니까?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의 결혼예식은 저녁에 이루어지는데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옵니다. 이때 신부의 친구들이 신부의 들러리가 되어 신랑을 혼인잔치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 '신랑'은 예수님을 의미하고 '열 처녀'는 모든 믿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관계를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가 영원히 함께 살 영적인 남편인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죄와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반드시 그분을 맞이하고 주님의 혼인잔치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종말은 이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혼인잔치를 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진정으로 맞이하기 원하는 성도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신부인 우리들에게 깨어있으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신랑이 더디 오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에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라고 했습니다. 신랑이 몇 시에 오겠다고 하고 더디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은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오리라고 하신 약속을 연기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더디 오신다는 것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기다렸던 것과 다르게 오신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일에 기대와 계산을 합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하고 꿈꾸었던 것은 다 어디에 근거한 것입니까? 모두 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에 근거한 계산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사람의 방법은 참으로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나의 생각, 나의 방법, 나의 기대, 나의 열심은 무너져야 합니다.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안될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 제 뜻을 다 내려놓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나님을 인정해 드리십시오. 신앙생활 뿐 아니라 세상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자기 지식이나 물질이나 세상이나 능력을 의지하는 우리의 불신앙을 철저하게 꺾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교만을 꺽는 것입니다. 교만이 죄의 뿌리입니다.
우리 속에는 누구나를 불문하고 다 교만이 있습니다. 머리가 좋으면 머리 좋은 대로 교만이 있고, 사업이 잘되면 잘되는 대로 교만이 있고 돈이 많으면 많은 대로 교만이 있습니다. 학벌이 좋으면 좋은 대로 교만이 있습니다. 높은 사람들만 교만한 것이 아니라 낮은 사람들도 교만합니다. 교만은 인간의 본질적인 죄성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교만하지 않다고 자위하지 마십시오. 교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주인처럼 행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이 죄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자기중심의 자기 왕국을 이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에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 부인의 과정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입니다. 광야생활의 모진 훈련과 연단은 오로지 내 겉사람이 깨어지고 내안에 거듭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기위해서 인 것입니다. (신 8:16)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광야생활을 통해 훈련과 연단을 통해 너를 낮추시고 너를 시험하심으로 마침내 복을 주려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직도 우리는 더 깨어지고 더 부서져야 합니다. 신랑이 더디 온 것은 약속을 위반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요, 준비된 사람과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무슨 현상이 생겼습니까?
슬기로운 자들과 미련한 자들이 다 졸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로마서 13:11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깨어있을 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깜박깜박 조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하고 조는 것을 이해하십니다. 그런데 계속 조는 사람은 곤란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실 때 제자들도 잤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 26:40-41)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시간에 졸던 제자들은 십자가앞에서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님도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자다가 깰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졸며 자는 성도들은 없습니까? 혼자 기도하기 어려우니까 교회공동체를 세워주시고 함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교회 기도에 힘을 보태십시다. 합심해서 기도할 때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결심을 했다가도 넘어지고, 열심히 하려고 하다가도 졸고, 잘하려고 하다가도 실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하나님이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신랑이 더디 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깨어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주님을 기다립니다. 정말 기다립니까? 그렇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떤 상황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제대로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이 내 뜻대로 안되도 내 방법대로 안되도 너무 실망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연단과 시련의 과정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음으로 오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깨어있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슬기있는 처녀와 같은 성도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 4-6절에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라고 했습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열 명의 처녀들이 다 졸며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이때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고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났습니다.
아주 급작스러운 방문이었습니다. 돌발적인 방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얼마나 돌발적이고 얼마나 급작스러운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등과 기름을 준비했기에 슬기로운 처녀로 불려지고, 다섯은 등만 가지고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서 미련한 처녀로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등을 가진 것으로 평가하지 않고 기름준비 여하에 따라서 슬기로운 사람과 미련한 사람으로 구별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등은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의 모습을 상징하며 ‘기름’은 외형적인 신앙생활을 유지해 주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가 등은 가지되 기름은 가지지 않았다는 말은 신자가 경건의 모습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처음에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으나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마치 기름이 다 떨어진 등불처럼 영적으로 무력하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힘이 없으니까 세상 유혹과 시험에 쉽게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쉽게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불꽃이 꺼져가 영적인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작동하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입니다. 육신의 죄성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자기를 맡겨버리고 맙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사회가 그렇습니다. 너무 죄악이 관영합니다.
너무 죄악이 잔인하고 끝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만 만족한다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괜찬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멋진 등잔을 가지고 있어도 그 안에 기름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안다할지라도 삶의 현장에서 그 말씀이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는 기름이 떨어진 사람인 것입니다.
자기속에 자기가 너무 많습니다. 신앙과 삶이 다르다는 말인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주도하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주권에 나를 내려놓으십시다. 주님이 원하시면 자기 내려놓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에는 반드시 십자가가 있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가 있을 때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신앙의 정수입니다.
본문 11절을 보아도 이미 문이 닫혔는데도 '주여 주여'라고 소리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기름이 없습니다. 미련한 자들은 그 중심에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생명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마음속에 중생케 하시는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 구원의 감격도 없이 습관에 따라 신앙 생활하는 외형적인 신자입니다. 이들은 기름을 준비하는 것을 비아냥거렸을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어렵게 신앙생활하느냐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면 다 드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신랑이 오시기 전에는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았는데 신랑이 오자 저들의 등불은 꺼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신앙의 내면적 상태 즉 영적 생명력의 고갈, 은혜가 떨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나오는데 내면에 기쁨이 없습니다. 봉사는 하지만 자기 욕심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의 제목마다 자기만족을 채우려는 것뿐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슬기 있는 자들에게 기름을 나누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생명은 나누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예수 믿기 때문에 믿지않는 가족이 자동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입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평소에 말씀과 기도로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들이 세상 일에 빠져 잠잘 때 하나님앞에 나아와 기도했던 사람들입니다. 남들이 무관심할 때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순종했던 사람들입니다. 오직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거듭난 성도답게 신앙생활하며 살았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날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도입니다. 내 방법, 내 뜻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성도입니다. 바로 이런 성도가 슬기로운 성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미 우리 안에 성령이 임재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 열심이, 자기감정으로, 자기 지식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전부인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과 기도가 여러분의 삶속에 베어있는 믿음의 삶, 신앙을 가졌다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살아 움직이는 생활신앙을 가지고 영적으로 깨어있는 성도, 기름을 준비해서 어둠과 싸워서 승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신랑되신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살기위해서 입니다.
본문 10,11절에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고 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고 인내하며 기다렸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천국이 예비된 자의 것임을 보여줍니다. 성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위해 고통을 견디기도 하고, 슬픔을 참기도 하고, 환난과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이 혼인잔치에 들어가자 문이 닫혔습니다. 천국의 문은 예비하지 못한 모든 자들에게 닫혀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찾을 수 있을 때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회가 언제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성경공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삶의 기회가 언제나 그렇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한 순간 갑자기 내 인생의 기회의 문이 아주 닫혀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기회의 문이 닫힐 수도 있습니다. 닫힌 다음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는 기회, 주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 주님을 섬기며 주님께 헌신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은 문이 닫힌 후에 돌아와서 주여주여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소소라고 소리질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날을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성령의 교통하심 속에서 늘 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등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교회생활이 저들의 신앙생활 전부였습니다. 구원의 감격도 없고, 기쁨도 없고, 자기 만족을 위해서 신앙생활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는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 오실지라도 깨어 있는 성도, 준비하는 성도,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되신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