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읽고 궁금한 게 생겼다. 성령이 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지?
집 주변에서 산비둘기를 보았는데 상상하던 것처럼 대단한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더구나 도시에서 비둘기가 머리 위로 내려온다 싶으면 사람들은 비명을 지른다.
별로 관심두지 않을 때는 그냥,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니까, 예수님이 평화를 상징하니까, 라고 단순히 받아들였는데
문득, 그 시절에도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었나? 싶었다.
두 가지를 말씀해주셨고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첫째는 제사에서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일반 민중들이 준비하는 제물로써 비둘기,
둘째는 까마귀와 달리 약속을 굳게 지키고 좋은 소식을 가져오는 방주의 비둘기.
당시 로마의 상징은 독수리 곧, 공격하고 심판하고 처단하는 새였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독수리에 맞설 더 강력한 심판자를 기다렸으며 세례요한조차도 메시야를 심판자로 그렸었는데 정작 예수님은 비둘기 성령을 받으신 거다. 약하디 약한 비둘기. 그러나 약속을 굳게 지키고 결국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비둘기. 심판자가 아니라 죄를 괴로워하고 자유를 찾는 이들 사이에 들어가서 함께하는 메시야. 예수님이 더 분명하게 다가왔다.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기적이 상호일치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사람에겐 기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거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를 다녀서 예수님이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익숙하지만 뭐랄까. 일방적이었다.
예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하시면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별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가진 때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고 나는 내 맘대로 살 수 있는 핑계가 되기도 했다.
강의에서 상호일치를 위로의 말로 느꼈다. 하나님께서 당신 나라와 일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는구나,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구나.
신과 나 사이에서도 대상과 대상, 개체와 개체가 아닌 사이주체, 장주체, 서로주체라는 것에 뭉클하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실재,
예수의 영으로 하나된 교회 공동체가 이 시대 이 땅에 많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껏 공감했다.
분리된 개별주체가 아닌 사이주체를 발견하며 말씀으로 각성하는 교회가 이 땅에 많아지기를 빌었다.
첫 시간과 비슷하게 둘째 강의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예수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는데, 이렇게 쉽고 재미있게 하늘나라를 배우니 어쩌면 부끄럽기까지하다.
놀라운 하나님 말씀이 이토록 새롭고도 쉽게 풀이되고 예수 살과 피가 관념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운동하는 실재인 것을
강사님 포함해서 고작 여덟이 경험하는 게 아쉽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광야 유혹도 떠올린다.
빵을 배불리 먹어서 예수를 찾던 청중들이 떠나고 그 자리에 남은 제자 열 둘도 떠올린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시편 2편)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이사야42장)"
예수님이 성경말씀을 통해 각성하신 것처럼,
우리도 말씀을 깊이 읽고 분명한 부르심 듣게 되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