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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1. 성 앵베르 라우렌시오(Laurent-Joseparius Imbert)
- 윤영선 교수가 직접 그린 앵베르 성인과 절두산순교성지.
출생 : 1796년 프랑스 마리냔(Marignane)
순교 : 1839년(43세) 새남터 / 군문효수(軍門梟首) : 죄인의 목을 베어 군문(軍門) 앞에 매다는 형벌
신분 : 주교(제2대 조선대목구장)
한국이름 : 범세형(范世亨)
조선의 수호자로 성모님 모시려 청원
1월 1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수호자로 모시고 있는 한국 교회는 성모님과 맺은 관계도 특별했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한창인 1838년 성모님을 수호자로 모시려는 청원을 교황청에 올렸다. 그의 청원은 순교 후 2년이 지난 1841년에야 화답되었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에 의해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이 조선의 수호자로 선포된 것이다. 청원자 앵베르는 답을 얻지 못한 채 순교했지만 끊을 수 없는 매듭으로 한국 교회와 성모님을 연결시켜줬다.
태양볕이 따가운 8월 중순 앵베르 라우렌시오 성인을 만나기 위해 서울 관악구의 삼성산성지를 찾았던 기억이 있다. 이곳은 성인의 유해가 58년간이나 묻혀계셨던 곳이다. 성인을 만날 기대감으로 초행길부터 가슴이 설렌다. 주차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어떤 형제분이 산 위에서 야외 미사가 곧 거행된다고 알려줬다. 성지의 거룩한 미사에 참여할 수 있다니, 예상치 못한 횡재에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기뻤다. 장마철이라 이끼 낀 돌길이 다소 미끄러웠으나 짙은 초록의 숲으로 간간이 들어오는 햇살이 정신과 마음을 맑게 해주는 듯했다. 숨 가쁘게 오른 언덕 위에는 하얀 제대보가 눈에 들어왔다. 연두색 초, 성작, 십자고상이 놓여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대가 마련된 것이다. 성인이 이 자리에 나를 초대해주신 것 같은 기분이다. 성인이 묻혔던 묘역에 서있자니 성인의 사랑이 더욱 위대하게 느껴진다. 교우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 잡혀서 순교하신 착한 목자다.
스스로 잡혀서 순교하신 착한 목자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만 리 길도 마다치 않고 달렸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일러바쳐 해를 입히느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십계의 가르침을 어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칼과 톱이 우리 앞에 있고 우리의 몸이 가루가 될지라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인의 유해는 삼성산에 안치되었다가 명동대성당을 거쳐, 지금은 절두산순교성지 병인박해 100주년 기념성당 지하에 모셔져 있다. 절두산성지도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된 장소다. ‘목이 잘린 곳’이라 절두산이라 한다는데, 미사에 올 때마다 때아닌 비가 세차게 내려 성지는 우수에 젖은 성스러움으로 다가왔다. 비바람에 실려 환청처럼 흘러드는 형장 군졸들의 음성이 속삭이듯 귓전을 스친다. “타국 사람을 죽일 때에 청명하던 하늘이 홀연히 어둡고 비가 급히 쏟아져 지척을 분간치 못하여 무섭더라.” 하나같이 우수에 젖은 새남터와 삼성산과 절두산은 착한 목자의 마음을 닮았다.
우리나라 땅을 밟은 최초의 주교
앵베르 성인은 우리나라 땅을 밟은 최초의 주교다. 많은 교우가 박해로 죽어가는 상황에서 자식을 살리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했다. 성모님을 우리의 수호자로 삼으려던 목자는 이미 마리아의 모성으로 백성을 끌어안은 게 아닐까. 끔찍이도 인자하셨던 성인은 절두산에 우뚝 서서 오늘날에도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다.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2. 성 임치백 요셉
- 윤영선 작 ‘성 임치백 요셉’
출생 : 1803년 서울
순교 : 1846년(43세) 포도청 옥 / 교수
신분 : 사공, 포졸
1월 7일은 주님 공현 대축일, 8일은 주님 세례 축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활을 시작하셨다고 하니, 세례는 하느님께서 세상에 드러난 공현의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순교자의 세례도 세상에 천주를 드러낸 작은 공현임을 알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 만나 감옥에서 영세
임치백은 세례를 받기 전부터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옥에 갇힌 교우들을 돌보는가 하면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846년 그의 아들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도와 황해도 해안에 갔다가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치백은 황해도까지 찾아가 스스로 붙잡혀 서울의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났다. 그리고 그분 말씀에 크게 감복하여, 요셉이라는 본명으로 옥중 세례를 받았다.
임치백 요셉의 옥중 일화는 유명하다. 한번은 십계명을 외워보라는 포장의 말에 답을 하지 못했다. 형리가 조롱하자 그가 말했다. “자녀가 무식하면 효도할 수 없습니까? 아닙니다. 무식한 자녀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모께 효도를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배운 것이 없으나 천주께서 저의 아버지이신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초라한 옥중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임치백의 영세와 신앙고백은 천주의 정체를 세상에 드러낸 작은 공현이다.
옥중 영세와 신앙고백은 ‘작은 공현’
지난해 주님 공현 대축일에 서울 종로성당 미사에 참여하였다. 종로본당은 포도청 순교자를 현양한다. 성전에 들어서자 파이프오르간과 열두 사도의 천장 부조가 눈에 들어왔다. 빵 다섯 개 모양의 간접 조명에 제대 위 예수님의 후면에서는 빛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성당 곳곳에서 마주하는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거룩함의 영역으로 영혼을 이끄는 듯했다. 저 아름다움은 분명 아름다움의 극치이신 하느님의 자취일 것이다. 소박한 구유에는 아기 예수가 동방박사의 경배를 받고 있다. 박사들도 세상에 오신 절정의 아름다움과 마주하고 있다. 지하에 있는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에서는 해설사가 박해의 역사와 고통 중에도 신앙을 고백했던 성인들의 말씀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눈물과 함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수많은 순교자 기념하는 종로성당
옛 좌·우포도청, 의금부, 형조, 전옥서 등에서 순교한 수많은 순교자를 기념하는 종로성당은 성령의 그느르심이 강해서인지 더욱 거룩하게 느껴졌다. 겨울이지만 밝은 햇살이 가득한 종로 거리를 숨겨진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걷는다. 거리 곳곳에서 성인 성녀들의 자취가 살아나는 듯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한국의 모든 땅이 거룩하게 느껴진다. 거룩한 순교자의 땅에서 숨 쉬고 산다는 것이 참 다행스럽고 행복하다. 포도청의 종로에서 성인의 세례를 기억하며 이는 감사와 행복을 초라한 나의 마음에 허락하신 주님 공현의 축복이 아닐까.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3. 성 안토니오 다블뤼(Marie-Nicolas-Antoine Daveluy)
- 윤영선 작 '성 다블뤼 안토니오'
출 생 1818년 프랑스 아미앵(Amiens)
순 교 1866년(48세) 갈매못 / 군문효수
신 분 주교(제5대 조선대목구장)
한국이름 안돈이
‘모든 것’ 버린 대신 예수님 가진 성인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성 안토니오 다블뤼의 좌우명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언제나 큰 힘이 된다. 북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의 부유한 명문가에 속했던 그는 어쩌면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겠다며 사제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끝이나 다름없는 조선으로 그를 보냈다. 조선 선교사로 살았던 21년은 상상에서조차 그려본 적 없는 고난의 세월이었다. 낯설고 열악한 조선에서 피로와 허기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버린 대신 예수님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1866년 성 금요일 갈매못에서 순교
성인을 만나러 갈매못성지로 향했다. 갈매못은 성인이 순교한 곳이다. 바닷가 모래사장, 갈매못성지는 갈 때마다 아름답고 성스럽다. 세상 대신 예수님을 얻은 주교님은 죽음마저 예수님을 닮고자 했다. 예정된 처형일이 연기되려 하자 외쳤다. “안 되오. 내일 죽어야 하오. 내일은 예수님이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이오.” 다블뤼는 주님께서 수난하고 죽으신 날, 1866년 성 금요일에 예수님처럼 순교하였다.
당진 신리성지도 그의 자취가 생생하다. 신리에는 순교를 위해 체포되기 전까지 그가 머물던 초가가 있다. 소박한 초가의 창호지문 너머에 다블뤼 주교가 황석두 루카의 도움을 받아 교리책을 만들고, 조선 순교자들의 귀한 행적을 기록하고 있을 것만 같다.
다블뤼 성인을 갈매못과 신리라는 공간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신비로운 체험이다. 그리고 성인과의 만남이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경험이었다. 1월 17일, 성 안토니오 축일에 그분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가진 안토니오 다블뤼를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옛날 안토니오 성인 역시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상속받은 재산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고 은수자의 삶을 살았다. 신자들이 자신의 세례 성인을 은연중에 본받는 것처럼, 다블뤼가 부유함 대신에 예수님을 택한 것은 자신의 수호성인 안토니오를 닮아서일 것이다.
다블뤼 성인 닮은 후손 들렉 신부 만나
그런데 성인화 작업을 하면서 다블뤼 성인을 닮은 또 다른 안토니오를 만났다. 내포교회사연구소장 김성태 신부에게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다블뤼 주교의 후손 안토니오 들렉(Antoine Delegue) 신부를 알게 된 것이다. 들렉 신부는 성령선교회에 입회하여 아프리카 선교사로 52년간 사목하였다. 그는 순교자 할아버지의 한국을 늘 생각했다며, 평생 사용하던 성작을 할아버지 주교가 가장 사랑했던 한국에 선물했다. 고되었지만 당신처럼 살았노라고 천상의 할아버지께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낡은 성작에 배어있는 자신의 인생을 봉헌한 것이다. 안토니오 들렉에게서 160년 전 안토니오 다블뤼가 보이는 듯했다. 그들은 모두 세상 대신 예수님을 얻고, ‘예수님을 가져서 모든 것을 가진 자’였다.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4. 성 남명혁 다미아노
- 윤영선 작 ‘성 남명혁 다미아노’.
출 생 1802년 서울
순 교 1839년(37세) 서소문 밖 / 참수
신 분 회장
방탕한 생활 접고 극적으로 회심
1월 25일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이다. 율법에 충실했던 유다인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던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부터 그리스도의 사도, 특히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변모했다. 사도가 된 바오로는 생명을 바칠 열정과 각오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바오로 사도 같은 특별한 체험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할 즈음, 극적인 변모를 이룬 신앙 선조를 만나게 되었다. 기해박해(1839년) 순교자 남명혁 다미아노이다.
그는 서울의 양반으로 태어나 방탕한 생활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30세 즈음 우연히 알게 된 천주교에서 세상의 즐거움과 구별되는 참된 가치를 발견하였다. 성인의 시복재판록에는 “회장 소임을 맡아 남을 권화하여 외교인(비신자)이 그 권면을 듣고 성교(聖敎)에 돌아온 이 많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항덕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교리 공부에 몰두하며 천주를 알아갔다. 구원의 진리를 알게 된 다미아노는 병자, 냉담자, 외교인,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 친구가 “저 세상에서 자네 이름을 무어라 부를 것인가”라고 묻자, “천주를 위하여 순교한 성교회의 남 다미아노라고 불러주면 원이 없네. 천국에 가려면 아무래도 미쳐야 한다네”라며 순교 의지를 밝혔다.
“영광의 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왜곡된 방법에서 돌아선 바오로 사도나, 방탕한 삶의 오류로부터 되돌아온 남 다미아노는 모두 극적인 회심의 본보기다. 어쩌면 우리 역시 왜곡된 사랑이나 빗나간 줄도 모르는 삶의 오류에 익숙해진 건 아닐까. 익숙한 나약함으로부터 적극적인 회심이 더욱 간절한 이유다.
내가 만난 성인은 한 손에는 천주의 가르침이 담긴 「주교요지」를, 한 손에는 그 가르침의 실현인 십자가를 든 채 환한 웃음으로 천국을 바라보고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순교자는 마찬가지로 순교를 앞둔 아내 이연희 마리아에게 말했다. “이 세상은 주막집에 지나지 않고 우리의 참된 고향은 천국이오. 천주를 위하여 죽으시오. 그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당신을 만나기를 바라오.” 영광의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는 부부의 다짐에서 초월적 사랑으로 맺어진 성가정을 만난다.
약현성당 인근 서소문 밖에서 순교
그림 배경으로 선택한 서울 중림동약현성당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으로, 국가 사적이다. 성인은 중림동약현성당 인근의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중림동약현성당은 방문할 때마다 그 모습이 한껏 단장한 신랑, 신부의 모습처럼 정갈하고 아름답다. 남편과 함께 순교자현양관에서 미사에 참여하고 나오는데, 중림동약현성당 혼인미사 예약 추첨이 있다고 한다. 딸 둘을 가진 엄마의 마음으로 예비 신랑, 신부들의 환한 앞날을 위해 성인께 전구를 청해본다. “남명혁 다미아노 성인이시여, 예비 신랑과 신부, 그들의 성가정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윤영선 교수의 우리 성인을 만나다] 5. 성 김제준 이냐시오
- 윤영선 작, '성 김제준 이냐시오'
출 생 1796년 충청남도 당진시 솔뫼
순 교 1839년(43세) 서소문 밖 / 참수
신 분 회장
맏아들 김대건 하느님께 봉헌
해마다 2월 2일에 교회는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낸다. 이날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지 40일째 되는 날로 유다 전통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 우리는 기도할 때 쓸 초를 축복하고 봉헌한다. 초는 자신을 태워서 미약하지만 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는 빛이다. 주님 봉헌 축일에 특별히 떠오르는 한국의 성인은 맏아들 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하느님께 봉헌한 김제준 이냐시오이다.
배교했다가 신앙 고백하고 참수형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의 손자로 성실하고 선량하였으며, 신앙심이 두터웠다. 고 우르술라와 혼인하여 아들 김대건을 낳았으며, 온 가족이 당하게 될 무서운 형벌과 환난을 주님의 뜻에 의탁하면서 아들이 신부가 되기를 바라며 마카오로 보냈다.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지내던 기해년 9월 중순 포졸에게 붙잡혔으며, 국법을 어기고 아들을 마카오로 가게 하였다는 이유로 더욱더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처음에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를 하였으나, 곧이어 다시 용기를 내어 굳건한 신앙을 고백하며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체격이 좋고 기운이 장사였다고 전해지는 성인의 모습에서 어부 출신의 체격이 좋은 베드로 사도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인간적인 두려움으로 마음이 약해졌다가 곧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회개하고, 신앙을 굳건히 지켜나가는 모습이 그러하다.
솔뫼에서 아들 기다리며 기도
6년 전 「성지를 담다」 책을 준비하면서 여러 번 방문하고 미사 드렸던 때는 김대건 신부님을 기리는 솔향기 가득한 성지의 외관 모습만을 담았다면, 다시 찾은 솔뫼에서는 한옥 기와집에서 맏아들 안드레아를 낳고 기르고 하느님께 봉헌한 인자하고 겸손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를 만나게 된다. 성인은 솔뫼성지에서 아들 김대건 신부를 기다리며, 부인 우르술라와 함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모님께 묵주 기도를 올리고 있다. 지금은 하느님 나라에서 가족과 함께 계시면서 한국 땅을 보호하고 지켜보고 계시리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 곁에 계시는 성모 마리아여~ 묵주의 기도 드릴 때에 나를 위로하시며 빛을 밝혀주시니~ 모든 걱정 사라지고 희망 솟아오르네~ 항상 도와주옵소서 인자하신 어머니~♪”(가톨릭성가 271번) 나도 성인을 조금이나마 본받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묵주기도 드리며 항상 주님의 뜻 안에 머물면서 나의 삶을 기쁘게 봉헌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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