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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44) 전례 주기 ②
구세주 탄생 기뻐하고 주님께 감사드리는 성탄
성탄(聖誕) 시기
전례력으로 성탄 시기는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부터 다음해 1월 주님 세례 축일까지입니다. 주님 탄생과 함께 기쁨의 축제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확한 탄생일은 기록돼 있지 않아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루카 복음 2장 8절에는 밤중에 태어났다는 기록과 목동들이 예수님을 찾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티나에서는 8월에 양 떼들을 산으로 들로 끌고 가서 방목하고 10월쯤 되면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래서 예수 탄생을 양 떼들이 집으로 돌아온 계절이라고 본다면, 적어도 10~11월경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12월 25일을 주님 탄생일로 정한 것은 이날이 로마인들의 태양신인 미트라(Mithra)의 축제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인들의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진정 태양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정했습니다. 6세기 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칙령으로 12월 25일이 예수 탄생일로 결정됐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성탄의 의의
① 구원의 약속이 실현되기 시작했음과 참 생명의 빛이 도래했음을 알려 줍니다.
②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이 복음이듯 인류의 스승인 구세주가 태어나심은 복음입니다.
③ 예수님께서는 유다인 사회에서 나셨지만, 그분의 구원 은총은 전 인류에게 미칩니다. 그리스도는 과거와 현재·미래 모든 이의 구원자로서 온 인류가 하느님 자녀로 태어나게 하는 의의와 가치가 있습니다.
성탄 전례
① 주님 성탄 대축일 미사
1970년 발표된 「로마 미사 경본」은 성탄 대축일에 모든 사제가 3대 미사를 바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첫째 미사 : 밤중에 봉헌하며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영원히 탄생하심을 경축합니다.
둘째 미사 : 새벽에 봉헌하며 성자께서 영원으로부터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 사이에 육체를 가지고 마리아 몸에서 베들레헴의 구유에 태어나심을 경축합니다.
셋째 미사 : 낮에 바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요, 구원자로 오심을 경축합니다.
② 성탄 나무
성탄 나무가 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어떤 종이든 상관이 없으나 살아있는 나무라야 합니다. 즉 상록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생명을 주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살아있는 나무에 값진 것으로 장식해야 합니다. 금실이나 은실 또는 별 모양 전등·예쁜 방울 등입니다. 생명의 나무에서 열매를 맺는 새 생명은 영원한 하느님의 생명이기에 고귀한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되는 하느님스러운 생명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③ 구유 조배
예루살렘 신자들이 성탄 밤 베들레헴 현지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부러워한 로마 신자들은 5세기부터 마구간 모형을 만들어 그 앞에서 성탄 미사에 참여했습니다. 유럽에 널리 보급된 것은 1223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의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성인이 성탄 때 그레치오 성당에서 베들레헴 외양간을 본떠 구유를 만들어 경배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성탄 전야 미사 때 말씀의 전례와 함께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모시는 장엄한 행렬을 하는 곳도 있습니다. 연약한 아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가난과 순명을 닮도록 노력하기 위함입니다.
성탄 8일 축제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새로 나신 예수님께 흠숭과 사랑을 드리는 기간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
아기 예수님이 동방 박사를 통해 메시아임을 드러낸 사건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공현(公現)이란 ‘나타남, 나타내어 보여줌’이란 뜻입니다.
성탄 시기 제의는 기쁨·환희·영광·결백을 상징하는 흰색입니다.
[빛과 소금] 믿음 · 희망 · 사랑 : 사랑의 촛불 밝히기 (3) 기도 편
사랑의 기도! 사랑의 계명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듯이, 사랑의 기도 또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기도’와 ‘이웃을 향한 사랑의 기도’ 두 가지를 다 아우릅니다.
먼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의 첫걸음은 묵상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으로 직접 마주하는 것이 처음에는 그저 막막하기만 하니, ‘말씀’을 매개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묵상기도입니다. 묵상은 한마디로 말씀을 읽고 음미하면서 하는 기도입니다.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일단 읽고 나서 속으로 무슨 뜻인지 반추하는 것이지요. 이 묵상기도를 하면 성경에 있는 여러 말씀이 점점 ‘내’ 것이 되는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말씀을 가까이 모시면서 더불어 있기만 하면, 그것이 묵상이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기도에서 본격적인 경지는 관상기도입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여기서 ‘멈추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관상기도는 일단 멈춰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관상기도의 한 방법인 성체조배는 성체 앞에 가서 그냥 앉아 있는 것입니다. 찜질방에서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땀이 나듯이, 성체 앞에 앉아만 있으면 사랑으로 채워져 후끈후끈해지면서 ‘사랑의 원적외선’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이 그 기도의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좋은 기도는 많은 말이 필요 없답니다. 그분께 우리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의 거룩한 현존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최상의 기도입니다.”
이처럼 성당이나 성체조배실에 앉아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일상에서 관상하는 기도, ‘임재기도’도 필요합니다. 화살기도도 일종의 임재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 날씨가 참 좋아요.”, “주님, 오늘은 기분이 별로 안 좋네요.” 등등 그때그때 수다 떨듯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지요. 운전하면서나 산책하면서 혹은 찰나의 순간순간,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웃을 향한 사랑의 기도입니다. 사도신경에는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서 성인은 시성(諡聖)된 성인만이 아닌 하느님 백성으로 불림 받은 모두를 말합니다. 우리 모두 기도로 엮인 사람들이기에, 서로 “기도 안에서 만나요.”, “기도로 응원할게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이웃을 위한 기도를 바치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위해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라는 사랑의 계명처럼, 기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위해 먼저 기도하고 나서, ‘내’ 안에 역사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확신이 들 때 비로소 진짜 ‘남’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남을 위해 기도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기도를 기호와 자신의 처지에 맞게 총동원하는 것이지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내 마음의 표현인 기도, 하나씩 맛 들이며 사랑하는 마음을 전해 보면 어떨까요?
[매주 읽는 단편 교리] 기념 환호 - 신앙의 신비여
미사 중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축성된 직후, “신앙의 신비여”라고 불리는 기념 환호가 뒤따릅니다. 이 기념 환호는 성령의 힘으로 빵과 포도주 안에 현존하시게 된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부터 서방 교회에서는 성체와 성혈 축성 다음에 흠숭의 노래나 기도를 바쳤고, 동방 교회에서는 “아멘” 같은 환호를 올렸습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가톨릭교회는 1970년 「로마 미사경본」을 편찬하면서 기존 성혈 축성문에 있던 “신앙의 신비여”를 축성 후의 기념 환호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성찬 제정 축성문을 통해 성체와 성혈이 축성되면, 신자들은 누구나 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현존하시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큰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에서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적극적으로 모색하였기에, 미사의 절정을 이루는 부분에서 공동체 전체가 환호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감사송 다음에 나오는 “거룩하시도다” 보다 더 중요한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형식으로 기념 환호를 바치게 되었는데, 이는 미사 절정에 행하는 가장 적절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은 이 환호를 통해 방금 실현된 축성과 구원의 제사가 의미하는 바를 믿고 고백하며 이 신비를 선포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로마 미사 경본」에 나오는 기념 환호는 세 가지입니다. 이들은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 성찬 제정 축성을 통하여 재현된 주님의 구원 업적을 기념하고 고백하며 선포합니다.
1) 첫째 양식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는 1코린 11,26에 바탕을 둔 경문입니다. 성경 본문에는 “부활”이 없는데, 여기선 이를 첨부하여 기념의 내용을 완전하게 만들었습니다.
2) 둘째 양식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나이다.”도 1코린 11,26에 바탕을 두는데, 여기선 성경 구절을 거의 그대로 인용하였습니다. 반면, 부활에 관한 언급없어 기념 환호로서는 의미가 약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매우 충실한 환호라고 할 수 있고, 주님의 죽음에 집중하기에 주로 사순시기에 바쳐지고는 합니다.
3) 셋째 양식 “십자가와 부활로 저희를 구원하신 주님, 길이 영광 받으소서.”는 중세 시대 이후 기도와 성가에 자주 나오던 경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신앙고백이자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입니다. 이 양식은 파스카의 신비를 잘 드러내기에, 주로 부활 시기에 바쳐지고는 합니다.
“신앙의 신비여”는 공동체가 바치는 매우 중요한 기도 성가입니다. 우리는 미사의 절정에서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 곧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가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 구원과 자유를 얻게 되었음을 노래합니다. 따라서 이때는 모든 이가 함께 큰 소리로 응답해야 합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9) 교회, 세상 창조 때 예표되다, 「교회헌장」 2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의 특징 중 하나는 ‘삼위일체의 교회론’입니다. 「교회헌장」은 ‘교회의 신비’를 다루는 제1장의 2항부터 4항까지 교회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전에 「교회헌장」의 초안은 교회의 설립과 관련하여 하느님이 아담의 죄로 죽음에 떨어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성자 그리스도의 죽음을 택하시고 교회를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이 언급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아담의 죄로 인한 것이며, 성자의 죽음은 교회의 설립을 위한 것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초안에는 교회의 기원과 관련해서 성령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헌장」은 교부들의 증언을 토대로 교회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의 일치에서 비롯된 백성의 모임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2항은 성부에 의한 보편적인 구원 계획 안에서 교회의 예표를 언급합니다. 3항은 성자의 십자가 희생제사에 의한 교회의 기원과 성장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4항은 성령에 의해 교회가 끊임없이 거룩하게 되고 온전한 진리로 인도되어, 교회를 새롭게 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교회헌장」은 삼위일체의 신비와 구원 역사 안에서 교회를 바라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당신 지혜와 선함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성부는 아담의 죄에도 불구하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아 인간을 당신의 신적 생명에 참여시켜 주십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본성)에 따라 창조되었고, 그 완성은 구세주 그리스도에게 주어집니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콜로 1,15).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로마 8,29).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상이요 모든 피조물의 첫째이기 때문에, 피조물인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부께서는 하느님의 모상성을 완성해 줄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거룩한 교회 안에 불러 모으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느님은 개별이 아닌 당신 백성 전체로 인간을 구원하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성부의 구원 계획에 따라 세상 창조 때부터 예표되었습니다. 초기 교부들이 ‘세상이 교회를 위해 창조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이 생길 때부터 예표되었다는(prae-figurata, 미리-그려졌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구약에서 준비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고 성령 강림으로 세상에 드러났으며, 세상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성부의 보편적 구원 계획대로 모든 의인이 보편 교회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 앞에 모일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라는 ‘불러모음’은, 세상에 가시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기 전부터, 이미 창조 때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사회교리에서 희년을 보다] 낯선 그들
2023년 여름, 아는 수녀님의 초대를 받아 독일 파더본(Paderbom)에 위치한 빈센트회 수녀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잘 가꿔진 정원에선 수녀님들의 성실함이 엿보였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있지만 여전히 견고한 가구들에선 수녀님들이 얼마나 검소하게 물건들을 잘 관리하며 살아오셨는지 알 수가 있었습니다. 성당에 놓인 낡은 성경과 묵주에선 영성의 향기가 풍겼고, 손님방 탁자 위에 놓인 예쁜 물컵과 쿠키 몇 조각에선 손님을 향한 세심한 배려도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저의 눈길을 끈 것은 수녀원 곳곳에 앉아 있던 ‘낯선’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그 수녀원을 방문한 저에게 누가 낯설지 않겠냐마는 그분들은 특별히 낯설었습니다. 어딘가 차가웠고 많이 지쳐 보였습니다. 나중에 수녀님께 여쭈었더니 우크라이나에서 온 난민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분들의 낯선 모습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실은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중이었다는 것을요.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속보를 접하였을 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면 어쩌나 걱정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뉴스에 등장하는 빈도도 줄고, 코로나 때와는 달리 제게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전쟁으로 인한 불편함이 없으니 그 심각성을 잊고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피난 중이었고 그렇게 ‘낯선’ 모습으로 저의 주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수녀원에서 보았던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낯선 모습이 다시금 떠오른 것은 얼마 전 보았던 뉴스 속 한 장면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트럼프’와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가 종전(終戰)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었는데 보기에 불편하더군요. 당신은 우리에게 감시해야 한다. 이런 자리에 입고 올 양복도 없는가. 앞뒤 맥락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그리한 교양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마치 힘을 가진 자들이 절박한 한 사람을 윽박지르는 듯하였습니다. 수만의 생명을 책임져야 할 지도자의 모습은 그날따라 유독 더 초라하고 힘들이 보였습니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인간이 내릴 수 있는 가장 멍청한 결정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전쟁은 재앙이고, 결코 국가 간에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길이 아니라고 천명(闡明)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호소를 경청하지 않는 세상은 여전히 전쟁에 몰두합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그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더 이상 ‘낯선’ 이웃으로 살게 두지 않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외쳐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희년은 ‘화해’의 해입니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리의 이웃들을 기억하며 하느님께 평화와 화해의 은총을 청합시다.
[가톨릭 신학]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2025년을 가톨릭교회는 희년으로 선포했습니다. ‘희년’(禧年)이란 무엇인가요? 창세기를 보면 세상 창조 때 하느님께서 6일 동안 일하시고, 7일째 되는 날 쉬셨습니다. 여기에 착안해 6년 동안 밭을 경작하고, 7년째 되는 해를 안식년으로 지냈는데, 이때는 밭의 소출을 자기 소유로 주장하지 않고, 여기서 얻은 곡식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사용합니다. 이때는 빚도 탕감해 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안식년을 7번 지낸 다음 해가 희년입니다. 이때는 땅을 일구지도 않고, 땅이나 물건은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해입니다. 희년은 모든 것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는 시간입니다.
교황님은 희년을 선포하시며 특히 ‘희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희망을 무엇보다 사랑과 믿음에 연결시켜 말합니다. 실제로 희망의 근거는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샘솟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죄인임에도 구원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2-5) 그리스도인은 사랑에서 비롯된 희망이 믿음을 통해 굳건해질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가 참 어렵고 힘든 우리에게 교회는 희망을 가지고 인내하라고 가르칩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로마 15,5)이신 분께 믿음을 두고 인내하며 희망해야 합니다. 인내는 희망의 출발점이자 과정이며 토대입니다.
희년을 위해 거룩한 장소라 지정된 곳을 방문하고, 순례하며 정해진 참회 행위를 바치면 희년 대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교황청 내사원은 대사 받는 12가지 방법을 제시하였고, 이에 근거해 우리 교구도 전대사 받는 방법을 굿뉴스에 공지했습니다. ‘대사’(大赦, indulgentia)란 고해성사 이후 죄를 용서받았으나 아직 미처 다 해소하지 못한 나머지 벌인 ‘잠벌’을 사해 주는 것, 그리고 보속을 완수하지 못한 채 죽은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 살아 있는 신자들이 ‘대속’하도록 허락해 주는 것입니다. 대사는 자기 자신뿐 아니라 죽은 이를 위해서도 대리 기도의 방식으로 얻어줄 수 있지만, 살아 있는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얻어줄 수는 없습니다. 대사는 희년의 선물이지 목적은 아닙니다. 희년의 목적은 창조주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기쁨을 배우는 것입니다. 희년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믿음과 사랑을 키워가는 시간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의 “길, 진리, 생명”(요한 14,6 참조)이신 예수님과 참되고 인격적 만남을 갖는 시간이 희년입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