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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노래를 좋아했던 별난 공산주의자 정율성과 부친
영어를 하나도 모르지만 <타이타닉> 영화 주제곡을 들으면 뭔가 혼이 빠져든다.
그래서 인지 딸애가 7살 때 좋아하는 노래가 소련 국가였다.
유튜브에서 즐겨 찾아 듣기에 왜 좋아하냐고 하니 그냥 웃기만 한다.
곡이 얼마나 좋았으면 소련이 붕괴되자 가사만 바꿔 러시아 국가로 이어졌다.
북한 애국가를 들으면 남한 애국가 이상으로 잘 만들었다고 본다.
10년 전 대북 전단을 위해 중국에 갔을 때 베이징 역에서 이다.
역사 안에 여기저기 삼성 핸드폰 광고도 놀라웠지만
역 탑의 대형 시계 시침이 한 시간 될 때마다 은은히 울리는
<동방홍>이란 모택동 노래가 감미로웠다.
수천만 명을 죽인 모택동이지만 노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전세계에 공산 혁명의 바람을 불게 한 <공산당 선언>이상으로
<인터네쇼날의 노래> 역시 억눌린 자들이 스스로 일어나게 만든다.
이 기운을 따서 중국 국가도 만든 것이다.
<적기가> 역시 그 비장함에 이념을 뛰어넘어 남한 영화에 반영할 정도이다.
14억 중국의 군가와 북한 인민군 군가를 만든 정율성은 남한의 광주사람이다.
그의 음악 기질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그에 반해 기독 교회에서 배양 되어 시작된다.
독립 운동가였던 그는 연안의 모택동 부대에서 현재의 중국 군가를 만든다.
815 해방 후에는 북한에 가서 조선인민군가를 만든다.
조선 인민군 협주단도 그가 창립하였다.
하지만 김일성의 숙청 기운이 싫어 중국으로 다시 갔지만
역시 문화 대혁명에서 간첩으로 몰리게 된다.
한편 그가 연안에서 창작한 노래들은 폐기되는 수모를 겪는다.
작곡가로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그가 유일하게 남긴 육성 노래는 <매기의 추억>이다.
주 특기인 혁명 가요가 아닌 것이다.
<매기의 추억>은 미국 민요이다.
사랑하는 여인과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 결혼하였는데
결혼 한 해에 죽자 그녀를 추억해서 만든 노래였다.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악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공산 이념에 맞지 않게 별난 행보자들도 있다.
또 평등 사회를 추구하는 노래를 잘 만들 만큼 감성적인 자도 있다.
정율성과 같은 청년기부터 공산주의를 신봉한 저의 부친 역시 비슷한 면이 있다.
전라도 익산군 선전 비서로 부친은 절대 학살을 못하게 막아 나섰다.
빈자가 부자를 죽인다고 나서면 “마을 사람 죽이는 것은 너희 가족을 죽이는 것과 같다”며 통제하여 관할 지역에서는 학살이 없었다고 한다.
유엔군이 북진하자 부친에게 보호를 받은 부자들이 보증서겠으니
당신은 북한으로 가지 말라 하였으나 공산이념이 좋아서 가셨다.
부친 역시 노래를 좋아하셨다.
1970년대 중반 북한에서 집 몇 채 살 가치라고 할 정도인
소련 제 전축 <우랄111>을 소지한 유일한 집이었다.
<빨찌산의 노래>,<금강산> 노래를 애창하셨다.
하지만 정율성이 죽기 전에는 <매기의 추억>를 부른 것처럼
부친 역시 <새야 새야 파랑새야>였다.
1946년부터 남로당원으로서 나름의 백전노장이지만
당수 박헌영이 미제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니
남 출신들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었다.
자녀들까지 출세길이 막힌 꼴을 본다.
일생을 평등 사회를 위해 바친 부친은 유언처럼 이런 말을 남기신다.
“정치는 최대의 협잡이야!”
나는 과학 연구와 공부를 하다 흔히 새벽 1시 정도에 퇴근하였다.
집으로 가는 허허벌판 길에서 어른의 통곡 소리가 난다.
놀라서 뛰어가 보니 뜻밖에도 부친이었다.
은퇴를 앞둔 부친은 그 후 2년도 못 사시고 자살 아닌 자살을 하셨다.
부친은 평등을 찾아 월북하셨다.
그 아들인 나는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다.
부자가 대를 이어 살아 본 공산 사회를 집약화하여 결론한다.
“공산주의는 공상주의! 사회주의는 사기주의!”
공산주의 이상과 노래를 좋아했던 정율성과 부친을
이제 와서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민복 (사)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
#뉴스앤넷 #이민복 #정율성 #대북풍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