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크냐?(막9:30-37)
갈등
1. 요즘 우리나라에서 제일 힘든 직업이 된 것이 초중고 교사들입니다. 한때는 학생들이 원하던 1순위가 교사이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저의 가까운 가족 가운데에도 20년 교사를 하고 이제는 더 이상 못하겠다고 퇴직을 준비하는 이가 있어요. 어제 전도 현장에서 만난 한 학부모에 의하면,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 가운데 너무 속을 썩이면 병가를 내거나 전근을 요청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뉴스로만 듣던 이야기들이 사실임을 발견하면서 씁쓸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하면서 그만큼 가치관이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저 상위권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경쟁심을 길러주고 남을 배려할 줄을 모릅니다. 성적 외에 중요한 인격 교육을 소홀히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 삶의 질이 터무니없이 떨어져 있어요. 지금은 경제발전보다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기를 다시 길러야 하는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에 대한 관심은 학교나 학부모나 모두 없고 학교 교육은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의 대화가 나옵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함께 한 이 공동체는 어떠했을까요?
2. 오늘날 우리나라 학교 교육과 비교하여 더 나았을까요? 오늘 본문이 시작은 31-32절,“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예수님의 공생애가 무르익어 갔어요. 사람들은 더욱 주님을 따르고, 주님은 유대의 여러 마을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시는 일을 반복해서 행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장은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하신 모습을 세 제자, 베드로와 야보고와 요한이 보았습니다.
세 제자가 이 신비한 모습을 보고 있을 때 하늘에서,“이는 내 사랑하는 아드리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황홀한 가운데 마을로 내려왔흡니다. 이 마을에는 귀신들린 한 아이가 큰 고통 가운데 있었고 아무도 그를 고통 가운데서 건져주지 못했어요. 세 제자 외에 아홉 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들도 무기력한 가운데 아이가 고통당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오게 하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주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 이 일 후에 예수님은 두 번째 수난 예고를 열두 제자들에게만 말씀해주셨어요. 주님은 유대 종교인들에게 잡히시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두 번째 듣고도 제자들은 32절,“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당시 (구약)성경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사야 53장의 메시야 고난 이야기를 알았을 것인데, 유대 종교인들만 아니라 주님의 열두 제자들조차도 이 말씀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알지도 깨닫지 못하며, 또 왜 주님께 묻기도 두려워했을까요? 제자들의 상황이 궁금합니다.
갈등 심화
4. 예수님은 두 번째 수난예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과의 소통은 계속해서 엇박자가 이어졌습니다. 33-34절,“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주님의 마음은 당시 점점 심각했어요. 그가 고난당하실 날이 다가오고 이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주님과 더불어 함께 그 날을 준비하게 하기 위해서 두 번째 반복해서 수난예고를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동상이몽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가장 오래 머무시며 공생애를 보내신 곳입니다. 그만큼 이곳에서 가장 많이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치유 사역도 행하셨어요. 주님은 제자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셨습니다. 그는 그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대화를 하시기 위해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제자들은 그들이 다투며 이야기한 것을 주님 앞에서 말하기가 부끄러웠습니다. 그들이 양심에 찔렸고, 차마 주님께 어떤 이야기들이 있었는지 말하지 못했습니다.
5. 예수님은 그들의 중심을 아시고 35절,“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오늘 본문에는 구체적으로 제자들이 누가 크냐는 문제를 어떻게 토론했는지 나오지 않아요. 다른 복음서에 보면, 한 번은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주님께 나와서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자기 아들들을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하나는 주님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또 한 번은 요한과 야고보 형제가 예수님께 동일한 내용으로 청탁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어머니와 그들의 요청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셨어요.
예수님은 예, 아니오가 분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세상 이치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동일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잘못된 요청을 했을 때 주님은 그것은 그렇게 구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너희들처럼 주님께 요청을 하지 못해서 안했겠느냐? 다른 아홉 제자들도 주님께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모두가 동일했습니다. 서론에서 우리나라 학교 교육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만, 그들도 서로 높은 지위-성공에 치우쳤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제자들의 한심한 모습을 보면서, 또 한편으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실마리
6.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열두 제자들에게만 세 차례 수난예고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주님은 이 일이 아니라면 굳이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필요가 없었어요. 주님은 그 일이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임을 아시면서도 그 길을 묵묵히 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주님의 길을 가도록 하나씩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생각과 사고체계는 전혀 주님이 가르치심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다 아시면서도, 반복해서 수난예고를 하시며 더불어 제자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의지의 한국인 이야기를 전에 많이 말했습니다. 요즘도 우리 한국인들이 의지가 여전히 강한지는 의문입니다만. 예수님은 정말 의지의 한국인과 같으셨어요. 한 번 계획하신 것은 조금도 변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명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은 홀로 그 길을 가셨지만, 제자들은 주님과 3년을 동고동락해도 이 부분은 도무지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사고체계가 주님의 부활과 승천, 성령이 강림하시기까지 변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 가치관을 갖지 못하고 세상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7. 이런 사고체계는 12 제자들이나 유대 종교인들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는 세상 나라에서 성공을 원했고, 유대 종교인들은 주님이 없이 그들이 주도하는 세상 나라에서의 특권을 계속해서 누리기 원했습니다. 한심하기로는 제자들이나 유대 종교인들이 동일했어요. 주님은 제자들의 이렇게 형편없는 사고체계를 보시면서도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세상에 계신 동안 끝까지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부활과 승천 후 성령이 임하시면 그들이 깨닫고 변화되리라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알지도 깨닫지 못했지만, 이것은 그들이 전혀 바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있었더라도 그 말씀이 가치관의 변화가 없었던 제자들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였어요. 그리고 주님께 수난 예고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감히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주님은 36-37절,“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요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8. 예수님은 누가 크냐? 누가 장차 주님의 나라에서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는 것에만 몰두하던 제자들에게, 아서라. 너희가 할 일은 그것이 아니고 어린아이와 같이 작은 자-약한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들을 돌보는 것이다. 너희가 지난 3년 동안 내가 작은 자들-약한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너희도 나와 같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치유하며 섬겨야 한다. 너희가 이렇게 세상을 섬길 수 있도록 내가 세상에 왔단다. 나는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이 왔는데, 너희도 이제 생각과 가치 체계를 새롭게 하도록 하라고 주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복음 제시
9. 사람들은 누구나 고난당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어요. 그들이 주님이 고난을 당하실 것을 두 번이나 예고하셨지만, 그 말씀만은 듣기 싫어했습니다. 주님께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주님도 고난이 힘든 것을 아셨습니다. 겟세마네 마지막 기도 가운데 주님도,“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기도하셨습니다.(눅22:42) 주님이 원하지 않으셨으면 십자가를 감당하지 않으셔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고난을 끝내 감당하셨습니다.
기대
10. 히브리서 목회자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았습니다. 그는 흩어져 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오늘 우리의 생각과 가치 체계도 대체로 고난을 거부해요. 그래서 누구나 편한 길-쉬운 길을 가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나를 이기는 것입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가르치고,
잠16:32에서도 성을 빼앗는 것보다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도 신앙인의 변화된 삶의 시작을 갈2:20에서,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이렇게 살았던 바울은 초대 교회 최고의 인물로,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제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기도합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의 생각과 가치 체계가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세상 가치관(소유-성공-편리함)에서 하나님 나라 가치관(주고-섬기고-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이 땅에 임하도록 하는)으로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