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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아래 링크를 따라가면, 17세기말의 한성전도(漢城全圖)에서부터, 김정호선생이 1834년경 그린
청구요람(靑邱要覽)의 도성전도(都城全圖), 역시 김정호선생이 1840년대에 그린 수선전도(首善全圖),
역시 김정호선생의 1860년대 대동여지도 도성도(都城圖)를 통해 조선의 수도 한성(漢城) 도성과 궁(宮)의 위치를 볼 수 있다.
고종 2년 을축년(1865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에 나타난
조선의 경성(京城)과 사대문 그리고 궁궐에 대한 내용과 시대적으로 비교하면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아래 동국여지비고에는 경복궁을 고종 2년 을축년에 다시 중건하였다고 적고 있다.
경복궁 중건(景福宮重建)은 조선 말기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에게서 지시를 받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해 1865년(고종 2년)부터 1872년(고종 9년)까지 이루어졌다.
지도로 본 서울
http://zukerman.cafe24.com/03seoulmapA.htm
서울의 성곽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경성(京城)
○ 우리 태조 5년에 돌로 쌓았는데 평양 감사(平壤監司) 조준(趙浚)이 공사를 감독하였다. 세종 4년에 고쳤는데, 주위가 1만 4천 9백 35보로 주척(周尺)으로 재어서 8만 9천 6백 10자요, 높이가 40자 2치이다. 문 8개를 세웠다.
정남쪽 문을 숭례문(崇禮門)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남대문이라 부른다.
정북쪽 문을 숙정문(肅靖門)이라 하는데, 위에 집 지은 것[架屋]이 없으며 닫아둔 채 다니지 않는다.
정동쪽 문을 흥인문(興人門)이라 하는데 겹처마요 밖을 곡성(曲城)으로 둘렀으며 민간에서 동대문이라 부른다.
정서쪽 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하는데, 조일회(曺一會)가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신문(新門)이라 부른다.
동북쪽 문을 혜화문(惠化門)이라 하는데 처음엔 홍화(弘化)라고 이름하였다. 중종 6년(1511)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조이(趙履)가 현판 글씨를 썼다. 민간에서 동소문(東小門)이라 부른다.
서북쪽 문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고, 동남쪽 문을 광희문(光熙門)이라 하는데 민간에서 수구문(水口門)이라 부른다.
서남쪽 문을 소의문(昭義門)이라고 하는데 처음 이름은 소덕(昭德)이다. 장경왕후(章敬王后)께 시호(諡號)를 올린 다음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민간에서 서소문(西小門)이라 부른다.
대개 숭례문ㆍ흥인문ㆍ돈의문ㆍ혜화문이 정문이고 나머지 네 문은 사잇문이다.
예전에는 남소문(南小門)이 있어서 광희문 남쪽, 목멱산(木覓山-남산의 옛이름) 봉대(烽臺) 동쪽에 있었는데, 김안로(金安老)가 제멋대로 닫았다고 하니, 근거할 바가 없다. 숙종 5년(1679)에 다시 설치하자고 의논하다가 곧바로 중단되었다.
또 수문(水門) 2개가 있는데, 흥인문 남쪽에 있는 것이 오간수문(五間水門)이고, 또 그 남쪽 곧 광희문 북쪽에 있는 것이 이간수문이다.
○ 성의 동서남북을 그 지세의 험하고 평탄함을 헤아려 삼군문(三軍門)에 나누어 맡겨서 훼손되는 대로 수축하게 하였는데, 숙정문 동쪽 가 무사석(舞砂石)에서 돈의문 북쪽 가에 이르기까지 4천 8백 50보는 훈련도감에, 돈의문 북쪽 가 무사석에서 광희문 남쪽 가 남촌(南村) 집 뒤에 이르기까지 5천 42보 반은 금위영에, 광희문 남쪽 가 남촌 집 뒤에서 숙정문 동쪽 가에 이르기까지 5천 42보 반은 어영청에 맡겨서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보살펴 지키게 하고,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은 사산(四山)의 감역(監役) 지금의 참군(參軍) 이 그 산지기를 시켜서 나누어 맡아 살펴보게 하였다.
○ 오래도록 비가 오면 숭례문ㆍ흥인문ㆍ돈의문ㆍ숙정문 네 문에 나가서 영제(禜祭 개기를 비는 제사)를 거행하였다. 영제는 당하(堂下) 3품관이 연 3일간 설행하는데, 그래도 오래도록 개지 않으면 3차에 한하여 또 설행한다.
○ 성문 안에는 월도(月刀)를 꽂는데 영종조(英宗朝)에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시작한 것이다.
○ 영종 무신년(1728)에 이인좌의 여러 역적들을 쳐서 평정하고, 왕이 숭례문에 나가 헌괵례(獻馘禮 적장의 머리를 드리는 예)를 받았다. 계해년(1743)에는 왕이 북교(北郊)에서 비를 빌고 돌아오다가 창의문루에 임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들의 성명을 새겨서 걸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후의 임금으로 하여금 여기를 지나면서 성조(聖祖)의 힘들고 어려웠던 일을 생각하게 하라.” 하였다.
○ 영종 47년(1771)에 성을 나누어 세 군영에 속하게 하였다. 훈국도감의 관내[宇內]는 돈의문에서 동쪽으로 숙정문까지 1천 5백 14타(垜)로 모두 4천 8백 50보이다. 성랑(城廊)이 24개 소(所)이며, 무릇 성랑 근처에는 모두 돌을 높이 쌓았는데, 인왕산(仁王山)은 몹시 험하여 5개 처(處) 80보를 쌓지 않았다. 금위영 관내는 돈의문 북변 무사석에서 광희문 남변까지 1천 5백 42타로 모두 4천 9백 35보인데, 성랑이 24개 소이다. 어영청 관내는 숙정문에서 동쪽으로 광희문 남쪽 표석(標石)까지 1천 5백 98타로 모두 3천 7백 95보이며, 치첩(雉堞)이 6개 처, 성랑이 27개 소이다.
○ 매해 봄ㆍ가을에 병조 판서와 낭청이 공조ㆍ한성부의 당상과 낭청과 함께 두루 다니면서 성첩을 조사하여 무너진 곳은 고쳐 쌓으며, 번갈아 맡은 영문에서 장교를 정하여 군사 20명을 거느리고 파수하기를 궁성(宮城)같이 한다.
○ 도성 7개 문의 자물쇠는 문마다 각각 2개씩인데, 상하면 바꿔서 쓴다.
○ 설성(雪城) 《택리지(擇里誌)》에 이르기를, “한양에 외성(外城)을 쌓으려고 하나 아직 주위의 원근(遠近)을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하룻밤에 눈이 와서 밖은 쌓이고 안은 녹았다. 우리 태조가 크게 이상히 여겨, 명하여 눈을 따라 성 터를 정하였으므로 설성이라고 이름하였다.” 하였다.
○ 경복궁성(景福宮城)-- 경성(京城) 안에 있는데, 주위가 1천 8백 13보, 높이 21척 1촌이다.
문 넷을 세웠는데, 남쪽 문은 광화문(光化門) (옛날 이름은 정문이다) 이고, 북쪽 문은 신무문(神武門)이요, 동쪽 문은 건춘문(建春門), 서쪽 문은 영추문(迎秋門)이라 한다.
정도전(鄭道傳)이 정문 이름을 짓고, 그 이름한 뜻을 아울러 써서 올렸다. 또 변계량(卞季良)의 광화문 종명문(鍾銘文)과 병서(竝序)가 있다.
임진년 왜란 후에 궁성(宮城)을 그대로 둔 채 수리하지 않았고 단지 남쪽과 북쪽 두 문만을 세우고서, 남문의 현판에 옛 광화문이라고 썼는데, 조윤량(曺允亮)이 썼다.
금상(고종) 2년 을축년에 고쳐 지으니, 네 문이 모두 무지개같이 반원형이며, 광화문만은 겹처마이고 문루 위에 종을 달았다.
○ 창덕궁(昌德宮)ㆍ창경궁성(昌慶宮城)-- 경성 동북쪽에 있는데, 두 궁과 종묘(宗廟)를 둘러쌌으며 주위가 □천 □백 □□보요, 높이 □□척 □촌이다.
창덕궁의 남문은 돈화문(敦化門)이라 하며 겹처마인데 곧 정문이다. 문루에 큰 북을 달아, 매일 정오 및 인정(人定) 때에는 종이 울리고, 파루(破漏) 때에는 북을 친다. 동쪽은 건양문(建陽門)이라고 하는데, 그 동쪽이 창경궁이다. 서쪽은 경추문(景秋門)이라 하는데,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출동할 때에 비로소 열기 때문에 항상 닫아 둔다. 돈화문의 동쪽은 단봉문(丹鳳門)이요, 서쪽은 금호문(金虎門)이라 하는데, 성임(成任)이 현판 글씨를 썼다. 조정 신하들은 모두 여기를 거쳐서 출입하는데 대관(臺官)은 반드시 정문으로 출입한다. 경추문의 북쪽은 요금문(曜金門)이라 하는데, 신자건(愼自建)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또 그 북쪽은 공북문(拱北門)이라 하는데, 바로 대보단(大報壇)이 남문이다.
창경궁의 동쪽 문은 홍화문(弘化門)이라 하며 겹처마인데 바로 정문으로, 성임이 현판 글씨를 썼다. 북쪽의 곁문을 청양문(靑陽門)이라 하는데, 그 안이 춘당대(春塘臺)로 후원(後苑)이다. 홍화문의 남쪽을 선인문(宣仁門)이라 하는데, 옛날 이름은 서린문(瑞獜門)이며 곧 동궁(東宮)의 정문으로 조정 신하들이 모두 여기로 출입하고, 대관은 반드시 정문을 경유한다. 북쪽을 통화문(通化門)이라 하는데, 서쪽이 바로 창덕궁의 건양문(建陽門)이다. 통화문의 동북쪽을 월근문(月覲門)이라 하는데, 곧 청양문의 내동문(內東門)이다. 정종(正宗) 3년에 세웠는데 함춘원(含春苑)의 유근문(逌覲門)과 마주 서 있다. 매달 초하루에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할 때에 반드시 이 문을 경유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또 그 북쪽을 집춘문(集春門)이라 하는데, 곧 춘당대 후원의 동문으로서 태학(太學) 서쪽 반교(泮橋)와 제일 가깝다. 역대 임금들이 태학으로 거둥할 때에 매양 보련(步輦)을 타고 이 문을 경유하여 나갔다.
성 밖을 빙 둘러 군포(軍鋪 순라군이 머물러 있는 곳)를 배치하니 둔처(屯處)가 20개 소로, 훈국(訓局) 관내에 6개 소, 금위영 관내에 8개 소, 어영청 관내에 6개 소이다.
○ 경희궁성(慶熙宮城)-- 경성 서쪽에 있는데, 주위가 □천 □백 □□보요, 높이가 □□척 □촌이며, 문 다섯 개를 세웠다. 동쪽 문을 흥화문(興化門)이라 하는데 곧 정문이요, 왼쪽을 흥원문(興元門)이라 하고, 오른쪽을 개양문(開陽門)이라 하는데, 조정 신하들이 모두 여기를 경유하여 출입하며, 대관은 반드시 정문을 경유한다. 서쪽 문을 숭의문(崇義門)이라 하는데, 장수를 명하여 군사를 출동할 때에만 비로소 열기 때문에 항상 닫아 둔다. 북쪽 문을 무덕문(武德門)이라 한다.
○ 각각 빈 궁궐에는 위장(衛將)을 두어 맡아 수직하게 하다가, 금상 2년 을축년(1865)에 헐어서, 그 재목을 옮겨다 경복궁을 지었다.
서울의 궁궐-동국여지비고
경복궁(景福宮)
백악산 남쪽에 있으며 북부 관광방(北部觀光坊)이다. 태조 3년(1394)에 짓고 정도전(鄭道傳)에게 명하여 이름을 지었으며 기문이 있는데, 대개 《시경(詩經)》 주아(周雅)의 개이경복(介爾景福)의 뜻을 취한 것이다. ○ 명종 8년(1553)에 사정전(思政殿) 이남이 모두 불타 이듬해에 중수하고, 이황(李滉)이 기문을 지었다. ○ 선조 25년(1592) 왜란 때 불타고 그대로 폐지되었다. ○ 위장을 두어 맡아 수직하게 하였다가, 금상 2년 을축(고종 2년 1865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근정전(勤政殿) -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이다. 남쪽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고, 또 그 남쪽을 홍례문(弘禮門)이라 하며, 동쪽을 일화문(日華門), 서쪽을 월화문(月華門)이라 한다. 홍례문 안에 어구(御溝)가 있는데, 다리를 금천(錦川)이라 하며, 영제(永濟)라고도 한다. 동서쪽에는 수각(水閣)이 있다.
사정전(思政殿) - 근정전 북쪽에 있는데, 아침마다 공사를 보는 곳이다. ○ 세종이 문신 40여 명을 집현 전(集賢殿)에 모아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를 편찬하고 친히 교정을 보고서《사정전훈의자치통감강목》이라 이름하였다. ○ 명종 8년에 불이 나서 전의 이남이 연달아 타 역대 법전이 재가 되고 말았다.
강녕전(康寧殿) - 사정전 북쪽에 있는데, 곧 연침(燕寢 임금이 한가로이 거처하는 전각)이다.
연생전(延生殿) - 동쪽의 작은 침실이다.
경성전(慶成殿) - 서쪽의 작은 침실이다. ○ 이상 다섯 전에는 모두 정도전(鄭道傳)의 글이 있다.
교태전(交泰殿) - 강녕전 북쪽에 있다.
만춘전(萬春殿) - 전 동쪽에 일성 정시의(日星定時儀)를 두었다.
함원전(含元殿) - 강녕전 서북쪽에 있다.
천추전(千秋殿) - 문종이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전 서쪽에 소간의(小簡儀)를 두었다.○ 흠경각(欽敬閣) 이 있다.
은정전(恩政殿) - 세조 11년(1465)에 등준시(登俊試 별과(別科)의 한 이름)를 설행하여 김수온(金守溫) 등을 뽑았는데,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하니, 내전에 불러들여서 보고 이르기를 “옛날에는 좌주(座主)와 문생(門生)의 칭호가 있었다. 이 과거의 참여가 은문(恩門)이 될 것이니, 이 전을 은정(恩政)이라 이름해야겠다.” 하였다. 며칠이 지나서 두 전하께서 이 전에 거둥하자 여러 사람들이 잔을 드리기를, 한결같이 문생이 좌주에게 하는 예와 같이 하니, 은총과 영광이 함께 갖추었다.○ 이상의 세 전은 소재가 자세하지 않다.
선원전(璿源殿) - 문소전(文昭殿) 동북쪽에 있으며, 선왕과 왕후의 화상을 봉안한 곳이다.
양심당(養心堂) - 강녕전 서북쪽에 있다. ○ 명종이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비현각(丕顯閣) - 사정전 동편에 있다.
인지당(麟趾堂)ㆍ자미당(紫薇堂) - 예종이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청연루(淸讌樓) 모두 교태전(交泰殿) 동쪽에 있으며, 인종이 아래 소침실에서 승하하였다.
계조당(繼照堂) - 건춘문 안에 있다. 세종 27년(1445)에 세자의 조당(朝堂)을 지었다.
자선당(資善堂) - 융문루(隆文樓) 남쪽에 있는데, 동궁이 서연(書筵)하던 곳이다. 단종이 이 전에서 태어났고 현덕왕후(顯德王后)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융문루(隆文樓) - 근정전 동각(東閣)의 누대이다. 무릇 책을 박아 내면 따로 융문루ㆍ융무루(隆武樓) 및 의정부ㆍ홍문관ㆍ성균관ㆍ춘추관에 각각 한 벌씩 간직한다.
융무루 - 근정전 서각(西閣)의 누대이다. 무릇 책을 박아 내면 따로 두 누각에 간직한다. 모두 정도전(鄭道傳)의 글이 있다.
경회루(慶會樓) - 사정전 서쪽에 있는데, 태종 임진년(1412)에 지었다. 누대를 둘러 못을 만들었는데, 못이 깊고 넓으며 연을 심었으며, 가운데 두 섬이 있다. 하륜(河崙)의 기문이 있다. ○ 세종이 일찍이 누 동쪽에 흩어진 재목으로 별실을 지었는데, 주춧돌과 섬돌을 쓰지 않았으며, 띠풀로 지붕을 덮어서 되도록 검소하게 하였다. 항상 이 집에 거둥하였다. ○ 못가에 도마뱀[蜥蝪]과 동자의 모습을 만들어 기우제를 지내기를 10차례를 하였는데, 제관은 무관 종2품으로 하였다. 도마뱀을 만드는 행사는 지금은 폐지되었다. ○ 성종 정유년(1477)에 유구국(琉球國) 사신이 서울에 들어와서 역관에게 말하기를, “이번 길에 세 가지의 장관(壯觀)이 있으니, 경회루 돌기둥에 나는 용을 새겼는데, 그 그림자가 푸른 물결과 붉은 연꽃 사이에 거꾸로 비치니 첫 번째 장관이요, 정승 정창손(鄭昌孫)의 풍채와 옥 같은 얼굴이 조정 반열에서 빛나니 두 번째 장관이요, 예빈시 정(禮賓寺正)인 관반(館伴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사람) 이숙성(李淑珹)이 술자리를 잘 마련하여 장쾌하게 큰 그릇의 술을 마시게 하니 세 번째 장관이다.” 하였다.
○ 연산군 때에, 채붕(彩棚 채색으로 홍예문처럼 만든 것)을 못 위에 매어 놓았는데, 첫째가 만세(萬歲)요, 둘째가 영춘(迎春)이요, 셋째가 진방(鎭邦)이다. 세 채붕이 산같이 높이 솟아서 매우 장려하였다.
흠경각(欽敬閣) - 강녕전 서쪽에 있다. 세종 20년(1438)에 창건하고 천문 의기(儀器)를 두었는데, 후에 불타 명종 9년(1554)에 중건하였다. 김돈(金墩)의 기문이 있다. ○ 혼의(渾儀 천체 관측기)가 있는데 원 나라 선비 오징(吳澄)의 《서찬언(書纂言)》에 실린 내용에 의하여 나무에 칠하여 만들었다.○ 혼상(渾象)은 옻칠한 베로 몸체를 만들었는데 둥글기가 탄환 같으며, 둘레가 10척 8촌 6분이다. 가로 세로에 하늘 둘레의 도(度)ㆍ분(分)을 그리되, 적도(赤道)가 중앙에 있고 황도(黃道)가 적도 안팎을 출입하는데 각각 24도 약(弱)이며, 한편에는 중외 궁성(中外宮星)을 배열하였다. 하루에 한 바퀴를 돌고, 1도를 지나서 해가 황도에 매이게 되는데, 매일 한 도를 뒤로 가게 하여 하늘의 운행과 합치한다. 물을 막아 수세를 세게 하여 돌리는 기계 바퀴는 안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다.
○ 일구(日晷)의 제도는 네 가지가 있으니, 현주(懸珠)ㆍ천평(天平)ㆍ정남(定南)ㆍ앙부(仰釜)이다. 현주는 네모난 받침돌[方趺]의 길이가 6촌 3분이며 기둥을 받침돌 북쪽에 세우고 못을 받침돌 남쪽에 팠으며, 십자(十字)를 받침돌 북쪽에 긋고 추(錘)를 기둥 머리에 매달아 십자와 서로 맞서게 하여 수준(水準)이 없어도 자연히 평평하고 바르게 된다. 1백 각(刻)을 작은 바퀴에 그렸는데, 바퀴의 직경이 3촌 2분이며 자루가 있어 기둥에 비스듬히 걸치고, 바퀴 한 가운데에 구멍이 있다. 한 올의 가는 실을 꿰어 위로 기둥 끝에 매고 아래로 받침돌 남쪽에 매어서 실의 그림자가 가는 데 따라 곧 시각을 알게 한다. 천평의 제도는 현주와 대략 같은데, 오직 못을 파는 것, 남북쪽에 기둥을 세우는 것, 받침돌 가운데 노끈을 꿰는 것, 기둥 머리가 들려서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다르다.
정남은 받침돌의 길이가 1척 2촌 5분이요, 양쪽 머리의 넓이가 4촌, 길이가 2촌, 허리의 넓이가 1촌, 길이가 8촌 5분이다. 가운데 둥근 못이 있고 직경이 2촌 6분인데, 도랑이 있어 양쪽 머리에 통하며 기둥 곁을 돈다. 북쪽 기둥의 길이가 1척 1촌이요, 남쪽 기둥의 길이가 5촌 9분이다. 북쪽 기둥이 1촌 1분이요, 아래 남쪽 기둥이 3촌 □분인데, 아래에 각각 굴대[軸]가 있어 사유(四游)의 고리(環)를 진정하며, 동ㆍ서로 돌아 운전하여 각(刻)이 반 주천도(周天度)가 되면 도수는 4분이 된다. 북쪽 16도에서 1백 67도에 이르는 사이에 중간이 비어서 마치 쌍 고리 모양 같고 나머지는 온 고리가 된다. 안에 한 획을 중심에 새기고 밑에는 모난 구멍이 있어 가로로 곧은 칸막이를 설치하는데, 칸막이 가운데가 6촌 7분이다.
비워서 규형(窺衡)을 유지하며 저울대 위에 두 고리를 꿰어서 아래로 온 고리[全環]에 임하여 남쪽과 북쪽을 높고 낮게 하며 평평하게 지평(地坪)을 만들었는데, 고리가 남쪽 기둥 머리와 가지런하여 하지 때 해가 출입하는 시각에 맞춘다. 가로로 반 고리를 지평 아래 설치하고 안에는 1백 각(刻)을 나누어서 모난 구멍에 당하게 하며, 받침돌 북쪽에는 십자(十字)를 그리고 주춧돌 북쪽 굴대 끝에 달아 십자와 서로 맞먹게 하니, 역시 규형을 평평하게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매일 태양이 극도(極度) 분에서 떠날 때마다 해의 그림자를 정원(正圓)에 비쳐서 들게 하고, 곧 모난 구멍을 통하여 반 고리[半環]의 각을 굽어 보면 정남침(定南針)을 사용하지 않아도 남쪽을 정하여 시간을 알 수 있다. 앙부(仰釜)는 《원사(元史)》에 실린 곽수경(郭守敬)의 법으로 동(銅)을 주조하여 그릇을 만든 것인데, 형상이 가마솥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가에 두고 하나는 종묘 남쪽 거리에 두었다.
보루각(報漏閣) - 경회루 남쪽에 있는데, 세종 16년(1434)에 창설하였다. 예전의 누기(漏器)가 정밀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쳐 만들어서 두었다. 김돈(金墩)의 기문과 김빈(金鑌)의 명문과 서문이 있으며, 김돈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의 명문과 서문이 있다.
간의대(簡儀臺) - 궁성 서북쪽 모퉁이에 있는데, 세종 16년에 창설하였다. 돌을 쌓아 대를 만들었는데, 높이가 31척, 길이 47척, 넓이 32척이며, 돌 난간으로 두르고 관천의기(觀天儀器)를 만들어 두었다.
○ 대간의와 소간의가 있다. 대간의(大簡儀)는 《원사(元史)》에 실린 곽수경의 법에 의하여 정방형의 받침을 남쪽에 설치하고 대 서쪽에는 구리 표본을 꽂으니, 높이가 8척의 문지방에 5배가 된다. 푸른 돌을 깎아 규(圭)를 만들고 규의 앞면에는 장(丈)ㆍ척ㆍ촌ㆍ분을 새겼는데, 그림자 부호를 써서 정오의 그림자를 취하여 음양 두 기운이 가득 차고 줄어드는 것을 추측한다. 소간의(小簡儀)는 밑받침을 정밀한 동(銅)으로 만들고 도랑을 둘렀으며 자오선(子午線)을 표준으로 하여 지평(地平)을 정하고, 적도 주위에서 주천(周天) 3백 65도 4분도의 1을 나누며, 동ㆍ서로 운전하여 칠정(七政)과 중외 관직 8수(宿)를 측정한다. 도수는 1백 각(刻)을 나누는데 고리가 적도에 있으며, 고리 안에는 12시와 1백 각으로 나누어 그어서 해 그림자를 알게 한다.
밤에 중성(中星)을 정함으로써 사유(四游)의 고리로 규형을 유지하면서 동ㆍ서로 운전하고 남북으로 낮아졌다 높아졌다 하면서 관측하기를 기다린다. 여기서 기둥을 세워서 관통하되, 고리를 비스듬히 기대면 사유는 북극을 기준하고 적도는 천복(天腹)을 기준하며 고리를 곧게 세우면 사유가 입운(立運)이 되고 백 각이 음위(陰緯)가 되는데, 대 위에 설치한다. ○ 김돈(金墩)의 기문과 정초(鄭招)의 소간의 명문(銘文) 및 서문이 있다.
동궁(東宮) - 일화문(日華門) 밖에 있다.
친잠단(親蠶壇) - 영종(英宗) 43년 왕비가 친히 누에를 쳐 채상례(採桑禮)를 행하였다. ○ 어필로 비를 세우고 각을 건립하였다.
창덕궁(昌德宮)
응봉(鷹峯 매봉) 아래 있으며 북부 광화방(廣化坊)이다. 개국 초기에 지었다. 성종 6년(1475)에 서거정(徐居正)을 명하여 궁의 여러 문을 이름지었다. 선조 25년 왜란 때 불타고 광해군 기유년(1609)에 중건하였다. ○ 무릇 궐내의 연로(輦路) 수리와 청소및 궁성 안에 탈이 있는지 없는지를 각기 그 자내(字內)의 위장(衛將)과 부장(部將)이 순찰 검사하며, 병조의 입직 낭청(入直郞廳)은 중일(中日)마다 검사하여 신칙하고 수리 청소시키는데, 창경궁과 경희궁 두 궁궐도 같다. ○ 만일 경희궁에 이어(移御)하는 때를 만나면, 창경궁과 함께 위장을 두어 수직을 맡게 한다.
인정전(仁政殿) - 궁중[大內] 서쪽에 있는데, 조정 하례를 받는 정전이다. 순조 4년(1804)에 화재로 타서 중건하였다. 서영보(徐榮輔)가 현판 글씨를 썼다. 겹처마에 넓이가 5칸, 세로가 4칸이며, 앞 계단이 3층이고, 동쪽과 서쪽 뜰에는 문반과 무반의 품계석(品階石)을 벌여 세웠다. 남쪽을 인정문(仁政門)이라 하는데 이해룡(李海龍)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또 그 서남쪽을 진선문(進善門)이라 하는데 문 곁에 신문고(申聞鼓)를 달았다. 어구(御溝)가 한 곳 있는데, 다리를 금천교(錦川橋)라 한다. 동쪽을 숙장문(肅章門)이라 하는데 두 문은 모두 정난종(鄭蘭宗)이 현판을 썼다. 또 그 동쪽이 바로 건양문(建陽門)이고, 또 그 동쪽이 동룡문(銅龍門)ㆍ선화문(宣化門)ㆍ숭지문(崇智門)인데, 한려(漢旅 중국인으로서 우리나라에 와 사는 사람)가 입직(入直)한다. 영숙문(永肅門)의 처음 이름은 담연문(淡煙門)이었는데, 중종 무자년(1528)에 정원에서 아뢰기를, “대내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 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국별장(局別將)이 입직한다. 전(殿) 뜰의 동편 문을 광범문(光範門)이라 하는데 승정원과 서로 통하며, 서편 문을 숭범문(崇範門)이라 하는데 내의원과 서로 통한다.
선정전(宣政殿) - 인정전 동쪽, 연영문(延英門) 안에 있는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푸른 기와로 덮었으며, 남쪽에 선정문(宣政門)이 있다.
대조전(大造殿) - 희정당(熙政堂) 북쪽에 있는데 곤전(坤殿)의 궁전이다. 들보[樑]와 기와 마루를 평평하게 덮었다. 성종ㆍ인조ㆍ효종ㆍ효현왕후(孝顯王后)가 승하하였으며, 익종(翼宗)이 이 전에서 태어났다. 순조 33년(1833)에 불이 나 중건하였다.
구현전(求賢殿) - 바로 내전(內殿)이다.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승하한 곳이다.
경복전(景福殿) - 인정전 서쪽 태추문(泰秋門) 안에 있는데, 바로 만수전(萬壽殿)의 옛터요, 옛날 경복당(景福堂)이다. 경종(景宗)이 일찍이 인원대비(仁元大妃)를 여기에 모시고 편액을 고쳐서 전으로 하였다.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으며, 효의대비(孝懿大妃)도 일찍이 오래 거처하였다.
만수전(萬壽殿) - 효종 6년(1655)에 흠경각(欽敬閣) 옛터에 짓고 자의대비(慈懿大妃)를 모셨으며, 또 춘휘전(春暉殿)을 지었는데 모두 금호문(金虎門)과 요금문(曜金門) 두 문 안에 있다. 숙종 13년(1687)에 화재를 당한 뒤로 폐지되었다.
집상전(集祥殿) - 현종 8년(1667)에 만수전 동쪽에 지어서 부모 봉양하는 정성을 갖추었다.
승휘전(承暉殿) - 숙종 24년(1698)에 화재를 입어 선왕조의 유물과 두 전하의 입고 쓰던 물건이 모두 불타버렸다.
선원전(璿源殿) - 인정전 서쪽에 있다. 숙종의 어용(御容) 2폭, 영종의 어용 4폭, 정종(正宗)의 어용 4폭, 순조의 어용 1폭, 익종의 어용 2폭, 헌종의 어용 1폭을 봉안하였다. ○ 초하루와 보름마다 왕이 친히 분향 전배(展拜)하며 탄신일(誕辰日)에는 다례(茶禮)를 지낸다. ○ 문 두 개가 있는데, 동쪽을 만안문(萬安門)이라 하고, 서쪽을 만녕문(萬寧門)이라고 한다. ○ 중관(中官)을 두어 수직한다.
희정당(熙政堂) - 협양문(協陽門) 안 선정전(宣政殿) 동쪽에 있는데, 여러 신하들을 한가로이 접견하는 곳이다. ○ 순조 33년(1833)에 화재를 당하여 중건하였다.
보경당(寶慶堂) - 인정전 서쪽에 있는데, 후에 폐지되었다.
징광루(澄光樓) - 대조전 곁에 있었는데, 순조 33년(1833)에 불이 나 역대 왕의 복식과 기구가 모두 불타버렸다.
소덕당(昭德堂) -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승하한 곳이다.
제정각(齊政閣) - 희정전 남쪽에 있다. ○ 숙종 13년(1687)에 지었다. ○ 통제문(通濟門) 안에 풍기죽(風旗竹)을 세웠다.
경봉각(敬奉閣) - 황단사유(皇壇四壝)의 바깥쪽에 있는데, 계단에서 국조 이래로 반포하는 조칙(詔勅)을 받들었다. 전에는 창경궁 동룡문(銅龍門) 안에 있었는데, 영종 경인년(1770)에 짓고 어필 현판을 달았다. 정종 23년(1799)에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광연루(廣延樓) - 태종 8년(1408)에 태조가 이 누 아래 별전(別殿)에서 승하하였다.
영모전(永慕殿) - 경복전 서쪽에 있다. 인원왕후(仁元王后)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장춘헌(長春軒) - □□□에 있다. 단의왕후(端懿王后)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관리각(觀理閣) - 융경헌(隆慶軒) 서남에 있다.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양심각(養心閣) - 희정당(熙政堂) 동북쪽에 있으니, 곧 제전(齊殿)이다. 현종이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의두각(倚斗閣) - 영화당(暎和堂) 북쪽에 있다. 순조 □□년 익종(翼宗)이 세자궁[春邸]에 있을 때에 지은 “매양 북두성을 의지하여 서울[京華]을 바란다.”는 뜻을 딴 것이다.
향실(香室) - 인정전 서쪽에 있는데, 제향(祭享)과 축문(祝文)을 쓰고 향을 봉(封)하는 등의 일을 한다.
○ 충의위(忠義衛)와 향관(香官)과 교서관(校書館) 참외(參外)가 날을 바꾸어 가며 직숙(直宿)한다.
비궁당(匪躬堂) - 곧 빈청(賓廳)으로 연영문(延英門) 밖에 있는데, 공경(公卿)들이 모여서 조정 일을 의논하는 곳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이 있다.
대청(臺廳) - 승정원 동쪽에 있는데,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신(臺臣)들이 논계(論啓)할 일이 있을 때에 와서 거처하는 곳이다.
정청(政廳) - 연영문 곁에 있는데, 곧 동전(東銓 이조)의 정사를 여는 곳이다. ○ 빈청 곁에 우물이 있는데, 서전(西銓 병조) 정청이 예전에는 우물 서쪽에 있었으나 후에 헐려, 서전에서 정사를 열 때마다 반드시 빈청의 서헌(西軒)을 빌려 행한다.
규장각(奎章閣) - 금원(禁苑) 북쪽에 있다. ○ 숙종 20년(1694)에 종부시(宗簿寺) 구내 에 세우고 어필 현판을 달았는데, 정종 초기에 비로소 대궐 안으로 옮겨 지었다. ○ 팔경(八景)이 있는데, 봉모 운한(奉謨雲漢)ㆍ서향 하월(書香荷月)ㆍ규장 시사(奎章試士)ㆍ불운 관덕(拂雲觀德)ㆍ개유 매설(皆有梅雪)ㆍ농훈 풍국(弄薰楓菊)ㆍ희우 소광(喜雨韶光)ㆍ관풍 추사(觀豐秋事)이다. 각지(閣志)가 있다.
주합루(宙合樓) - 곧 규장각의 정실(正室)로 정종이 어필로 현판을 써서 달았다. 위는 다락이요, 아래는 툇마루인데, 정종의 어진(御眞)ㆍ어제(御製)ㆍ어필(御筆)ㆍ보책(寶冊)ㆍ인장(印章)을 봉안하였다.
서향각(書香閣) - 주합루 서쪽에 있는데, 조윤형(曺允亨)이 현판을 썼다. 어진 및 어제ㆍ어필을 옮겨다 볕을 쪼이는 곳으로서, 이안각(移安閣)이라고도 한다. 또 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해마다 사계절 첫 번째 달 보름에 규장각 신하들이 계품(啓稟)하여 전봉 포쇄(展奉曝灑)를 행한 후에 봉모당(奉謨堂)을 봉심(奉審)한다. ○ 각의 남쪽 누대는 향명루(嚮明樓)라 현판을 달았는데, 강세황(姜世晃)이 편액을 썼다.
봉모당(奉謨堂) - 주합루 서남쪽에 있으니, 곧 예전 열무정(閱武亭)이다. 옛 제도 그대로 고치지 않고 열성조의 어제ㆍ어필ㆍ어화(御畫)ㆍ고명(顧命)ㆍ유고(遺誥)ㆍ밀교(密敎) 및 선보(璿譜)ㆍ세보(世譜)ㆍ보록(寶錄)ㆍ장지(狀誌)ㆍ인보(印譜)를 봉안하였다. 운한문(雲漢門)이 있다.
열고관(閱古觀) - 주합루 남쪽에 있다. 상하 2층으로 되었으며, 또 북쪽으로 꺾어지면 개유와(皆有窩)가 되고, 또 서북쪽은 서고(西庫)이다. ○ 열고관ㆍ개유와에는 모두 중국본 도서를 보관하였는데, 정종조 정유년(1777)에 도서집성(圖書集成) 5천 권 등 무릇 32전(典)을 사 와서 이곳 개유와에 간직하였으며, 우리나라 본 도서는 서고에 간직하였다.
희우정(喜雨亭) - 주합루 서북쪽에 있다. 현종 16년 여름에 오래도록 가무니 대신을 보내어 비를 빌었는데, 이날 비가 오니 왕이 매우 기뻐하여 드디어 금원(禁苑) 안에 있는 취향전(醉香亭)을 이름을 고쳐 희우(喜雨)라 하고, 친히 명문(銘文)을 지어 〈그 뜻을〉 기록하였다. ○ 천석정(千石亭)이 그 동쪽에 있으며, 작은 누각이 있는데 제월광풍루(霽月光風樓)라고 현판을 걸었다.
부용정(芙蓉亭) - 주합루 남쪽 못가에 있으며, 못 가운데는 채색 배에 비단 돛이 있는데, 정종조 때 꽃을 감상하고 고기를 낚던 곳이다.
불운정(拂雲亭) - 정종 원년(1776)에 지었는데, 주합루 동북쪽 작은 언덕에 있다. 대나무로 지었으며, 활 쏘던[觀德] 곳이다. 이에 앞서 현판이 아직 없어 출입하는 자가 어리둥절하였는데, 성종이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에게 명하여 이름을 지어 달게 하였다.
궁 밖의 동쪽 담 문을 선인문(宣仁門)이라 하고, 가운데 동쪽 담 문을 경양문(景陽門), 새 대문을 장춘문(長春門), 가운데 대문을 선명문(宣明門), 남쪽 협문(夾門)을 춘흥문(春興門), 안의 동쪽 담장 문을 건양문(建陽門), 동북쪽 담장 문을 기화문(綺華門), 광연정(廣延亭) 서쪽 고개 문을 평창문(平昌門), 남쪽 행랑 문을 영화문(永和門), 북쪽 행랑 문을 영평문(永平門), 내사복(內司僕) 남쪽 문을 운금문(雲錦門), 외동산(外東山) 문을 연양문(延陽門), 왼쪽 협문을 광범문(光範門), 오른쪽 협문을 숭범문(崇範門), 남쪽 담장 문을 단봉문(丹鳳門), 안의 서쪽 담장 문을 의추문(宜秋門), 왼쪽 궁 문[闥門]을 숙장문(肅章門), 겸사복청(兼司僕廳)의 새 대문을 영복문(迎福門), 내사옹(內司甕)의 위쪽 동문을 소춘문(小春門), 북문을 소동문(小東門), 중궁 차비문(中宮差備門)을 연도문(延禱門), 승정원 남문을 연영문(延英門), 서쪽 행랑 문을 금호문(金虎門), 밖의 서쪽 담장 문을 진금문(鎭金門), 서쪽 담장 문을 요금문(曜金門), 후원의 북쪽 담장 문을 공신문(拱辰門), 새로 난 북쪽 담장 문을 창합문(閶闔門), 동쪽 담장 문을 청양문(靑陽門), 밖의 북쪽 담장 문을 광지문(廣智門)이라 하였다.
창경궁(昌慶宮)
창덕궁 동쪽에 있으며, 예전 수강궁(壽康宮) 터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貞熹王后)ㆍ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ㆍ안순왕후(安順王后) 세 궁(宮)을 위하여 지었다. 선조 25년(1592) 왜란 때 불타 광해군 8년(1616)에 중건하였다.
명정전(明政殿) - 성종이 매양 정월ㆍ동지 때가 되면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세 궁에 하례드리고, 이 전에 나와서 조회를 받았다. 넓이가 5칸, 세로가 4칸이며, 동향이다. 동쪽을 명정문(明政門)이라 하며, 문 밖의 어구(御溝 다리)를 옥천교(玉川橋)라 한다. 전 뜰의 남쪽 문을 광정(光政)이라 편액하고 북쪽 문을 원범(元範)이라 편액하였다.
문정전(文政殿) - 명정전 남쪽에 있으며, 숭화문(崇化門)을 □□라 한다.
인양전(仁陽殿) - 명정전 서쪽에 있다.
경춘전(景春殿) - 수강전(壽康殿) 북쪽, 환경전(歡慶殿) 서쪽에 있다. 소혜왕후(昭惠王后)ㆍ인현왕후(仁顯王后)가 승하하였으며, 혜빈(惠嬪)이 이 전에서 승하하셨다. 정종ㆍ헌종의 태어난 곳인데, 어필로 탄생전(誕生殿)이란 현판을 써서 달았다. 동쪽 벽에는 장헌세자(莊獻世子)가 그린 묵룡도(墨龍圖)가 있는데, 정조가 기문을 지었다. ○ 서쪽에 가효당(嘉孝堂)이 있고, 남쪽에 희강당(喜康堂)이 있다.
통명전(通明殿) - 경춘전 북쪽에 있는데,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이 전에서 승하하였다. 푸른 기와를 이었는데, 정종조에 불탔다. 고려 때 세운 것이다.
환경전(歡慶殿) - 경춘전 동쪽에 있는데, 중종이 승하하였다. 순조 30년에 불타 중건하였다.
수령전(壽寧殿) - 인양전(仁陽殿) 북쪽에 있다.
자경전(慈慶殿) - 명정전 북쪽에 있는데,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승하하였다. 정종이 자전(慈殿)을 이 전에 모셨다.
통화전(通和殿) - 요화당(瑤華堂) 동남에 있다.
양화당(養和堂) - 환경전 북쪽에 있다.
여휘당(麗暉堂) - 통명전 서쪽에 있는데, 인열왕후(仁烈王后)가 승하하였다.
숭문당(崇文堂) - 명정전 서쪽에 있다.
함인정(涵仁亭) - 명정전 서북쪽 빈양문(賓陽門) 안에 있다.
환취정(環翠亭) - 통명전 북쪽에 있는데, 경종이 승하하였다. 김종직(金宗直)의 기문이 있다.
영춘헌(迎春軒) - 집복헌(集福軒) 동쪽에 있는데, 정종이 자궁(慈宮)을 모시던 곳이다. 정종이 여기서 승하하였다.
공묵각(恭默閣) - 환경전 남쪽에 있다.
동궁(東宮) - 건양문(建陽門) 밖에 있는데, 예전 구현전(求賢殿)의 광연정(廣延亭) 터이며, 앞에 연못이 있다. 성종 22년(1491)에 짓고 춘궁(春宮)이라 고쳐 불렀다. 동남쪽에 동룡문(銅龍門)이 있다.
중희당(重熙堂) - 동궁(東宮)의 서연(書筵)이며, 신료(臣僚)들을 불러서 보는 곳이다. 헌종이 여기서 승하하였다. 곁에 소주합루(小宙合樓)가 있는데, 정종조 때 팔분(八分)으로 정구팔황 호월일가(庭衢八荒胡越一家) 여덟 자를 써서 당의 문 위에 걸었다. 남문을 중화문(重華門)이라 하며, 또 그 남쪽을 이극문(貳極門)이라 하는데 곧 동궁의 정문이다.
성정각(誠正閣) - 중희당 오른쪽에 있는데, 여러 신하들을 한가로이 만나보는 곳이다. 숙종의 어필 현판이 있다. 정종 5년(1781)에 조윤형(曺允亨)을 명하여 경계 십잠도(儆戒十箴圖)를 그려서 걸었다.
수강재(壽康齋) - 중희당 동쪽에 있다.
시민당(時敏堂) - 수강재(壽康齋) 동쪽에 있는데, 동궁의 외당(外堂)이다. 청정(聽政)과 조참(朝叅) 등의 일을 이곳에서 행한다.
건극당(建極堂) - 신독재(愼獨齋) 북쪽에 있다.
의춘헌(宜春軒) - 바로 건극당 동쪽 방이다. ○ 효순왕후(孝純王后)가 여기서 승하하였다.
저승전(儲承殿) - 건양문(建陽門) 밖에 있다.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승하하였다.
취선당(就善堂) - 저승전 서쪽에 있는데, 경종이 태어났다.
진수당(進修堂) - 시민당 북쪽에 있는데, 진종(眞宗)이 승하하였다.
집복헌(集福軒) - 영춘헌 서쪽에 있으며, 장헌세자(莊獻世子)와 순조가 태어났다.
양심각(養心閣) - □□□□□에 있는데,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승하하였다.
보루각(報漏閣) - 동룡문 옆, 시강원 동쪽에 있다. 광해군 갑인년(1614)에 지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일영대(日影臺)가 있다.
○ 대궐 안에는 전루소(傳漏所)가 모두 12곳이니, 동룡문ㆍ동수구(東水口)ㆍ어정(御井)ㆍ경화문(景化門)ㆍ광정문(光政門)ㆍ진선문ㆍ마군영(馬軍營)ㆍ돈화문ㆍ경추문(景秋門)ㆍ북수각(北水閣)ㆍ영숙문(永肅門)이다. 대궐 밖에는 6곳이니, 소(所)마다 군사 2명이 있다.
사정(射亭) - 내사복시에 있다. 효종조에 세웠는데, 바로 옛날 철장 목마(鐵杖木馬)의 뜻이다. 후에 정자가 폐지되었는데 영종 18년(1742)에 고쳐 지었다.
춘당대(春塘臺) - 바로 궁궐 안 후원(後苑)인데, 선비를 시험보이고 무사(武士)를 사열하는 곳이다. 성종조에 파가 창경궁 후원에서 났는데, 한 줄기에 9개의 가지가 자라니 당시에 서총(瑞葱)이라고 하였다. 그 후 연산군 을축년(1505)에 이곳에 대를 짓고 서총대(瑞葱臺)라 이름하여 방탕하게 놀이하는 장소로 삼았다. 대를 쌓을 때에 하삼도(下三道)의 군민(軍民)을 징발하여 고역(雇役)시키며 포목을 많이 받아들이니 백성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옷 속의 솜을 뜯어서 다시 포목을 짜기에 이르렀는데, 그 색깔이 연기에 그을린 듯 검고 치수가 짧았다. 이 때문에 지금도 거친 면포 옷을 서총대포(瑞葱臺布)라 한다. ○ 성종이 하루는 춘당대에 나가서 집춘문(集春門)으로 성균관 유생(儒生)들을 불러 경서를 강(講)받고 과거 급제를 주었는데, 지금도 미담(美談)으로 여긴다. ○ 선조 5년(1572)에 선비를 춘당대에서 시험보고 다음날 방방(放榜)하니, 선비를 춘당대에서 시험보이는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 임금이 거둥할 때마다 배설방(排設房)에서 큰 베 장막을 펼쳐 차일(遮日)을 영화당(暎花堂) 처마 앞 동쪽에 치는데, 큰 대나무 가지로 기둥을 삼아서 대(臺) 곁에 열 길이나 되게 세우니, 높은 나무들이 모두 그 아래로 들어간다. 또 당(堂) 섬돌에 잇따라 붉은 널마루[朱板軒], 곧 보계판(步階板)을 설치하고 용수석(龍鬚席)으로 덮으니, 그 위에 수삼백 명이 앉을 만하며 마루 밑으로는 사람이 서서 다닐 만한데, 9층 나무 층계를 만들어서 밖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못이 있는데, 가물 때 못가에 도마뱀과 동자(童子)를 만들어서 비를 11차례나 빌되, 무신 종2품관이 제관이 되며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며 시장을 옮겼다. 도마뱀을 사용하는 일은 지금은 폐지되었다. 12차의 오방 토룡제(五方土龍祭)에는, 당하(堂下) 3품관이 제관이 된다.
어수당(魚水堂) - 불로문(不老門) 안에 있는데, 돌을 깎아 문을 만들었다. 효종조에 창건하였다.
영화당(暎花堂) - 춘당대 위쪽에 있는데, 앞에 연못이 있다. 당 뒤에도 못이 있는데, 바로 주합루(宙合樓) 앞 못이다. ○ 무릇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를 시험할 때에 임금이 여기에 나온다.
진장각(珍藏閣) - 어수당 후록(後麓) 아래에 있는데, 천한각명(天翰閣銘)이 있다. 곧 숙종 갑술년(1694)에 규장각을 종부시(宗簿寺) 경내에 짓고서 세운 것이다.
연경당(演慶堂) - 어수당 서북쪽에 있다. 순조 27년(1827) 익종(翼宗)이 동궁에 있을 때에 진장각 옛터에 창건하였는데, 그때 대조(大朝 순조를 말함)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경사스런 예(禮)를 만났고 마침 연경당을 낙성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하였다.
석거각(石渠閣) - □□□에 있는데, 석거문(石渠門)이 있다.
관풍각(觀豐閣) - 춘당대 남쪽에 있다. 앞에 논이 있어 임금이 친히 나와서 농사짓는 것을 구경하고 매해 농사지은 것을 수확하면 근신(近臣)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춘당도(春塘稻)라고 한다.
관덕정(觀德亭) - 춘당대 동북쪽에 있으며, 곧 사정(射亭)이다.
단풍정(丹楓亭) - 춘당대 곁에 있는데, 단풍나무를 많이 심어서 가을이 되면 난만하게 붉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요, 정자는 없다.
장원봉(狀元峯) - 곧 춘당대 맞은편 언덕이다. 과거 볼 때에 지방에서 뽑혀온 선비[擧人]들이 여기에 모여 앉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성종이 정희(貞熹)ㆍ인수(仁粹)ㆍ안순(安順)의 세 대비를 위하여 창덕궁 동쪽 수강궁(壽康宮) 터에 창경궁을 짓고, 15년 갑진(1484)에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을 명하여 전각 이름을 지었는데, 전을 명정ㆍ문정ㆍ수령ㆍ환경ㆍ경춘ㆍ인양ㆍ통명, 당을 양화ㆍ여휘, 각을 사성(思誠), 정자를 환취(環翠)라 하였다.
경희궁(慶熙宮)
서부 여경방(餘慶坊)에 있는데, 곧 원종의 옛 저택이다. 광해군 병진년(1616)에 지었다. 처음 이름은 경덕(慶德)인데, 영종 36년(1760)에 장릉(章陵)의 시호(諡號)와 음이 같아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숭정전(崇政殿) - 대내(大內) 서쪽에 있는데,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이다. 넓이 5칸, 세로 4칸이고 남향이다. 남쪽을 숭정문(崇政門), 동쪽을 여춘문(麗春門), 서쪽을 의추문(宜秋門), 북쪽을 자정문(資政門)이라 한다. 숭정문의 남동쪽을 건명문(建明門)이라 하는데, 신문고(申聞鼓)를 그 곁에 달았다.
자정전(資政殿) - 숭정전 북서쪽에 있는데, 우문각(右文閣)이 있다. 북문을 명덕(明德), 동문을 함화(咸和), 서문을 숙성(肅成)이라 하며, 관덕대(觀德臺)가 있다.
융복전(隆福殿) - 흥정당(興政堂) 북쪽에 있는데, 대내의 정침(正寢)이다. ○ 숙종이 여기서 승하하였다.
회상전(會祥殿) - 흥정당 동쪽에 있으며, 시어내전(時御內殿)이다. 인헌왕후(仁獻王后)ㆍ인선왕후(仁宣王后)ㆍ인경왕후(仁敬王后)와 순조가 승하하였다.
집상전(集祥殿) - 궁지(宮志)에는 이 전의 이름이 없으니, 이름을 고친 것인지 알 수 없다. 현종 정미년(1667)에 지어서 인선대비의 시어소(時御所)를 삼았으며, 자의대비(慈懿大妃)는 그때 만수전(萬壽殿) 동쪽에 거처하였으니, 한(漢) 나라의 장락궁(長樂宮)과 장신궁(長信宮) 두 궁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장락전(長樂殿) - 융복전 동쪽에 있는데 좌ㆍ우에 용비루(龍飛樓)와 봉상루(鳳翔樓) 두 누가 있다.
광명전(光明殿) - 내전에서 하례 잔치를 받는 곳이다.
태령전(泰寧殿) - 자정전 서쪽에 있다. 원래 당(堂)으로 불렀는데, 영종 21년에 어용(御容) 2폭을 봉안하고, 지금 이름을 명하고 전으로 승격하였다. 전 뒤에는 바위와 샘물의 승경(勝景)이 있다. 5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을 집화문(集和門)이라 하고, 또 그 동쪽을 건경문(建慶門), 남쪽을 태령문(泰寧門), 서쪽을 제광문(霽光門), 북쪽을 현무문(顯武門)이라 한다.
어조당(魚藻堂) - 선의왕후(宣懿王后)가 여기서 승하하였다.
흥정당(興政堂) - 광달문(廣達門) 안, 회상전 남쪽에 있는데, 신료들을 불러서 만나는 곳이다. 동쪽에 석음각(惜陰閣)ㆍ존현각(尊賢閣)의 두 각이 있고, 각 위에는 주합루(宙合樓)ㆍ관문루(觀文樓) 두 누가 있다. 곁에는 동이루(東二樓)ㆍ홍월루(虹月樓)가 있으며, 또 그 곁에는 정이당(貞㶊堂)이 있고, 서쪽에는 정시각(正始閣)이 있으며, 북쪽에는 사현각(思賢閣)이 있다.
집경당(集慶堂) - 흥정당 서쪽에 있는데, 처음 이름은 예연당(蘂淵堂)이다. 숙종 25년(1699)에 세자의 천연두가 나았으므로 명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영종이 여기서 승하하였다.
위선당(爲善堂) - 영선문(寧善門) 안 태령전(泰寧殿) 서쪽에 있는데, 온천 세 곳과 영렬정(靈冽井)이 있다.
집희당(緝熙堂) - 장락전 동쪽에 있는데, 남쪽에 중서헌(重書軒)이 있고 동쪽에 경선당(慶善堂)이 있다.
융무당(隆武堂) - 회상전 동쪽에 있으니 곧 내원(內苑)의 별당인데, 관사대(觀射臺)가 있다. 북쪽에 봉황정(鳳凰亭)이 있고, 정자 아래에 소성(小星)ㆍ계성(啓星)ㆍ상란(祥鸞)ㆍ어관(魚貫)ㆍ계명(鷄鳴)ㆍ자란(紫蘭)ㆍ봉생(鳳笙)ㆍ이지(㶊祉)ㆍ복유(福綏)ㆍ첨선(添線) 등의 정자가 있다.
덕유당(德游堂) - 회상전 서쪽에 있다. 서쪽에는 사물헌(四勿軒)이 있고, 북쪽에 서암(瑞巖)이 있다.
경현당(景賢堂) - 경현문 안에 있는데, 동궁에서 예를 받던 정당(正堂)이다. 네 문이 있는데, 동쪽을 협화문(協和門)이라고 하고, 또 그 동쪽을 만상문(萬祥門)이라 하며, 서쪽을 청화문(淸華門)ㆍ통현문(通賢門)이라 하고, 남쪽을 숭현문(崇賢門)이라 하며, 북쪽을 숭덕문(崇德門)이라 하고, 또 그 서북쪽을 일중문(日中門)이라 한다.
양덕당(養德堂) - 경현당 북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동쪽에 함춘헌(含春軒)이 있고, 서쪽에 안희각(安喜閣)이 있으며, 또 그 동쪽은 영선창(永善廠), 또 그 서쪽은 지효각(至孝閣), 또 그 서쪽은 청한정(淸閒亭)이라 한다.
규정각(揆政閣) - 흥정당 동쪽에 있다. 영종 8년(1732)에 짓고 혼천의(渾天儀)를 설치하였으며, 또 서화문(西華門) 안에는 돌을 벌여놓고 풍기죽(風旗竹)을 세웠다. ○ 어제(御製) 기문이 있다.
경봉각(敬奉閣) - 영조 46년(1770)에 지었다. 어필로 현판을 써 달았으며, 국조(國朝) 이래로 반포한 조칙(詔勅)을 간직하였다.
규장각(奎掌閣) - 금상문(金商門) 안에 있다. 취규루(聚奎樓)가 있으니 곧 서적을 간직한 곳이다. 곁에 연려실(燃藜室)이 있는데 검서관(檢書官)의 직소(直所)이다.
빈청(賓廳) - 건명문(建明門) 안에 있다.
대청(臺廳) - 건명문 안에 있다.
정청(政廳) - □□에 있다.
서암(瑞巖) - 덕유당(德游堂) 북쪽에 있다. 옛날에는 왕암(王巖)이라 칭하였기 때문에 광해군이 이곳에 궁궐을 지었는데, 인조가 반정(反正)하자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받들어 이 대궐에 들어가 계시게 하니, 왕암의 칭호가 증험되었다. 숙종이 친히 서암(瑞巖)의 두 큰 글자를 써서 새겼으며, 채제공(蔡濟恭)의 송(頌)이 있다. 계마수조(繫馬樹棗) 두 그루가 있으니, 하나는 흥정당(興政堂) 서쪽 통양문(通陽門) 안에 있고, 하나는 흥정당 동쪽 흥태문(興泰門) 안에 있다. ○ 원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손수 한 그루의 대추나무를 심고 아침 저녁으로 사랑하여 구경하며 때로는 말을 매고 이름하기를 계마수(繫馬樹)라 하였다. 그 후에 나무가 문득 말라 죽어 몇 해가 되었는지 모르는데, 현종 신축년(1661)에 나무가 다시 거듭 피어나더니 이해에 숙종이 태어났다. 경종 신축년(1721)에 또 다시 거듭 피어났는데 영묘(英廟)가 세자가 되었으며, 정종 임인년(1782)에 또 다시 거듭 피어나더니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여기서 탄생하였으니, 이상한 일이다.
정종 어제 경희궁지(正宗御製慶熙宮志)에 이르기를, “대내의 정침(正寢)은 융복전(隆福殿)이요, 융복전 서쪽에 회상전(會祥殿)이 있는데 시어(時御)의 내전이다. 동쪽을 회장각(會藏閣)이라 하고, 서쪽을 무일각(無逸閣)이라 하니 모두 별실이다. 아래 지당(池塘)이 있는데 못 이름을 벽파담(碧波潭)이라 하며, 못 가에 한 칸의 대 정자[竹亭]가 있다. 또 그 서쪽을 집경당(集慶堂)이라 하니 곧 인원성후(仁元聖后)가 천연두를 앓을 때 계시던 곳이며, 성상께서 병술년(1766)부터 한가로이 거처하셨다. 모두 5칸이니 동쪽은 금명(金明)이라 하고, 서쪽은 연경(延慶)이라 하며, 또 그 서쪽은 청상(淸商)이라 하고, 남쪽은 일영(日永), 북쪽은 개경(開慶)이라 한다. 융복전 동쪽에 장락전(長樂殿)이 있으니 대비를 모시던 곳이다. 두 누대가 있는데, 왼쪽은 용비(龍飛)라 하며, 아래에 경의헌(敬儀軒)이 있고, 오른쪽은 봉상(鳳翔)이라 하며, 아래에 백상헌(百祥軒)이 있다.
북쪽에 자리잡은 당(堂)을 어조당(魚藻堂)이라 하며, 앞에 큰 못이 있으니 별당이다. 또 광명전이 있으니 내전에서 하례를 받던 곳이며, 서북쪽의 당을 상휘당(祥暉堂)이라 하는데 협실은 잔치하는 곳이다. 서쪽의 두 정자는 영취당(映翠堂)ㆍ춘화당(春和堂)이라 하는데 꽃 구경하는 정자이며, 영취정의 승경(勝景)은 기문에 자세히 있다. 융무당은 내원(內苑)의 별실인데 회상전 동쪽에 있으며, 그 남쪽의 대를 관사대(觀射臺)라 하고, 그 북쪽의 정자를 봉황정(鳳凰亭)이라 하는데, 모두 활쏘기를 익히고 무예를 연습하는 곳이다. 덕유당(德游堂)도 궁내의 별실인데 회상전 서쪽에 있다. 그 서쪽에 난간이 있으니 사물헌(四勿軒)이라 하며, 그 북쪽에 작은 바위가 있으니 바로 이른바 서암이라는 것이다. 또 12당이 있으니, 대내 북쪽에 있는 것이 소성ㆍ계성ㆍ상란ㆍ어관ㆍ계명ㆍ자란ㆍ봉생ㆍ순지(順祉)ㆍ복유ㆍ첨선인데 모두 봉황정(鳳凰亭) 아래, 광명전 서쪽에 늘어서 있다.
위선당(爲善堂)은 태령전(泰寧殿) 서쪽에 있는데 온천 세 곳이 있으며, 우물은 영렬(靈冽)이라 한다. 집희당은 장락전 동쪽에 있는데, 바로 성상의 춘저(春邸) 때의 내당(內堂)으로, 후에도 그대로 사용하였다. 남쪽이 중서헌(重西軒)으로 동궁이 궁의 관원들을 접견하던 작은 방이며, 동쪽이 경선당(慶善堂)인데 역시 별실이다. 양덕당(養德堂)은 경현당(景賢堂) 북쪽에 있으니, 곧 영휘전이 불타기 전 동궁의 내실인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그 동쪽을 함춘헌이라 하고, 서쪽을 안희각(安喜閣)이라 하며, 또 그 동쪽을 영선전, 또 그 서북쪽을 지효각, 또 그 서쪽을 청한정(淸閑亭)이라 하는데, 무릇 이곳은 모두 임금이 휴식하는 전각[燕朝之殿宇]이다. 대내의 정전을 숭정전(崇政殿)이라 하니 곧 조회와 하례를 받는 곳이며, 대내 서쪽에 있다. 네 문이 있으니, 동쪽을 여춘문(麗春門), 서쪽을 의추문(宜秋門), 남쪽을 숭정문(崇政門), 북쪽을 자정문(資政門)이라 하는데, 자정문 안에 전(殿)이 있으니 곧 숭정전의 후전(後殿)이며, 역시 이름은 자정전이라 한다.
그리고 우문각이라 하는 것은 협실(夾室)이다. 전의 북문을 명덕문(明德門), 동쪽 문을 성화문(成和門), 서쪽 문을 숙성문(肅成門)이라 하는데, 문 서쪽에 대가 있으니 관덕대(觀德臺)라 한다. 태령전은 자정전 서쪽에 있는데 당저(當宁 현재의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는 곳이며, 전 뒤에는 바위와 샘물의 승경(勝景)이 있다. 다섯 문이 있는데, 동쪽을 집화문(集和門)이라 하고, 또 그 동쪽을 건경문, 남쪽을 태영문, 서쪽을 제광문, 북쪽을 현무문이라 한다. 흥정당(興政堂)은 신료들을 접견하고 강연(講筵)을 여는 곳인데, 회상전 남쪽에 있다. 동쪽을 석음각(惜陰閣)이라 하고, 또 그 동쪽을 존현각(尊賢閣)이라 하는데, 역대 왕이 동위(銅闈 세자로 있을 때)에 있을 때 강독(講讀)하는 각이며, 후에 폐지되었다. 금상 경진년(1760)에 이 궁으로 이어하시고 명하여 이 각에서 글을 읽게 하였다. 각 위에 누가 있으니 주합루(宙合樓)ㆍ관문루(觀文樓)라 하며, 곁에 두 집이 있으니 동이루(東二樓)ㆍ홍월루(虹月樓)라 한다. 또 그 곁에 당(堂)이 있으니 정이당(貞頤堂)이라 하는데 예전 이름은 석음당(惜陰堂)이며, 이곳은 모두 내가 장서(藏書)한 곳이다. 서쪽은 정시각(正始閣)이라 하는데 내시들의 사후(伺候)하는 곳이요, 북쪽을 사현각(思賢閣)이라 하는데 신료들을 접견하는 거실이다.
경현당은 동궁이 예를 받는 정당인데 양덕당 남쪽에 있다. 문이 네 개가 있는데 동쪽은 협화문이라 하고, 또 그 동쪽은 만상문이라 하며, 서쪽은 청화문ㆍ통현문이라 하고, 남쪽은 숭현, 북쪽은 숭덕이라 하며, 또 그 서북쪽은 일중문이라 한다. 동쪽에 있는 각은 문헌각(文獻閣)이라 하는데 장서하는 곳이다. 무릇 이것은 모두 조정을 다스리는 전우(殿宇)이다. 각의 정문은 모두 다섯 개가 있는데, 동쪽을 홍화문이라 하는데 어가가 출입하는 정문이요, 문의 왼쪽이 흥원문(興元門)이고, 오른쪽이 개양문(開陽門)이며, 서쪽을 숭의라 하고, 북쪽을 무덕이라 한다. 승정원은 숭정문 남쪽에 있고, 홍문관은 금상문(金商門)의 서남쪽에 있으며, 예문관은 숭정전의 서쪽에 있고, 시강원ㆍ익위사는 모두 숭현문의 남쪽, 승정원의 동쪽에 있다. 그밖에 여러 관청의 건물은 모두 원지(原志)에 있으므로 다시 자세히 적지 않는다. 궁궐은 광해군 때에 세워졌는데, 인조 반정 후에 무릇 광해군 때의 모든 궁궐과 누대를 모두 파하였지만, 이 궁궐만은 원묘(元廟)의 잠저이므로 파하지 않았다.
궁중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으니 계마(繫馬)라 하는데, 하나는 흥정당 서쪽의 통양문(通陽門) 안에 있고, 하나는 흥정당 동쪽의 흥태문(興泰門) 안에 있는데 모두 고적(古蹟)이다. 대개 궁궐이란 인군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 우러러 보고 신민들이 둘러싸 향하는 것인 만큼,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이고,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 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붙이는 것이요, 그 거처를 사치하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개국 초기에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처음으로 경복궁을 짓고 또 창덕궁을 지어서 이로써 때로 이어(移御)하는 데에 대비하였다. 성종조에 와서 또 창경궁을 짓고 세 분 대비를 모셨으니 사실 한량 없는 효심에서 나온 것이다. 지금 경복궁이 비록 불탔으나 세 궁이 있으니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부족할 것이 없는 만큼, 어찌 건축하겠는가. 내가 경희궁의 전각에 현판이 참고할 문헌이 없고 연조에 깊이 감추어 두면 궁내의 사신(史臣)이라도 그 순위의 차례를 자세히 알지 못하게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에, 지(志)를 지어서 상고할 바가 있게 하는 것이다."
덕수궁(德壽宮)
정종 2년(1400)에 태상왕(太上王)을 봉하여 높이고 궁의 칭호를 세웠다.
인수궁(仁壽宮)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 거처하던 곳이다.
계운궁(啓運宮)
인조 원년(1623)에 인헌왕후를 봉하여 높여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하고 궁의 칭호를 세웠다.
혜경궁(惠慶宮)
정종 원년(1776)에 혜빈(惠嬪) 홍씨를 위하여 궁의 칭호를 세웠다.
인덕궁(仁德宮)
정종(定宗)이 선위(禪位)한 후에 거처하던 곳이다. 혹은 개국 초의 이궁(離宮)이었다고도 하는데, 소재가 자세하지 않다. 정종과 정안왕후(定安王后)가 여기서 승하하였다.
신궁(新宮)
서부 천달방(泉達坊)에 있다. ○ 태종이 승하한 곳이다.
수강궁(壽康宮)
창경궁의 별전이다. 단종 을해년(1455)에 손위(遜位)한 곳이며, 원경왕후(元敬王后)와 세조가 여기서 승하하였다.
자수궁(慈壽宮)
성종 8년(1477)에 폐비(廢妃) 윤씨를 빈(嬪)으로 강봉(降封)하여 이 궁에 따로 거처하게 하였다. ○ 연산군 때에 회록각(會祿閣)을 만들고 흥청(興淸 기생의 한 명칭)으로서 일찍이 임금의 사랑을 받았던 자들이 거처하였다.
정청궁(貞淸宮)
중종 원년(1506)에 연산군이 왕비 신씨(愼氏)를 강봉한 후에 이 궁에 나와 거처하게 하였다.
별궁(別宮)
곧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인데,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여기서 즉위하였다. 별궁 곧 세조의 잠저(潛邸)이다.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여기서 승하하였다. ○ 이상의 두 궁(정청궁과 별궁)은 소재가 자세하지 않다.
인수궁(仁壽宮)
명종 4년(1549)에 새로 예전 정업원(淨業院) 터에 지으니, 이것이 곧 인수원(仁壽院)이다.
경운궁(慶運宮)
서부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선조조의 이궁이다. 선조와 의인왕후(懿仁王后)가 승하하였다.
인경궁(仁慶宮)
서부 인왕산(仁王山) 아래 있는데, 원래 원종의 사삿집이다. 광해군 병진년(1616)에 술사(術士)가 “새문동(塞門洞)에 왕기(王氣)가 있다.”고 하여, 이 궁을 창건하여 지기(地氣)를 눌렀다.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이 궁의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였다. 인조조에 철거하였다.
가순궁(嘉順宮)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수빈(綏嬪) 박씨의 옛 궁이다.
이현궁(梨峴宮)
동부 연화방(蓮花坊)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광해군의 옛 궁이라 한다. 인조가, 능원대군(綾原大君)이 난리를 겪고 집이 없자 이 궁에 거처하게 하였다.효종이 가례(嘉禮)를 여기서 거행하였다. 정종조에 장용영(壯勇營)을 여기 설치하였는데, 후에 폐지하고 나누어서 훈국(訓局)ㆍ동별영(東別營)ㆍ선혜청(宣惠廳)ㆍ동창(東倉)을 만들었다.
운현궁(雲峴宮)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궁이다. 경근문(敬覲門)ㆍ공근문(恭覲門)이 있어 어가(御駕)가 와서 뵙는 길이 되었다.
어의궁(於義宮)
중부 경행방에 있는데, 속칭 상어의궁(上於義宮)이라 한다. 인조의 잠저(潛邸)인데, 잠룡지(潛龍池)가 있다.
용흥궁(龍興宮)
동부 숭경방(崇敬坊)에 있는데 속칭 하어의궁(下於義宮) 이라 한다. 효종의 잠저인데, 조양루(朝陽樓)가 있으며, 지금은 본궁(本宮)이라고 칭한다. 열성조의 가례가 이 궁에서 거행되었다.
창의궁(彰義宮)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는데, 효종의 잠저이며, 진종(眞宗)이 탄생하였다. 장보각(藏寶閣)이 있어 영종의 화상 두 폭과 어필 유서(諭書)를 봉안하였다.
수진궁(壽進宮)
중부 수진방(壽進坊)에 있는데, 원래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집이다.지금은 봉작(封爵)하기 전이나 출가하기 전에 죽은 대군ㆍ왕자ㆍ공주ㆍ옹주를 제사지낸다.
명례궁(明禮宮)
서부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 원래 경운궁(慶運宮)이다. 혹은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옛 집이라고도 한다. 선조 계사년(1593)에 환도한 후에 오랫동안 이 궁에 계셨는데, 양천도정(陽川都正) 성(誠)과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집으로 대내(大內)를 삼고, 청양(靑陽) 심의겸(沈義謙)의 집으로 동궁을 삼고, 영상 심연원(沈連源)의 집으로 종묘를 삼았다.
또 부근의 크고 작은 인가로 궁궐 안의 각 관청을 삼아 문을 세우며 울타리를 설치하고 이름하여 시어소(時御所)라 하였는데, 정유년(1597)에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이 비로소 담을 쌓았다. ○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가 이곳에 물러가 거처하였는데, 또한 서궁(西宮)이라고 불렀다. 인조가 계해년에 이 궁에서 즉위하였으므로 즉조당(卽祚堂)이 있다.
용동궁(龍銅宮)
서부 황화방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순회세자(順懷世子)의 옛 궁이라고 하는데, 자세하지 않다.
○ 명례ㆍ어의ㆍ용동ㆍ수진을 사궁(四宮)이라고 한다.
아래는 근세조선이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정신병자들의 말이다.
독립신문의 내용을 엉뚱하게 해석해, 근세 조선이 중국대륙과 한반도에 걸쳐있었다는 그림을
그려놓기까지 한 것을 볼 수 있다. 조선 고종 때에 일본과 전쟁을 벌였던 청(淸)나라는 어디 있는지
찾을 수도 없게 그려져있다. 그 이전에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일본과 싸웠던 명(明)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독립신문 (1896.4.7 창간)
(이십사호: 1896년 5월 13일 논설)에서 보면 이렇게 나온다.
“ 조선은 세계가운데서 큰 나라이고,
토지는 동양에서 제일이다.” (주2) 조선은 대국이었다. (그림8,9)
그림9= 대륙에서의 조선강역도
하지만 대륙조선설을 주장하는 정신병자들의 희망과 달리 조선이 중국대륙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것은
바로 그들이 인용한 독립신문에 분명히 나와있다.
즉, 조선의 크기가 이탈리아(伊太利)와 거의 같다는 것이다.
영국 리수(里數)라는 말은 평방 마일(mile)을 뜻하므로, 12만 평방마일을 평방킬로미터로 환산하면,
1마일 = 1.6km이니 1평방마일은 2.56평방킬로미터로 위 12만 방리는 약31만 평방킬로미터다.
지금의 남북한이 약 22만 평방킬로니 독립신문 당시의 기사는 간도를 포함한 수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이태리의 면적은 30만 1천 평방킬로미터로 현재 세계 69위이다.
조선 보다 적다는 영국의 면적은 24만 평방킬로미터이다.
이탈리아가 중국 대륙보다 큰가?
현재 중국의 면적은 959만 평방킬로미터, 미국은 983만 킬로미터, 인도는 328만 킬로미터이다.
한심하고 한심한 일이다.
『독립신문』(이십사호: 1896년 5월 13일)의 논셜의 일부분이다.
"조선의 인구 수효는 1600만 명인데, 남자는 900만 명, 여자는 700만 명이며, 호수(戶數)는 348만 911호 가량이다.
지면은 영국 리수(里數)로 12만 방리(方里)요, 조선 리수로는 60만 방리 가량이다.
이 수효로써 세계 각국과 비교하면, 조선이 영국보다는 크고, 벨기에(비리시: 比利時; Br ssel)보다 9갑절이 크고, 네덜란드(화란: 和蘭; Netherland)보다 8갑절이 크고, 덴마크(졍말: 丁抹; Denmark)와 스위스(셔샤: 瑞士; Swiss)보다 6갑절이 크고, 그리스(희랍: 希臘; Greece)보다 5갑절이 크고, 포르투갈(포도아: 葡萄牙; Portugal)보다 3갑절이 크고, 이탈리아(이 리아: 伊太利; Italy)와 거의 같고, 서양으로 가면, 엘살바도아(섈베도-: 薩爾瓦多; El Salvador)보다 13갑절이 크고, 코스타리카(코스다카: Costa Rica)와 도미니카(산도밍고: Santo Domingo)와 아이티(해타이: 海地; Haiti)보다 4갑절이 크고, 니카라과(늬코록가: 尼加拉瓜; Nicaragua)와 온두라스(한두라스: Honduras)보다 갑절이다.
인구 수효로는, 덴마크와 그리이스보다 8갑절이고,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와 벨기에보다 3갑절이고, 스웨덴(셔젼: 瑞典; Sweden)과 노르웨이(나위:那威; Norway)와 터어키(토이긔: 土耳其; Turkey)보다 갑절이고, 스페인(셔반아: 西班牙; Spain)과 거의 같고, 아메리카 합중국 외에는 조선같이 인구 많은 나라는 없는데, 그 가운데 비슷한 나라를 보면, 브라질(부라실: 巴西; Brazil)과 멕시코(묵셔가: 墨西哥; Mexico)이다. 브라질은 1233만3000명이고, 멕시코는 1040만 명 가량이다. 중앙 아메리카 속에는 5나라를 아울러서 6갑절이며, 남아메리카 속에 있는 각국을 아울러도 갑절이다. 이것을 보면, 조선이 세계 가운데서 큰 나라요, 토지는 동양에서 제일이다."
"죠션 토디에셔 생기는 돈과 외국 토디에셔 생기는 돈을 비교해보면 갓흔 디면을 가지고 죠션 사람은 백분지 이십이분 밧긔는 돈을 못만드니 이거슨 다름이 아니라 따흘 가지고 쓸줄을 모로는 거시라 따에 호불호를 가지고 비교해볼진대 죠션 따 만콤 기름진 따히 업는대 거기셔 생기는 쇼츌을 보거드면 외국보다 오분지 일밧긔는 못되니 이거슬 곳 죠흔 따흫 뭇키는 것과 갓흠이라 죠션 사람 생각에 죠타는 따흔 따히 낫고 물이 만히 잇서 벼를 심어야 죠흔 줄노 알거니와....
각국에셔 나무 파다 생기는 돈이 대강 미국셔는 일년에 삼억 팔쳔 칠백만원이요 아라샤에셔는 이억 팔쳔 일백 오십만원이요 덕국에셔는 일억 이쳔 이백 오십만원이요 오지리셔는 일억 오쳔 오십만원이요 죠션 반도 못되는 셔젼 갓흔 나라도 이쳔 삼백 오십만원 생재를 하니...
죠션 토디와 긔후가 동양 각국 즁에 뎨일 죠흔 고로 실과가 매우 잘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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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x/57?q=%C5%C2%C1%B6%C0%CC%BC%BA%B0%E8%B0%A1%20%BC%BC%BF%EE%20%C3%B9%BC%F6%B5%B5%20%C7%D1%BE%E7%C0%BA%20%C5%D9%C1%F8%B0%ED%BC%BA%C0%CC%B4%D9.
태조이성계가 세운 첫수도 한양은 텐진고성이다.
http://cafe.daum.net/sisa-1/dqMu/25885
조선왕조실록의 의구심
@우전 해방후 왜놈이 한국인으로 개명한 사람이
130만명 추정 ㅡ현재 손자까지 700만명 이상 추정 ㅡ내글 참조
자한당 바른당 80%는 왜놈자손이거나 친일파
민주당 국민당 일부도 마찬가지
1% 지배층중에 80%는 왜놈 자손이거나 친일파 라고 봅니다
재벌 사회 문화 지도자들도
대부분 왜놈이거나 친일파
역사를 왜곡해서 세뇌를 시키기 위한
대표적인 말이 조센징 이겠지요
여기도 왜놈 자손이나 친일파들이 많은것 같구먼요.
알려지면 중국이나 일본은 조선의 제후국 신세로 전락하고
자신들 밥줄이 떨어질까 싶어 막을려고 난리를 치겠지요.
언어적 표현이 잘못돼 있을 수 있죠.
그러나 그림이 맞다면 글이 표현상의 오류를 범한거죠.어느쪽이 맞냐는 것은 우리나라 혼자서 하는 것보다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를 조명해야 되지요.
전에 이란이 석유값문제로 한국에 왔을때에 신라비단얘기를 하면서 신라와 이란이 역사적으로 혈맹관계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언론은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란인은 우리 박물관에 와 봐라 다 증거를 가니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좀 있다가 언론에 신라에 금이 많이 나서 어느 하천이 사금천이라고 한참을 떠들었습니다.그런데 위치상 반도에서는 이란과 혈맹관계를 못 만들죠.
이 사람들의 뇌구조가 보통사람들의 뇌구조와 다른 점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보통이라면 창피함을 느낄텐데 도무지 그렇지 않으니 신비로운 현상같습니다. 뇌과학, 인공지능 얘기하며 출렁대는 사람이라면 설명을 할것도 같은데 안하고 있는걸 보면 너무 어려운 문제인가 봅니다...
이미 틀렸어요. 잘못 세뇌되어서 구제불능입니다.
사리분별력이 없습니다.
앵무새처럼 헛소리나 하는 글을 퍼오면 뭐가 되는 줄 아는 불쌍한 것도 있으니...
꼴에 호승심이 있기까지 합니다. 웃기는 것이죠...
@청량산 아, 네. 항상 좋은 자료를 영문 한문 가리지 않고 해석을 덧붙여 올려주시며 수고해 주시는데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사람분들이 아니라 뇌과학 한다는 분이 이 신비로운 현상을 설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청량산 그자들은 반민족"정신병자"들 같아보입니다. 돌맹이를 떡이라고 떠들어대는 꼴입니다. 아마 중국인들이 후원을 하는지도 모르지요. 중국사가 "대조선사"라고 하니...한반도의 역사는 없고 미제/일제/중국등에게 줘버려도 좋고... 아마 만주나 화북, 중국연해지역의 한민족의 발자취나 정신마져 말살하려는 "동북공정"이나 "탐원공정"같은 맥락에서 움직일수도..중당국에서 그것에 엄청난 돈을 지원했다니 그 작은 일부가 흘러들어왔을수도 그럴려면 조선민족이라는 그 정신까지도 없애버릴려고 할지도...그러니 중국역사가 "대조선역사"라고 하지요.
@청량산 조선실록, 동의보감(허준)
조선의 지형은 서고동저이다.러시아장교 조사여행기(내가 본 조선, 조선인) 카르네프지음(김정환 옮김) 가야넷 출판사 2003 -에서 “조선의 서울의 강은 서에서 동으로
나는 쪽바리가 아니무니다. 일본식 발음이라고 으심하면 곤란하무니다. 그들 소리를 대변한다고 으심하무니까..대륙사는 우리 일본인들이 아주 경기를 일으킨다고 누가 그라무니까..니뽄도 아주 무섭시무니다. 선조 때부터 발음이 그러하무니다. 자꾸 으심하면 우리동족이 법조계에 마니 있스니다...
@은하철도99콘
아래 두글을 비교해보시오.
러시아인들의 조선 정탐기 - 내가 본 조선, 조선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lsn76&logNo=40206667291&parentCategoryNo=&categoryNo=16&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
러시아 장교가 본 <조선, 조선인>의 실체 !!! 그들은 한반도에 오지 않았다.../ 최두환
http://cafe406.daum.net/_c21_/bbs_list?grpid=1GHAy&fldid=JA3Q
창의문에서 숙정문쪽으로 위로 올라가는 길에 8도에서 징발되어 거대한 돌을 정교하게 깎아 성곽을 쌓고 하자보수까지 성실하게 이행한 조선 8도의 석공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것 같네요.
반백년 전에 박정희 모가지를 떼러 왔다던 무장공비님들에게 선물해준 흔적도 남아있는 듯 하네요...
참 의문인 것이 수도를 방비하는 성의 규모가 왜이리 조잡하고 낮은 가요. 적어도 10m는 넘어야 외적의 침공을 막지 않는가요?
저런 성벽을 보면서 과연 맞을까? 하는 의심도 들죠.
무슨 시골집 돌담을 쌓은 거 같아서......
전쟁대비라기보다 일반인의 통행을 막는 역할을했을수도 있지요. 시간을 정해서 성문을 열고 닫음으로서 일반인의 통행을 조절했을겁니다.
to 세리랑 님
아. 네. 아마도 이병도가 티메머신을 타고가 시키긴 했지만 400년 전의 석공들이 일을 제대로 안했는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처럼 모자란 사람 눈에는 헬기를 타고 넘으면 아주 쉽게 넘을 수 있는것으로 보여집니다.
@우람 성곽 자체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해 보입니다. 헬기를 타야 넘을 수 있어 보인다는 제 말은 과장이 아닙니다. 사진을 잘 보고 주변의 사람과 크기를 비교해 보면 충분히 판단이 가능해 보입니다. 다만 기록상으로는 외침보다는 내침에 신경을 더 썼고, 정작 외적에 의한 전란이 발생했을 때는 저 훌륭한 성벽의 총구멍에 배치할 병사가 없었다고 합니다.
대륙조선설을 주장하시는 분들의 믿음은 확고하신것 같은데
그 심리상태를 저는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모르는 사실에 대한 가설을 세워보고 가설을 부정할수 있는 근거를 찾아 가설을 계속 수정하면서
진실에 다가가야 되는데 어떻게 가설을 더 분별할수 없도록 혼란시키는지
문제는 그런 분들이 한 둘이 아닌것 같으니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많지 않더라도 합리적 의심이 있는 부분은
자꾸 의심해보고 연구.조사하고 가정을 세워보고
어느 방향으로든 검증을 위한 노력을 해 보는 것을 다 나쁘다고만 할 것은 아니라 봅니다.
그런거에 대해 일방적 비난 및 매도만 하여서는 학문의 발전이 없읍니다.
비난이 아닌 비평을~~
반론이 아닌 반증을~~
밥통들의 증폭된 망상을 합리적 의심이라 하면 동일한 부류라고 확실하게 판단이 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겁니다.
@성실 ㅎㅎㅎ~ 밥통~~
독립신문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구실로..
조선의 정신적인 정체성을 회손하고..
서양문명의 우월함을 세뇌시키기 위한..
세뇌용 근대화? 신문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당시 이땅에 살던 민중(인민)들이..
조선시대를 몸소 체험한 사람들임을 감안하면..
서세가 이땅에..
최초로 진행한 세뇌의 바탕화면 또한..
조선시대의 실상으로 채울수밖에 없었겠죠.
세뇌를 목적으로 하면서..
허무맹랑한 소설성 글들로 채워졌다면..
그 누군들 세뇌될 턱이 없을게 뻔하니까요.
또한 그당시는 아직..
"조선사 편수회"의 역사 왜곡작업 이전 이기에..
조선시대의 실상을 적시했을 가능성 또한..
그 어느 신문보다 높을수밖에 없겠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