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과 지혜
멜라토스, 아니토스 등 소크라테스를 고발, 고소한 이들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며 좋지 않은 쪽으로 가르친다고 죄를 더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던진다. 일단, 가르침이 있으려면 먼저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모든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훌륭한 상태를 위한 가르침을 받고자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당연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무엇이 훌륭한 상태인지, 정확히는 어떻게 훌륭하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헌데 소크라테스 본인이 자신을 돌아 볼 때 그런 종류의 지식, 다른 사람을 어떻게 훌륭하게 살게 하는 지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본인도 훌륭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지식은 테크네(techne)라는 것으로 전문 지식과 함께 자신의 지식의 성질, 이론, 원인 같은 본질적인 것들도 아는 것이었다(내지는 알려고 하는 것). 이 테크네와 같다고 평가되는 에프스테메(episteme)는 “할 줄 아는 앎”이었다. 그러니 소크라테스가 볼 때 자신에게는 훌륭한 상태에 대한 본질적이고 전문적인 지식도 없었으며, 곧 훌륭할 줄 아는 앎이 없었다. 그런 앎이 없는 와중에 이에 대하여 타인을 가르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를 당혹케 한 것은 신탁의 답변이었다. 카이레폰은 당시 아폴론 신전에 가서 무녀를 대상으로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가 있는지 신탁을 구한다. 이에 대한 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곧 소크라테스가 당대 사람 중 가장 현명한 자라고 신이 말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혼란했다. 자신이 보기에 자신에게는 최고 가치로 가기 위한 지식이 결여 되어있었다. 자신은 현명한 이도, 지식인도, 지혜로운 이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또한 인간을 “지혜를 사랑하는 자” 밖에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진실로 지혜로운 것은 신 뿐이다.. 단지 소크라테스는 보다 더 지혜로워지려고 노력할 뿐인 철학자라는 것이다.
그런 자신이 당대 최고로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을 찾으러 떠나 그 신탁의 틀림을 증명하고 답을 구하든지, 혹은 신의 뜻을 깨닫던지 이 둘 중의 하나의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한다.
첫째로 소크라테스는 정치인들을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들은 정작 현명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현명하다고 착각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밝히려 하자 정치인들은 분노한다.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훌륭함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무지에 대한 지혜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인간은 현명하지 못하고, 지혜를 얻을 수 없으며, 지혜에 있어서 오로지 노력자의 입장 밖에 되지 못한다는 무지의 지를 발견하고 이를 “인간적인 지혜”라고 정의한다.
이후에도 소크라테스는 시인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난다. 시인들은 놀라운 작품들을 썼다. 신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는 듯한 작품들 말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이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자 시인들은 별말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감정의 고양, 신들에게 받은 영감을 토대로만 놀라운 시들을 집필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정작 시인들은 그런 고양과 영감이 자신의 현명함에서 비롯됐다고 착각했다. 자신이 무지하는 것에 대해 무지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분명 특정 분야 내에서 현명했고 지혜가 있었다. 하지만 부분에 요소에서, 그리고 작은 요소에서 현명하다고 모든 요소에서 그리고 중대한 요소에서 조차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목공의 지식이 있는 정도를 가지고 국가의 사항, 더 나아가 모든 생물의 훌륭함에 관련된 최고 사항에 대한 지식까지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이들도 본인들의 무지에 대하여 무지했다.
결국 소크라테스가 얻은 결론은 결국 모든 사람들은 지혜로울 수 없고 현명하지 못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저들은 자신들이 현명하지 못하다는(무지하다는) 지식은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지각이 있으니 저들보다는 내가 더 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매우 흥미롭다. 인간은 훌륭함에 대한 지식이 없다. 훌륭함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은 훌륭함의 본질적인 부분, 원인적인 부분, 성질적인 부분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는 것이며, 또한 훌륭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지식의 무지는 지혜의 무지로 연결된다. 헌데 책에 내용 속에는 지식이 지혜로 연결되는 과정이 설명되어 있지 않다. 더 이상한 점은 사람은 훌륭함에 있어서 지식이 있지 않아도 극복 불가의 문제로까지 말하지 않지만, 지혜에 대해서는 “지혜로운 이는 신”뿐이며 “인간은 그저 지혜를 사랑하는 입장”으로 불가의 문제를 삼는다.
현대의 국어사전을 통하여 당대의 철학 언어를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올바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추론해본다. 지식이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배우거나 실천을 통하여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이다. 지혜란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다. 지식은 대상을 향한 배움과 실천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명확한 인식과 이해이다. 반면 지혜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음에서 나오며 결과는 정확한 처리 능력이다. 여기서 이 두 개념의 극명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지식은 대상 자체를 그저 배우고 실천하면 된다. 다만 지혜는 대상(사물)의 이치를 깨닫아야만 한다. 내가 수영에 대하여 지식이 있다는 것은 수영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는 수영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수영의 도리(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 따위에 답할 수 없다. 수영의 지식을 통하여 수영 자체는 잘하게 될지 몰라도 수영이 무엇인지, 수영을 어떻게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반면 수영에 대해 지혜가 있다는 것은 수영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이치란 사물의 정당한 조리, 또는 도리에 맞는 취지이다. 곧 수영이 무엇인지, 또한 수영을 올바르게 하는 것, 사용하는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앎이며 이에 대해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차이가 보이는가?
지식은 어쩌면 대상에 대한 사용자로써의 중요성이 요구된다. 내가 수영이란 대상을 배우고 실천하며 더 잘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는 명확한 인식과 이해가 요구된다. 명확하다는 것은 명백하고, 확실하다는 것이다. 또한 명백은 의심 없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내가 수영을 함에 있어서 뚜렷한 인식과 이해를 가지고 이를 대한다. 발차기를 강하게 하면 되려 에너지 소모가 심하고 적정선에서 빠르게 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식의 뚜렷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식과 이해는 수영에 대한 지식이며 이는 곧 수영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그 지점에서 지식은 대상에 대한 유용성만 고려한다.
하지만 지혜는 어쩌면 대상에 대한 인간으로써의 중요성이 요구된다. 수영을 단지 이용하는 것이 아닌, 사람으로써의 도리로 어떻게 수영을 대해야 하는지(취지)에 대한 이치를 판단하고 이에 대한 정확한 처리가 필요하다. 정확하다는 것은 바르고,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유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 바라야 한다. 수영을 빠르게 하는 것이 바른가? 혹은 멋지게 하는 것이 바른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반면 지식은 그저 수영을 어떻게 하면 가장 확실하게 빠르게 할 수 있는가? 따위의 행위와 유용성의 측면만 고려하면 된다. 지혜는 행위의 당위와 인간성의 측면을 고려해야만 한다.
어떤 것의 도리(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를 생각하는 것, 또한 그것을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소크라테스가 고심했던 “인간으로써의 훌륭한 상태란 무엇인가?” 와 같은 결이다. 지혜는 지식보다 고차원적이고 본질적이며 나아가 도덕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소크라테스가 본 인간의 훌륭한 상태는 물론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에서 나오지만 이 단계에는 도덕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이 목적이 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인생의 질문(인간으로써의 훌륭한 상태란 무엇인가?)을 풀기 위해서는 지식이 아닌 지혜가 필요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식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지만 지혜에 있어서는 온전히 아는 것이 불가할 정도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의 무지를 목격한 것은 지식과 지혜 둘 다였지만 특히 그는 지혜에 있어서 인간의 철저한 무지를 알아 버렸다. 그 무지는 곧 절망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지식의 범주를 넓힌다. 앞서 말한 테크네(techne)와 에프스테메(episteme)가 그것이다. 지식은 보다 본질적이고 또한 실천적이라는 것이다. 훌륭함은 본질적인 것이면서 도리에 맞는 것이기에 지식은 그 영역에 들어갈 수 없었다. 지식은 본질이 중요한 것이 아닌 그저 명백한 이용수단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 지식은 본질에 해당하는 것까지 늘림으로 인하여 훌륭함의 범주에 들어설 수 있게 했으며 또한 계속하여 실천할 수 있음으로 지식이 지혜로, 또한 그 지혜가 그저 사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신의 영역의 진실로 지혜로운 자로 각성되기를 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