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39
8월1일 [연중 제18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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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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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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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안에 약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점도 있습니다. 추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남아있습니다!>
언젠가 짧게나마 맛봤던 영신수련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가 우리 신앙의 후예들을 위해 선물로 남겨주신 소중한 유산입니다. 지도 신부님의 안내에 따른 집중 관상기도를 통해 제 자신의 적나라한 내면 상태를 뚜렷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영혼 안에 웅크리고 있는 짙은 어둠과 무질서를 확인하며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구나!’하는 실망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계속된 성찰작업은 저를 한 가지 특별한 깨달음에로 안내했습니다.
‘내안에 약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점도 있구나. 추함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남아있구나. 결핍만 있는 것이 아니고 넘치는 부분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이토록 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항상 나를 지속적으로 사랑해주셨구나!’ 하는 깨달음, ‘이토록 부족하고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나를 당신 눈동자처럼 소중히 여기시는구나!’ 하는 깨달음 말입니다.
스페인 로욜라에 있는 이냐시오 성인의 생가를 들렀을 때였습니다. 고풍스런 성채 안에는 그분께서 탐독했던 책들부터 시작해서 그의 가족들이 쓰던 식기, 가구, 입던 옷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 이냐시오 대성당 중앙 제대 뒤편에는 그분의 청동상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의 손은 어떤 글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글귀는 예수회 회원들의 살아가는 이유이자 모토였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Ad Majorem Dei Gloriam)’
예수회 회원들은 창립자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과 정신에 따라 오직 하느님에게 영광을 돌릴 뿐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하여!’
창립자나 카리스마는 다르지만 ‘동종 업계 종사자’인 동료 수도자로서 생각할수록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오늘 과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혹시라도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아니라 내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한 성찰을 하게 만듭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는 풍파 많고 우여곡절 투성이인 우리네 삶에 큰 위안과 위로를 건네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걸어갔던 그의 여정은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기사(騎士)로서의 큰 성공을 꿈꾸었습니다.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그는 왕에 대한 대단한 충성심을 드러내며 목숨까지 걸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를 위한 하느님의 뜻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1521년 침략해온 프랑스군과 맞서 싸우던 그는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날아온 포탄에 맞아 한쪽 다리는 부러졌고, 다른 쪽 다리마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던지 의사는 고개를 가로 저었고 병자성사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은혜롭게도 이냐시오는 그 시점에서 자신의 인생 여정 안에 중요한 터닝 포인트 하나를 마련합니다.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그는 회복과정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인열전’이란 영성서적을 손에 듭니다. 처음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읽기 시작했던 그 책들이 그를 천천히 주님께로 안내했습니다.
그는 조금씩 세상의 덧없음과 허무함을 알아갔습니다. 그리고 보다 가치 있는 일, 보다 의미 있는 일, 보다 영양가 있는 인생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속적인 성공하기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부었던 에너지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왕의 충직한 기사를 꿈꾸었던 그는 이제 하느님의 충성스런 군사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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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5DQXbgWKR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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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야 할지 모를 때 먼저 찾아야 할 유일한 것, 양식>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좇아서 오기는 하였지만, 기적의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육체적으로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신기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기적에서 ‘표징’을 본다는 의미는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믿는 것을 넘어서서 그 기적이 보여주는 참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표징으로 얻는 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표징을 보았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빵’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에 대해 물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양식임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내가 아버지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고 그리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을 찾고 따르게 됩니다.
요즘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행동부터 하라고 합니다. 이불을 개고 집 정리부터 하면 점점 무엇을 해야 할지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놀면서 배우는 심리학’이란 유튜브 채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이것부터 하세요’에서 어떤 초대손님이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군대 제대하고 자살을 생각하였습니다. 군대에서 제 꿈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계획하고 전역하고 제 꿈을 이루려고 하다 보니까,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노력은 별로 안 하고 꿈만 꿔 왔던 것입니다. 1년 정도 도전하다가 포기를 했습니다.
내가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겠고, 왜 살아야 하나 싶어 좌절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내일은 뭐 해야 하나, 내일모레는 뭐 해야 하나, 이렇게 살다 보니 죽는 게 편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이때 생각나던 게 가족이었습니다. 나는 그냥 죽으면 그만인데 남은 어머니, 아버지, 동생은 절망적일 거 아니겠습니까 저 하나 때문에.. 그러면서 자살 생각은 접고 어떻게 살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후 6개월 동안 술만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며 제 생각을 노트에 적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뭘 해야 좋을지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돈 벌고 싶다.’라는 결과물만 나왔습니다. 그러며 든 생각은 ‘나를 먼저 알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나는 (무엇)이다.’라는 것을 20개 정도 다른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알게 되니까 행동에 옮길 일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 출근하면 술 마시고, 집에 계실 때는 잠만 잤는데 시간을 정해놓고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니까 당장 해야 할 일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될 것 같습니다.”
이분의 말을 정리하자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니 먼저 자신을 잘 알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려면 양식부터 찾아야 합니다. 양식은 부모가 주는 것입니다. 양식을 찾으면 부모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게을러지지도 못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양식은 그냥 음식이 아닙니다. 사랑이 담긴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긴 음식 안에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뜻이 들어있습니다.
루마니아의 ‘요람’이란 국가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온전히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 걷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발육도 저하된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먹는 음식에서 표징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음식에서 표징을 발견한다는 말은 음식과 섞여 있는 그것을 주는 이의 ‘사랑’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발견했다면 그 사랑 안에는 반드시 그것을 주는 이의 ‘뜻’이 들어있기 마련입니다.
일반 가정에서 아이들이 받아먹는 음식에는 부모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 음식에서 표징을 본다는 말은 그 양식을 주는 이의 ‘뜻’을 알아듣는다는 뜻입니다. 그 뜻이 그 아이를 성장하게 만듭니다. 모든 양식에는 그것을 주는 이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요람’이라는 보육원에서 자라는 이들은 그 ‘뜻’을 물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며 자랐기에, 걸어야 할 때 걷지 못하고 말을 해야 할 때 옹알이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그 양식을 먹으며 ‘오늘은 어떤 뜻을 따라야 하는가?’라는 것을 스스로 질문하고 옹알이와 걸음마를 시작하게 됩니다. 양식이 부모님의 사랑임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주시는 양식으로 믿게 된다면 우리는 매일 아버지의 뜻을 묻고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는 주인에게 양식을 먹는 한 뭐 해야 하며 살아야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밥을 주는 주인의 뜻을 따라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양식을 먹는 것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먹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을 잃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몇 년을 같은 자리를 지키는 개들도 있습니다. 양식이 그리운 것입니다.
성인이 되면 부모가 주는 음식은 더는 양식이 되지 못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대로 성장해 버렸고 놀면서 밥을 먹는 자녀에게 음식을 주며 사랑이 담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줄어들면 정체성도, 뜻도 희미해집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으며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대로 살면 됩니다.
양식이 부모가 주는 것임을 믿게 된다면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내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두 개만 아침에 해치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독서가 될 수도 있고 운동이 될 수도 있고 기도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양식을 통해 아버지를 찾은 사람들이 자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내일 일어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을 수 있을 때 그것을 죽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생기는 뜻은 없습니다. 내 안에서 뭘 해야 하는지, 그 뜻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뒤져도 안 나옵니다. 내 안에 있는 뜻은 그저 내가 생존하면 된다는 욕구와 그동안 타인들에 의해 주입되어온 것들뿐입니다.
인간답게 만드는 모든 욕구는 ‘양식’으로 들어옵니다. 사랑이 담긴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인이 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양식은 부모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큰 사랑을 지닌 양식을 찾아야만 합니다. 양식을 먹으며 그것을 주는 이 때문에 사는 게 인간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사랑이 담긴 양식, 그것이 성체입니다. 성체를 먹으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확해집니다.
성체를 영하는 이들은 하루에 무엇을 하며 지내야 할지 타인에게 묻지 않습니다. 잠들기 전에 하느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뜻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2~3개를 정하고 그것을 성취하며 살아갑니다. 양식을 먹는 사람은 아침에 ‘개구리 두 마리’(오늘 실천해야 할 주님 뜻)를 삼킬 힘이 있습니다. 내일 하느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명확하게 해야 할 일이 나오지 않는다면 성체를 양식으로 영한 게 아닙니다. 아기는 부모에게 양식을 먹으며 시키지 않아도 옹알이와 걸음마 연습을 합니다. 내일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히 모른다면 먼저 그 뜻이 들어있는 양식을 찾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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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성체성사로써 만나의 새로운 선물에 대한 것이다. 요한 묵시록에도 이러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다.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숨겨진 만나를 주겠다.”(묵시 2,17) 만나의 기적은 모세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직접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탈출 16,4.12 참조). 모세는 만나를 보고 놀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에 대해 알려준다.(탈출 16,15 참조) 여기서 모세는 기적의 중개자일 뿐이다. 모세 역시 하느님의 선물을 받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이로써 모세와 예수님의 차이가 어떤지를 보여 준다(요한 6,32.35 참조).
복음: 요한 6,24-35: 나를 믿는 사람은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의 빵의 기적과 연결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는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감사와 찬미보다도 호기심과 어떤 이익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흥분된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6-27절)
군중들의 잘못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주시는 분 대신에 선물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참조: 마태 12,28; 사도 10,38; 에페 1,13; 4,30; 2코린 1,22).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주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참된 양식이시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앞에 신뢰를 얻도록 하라고 하시며,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탁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절) 즉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그리스도, 하느님의 일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당신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이루어 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믿으라고 하신다. 이것이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27절 참조)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30-31절)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빵의 기적을 벌써 잊어버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빵을 위한 빵만을 찾고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이 없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기적보다도 만나의 기적이 더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2-33절)
여기서 만나는 참된 빵이 아니며, 빵의 상징이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한 현세적 양식이었고, 빵의 기적도 현세적인 배고픔을 면해준 것으로 이것 또한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이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3절)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고 계시다. 여기서 이 빵은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시는 구체적인 인격체로서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이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행동을 통해 주시는 영적인 빵보다는 물질적인 빵을 택하고 있다. 이에 예수님은 당신을 참된 빵과 동일시하신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느님의 빵이며, 하느님의 선물 그 자체이시다. 신앙만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의 빵이 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우선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생명의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새 인간”(에페 4,24)이다. 그리스도를 택한다는 것은 죄로 물든 “옛 인간”(에페 4,22)을 벗어버리는 것과 또한 성령에 힘입어 끊임없이 새롭게 변모될 수 있도록 죄를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2코린 5,17에서도 그리스도 신자를 “새 인간”이라 한다. 이는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생명을 주는 빵”(요한 6,33)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는 끊임없이 변모되는 것이다. 참된 신앙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오신 생명의 빵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며 그분을 담고, 닮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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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 끝자락 이방인의 땅으로 가십니다.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표징을 본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렇게 모여드는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병자가 치유되는 기적과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은 이제 예수님을 모셔다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 이를 알게 된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에서 카파르나움으로 가십니다. 이튿날 예수님이 보이지 않자 군중은 십육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카파르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이렇게 군중이 예수님을 애타게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빵을 원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배불리 먹여 주시고, 자신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바라며, 그것을 확신하게 해 주는 더 많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군중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성당에 열심히 다니며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부자가 되고, 시험에 합격하고, 성공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은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빵을 잘 만드는 메시아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다른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빵에서 벗어나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해 봅시다. 나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입니다. 나는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람을 살리는 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나처럼 이웃과 세상을 사랑하는 이가 된다면, 여러분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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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생명의 빵>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이 말씀은, “빵을 배불리 먹은 일만 생각하지 말고, ‘빵의 기적’이 무슨 표징인지 깨달아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않고 빵만 보았습니다. (자기들이 배불리 먹었다는 것만 생각했고, 예수님께서 그 기적을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빵의 기적’을 해석할 때, 그 기적만 바라보면서 그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잊어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면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다가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ㄱ)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지상의 양식’, 즉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는 일에 대해서만 집착한다면, 그 양식과 함께 썩어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어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을 받아먹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 빵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먹이신 그 ‘기적의 빵’도 ‘썩어 없어질 양식’이 될 뿐입니다. 또 만일에 ‘성체’를 믿음 없이 받아먹는다면, 그 성체도 ‘썩어 없어질 양식’이 될 뿐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육신의 양식’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육신의 양식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영혼의 굶주림만 신경 쓰신 것이 아니라, 육신의 배고픔도 걱정하셨습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마르 8,2-3) 이 말씀은 분명히 사람들의 ‘육신의 배고픔’을 걱정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굶주리면서 신앙생활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번도 배고픔의 고통을 겪어 본 적 없는 사람들은,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의 비참한 심정을 모릅니다. 모르니까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이들을 너무 쉽게 비난하고 꾸짖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배부름만을 기준으로 삼아서 남의 배고픔을 함부로 판단하는 바리사이들 같은 모습입니다. (겪어 보지 않아서 모르는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알려고 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육신의 양식이 아예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필요해서 찾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7ㄴㄷ)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요한 6,30-31)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당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신원보증을 하신 분, 즉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표징을 일으켜서 자기들을 믿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이미 체험한 ‘빵의 기적’만으로는 예수님을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나’를 언급한 것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빵의 기적’을 ‘만나’보다 못한 일로 생각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사실 누가 보아도 예수님의 ‘빵의 기적’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렇지만 한 번으로 그친 일입니다. 반면에 ‘만나’는 긴 세월 동안 ‘날마다’ 일어난 일입니다. 바로 그 차이 때문이 아닐까? 예수님 쪽에서 생각하면,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기 위해서는 한 번의 기적으로도 충분했지만, ‘몸의 배부름’만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겨우 한 번 배불리 먹은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날마다’ 기적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날마다’ 배불리
먹이셨다면, 사람들은 열광하면서 예수님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일은(요한 6,15), ‘날마다’ 자기들을 배불리 먹이라고 요구한 일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은, 힘들게 노동하지 않고도,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날마다 배불리 먹을 수 있기만을 그들이 바라고 있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2-33)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이 말씀은, ‘만나’를 깎아내리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과 당신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만나’가 내리던 때의 이스라엘 모습을 보면, 날마다 ‘만나’를 받아먹으면서도 너무 쉽게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거나, 하느님께 반역한 일이 많았습니다.) 지상에서 살아가려면 육신의 양식이 필요하지만, 그 양식은 몸의 생존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을 받아먹어야 합니다. ‘생명의 빵’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믿는 대로 살면서,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의 빵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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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텃밭에 물을 주면서 생각합니다. 잎이 노랗게 타들어가기 때문에 물을 줍니다. 그러나 잎에 물을 준다고 잎이 생기를 되찾지는 않습니다. 잎이 노랗게 타들어가는 것은 뿌리에서 양분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젖도록 흠뻑 물을 주면 비로소 잎은 생기를 얻게 됩니다. 우리의 몸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질병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암이 있습니다. 다양한 합병증으로 건강을 위협하는 당뇨가 있습니다.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 되는 비만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대부분의 증상은 마치 나뭇잎이 가뭄에 노랗게 타들어가는 모습과 같습니다.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서 약을 먹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메마른 잎에 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뿌리에 물을 주면 나뭇잎은 생기를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증상은 삶의 질을 개선하면 대부분 좋아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식사, 규칙적인 운동, 긍정적인 생각, 타인을 위한 봉사, 충분한 수면, 가족과 친구와의 깊은 대화, 삶의 지혜를 얻는 독서, 내면의 자아를 찾는 명상, 영적인 힘을 주는 신앙은 뿌리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이 우리의 지친 몸에 활력을 줄 것입니다. 증상을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는 내 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건강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을이 되면 저렇게 풍성한 나뭇잎들이 하나둘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일전에 ‘나이를 숫자로 생각하면 주름이 늘고, 나이를 경험으로 생각하면 연륜이 쌓인다.’는 말을 읽었습니다. 낙엽이 되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봄이 되면 다시 피는 새 잎을 위한 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나무의 지혜입니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있다면 잎도 죽고, 나무도 죽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가족의 축하를 받았음을 감사한다면,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또 다른 탄생으로 알고 감사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생명이 그렇듯이 삶은 이어달리기입니다. 나 또한 또 다른 생명을 위한 거름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창고에 가득 쌓아 놓고 좋아하는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쌓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의 창고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소유의 삶을 살았던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빚진 것은 4배로 갚아 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를 칭찬하시면서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계명을 충실하게 지킨 부자청년을 칭찬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오늘의 성서 말씀을 통해서 한번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한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는 오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많은 시련을 겪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에 이르자면, 즉 성숙한 자유로운 신앙인이 되려면 극복해야 할 많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파라오의 정치적 권력이나 거짓된 마술사 같은 사기꾼들 그리고 물과 바다와 같은 자연의 재난, 인생의 사막과 광야를 건너는 동안 겪게 되는 뜨거운 열기와 뱀 그리고 갈증과 허기, 또는 이방인들로부터의 학대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이와 같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오늘 모세가 겪는 것과 같이 우리의 내부에서 오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불평입니다. 백성들을 구원의 땅으로 인도하던 모세는 자기 백성의 저항에 부딪혔고,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하느님께 반항하며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에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 하는 불평이 모세와 아론에게 쏟아집니다. 그러나 야훼 하느님은 신비스러운 음식인 만나를 내려 주심으로써, 당신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항상 함께하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있기는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영광스러운 예수의 변모를 보고 초가집 짓고 한평생 살자고 했다가 혼쭐이 났습니다.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조르다가 창피만 당했습니다. 가리웃 사람 유다는 잿밥에 눈이 어두워 스승 예수를 팔아넘기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길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진리가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고 배웠다면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잿밥보다는 염불에 관심을 가지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시간과 정열을 투자하기보다는 영원히 썩지 않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시간과 정열을 바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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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하늘양식을 섭취하며 삽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2~35)
빵은 주식이었고 음료수로 포도주가 언급되지만 결론은 먹거리입니다. 짧고 굵게 살건 가늘고 길게 살건 어찌 살든지 일단은 먹어야 삽니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듯 세상만 아는 사람들 영원 살이 모르겠지요. 이 세상만 알고 저 세상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이 세상 문젭니다.
저 세상까지 믿는 사람들인 하느님 가족들은 하늘양식 먹으며 삽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은 일용할 정도면 됐고요 영원생명 양식에 힘써야죠.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그 양식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라는 양식으로 이 세상을 저 세상까지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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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라병국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씀에 가슴이 멍해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과 함께 코로나 이후 시기에 대한 걱정들로 가득 차 있지요. 수없이 주위 사람들과 대화하고 기도하면서 뭔가 답을 얻고자 했지만, 불안과 탄식이 더 큽니다. 사실, 그동안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마음에 이 말씀이 메아리쳤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했던 기도가 참 부끄럽습니다. 구체적인 방법, 곧 만나만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달콤합니다. 당장 허기를 채워줍니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다시 배고프고 또 다른 만나가 있어야만 합니다.
최근의 이 상황을 빨리 끝나게 해 달라고만 졸랐습니다. 배고픔을 채워줄 빵을 달라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배를 타고 쫓아가면서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던 군중의 한 사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이리 힘들다면 차라리 당신을 모르던 때로 돌아가겠다.’고 협박하는 꼴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어지는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 여러 번 되새김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4장 23절-24절). 지금은 고통과 고난의 시기이기에, 영과 마음의 새로움이 더더욱 필요할 것입니다.
짐작하지 못한 어려움이 닥칠 때 사람들은 당황하곤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시야에서 사라져버립니다. 사라지신 게 아니라 계실 곳에 분명히 존재하시는데 말입니다. 군중의 시선에 예수님은 모세처럼 보였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중개했던 인간 모세 말입니다. 그리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듯 그 정도로만 예수님을 바라봤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손가락 끝이 가리켰던 분과 예수님 당신 자신에 대해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모세가 중개했던 분은 만나의 주인이신 아버지 하느님이시고, 예수님 당신은 새로운 만나이며 결코 배고프지 않게 할 생명의 빵이시라고.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그렇게 영원히 우리와 함께해주십니다.
사실, 주님과 함께해도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주님은 우리가 함께 계시는 당신을 잊거나 못 알아보고 죽게 되었다며 소리치지 않도록 붙잡아 주십니다.
그리고 고물을 베고 잠만 자고 계시는 분으로 당신을 오해할까 봐 우리네 마음을 흔들어 주십니다.
“제발, 오병이어(五餠二魚)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뻥튀기 장사꾼으로만 보지 말라고!”
영원한 생명은 단지 죽음 이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됩니다. 따라서 이 세상살이에서 축복과 평화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러니까 이 혹독한 고난을 가벼이 보자.’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낭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지치고 불안한 이때,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은 사도 바오로가 말씀하신 ‘영과 마음의 새로움’ (에페소서 4장 23절 참조)을 찾는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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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구요비 욥 주교님]
저는 1970년대 신학생 시절에 남미 교회에서 시작된 ‘해방신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이 새로운 신학의 성서적 근거인 ‘탈출기’를 읽으며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억압받고 강제 노역으로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을 가엾이 여겨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이끄시는 야훼 하느님의 격정과 연민에 열광하며 ‘세상에 열린 신앙’, ‘사회적인 관심’을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이 ‘탈출기’를 영적으로 해설한 니싸의 그레고리오 성인의 책 <모세의 한평생>(최익철 신부 역)을 읽으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성인은 이 책에서,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 뵙고 일치하는 여정에서 모세를 영적으로 ‘완덕(完德)의 정상’에 도달한 분으로 제시합니다.
그는 탈출기의 역사를 이 세상의 온갖 탐욕으로 노예 상태에서 사는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탈바꿈하고 성장하며 겪어야 할 영적인 투쟁과 수덕의 과정으로 해설합니다.
‘완덕은 영적인 진보에 있다.’라는 성인의 관점은 오늘 제2독서에 나오는 말씀에 도달하기 위한 지침서처럼 보입니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소서 4장 22절-24절)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찾아온 군중들에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복음 6장 27절)라고 촉구하십니다.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존재인 인간은 생존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필요로 하지만, 또한 인간의 본성 안에 깃들어 있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갈증과 목마름을 늘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이 모든 갈망은 하느님께서 통교(communio)하시기를 원하시기에 인간의 마음 안에 심어주신 당신을 향한 향수(nostalgia)라고 하겠습니다.
“오 하느님,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시는 당신의 열망을 찬미합니다!”(앙트안느 슈브리에 신부) 예수님께서는 이 하느님의 목마름과 인간의 거룩한 갈망을 하나로 채워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복음 6장 35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주님께 대한 순결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히브리서 11장 1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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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유성모 요셉 신부님]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순수한 아이의 눈망울처럼, 해맑게 웃는 그 미소처럼 누구나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과 같은 인생의 순간이 있습니다. 젊고 희망이 가득하고 그 반짝반짝 빛나는그 순간이 영원하길 우리 모두 희망할 것입니다.
좋은 물건, 맛있는 음식이 즐비한 이 세상은 행복하게 해주는 듯 하지만 또한 동시에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함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불확실한 것이 안정되고 확실한 것으로 채우기 위한 온갖 몸부림과 골몰의 시간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불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 확실함의 작은 표징이라도 찾아 헤맵니다. 보험에 가입하고, 재산을 증식하며, 한편으로 성당에 다니고, 또 어딘가에서 들리는 현혹시키는 소리에 기웃거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하여 확실하고 구체적인 것을 얻기 위한 우리 스스로의 노력은 자주 우리 자신의 한계만 드러내고 좌절과 절망을 느끼게 할 뿐입니다.
이집트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목적하신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물질의 세상에 하느님의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해 보면 우리는 그분의 삶의 지향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확실한 무엇을 구하려하지 않으십니다. 매 순간 다가오는 불확실함을 그저 무력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렇게 닥치는 당신 앞날의 불확실성을 피하지 않으시고 그저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머무르고 따르셨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우리에게 확실함을 줄 것처럼 현혹합니다. 하지만 진리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 말씀하십니다.
다가올 불확실함을 피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역시 당신의 방법을 따르라고 알려주십니다. 그분이 알려주시는 세상에 마음을 둘 무엇을 추구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길은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복음 6장 35절)
아버지와 말씀 안에 일치하신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 그분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곧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에서만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얻지 못하는 확실함을 얻을 수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광야는 지나가는 곳입니다. 우리가 희망을 더 멀리 두고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의 순간에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 분위기만 보면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이 지상의 삶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육적인 삶은 치열하지만 영적인 측면은 메말라가는 듯합니다.
그러기에 자기 뜻이 좌절되는 일들이 생기게 되면 좌절과 우울함에 빠지고 난관을 견디고 이겨나갈 힘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영은 생명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말씀이 머무를 자리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소서 4장 23절-24절).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오늘의 말씀으로 불확실한 삶 속에 어떤 고난과 절망이 다가와도 궁극적인 희망을 잃지 않는 우리가 되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신앙의 여정 안에서 그 어떤 상황이 우리 앞에 닥친다 하더라도 꺼지지 않는 희망을 간직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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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연중 18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입니다. <제1 독서>는 이집트를 탈출해 홍해를 건너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 준 양식”인 메추라기 떼와 만나를 먹은 이야기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선포하시며, <제2 독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고, 옛 인간을 벗고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로 많은 이들을 먹이신 후에 군중을 피하여 호수 건너편으로 오자, 그곳까지 몰려 온 군중의 세 가지 질문과 한 가지 청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군중이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요한 6, 25)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6-27)
군중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빵을 배불리 먹었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에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사람의 아들”이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브로시스)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 34)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군중들이 다시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여기서, ‘일’(에르가)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이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그분의 뜻을 우리가 실천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일’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곧 ‘믿음’이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요한 6,27)으로 믿지 않는 이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또다시, 그들이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30) 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인간이 만든 빵이 아닙니다. 선물로 주어진 은총의 빵입니다. 그러나 이 빵은 더는 하늘에만 차려져 있는 빵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빵입니다. 그러니,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먹어야 할 빵으로,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곧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동시에, 이 빵을 먹는 사람도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됩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 빵으로 내어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군중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양식’으로 내어놓으십니다. 사실, 물질의 빵과 생명의 빵인 예수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물질의 양식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살과 피로 바뀝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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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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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6,27)
모든 사람들에게, 곧 가진 자나 가진 것이 없는 자나, 높은 자리에 있는 자나 낮은 자리에 있는 자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 있는데, 바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의미'는 창조 이전의 모습인 '무(없음)의 상태'입니다. 너와 내가 없고, 좋고 싫음이 없고, 소유가 없는 '완전한 무의 상태'가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죽음을 영원한 것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바라보고, 영원한 것과 연결시켜주는 '다리로' 바라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인 영원한 것은, 죽음의 다리 그 건너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영원한 것에 이르게 하는 양식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이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그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일이 바로 '하느님의 일'인데,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 양식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그런 우리들은 아닌지?'
그런 우리들이 되지 말고, 영원한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참된 빵이신 예수님,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잘 믿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교회에 이렇게 권고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에페4,17)
그리고 '옛 인간'을 벗어버리고, 영과 마음이 새로워진
'새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피할 수 없는 자매인 죽음을 기쁘게 맞이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빵'이시며,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로 우리의 마음이 더 향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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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밥>
요한 6,24-35 (생명의 빵)
그때에 군중은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밥>
밥에는
참밥과
헛밥이
있지요
먹으면
먹을수록
먹히게끔 하는 것이
참밥이요
먹으면
먹을수록
게걸들게 하는 것이
헛밥이지요
참밥에
맛이 들어
먹히는 사람은
참사람이요
헛밥에
맛이 들어
먹으려는 사람은
헛사람이지요
참밥을 먹는
참사람은 먹힘으로써
살리고자 죽지만
죽어도 살고
헛밥을 먹는
헛사람은 먹음으로써
살고자 죽이지만
살아도 죽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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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는 모르는 곳에 갈 때 지도를 보며 길을 공부해야 했지만, 이제는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알아서 척척 안내해주는,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미리 찾아볼 필요가 없어 운전하는 것도 쉬워졌고 시간도 많이 절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느 순간 저의 운전이 무척 급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 몇 초라도 빨리 가려고 ‘최단 시간 경로’를 찾고 있습니다.
우연히 제가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에서 ‘운전 습관’이라는 항목을 발견했습니다. 저의 운전 습관 점수는 100점 만점에 31점이었습니다. 고속, 급가속과 급감속으로 인해 이렇게 점수가 낮았습니다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지난 4월부터 철저하게 교통 법규를 지키면서 운전했습니다. 차선도 자주 변경하지 않고, 과속은 절대 하지 않았으며 급감속과 급가속도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조금씩 올라가 94점이라는 높은 점수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운전하다 보니 조금 늦게 도착하기는 하지만, 서두르지 않는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왜 앞 차는 잘 안 가는 거야?’, ‘제대로 운전 좀 하지?’라는 불평을 마음속으로 하곤 했지만, 이제는 여유를 가지면서 오히려 운전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조금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이익을 좇다 보니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도 그런 적이 너무 많지 않을까요? 순간의 만족, 약간의 이익에 신경 쓰다가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빵의 기적을 목격한 후에 예수님의 권능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중요한 의미는 깨닫지 못하지요. 단순히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만을 바라보면서 관심을 가질 뿐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30)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빵을 먹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빵을 많게 하신 분을 보고 열광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 담긴 표징을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바로 주님의 일에 철저하게 협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랑을 강조하신 주님의 일에 함께하면서,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이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이 주는 약간의 이익에 매달리기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이익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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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아이콘>
군대에서 봤던 연인이 생각납니다. 제 후임병 이야기입니다. 30개월 군 생활 동안 이 연인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만났습니다. 여자 친구가 매주 면회를 와서 만났던 것이지요.
이 후임병은 제가 제대할 때까지 이렇게 사랑을 키우면서 아름다운 만남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제대한 후 사회에서 우연히 이 후임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후임병 역시 군 생활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자 친구가 생각나서 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헤어졌다는 것입니다. 군대 3년 기간 동안 변하지 않았던 사랑인데 제대 후에 한 달 만에 헤어졌다고 합니다.
군 복무 중에는 매일 볼 수가 없기에 면회 때의 만남 자체가 감사했고 그래서 상대방이 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 후에는 매일 만나다 보니 상대의 부정적 모습이 보이면서 싸움이 잦아졌고 그래서 결국 헤어졌다는 것입니다.
꾸준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꾸준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주님께서 이 변하지 않는 사랑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배신의 아이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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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성체를 갈망하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날씨가 더운 날 한 수행자가 절의 큰 스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더운 날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었습니다. 스님께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묻습니다. ‘어느 곳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스님께서 말했습니다. “추울 때에는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 자신이 더위가 되십시오.”
일에 열중하는 사람은 더위도 추위도 없습니다. 쇠가 녹는 용광로 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더위가 감히 범접할 수 없습니다. 더위에 지치지 않고 건강한 날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은 5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에 이은 이야기입니다. 빵의 기적에 사람들은 열광하여 억지로라도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6-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그 기적이 지닌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빵의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양식과 그 양식으로 성장하는 또 다른 생명,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는 분, 삶의 질을 높여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썩어 없어질 빵으로 오천 명을 먹여 살리는 육적인 생명이 있듯이 썩어 없어지지 않을 빵을 먹여서 살리는 참다운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총의 열매에 매이지 않고 언제나 은총을 주시는 주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 주님의 권능으로 무덤에서 나온 나자로, 많은 치유를 경험했던 이들, 주님의 말씀과 손에 의해 치유를 받았던 이들은 오늘 여기 살아있지 않습니다. 이 지상을 떠나 하느님 안에 새 생명을 누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여기서 하늘을 갈망하고 하늘은 이미 여기서 열리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숨,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을 가진 육이 아니라 육을 입은 영입니다. 영이 먼저입니다. 그럼에도 육을 중심으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아까운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얼이 빠지면 껍데기입니다. 우리는 알맹이를 차지해야 합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숨, 얼이 우선 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밥을 먹어야 하지만 밥만 먹고 살수는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행해야 합니다. 신명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준 것도 “주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신명 8,3)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밥보다 먼저 말씀을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라는 말 한마디가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예를 들면, 주일 날, 내일을 먼저 하는 사람이 있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을 먼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른 아침 주일미사 참례를 하고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일에 급급해서 주일을 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행, 휴가는 꼭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주일을 궐하면서 휴가를 하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무엇이 우선권을 가지느냐에 나의 믿음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근본을 우선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것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러자 사람들이 “선생님,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겨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러나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체는 곧 예수님의 몸입니다. 영생의 빵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체를 모실 때 얼마나 준비된 마음, 믿음으로 모셔야할 지를 알려 줍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몸에 좋다는 음식을 찾아다닙니다. 웰빙식품을 먹으려 안달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성체 한번 모시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요? 좋은 음식을 찾는 만큼이라도 영성체를 갈망했으면 좋겠습니다.
썩어 없어질 빵과 썩어 없어지지 않는 빵은 서로 대비를 이룹니다. 다시 배고프지 않을 양식을 먼저 챙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성체만큼 잘 말해주는 것은 없습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더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에 앞서 성체를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계심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성체를 우리에게 주신 이유를 알고 성체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젊은이 알도 마르코치는 “어머니,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께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한지요? 성 필립보는 육체의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던 젊은이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아들아, 감실로부터 풍겨 나오는 천국의 향기를 어떻게 네가 느낄 수 있겠느냐?” 성체로부터 오는 기쁨과 감각적인 만족은 서로 상치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5,17)
육체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에 속하는 것들을 감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2,14).
세상의 것들이 달콤하게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앞세워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우리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썩어 없어질 세상의 헛된 것에 집착하지 않고 주님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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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 인간>
-생명의 빵인 예수님이 답이다-
삶은 반복입니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반복, 위대한 반복, 거룩한 반복입니다. 좋은 사람이나 좋은 글은 늘 봐도 새롭고 좋듯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진리 말씀도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습니다. 사제서품 만 32년 동안 매일 강론을 쓰면서 깨닫는 진리입니다. 반복을 통해 깨달음도 기억도 새롭고 깊어집니다. 결국 강론의 주제는 하나,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화두이자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이신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영원히 살아 계신 주님이자 스승이자 벗이자 연인이자 도반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몇가지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역시 수 차례 인용했던 예들입니다.
1.제 사제서품식 미사때 입당 성가 445장을 들으며 순간 주르르 흘렸던 눈물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한 감동입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2.토마스 아퀴나스 성인 말년에 경당에서 있었던 일을 문틈으로 엿본 어느 수사의 전설같은 증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토마스 아퀴나스와의 대화입니다. 읽을 때마다 공감하며 감동을 받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말했다. 무슨 상급을 주면 좋겠니?”
예수님께 드린 토마스의 대답은 바로 예수님의 친구들이자 제자들인 우리 역시 언제나 드리고 싶은 대답입니다.
“주님, 오직 당신만을 원합니다!(Nothing but youself, Lord!)”-
3.더불어 생각나는 예화입니다. 언젠가 어느 자매님이 고마운 마음에 무엇을 좋아하는가 물었습니다. 먹을 것을 물었음이 분명했지만 저는 에둘러 기분 좋게 거절했고, 함께 웃으면서 해피엔드로 끝났던 기억입니다.
“신부님, 무엇을 좋아하십니까?”
“예수님을 좋아합니다!”
청담淸談이자 진담眞談같은 대답에 참 흡족했습니다.
4.올해 사순절 첫날 재의 수요일 아침 산책중 발견한 수도원 십자로 예수님 성심상 앞에서 기도하다가 바위가 된 형상의 사람 모습입니다. 아마 올해뿐 아니라 이런 체험의 선물을 평생 처음일 것입니다. 지금도 매일 산책때마다 ‘늘 거기 그 자리’에서 기도하는 모습의 사람 형상의 바위를 볼 때마다 감동하여 휴대폰 사진에 담곤합니다.
5.참 많은 형제자매들과 나눈 2018년 10월에 쓴 행복기도문입니다. 참 많이도 나눈 고백이지만 늘 고백하면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새롭게 합니다. 면담고백상담중 자주 보속으로 소리내어 읽게 하는 기도문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예수님께 대한 여러 예화를 나눴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끊임없이 매일 물어야 할 물음입니다. 예수님을 깨달아 알아 가면서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참 행복, 참 기쁨, 참 생명의 참나의 발견이자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탐구와 참 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첫째, 예수님은 ‘생명의 빵’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I AM the Bread of Life). 나에게 오는 사람을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을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해 주실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의 허기虛氣는 예수님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나는(I AM)’ 모세가 불타는 떨기 나무속에서 만난 하느님 이름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진리의 설파입니다. 이어 예수님의 정체를 알려주는 여섯의 고백입니다.
“나는(I AM) 세상의 빛이다(8:12,9:5)
“나는(I AM) 문이다(10:7,9)
“나는(I AM) 착한 목자이다(10:11,14)
“나는(I AM)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I AM)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I AM) 포도나무다(15:1,5)
바로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우리의 모두라는 고백입니다. 참으로 황송스럽게도 이 거룩한 미사시간, ‘생명의 빵’ 예수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아 참 내가 되는 복된 시간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참만나. 새만나입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에서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인 만나는 바로 장차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에 주실 양식의 전조前兆입니다. 진짜 천사의 양식, 천상의 양식 새만나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입니다. 오늘 탈출기에서 광야에 서리처럼 깔린 잔 알갱이들이 무엇인지 몰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서로 묻습니다.
“이게 무엇이냐?”(Man-hu:manna)
바로 이 물음이 정체 모를 것의 이름, ‘만나’가 된 것입니다. ‘이게 무엇이냐?’ 마침내 참만나, 새만나 예수님의 성체를 통해 진짜 답이 주어집니다. 바로 이를 친히 해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 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참만나, 참빵은 바로 당신이심을 밝히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추구할 대상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온갖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궁극으로 추구해야 할 바,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인 영원한 생명의 예수님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썩어 없어질 양식을 찾는 무지한 군중들을 향한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죽비같은,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빵만 보았을 뿐 빛나는 표징인 예수님을 보지 못한 눈먼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우선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의 부정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추구해야할 바, 영원한 생명의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인 예수님을 늘 삶의 중심인 으뜸 자리에 모시고 살라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은 새인간의 원형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 과제가 새인간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하여 듣고 배운 가르침대로 살아가십시오.
곧 지난 날의 생활방식에 젖어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으십시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통해 실현됩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새인간에 답은 오직 하나 생명의 빵이자 영원한 생명인 예수님뿐입니다. 이런 예수님과 하나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새인간으로 성장, 성숙해가는 우리들이요 평생과정이자 평생과제입니다. 이래서 새인간의 되어가는 영적 여정을 일컬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으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을 때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일희일비하며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원망하거나 절망하거나 실망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바오로 사도의 권고처럼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것입니다. 참으로 참된 믿음의 표지가 감사입니다. 그러니 평생수행이 예수님 공부, 예수님 살기, 예수님 믿기입니다. 특히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이를 분명히 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흡사 활동중의에 중독된 사람들같습니다. 무엇을 많이 잘 하여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어 구원받는 것임을 몰랐습니다. 참 좋은 손님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고 기쁘듯, 주님께도 참 좋은 믿음의 사람은 빈손으로 와도 반갑고 기쁠 것입니다. 동문서답같은 예수님 말씀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주님을 믿어 끊임없이 새인간이 되는 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참으로 믿는 일이며 그러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해 주십니다. 결코 막연한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수행을 통해, 책임을 다하는 분투의 노력을 통해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영원한 생명과 더불어 참 좋은 믿음을 선사하시어 우리 모두 새인간으로 거듭 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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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새로운 양식과 새로운 생명 이야기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보고 군중이 예수님을 쫓아옵니다. 식민지 상황에서 식량과 재산을 수탈당하는 이들에게 빵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생명과 직결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육신의 빵 때문에 당신을 따라온 이들의 시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돌리고자 하십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어습니다."(요한 6,31)
군중은 예수님의 빵 이야기에 당장 만나를 떠올립니다. 조상들이 40년 동안 굶어 죽지 않고 황량한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만나 덕분이었음을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지요. 그들에게 만나는 주님의 보호와 돌봄의 표징입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리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탈출 16,15)
파스카와 같은 삶의 커다란 변화를 체험하고 나서 또다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면 사람들은 곧잘 변화 이전의 과거를 미화하고 이상화하기 일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시절을 노예살이과 영아 살해 등의 기막힌 고통으로써 보다 고기 냄비와 배불리 먹던 빵의 추억으로 소환하였지요.
구해준 입장에서 들으면 분통이 터지는 일일 터인데도, 주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그리도 결국 당신께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다른 구원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먹을 양식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신 것이지요.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탈출 16,4)
그런데 분명 만나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음식 맞지만, 이 만나조차도 또한 "썩어 없어질 양식"이었음을 성경이 전합니다. 그날 먹을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좀 더 챙겨서 다음날까지 비축해 둔 사람의 만나는 썩어서 "구더기가 꾀고 고약한 냄새가 났"지요.(탈출 16,20) 인간적 탐욕과 불신으로 주님 말씀에 온전히 의탁하기를 주저하며 뒷주머니를 차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만나도 썩을 양식에 불과했던 겁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빵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인데, 바로 당신이 그 빵이라고 밝히십니다. 그저 배를 불리고 몸을 지탱하는 먹거리로서의 빵에서, 영혼을 살찌우고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으로서 당신의 존재를 내어 놓으시는 겁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복음 환호송)
예수님은 말씀으로, 성체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양식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양식은 그저 몇 시간의 에너지로 산화되는 육적인 빵을 넘어서, '이제와 항상 영원히' 생명의 근원이신 분과 함께 그 생명을 누리게 해주는 빵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육의 생명 너머 영의 생명으로 초대된 이들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3-24)
우리가 취하는 영원한 생명의 빵, 곧 말씀과 성체는 썩어 없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받아 모신 우리에게까지 썩지 않는 불멸의 생명을 보증하십니다. 창조 때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 모상이 더욱 충만해지는 새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 백성의 양식은 노예살이의 빵에서 광야의 만나로, 그리고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으로 이어져왔습니다. 이 변천의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더,더, 더 극대화되면서 "자기 증여"의 절정에 이르렀지요. 이것이 아무리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이 크고 힘겨워도 노예살이의 빵을 되짚어 기웃거려서는 안되는 까닭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나날이 새 인간이 되도록 초대받은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로 성체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씀께서 늘 우리 곁을 지켜주고 계시니 힘을 내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다 함께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아룁시다.
"주님, 더디 오지 마소서."(입당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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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LI4fhha9aw&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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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 35)
은총의
8월이
시작되었다.
매순간이
은총이며
믿음이다.
성체성사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믿음은
하느님의
힘이며
생명이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삶은 언제나
목마르다.
믿음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마음이 목마른
우리들 삶이다.
마음이
목마른 것은
마음에
있어야 할
믿음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을 향한
믿음뿐이다.
믿음은
빵이 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빵처럼
믿음을
필요로한다.
믿음은
실천이다.
주님의 빵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주는
실천으로
우리를
살리신다.
예수님의
한 생애가
오늘도
빵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믿음은
빵을 모시는
은총이다.
목마른
우리를 위해
믿음의
빵으로 오시는
믿음의
주님이시다.
믿음은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빵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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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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