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교회가 평신도 주일을 기념하는 것은
평신도들이 세상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사명을 자각하고,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사도직 활동을 수행하도록
고무, 독려 하고자 함입니다. 이런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공동합의성’과 주인의식에서 찾고자 합니다.
공동합의성의 실현
2015년 교황님은 현대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공동합의성’ 즉 교회가 ‘함께 나아감’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러한 공동합의성 실현을 위한 책무는 어느 한 편에만 있지 않습니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되
서로가 분리되어 있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권위로 교도권을 수행하는 직무사제와
성령으로부터 부여받은 보편 사제직과 예언직을 수행하는 평신도로
구성되어, 이들은 상호 연대적이며 보완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주인의식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변의 여러 상황을 이해시키려 할 때
‘주인과 일꾼’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는 경우를 우리는 성경에서
자주 접합니다. 성경에 인용된 ‘주인과 일꾼’의 비유는
모두 같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지만, 오늘날 한국교회가 처한
어려운 현실을 생각할 때, 주인과 일꾼이란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또 다른 의미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일꾼에게 주인의 역할을 맡기면서
“네가 지금부터 주인이다”라고 말한들 일꾼의 의식 속에 주인이라는
생각이 없다면, 하는 일이 주인의 일이라 할지라도 그는 영원한 일꾼입니다.
그렇지만 비록 일꾼의 역할을 하고 있을지라도 마음속에 항상
주인의식이 내재되어 있다면 그 일꾼은 진정한 의미의 주인입니다.
이처럼 주인의식을 가지고 주변 상황을 바라보면,
시각이 변하게 되고, 상황에 임하는 자세도 변하게 되며,
이 변화가 결국 더 큰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몸담고 있는 교회에서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교회를 바라보면 교회가 처한 상황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답을 찾고,
나아가 더 큰 변화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변화의 주체는 남이 아닌 나 자신이어야 합니다.
글 : 한병성(세례자요한) 회장 – 전주 평신도사도직 단체협의회
노래하게 하소서!
“안녕하세요, 성가 가수 나혜선 요셉피나입니다.”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성가 가수임을 소개할 수 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1999년 제1회 cpbc 창작생활성가 제 본선 입상을 하면서 성가 계에
입문하고 성가와 함께한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함께 데뷔하여 지금까지 찬양만을 이어온 존경스러운 동료들도 있지만,
그들에 비해 저는 치열하게 이 안에 머물며 찬양만을 이어온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대기업 비서, 금속공예가, 방송 진행자, 공연기획자, 감정코칭 지도자,
퍼머넌트 메이크업 아티스트, 누군가의 딸, 아내, 엄마, 그리고 성가 가수 ….
지난 20년 동안 지나간, 또는 여전히 붙어있는 제 이름 앞의 수식어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성가 가수’라는 단어 안에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성가를 놓지
못했던 제 신앙의 성장기가 고스란히 배어있습니다.
하루는 길에서 딸아이가 엉뚱하게도
“나는 성가 가수 나혜선 요셉피나의 딸이다!”라며 연이어 소리치기에
당황하여 아이의 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율아, 엄마가 성가 가수인 게 좋아? 엄마는 그것 말고 다른 것도 하잖아.”
“응, 난 엄마가 성가 가수인 게 좋아, 그게 내 엄마여서 더 좋아!
하느님이 듣기 좋으니까 성가 가수 시켜준 거 아냐?”
아이의 말은 지난 삶을 떠올리고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공연 스케줄과 겹쳐 공예 공방 문을 일찍 닫아야 할 때의 답답함,
밤샘 녹음을 마치고 일을 나갈 때의 고단함,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노래하는 것
같던 외로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두려움,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과
관계 속의 어려움 등 극복해야 할 상황들이 점차 늘어만 갔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치가 쌓여가도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제겐 살아내야 했던 삶이었고, 그렇게라도 저를 불러 세워주시는 것을
감사라 여기며 받아들이려 애썼습니다. 아이의 단순한 대답은 이런 삶 속에서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이리저리 선을 긋고 재단하던 제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아이의 답변이 싫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노래하는 삶을,
제가 단순하게 원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네, 주님! 그 부르심에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기꺼이 응답하겠습니다.
노래할 때, 제 안에 오셔서 이를 기뻐하며 즐기시는 분은 다름 아닌 주님이십니다.
저의 찬양이 더 이상 당신을 기쁘게 하지 않는다면 저는 그 찬양을 멈춰야 함을
압니다. 저의 노래가, 저의 이름이, 저의 모습이 기억되기보다
오래전 누구의 찬양인지도 모르고 따라 부르며 제가 위로받고 회복했던 것처럼
저의 찬양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찬양이 당신을 닮아,
소멸해가는 누군가의 마음에 생명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오소서 성령님, 제 안에 머무소서.
그리하여 당신으로 인해 제가 노래하게 하소서. 아멘
글 : 나혜선(요셉피나) – 생활성가 가수, 금속공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