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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3일 사순 제1주일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태오 4,1-1)
Jesus said to him,
“Get away, Satan!
It is written:
The Lord, your God, shall you worship
and him alone shall you serve.”
말씀의 초대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다. 하느님 안에 복을 누리고 사는 것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뜻을 벗어날 때 인간은 스스로 불행을 부르는 것이 된다(제1독서).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로 다시 생명을 선물받는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하시며 기도하실 때 악마의 유혹을 받으신다.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에 대한 순명으로 예수님께서는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시고, 당신께 주어진 소명을 이루어 나가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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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나가신 예수님께서 깊은 유혹에 빠지십니다. 세례 때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늘의 소리를 들으시고, 메시아의 소명을 시작하시며 받으신 유혹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세상에서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부와 명성과 권세를 가진 그런 메시아가 되라는 악마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악마는 세상에 널려 있는 돌을 빵으로 만들 듯, 사람들을 배불리고, 그들이 탐내는 재물을 채워 주는 그런 메시아가 되라고 유혹합니다. 능력을 과시하고 명성을 얻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또한 악마와 타협을 해서라도 권세를 얻어 세상을 지배하라고 속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유혹을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기까지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의 모습을 택하십니다(필리 2,7-9 참조). 예수님께서 공생활 내내 숱한 오해와 유혹을 받으셨을 때에도, 심지어 제자 베드로마저 예수님의 수난의 길을 막았을 때에도, 단호하게 당신의 길을 가실 수 있었던 것은 광야에서 유혹을 이기신 이런 단련의 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선과 악이 투쟁하는 싸움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유혹에 걸려 넘어져 악의 편에 서면 결국 내적 힘을 잃고 맙니다. 우리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악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은 없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오로지 주님 말씀에 힘입어 “아니오.” 하고 단호하게 유혹을 뿌리치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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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악마는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단식을 마치시고 허기지신 예수님께 빵을 만들어 보라고 충동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그분께 작은 빵 하나를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거절하십니다. 자신을 위한 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단호하신 말씀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합니다. ‘그대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대를 천사가 잡아 줄 것이 아닌가.’ 만약 그랬더라면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철없는 위인이 되셨을는지요? 유혹은 이렇듯 유치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유치한 감정에 속아 유혹에 발을 내딛습니다.
주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위안이 됩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악마라면 우리도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유혹 앞에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나만 왜 유혹에 시달리는가? 나는 왜 아직까지 이 유혹을 받아야 하는가?’ 이러한 느낌이 들 때에는 오늘의 복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악마를 물리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야 합니다. 유혹은 죄가 아닙니다. 윤리적인 그 무엇도 아닙니다. 유혹은 그저 유혹일 뿐입니다. 사순 첫 주일인 오늘, 우리는 유혹의 본질을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의 모습도 묵상해 봅시다.
앵무새 신앙 -박용식신부- 몸으로 실행하지는 않으면서 입으로만 외치는 사람을 앵무새에 비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고 말씀하심으로써 앵무새처럼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행동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아주 못 생긴 아가씨가 길을 걷고 있는데 한 상점에서 앵무새가 불렀습니다. "이봐, 아가씨! 진짜 못생겼다."
못 생긴 아가씨는 화가 났지만 참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다음날 다시 그 상점을 지나치는데 앵무새가 또 소리쳤습니다? "이봐, 아가씨! 진짜 못 생겼네."
못 생긴 아가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상점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항의했습니다. 상점 주인은 사과를 하며 다시는 그렇지 않도록 조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그 아가씨에게 앵무새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말 안 해도 알지?"
사실 앵무새는 말을 실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말뜻조차 모릅니다. 앵무새처럼 뜻도 모르면서, 또는 뜻은 알지만 실천하지 않는 신자들이 바로 '주님, 주님' 외치면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쌍한 '앵무새 신자'들일 것입니다.
스테파노씨는 성당에서 모범신자로 인정받아 각종 봉사직을 두루 거쳐 지금은 연령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수산나와 자녀들은 오래 전부터 냉담해 성당에 나오지 않습니다. 남편이 성당이나 동네에서는 훌륭한 사람일지 몰라도 가정에서는 낙제 점수, 아니 빵점이라는 겁니다. 아내에게 표독하고, 부모에게 불효하며, 자식들하고도 원수처럼 지내는 남편에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났다"며 신앙을 버린 겁니다. '주님, 주님' 외치기만 했지, 가정에서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잘못된 신앙생활 때문입니다. 스테파노씨야말로 앵무새 신앙인으로서 무늬만 신자일 뿐 진짜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부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나쁜 사람,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는 하지만 남을 해치지는 않는 보통 사람,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이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해만 끼치지 않는 보통 사람을 하느님 뜻을 실천하는 훌륭한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걸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은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참 신앙인은 못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상의 이런 기준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을 부르면서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단순히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도움으로써 하느님 뜻을 실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법을 잘 지키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기도도 잘 하고, 봉사도 잘 하고, 주일에 성당에 잘 나오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기본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웃을 돕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몸과 시간, 재물 등 가진 것 모두를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사용할 때 비로소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것이겠지요.
비포장 시골길에서 승객을 태우고 가던 버스가 고장이 나서 멈췄는데 아무리 시동을 다시 걸어봐도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승객 30여 명이 내려서 버스를 밀어보지만 10명만 힘껏 밀고, 10명은 미는 척 손만 갖다 대고 있고, 나머지 10명은 뒷짐을 지고 서서 '영차, 영차'하고 입으로 소리만 질렀습니다. 버스는 다시 시동이 걸려 운행을 했지만, 버스가 다시 시동 걸려 움직이도록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은 10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 20명은 말로만 또는 미는 시늉만 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본당이나 사회에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10명에 속합니까? 힘껏 밀어 시동이 걸리게 한 10명에 속합니까? 아니면 뒤에 서서 입으로만 '영차, 영차'하고 외치는 사람에 속합니까? 말로만, 입으로만 '주님, 주님'하는 앵무새 신자가 되지 맙시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 -최인각 신부- 하느님 나라 가는 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 나라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단지 입으로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바라시는 당신의 뜻을 실천해야 함을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판 날에 많은 이들이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하더라도,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라고 선언하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어 세상에 파견하시며 '가서, 만민을 제자로 삼아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며 아픈 이들을 고쳐주는 기적을 행하라.'라고 하셨는데,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많은 일을 한 이들에게 왜 '불법을 일삼는 자들'이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파견 받은 이들(제자들)이 파견한 이(예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파견한 이를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主客顚倒]. 이처럼 본래의 뜻이나 정신을 잊어버리고 주객이 전도되는 일들이 우리의 일상에 다반사로 일어납니다. 특별히 무지와 권력이 야합하여 일이 진행될 때,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불법을 일삼는 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먼저 인식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의 협조자이지, 하느님이 나의 협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 아버지를 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나 자신을 그분의 도구로 내어 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본분과 분수를 지킬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많은 일을 행하려고 애쓰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쉬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고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지만, 정작 하느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식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식별력이 부족할 때, 자신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관철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식별을 위한 최고의 방법은 말씀을 읽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어리석은 사람이 행하는 것이 되어 모두 무너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든든한 반석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삶은 아무리 거센 풍랑이 밀려와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의 슬기로운 자의 집인지, 아니면 완전히 무너질 어리석은 자의 집인지를 잘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 하느님의 뜻이나 모두의 이익보다는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들과 이에 동조하여 작은 이득이라도 얻어 보려고 애쓰는 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아픕니다. 중동과 그 이외 지역의 독재자들과 그 집단이 저지르는 부정과 비리와 불의, 비민주적인 장기집권, 부정축재와 이에 대항하는 국민에 대한 무차별 공격은 정말로 '불법을 일삼는 자들의 행동'입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픔과 어둠을 넘어 한 생애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온 인류에 큰 희망과 사랑을 전해주었던 이들이 있어 한편으로 위로가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마더 데레사, 김수환 추기경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는 작은 성인들이 있어 한편으로 마음이 흐뭇합니다. 그분들은 정말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반석 위에 빛나는 집을 지어 바친 위대한 거인들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누군가로부터 흐뭇한 사람, 슬기로운 사람,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다시금 다짐하며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용기와 희망을 달라고!
유혹은 내 집착의 그림자 -권철호신부- 무릇 삶이란 살아 있을 때 향기를 간직하고 삶이 다한 자리에 울림으로 자리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봄기운 한가득 아지랑이 피어나는 그 길가에서 삶의 향기를 간직하기 위해 오늘도 숱한 떨림 속에 자리하는 삶이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그 떨림만큼 울림을 간직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언젠가 선배 신부님께서 기도란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대해 많은 말들을 들었지만 유독 마음속에 와 닿았던 것은 내 집착의 드러남이 유혹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도 않는 것에 유혹당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유혹이란 내 집착하는 것의 드러남이고 기도는 그래서 나에게 다가올 유혹의 실체를 확인하게하는 작업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광야를 향해 나아갑니다. 황량한 모래 언덕만이 자리한 그곳은 간혹 보이는 산조차 산이라 말하기 어색한 흙과 돌로 이루어진 언덕 같은 곳이었을 뿐입니다. 우리네 산이 철따라 옷을 갈아입어 사람의 눈길을 끌어당긴다면 이스라엘 광야는 맨몸, 맨살을 속절없이 내보이는 통에 보는 이가 오히려 난처해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자연의 풍요로움에 마음의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입고 있던 옷조차 벗어 덮어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광야는 빛의 색감이 그 어디보다 묘한 여운을 남기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시시각각 태양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음영이 드러나는 것이 마치 하느님 의 햇살에 의지해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광야를 찾으신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였을 겁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삶, 인간이 자신을 가리고자 입은 온갖 옷들을 벗어 던진 채 오직 하느님의 손길로만 자신을 치장하고자 하는 열정이 살아 숨 쉬는 곳이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이란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이 입고 있는 위선과 거짓, 탐욕의 실체를 유혹의 그림자를 통해 확인해 보는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단한 것 같지만 한 끼만 굶어도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약함을 마주해야 하는 곳, 채워질 수 없는 탐욕의 창고와 결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욕망의 깊이를 위해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 사순절입니다. 하느님의 따사로운 햇살 한 조각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삶이었는데, 어찌하다 이렇게 덧씌워진 욕망들의 두터운 옷들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는지 되돌이켜 보는 시간이 사순절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순절이 은총의 시간일 수 있음은 하느님으로만 지탱되어지고자 하는 우리의 간절함이 자리하기 때문이고, 단지 고통과 고난으로 초대된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손수 시중들기 위해 초대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에게 광야가 그러했듯이….__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반명순 수녀-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결단으로 나갈 굳센 믿음을 더해 주소서 !
세밀한 독서 (Lectio)
절제와 희생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수난과 죽음은 고통과 절망을 불러오며, 그것 자체로 어두움이고 메마른 광야와 사막이 되어 우리 내면에 펼쳐집니다. 그러나 광야는 하느님을 향한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며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을 불러옵니다. (묵시 21, 1 참조)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로 광야” (마태 4, 1) 에 나가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당신의 신원과 직무에 공적인 확신을 불러왔습니다. 성령은 ‘광야’ 라는 거칠고 황량하며 고독한 장소로 예수님을 인도하며 ‘하느님 아들’ 로서 직무를 어떻게 수행해 갈 것인가 하는 기로에 서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간의 광야생활에서 유혹을 받았듯이 예수님께서도 “사십 일간 밤낮으로 단식” (2절) 을 하신 다음 악마의 유혹을 받습니다. 악마는 하느님 뜻을 거슬러 세상을 따르도록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는 “유혹자” (3ㄱ절) 입니다. 유혹자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계시된 말씀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3, 17; 4, 3. 6), 돌들에게 빵이 되게 하라고, 성전 꼭대기에서 몸을 던져보라고 합니다.
빵은 생명 보존을 위한 생활필수품입니다. 악마는 예수님께 현세의 목적을 위해 메시아의 영적 능력을 이용하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 유혹은 예수님만 받았던 것이 아닙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끊임없이 받는 유혹입니다. 거룩한 것까지 육신을 위해 쓰도록 충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모든 의로움’ 을 이루기 위해 (3, 15)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것처럼, 현세의 메시아가 되라는 유혹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빵이 아닌 하느님의 모든 말씀” (4, 4ㄷ) 으로 살아가며 그분만을 섬기겠다고 하십니다. (10절)
“몸을 던져보라.” (6ㄱ절)는 것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조정하고 떠보라는 유혹입니다. 시편 91, 11 – 12을 글자 그대로 인용하는 악마한테 예수님은 성경의 근본 의미를 들어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7절) 하고 단호히 거절하십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그분을 시험했지만 (1코린 10, 9 참조),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하느님을 시험하기보다 끝까지 신뢰하고 순종하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표명하십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보여주며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4, 9) 하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악마의 약속은 이미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이신 메시아한테 하셨던 말씀을 이용한 것입니다. 세상은 악마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한테서 예수님께 위임된 것입니다. (시편 2, 8; 72, 8; 마태 28, 18) 또한 ‘경배하다’ 라는 동사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완전한 복종을 뜻합니다. (마태 2, 2; 2, 11; 8, 2; 9, 18; 창세 37, 7 – 10 참조)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빠졌던 최초의 유혹 (창세 3, 1 – 7) 으로 제1계명을 거슬러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10ㄴ절) 하시고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10ㄷ절) 하며 물리치는 동시에, 예수님의 승리와 하느님 아들로서 권위를 확고히 하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고 하느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충실한 새 이스라엘이 되십니다. 유혹을 물리칠 때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11절) 이렇듯 유혹을 물리친 광야는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하고 그분을 만나는 장소가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세례 사건과 이어진 유혹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미를 새롭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시련과 유혹 속에서도 주님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자기희생의 삶을 살아야 하며, 하느님의 자녀는 어떤 유혹에서도 승리할 것을 보여줍니다.
묵상 (Meditatio)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 (마태 4, 3) 이 얼마나 크고 위험한 유혹입니까 ?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서, 그럴 수 없다고 단언하는 나의 관념 앞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못할 것이 무엇이며 왜 당장 행동하지 않으시는가 하며 수없이 되뇌던 저한테 다가온 유혹이기도 합니다. 저의 믿음을 땅에 묶어놓은 채 예수께서 현세적 욕구를 채워주는 메시아로 오시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왕좌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영원한 것을 바라보라 하십니다. 구원은 ‘돌이 빵이 되는 것’ 에 있지 않으며, 참된 믿음은 몸을 던져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졌을 때 나를 받쳐주는 기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악마한테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더 큰 권력을 얻기도 하지만, 그 대가로 자유와 사랑을 잃게 됩니다.
기도(Oratio)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 너희는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마라. (시편 95, 8)
반명순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로마 5, 17 – 19 )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사실 매력의 기준은 시대나 지역 그리고 문화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떠올려보세요. 그 그림을 보면 기형적으로 보이는 엄청난 엉덩이와 풍만한 몸매의 여자들이 등장하지요. 왜냐하면 당시에는 엉덩이가 크고 풍만한 몸매가 매력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 모습이 매력의 기준이 될까요? 그렇지 않지요. 지금은 건강미라고 말하는 약간 그을린 피부, 날씬하면서도 잘 발달된 근육을 가진 사람이 선망의 대상입니다. 유혹 뿌리치기 -정인준 신부- 교구청 소임 중에 성지나 성당 토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유혹, 그 뿌리깊은 영혼의 적 -오상선신부- 예수님 또한 둘째 유혹은 소유욕이다. 유혹 -고준석 신부- 교회는 재의 수요일로부터 부활 전야까지 40일 동안 사순절을 지내게 된다. 사순절은 부활을 준비하는 시기로써,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의 의미를 묵상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은총의 시간이다. 세 가지 유혹 = 사람들의 세 가지 단점 = 예수님의 싸움
-정호 신부-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복음은 그런 불가능이 현실이었음을 전해줍니다.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이야기는 무엇을 말할까요? 성경이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사순 시기 첫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기 전 40일 동안을 교회는 사순 시기라 부르며 전례에서 특별한 시기로 기념합니다. 40일의 사순 시기 관행은 교회가 로마제국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은 4세기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우리의 신앙 생활사에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기도 없이 죄를 알 수도, 이길 수도 없다.
-유영봉 몬시뇰- 묵상길잡이 :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자유란 선택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선택은 항상 갈등과 고뇌를 동반하는 것이며, 이는 항상 유혹을 불러오는 것이다. 기도 없이 죄를 알 수 없고, 죄를 이길 수도 없다.
이렇게 시대에 따라 변하는 사람들의 매력 기준을 보면서, 후대에는 제 얼굴도 매력 덩어리라고 취급되지 않을까 라는 엉뚱한 상상도 해보게 되네요.
그런데 세상의 것들 중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준 역시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변하는 세상의 기준만을 쫓으려 하고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착각 속에서 힘들게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한 남자가 속옷가게에서 여자 친구에게 생일선물로 줄 속옷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점원이 여자 친구의 사이즈를 물었을 때 남자는 ‘완벽해요’라고 대답했지요. 이 말에 점원은 날씬한 사이즈의 속옷을 싸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옷을 든 여자 친구가 나타나 자기 몸에 맞는 특대사이즈 옷으로 교환해 갔다고 하네요.
이 남자에게 있어서 가장 완벽한 몸매를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세상 사람들은 특대사이즈 옷을 입는 거구의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완벽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몸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몸매입니다. 이 남자처럼 변하지 않는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이 세상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 삶 안에서는 변하는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유혹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를 보면 뱀의 유혹에 넘어가는 원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에 쉽게 유혹에 넘어갑니다. 바로 세속적인 생각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모습과도 비슷합니다.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유혹,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유혹들. 그러나 그 유혹들은 나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만들어주는 못하는, 오히려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유혹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악마의 유혹을 모두 이겨내십니다. 그 비결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서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도, 세상의 모든 나라와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서 악마에게 절하는 것도 모두 순간의 기쁨에 불과한 유혹인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며 살면서 얻는 기쁨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악마의 이러한 유혹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 유혹이 너무나도 달콤해서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중심을 잡고 사느냐에 따라, 아담과 하와의 모습으로 또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중심을 두고 살고 있을까요?
하느님께 중심을 두고 살아가는 신앙인이 됩시다.
대부분 비신자와는 해결이 잘 되는데 왜 그런지 신자들이 그 땅의 소유주인
경우에는 서로 어색하거나 마무리가 잘 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처음에는 실망이 크기도 했지만 “신앙과 돈은 별개”라는 말을 생각하며 위안을 삼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를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돈이기 때문에 관련 공무원도 실망하는 눈치입니다. 이럴 때 돈이라는 유혹을 떨쳐버리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덕도 누리고 있지만 또 어쩔 수 없이 그 그늘에서도 살아가야 하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유혹자는
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명예욕구로, 세상의 달콤한 가치관으로 주님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위로와 교훈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유혹 앞에서 흔들리는 나의 모습과
더불어 큰 위로를 갖게 해줍니다. 그러나 악령의 유혹 앞에 단호하신 주님은
유혹을 단호하게 끊는 용기를 갖게 합니다. 씨를 뿌리고 보면 잡초도 채소도
함께 땅에서 올라오는데, 처음에는 두 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다 좋아
보입니다. 어린 잡초를 뽑는 것은 쉽지만 때를 놓쳐 다 자란 뒤에 잡초를
뽑으려하면 소중한 채소까지 들먹이게 됩니다. “유혹은 처음에 바로
잡아야 한다”라는 어른들의 가르침을 늘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우리 보다 앞서 갖가지 유혹을 당하신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고 그 유혹에 넘어간 것과 달리
예수님은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제2의 아담의 모습을 보여주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당하신 유혹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째는, 식욕이다.
단식으로 허기져 있을 때 가장 큰 유혹은 음식의 유혹이다.
마귀는 바로 빵으로써 예수님을 유혹한다.
식욕은 이렇게 모든 유혹의 첫번째의 것이다.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은 수도자 자격이 없다>고 하신
어떤 성인의 말이 기억난다.
40대에 가장 신경써야 할 미덕이 <절제>라고 읽었다.
사실 소식하고 음식을 절제할 수 있어야만
모든 욕심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사순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식탐에서 해방되어
영적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 주기에 거룩한 시기이다.
음식으로 배가 부르게 되면 그 다음으론 소유욕이 발동한다.
우리가 배고플 때는 없이도 잘 살았는데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니 엄청난 소비주의가 발동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식욕이 채워지면 자연스럽게 소유욕으로 넘어가게 된다.
소유욕은 끝이 없다.
비단 큰 집이나 자동차, 물건 등에 대한 소유욕만이 아니라
자식이나 사람에 대한 소유욕도 문제이다.
50대는 특히 이 소유욕을 극복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소유욕에서의 해방을 통해 더욱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50대 신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셋째 유혹은 권력욕(명예욕)이다.
사람이 먹는 것이 해결되고
덧붙여 돈도 많이 벌어 가질 것은 다 가져보고 나면
마지막으로 발동하는 것이 이 권력욕(명예욕)이다.
한국의 정치가들을 보라!
대부분이 이런 전철을 밟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정치가들이 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는 노름에
기대할 필요도 실망할 필요도 없다.
탐욕 덩어리의 사람들 앞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치란 사실 기대할게 못된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돈많은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도 무슨 장(長)자리라도 하나 해보려고
덤비는 미성숙한 모습들을 우리 주위에서 자주 보게 된다.
이러한 미성숙한 욕심을 지닌 장을 맡은 신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이상한 방향으로 가게 되고
이들이 그 장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면
이상한 싸움박질을 벌이기도 한다.
특히 60대 신자들이 조심해야 할 유혹이다.
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범을 보이시기 위해
유혹을 받으신 것은 아닐까?
우리가 당하게 될 유혹들을 미리 보여주시고
어떻게 이런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지
그 본보기를 보여주신 것은 아닐까?
이 유혹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자리하고 있음을 무서워해야 한다.
내 안에 어떤 유혹이 이미 도사리고 있는지 잘 살펴보자.
나는 어떤 음식이든지 정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음미하며 먹고 있는가?
쓸데없는 음식투정을 부리거나 맛있는 음식만 먹으려는
미식가, 탐식가는 아닌가?
내가 갖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때문에 안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정말 없어도 될 것인데도 소유욕 때문에
쓸데없는 것들을 너무도 많이 사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남들보다 윗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회장님, 단장님 등
장 소리를 듣기를 바라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상류층의 부류에 속하기를 바라고
아니 그런 이들과 친분을 갖는 것만으로도
내가 높아졌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우리가 이런 상태로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가 빠졌던 그 뱀의 유혹에 다시 빠지는 길이고
이것을 의식하고 과감히 물리칠 때
예수님처럼 새로운 하느님 나라를 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욕심이 없는 나라이리라.
그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소명이라면
우리 먼저 이러한 욕심에서 벗어나야 하리라. 아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신다.
첫 번째, 빵의 유혹이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3).
이것은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40일씩이나 단식을 한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변화시켜 먹어 보라는 것은 가장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배고픈 사람에게 먹음직스런 빵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배고픔을 느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배고픔이 얼마나 커다란 고통인지,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두 번째는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명예에 대한 유혹이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마태 4,6).
이 유혹은 참으로 매력적인 유혹이다. 사람은 누구나 남 앞에서 무엇인가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함으로써 뽐내고 싶은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혹의 말은 성경을 인용함으로써 겉으로는 하느님을 신뢰하는 척하면서 하느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이 더 드러나고 이로써 인간이 하느님이 아닌 자신이 최고가 되려는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받는 인정이나 명예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인기를 얻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명예를 얻기 위해 거짓과 불의와 타협하고 양심을 파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세 번째로 세상의 권력과 부귀영화의 유혹이다.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마태 4,8-9).
너무나 탐스러운 유혹이다. 남을 지배하고 그 위에 우뚝 서서, 남에게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과 힘은 얼마나 탐스러운가? 그렇기에 세상의 권력과 부귀영화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이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절히 싸우고 있는가? 모든 부정부패가 이것으로 인해 생기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4,10).
그렇듯 오늘 복음의 이 세 가지 유혹은 우리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유혹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먹음직스런 빵과 재물, 남에게 받고 싶은 인정과 명예, 남 위에 군림하는 힘과 권력, 그것은 참으로 매력적이고 탐나는 것들이다. 그렇듯이 모든 유혹은 그렇게 먹음직스럽고 탐스럽고 갖고 싶어 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선 악마가 예수님께 이런 유혹을 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인류는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해 잘못된 삶을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악마의 입장에선 세상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악마의 유혹이 사실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가르칠 양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모르는 이 세상은 이미 내 생각대로, 내 방법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일종의 자신감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겁도 없이 악마는 시종일관 예수님께 자신 있게 터무니없는 유혹을 펼칩니다. 그리고 그 유혹들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삶을 너무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마가 예수님께 던진 세 가지 유혹은 예수님을 홀리기 위한 유혹이 아니라 예수님이 앞으로 펼치실 공생활에 대해 사람들의 악함에 대한 증언과 사람들의 부조리한 현실인식을 예수님께 가르쳐 ‘그것이 가능할까?’하는 질문으로 그분을 포기하게 하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내가 가르쳐주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옳다는 은근한 자만심마저 보입니다. 그래서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싸우셔야 할 사람들의 잘못이기도 하고 사람들의 약함을 나타내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유혹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허기진 예수님께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천사들이 받들어 줄 테니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세상 모든 나라와 화려함을 담보로 악마에게 절하라는 유혹입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은 예수님에게 당신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와 무엇으로 사람들을 가르칠 것인지, 또 결국 이미 세상은 악마의 것이니 악마의 방식에 따르라는 도전으로 끝을 맺습니다.
40일 간의 단식으로 허기지신 예수님께 돌을 빵을 만들어 보라는 유혹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근본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구하신다는 것이 결국 당신 좋으라고 하는 일이 아닌가 악마는 질문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우선 당신 허기짐이라도 채우라고 악마는 예수님께 충고합니다. 이것은 또한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무엇이든 하려 한다는 현실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선 네 자신부터 살려보라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들으셨던 차가운 비웃음의 질문을 이미 악마가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곧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신부터 살리는 사랑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 놓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허기짐에도 돌을 빵이 되게 하는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생활 중 돌이 빵이 되게 하는 기적을 뛰어넘는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들의 허기짐에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을 떠올리게 됩니다. 자신의 허기짐은 돌보지 않으시고, 다른 이의 허기짐을 돌보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의 모범이 됩니다.
높은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은 하느님 아들로서 그 자격을 증명해 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가 당연히 떠받들 것이고 그것은 곧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악마는 이런 유혹을 통해 예수님께서 도대체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그들을 사로잡을 것인지, 가르칠 것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잘난 능력을 한 번 보여 주세요’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사람들이 능력이나 권위에 얼마나 약한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요즘 사람들은 능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되니 너도 능력을 한 번 보여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다가온 유혹을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으로 극복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가진 신통방통한 능력을 사람들을 들뜨게 해서 당신을 따르게 하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려 하신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지 그분의 힘이나 능력, 재주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두 번째 유혹은 이번뿐만 아니라 복음서 곳곳에서 악마와 예수님이 충돌하는 부분에 자주 등장합니다. 악마는 예수님만 보면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니,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라 떠들고, 사람에게서 나갈 때 경련을 일으키는 과장된 몸짓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드러내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때 마다 ‘입을 다물라’고 말씀하곤 하십니다. 악마는 사람들이 얼마나 능력에 약한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 능력에 대한 맹신이 하느님 사랑을 훼손시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시곤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악마는 예수님께 세상 모든 것을 주겠노라고 약속하며 자신에게 고개를 숙일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이미 악마가 얼마나 사람들의 악한 마음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며 세상이 그럴 만큼 이기적이고 죄악에 물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미 세상은 자신의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악마의 목소리는 그냥 무시하기에는 너무도 당당합니다. 악마가 세상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세상을 차지하는 그 아름다움은 모두 악한 사람들의 싸움과 이기심의 투쟁에서 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런 세상에 사랑을 심겠다니 우습다고 그러느니 차라리 나의 방법을 쓰는 것이 어떤가 하는 충고까지 악마는 서슴지 않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고 오히려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하시지 않았느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리이며, 희망을 두고 계시는 사람들을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죄 많은 인간에게서도 전혀 불안함이나 의심이 아닌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하느님이라는 최종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래서 여전히 세상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악마의 주장은 세상은 자신의 것이니 하느님께 사람 전체를 포기하라는 요구요, 세상을 포기하라는 요구가 됩니다. 그러니 이 유혹이 예수님의 노기를 건드렸음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 되돌리려는 다짐을 더욱 굳게 하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
결국 악마는 이런 주님 곁을 떠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세상이 이뤄놓은 모든 악한 습관과 잘못 모두를 극복하려고 사랑 하나에 모든 것을 거셨고, 이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천사들을 시켜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악마의 유혹이 우리가 가장 약한 부분을 너무나 자세히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어떤 일도 서슴지 않고 하려하고, 그것이 세상을 사는 이유인 것처럼 말하곤 합求?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도 사람됨이 아닌 능력과 재력 등의 조건을 따지는데 익숙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서로 서로 경쟁이란 이름 아래에서 서로 다투며 서열을 매기며 참으로 이기적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마져도 자신을 위해 이용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악마의 세 가지 유혹은 우리의 세 가지 단점을 말해주고 예수님께서 결국 이것을 극복하시려 하셨고, 이로 인해 돌아가셨고, 부활로써 이를 극복해주시는 싸움을 벌이셨다는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니 복음 속에 드러나는 주님의 수난이 이유가 되기도 하는 이 모든 것을 우리 안에서 극복하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 하신 유일한 가치, 곧 사랑을 우리 안에 품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악마의 치명적 유혹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 계속됩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끊임없이 사랑 하나의 힘으로 이를 극복해야 합니다. 주님이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에 확신을 가집시다.
-서공석신부-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태초에 인간이 유혹에 빠져 범죄 하였다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복음에서는 예수가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한 후 마귀의 유혹을 체험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두 개의 이야기들은 실제 일어난 사실을 우리에게 보도하는 것이 물론 아닙니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를 위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림과 같은 구체적 이야기 안에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담은 것입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인간은 그 기원에서부터 하느님과 관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인간 생명이고 하느님이 베푸신 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 불행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선과 악을 판단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행동한 데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창세기는 인간이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나무열매”를 먹는 유혹에 빠졌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바는 인간은 “먹음직하고 탐스럽고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이만 보이면, 무엇이라도 해버리는 비극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두 주인공은 하느님이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음직하고 탐스럽고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아서 먹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행해야 하는 선과 행하지 말아야 하는 악을 판단하면서 하느님과 동료 인간 앞에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광야에서 유혹 받는 예수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유혹하는 자가 예수님에게 권하는 것은 “탐스럽고 자기를 영리하게 해 주는” 길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어 주어서 모든 사람이 탐하는 것을 주는 하느님을 가르치라는 유혹입니다. 하느님을 이용하여 사람이 잘되는 길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그들로부터 환영받는 인물이 되라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그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사는 것이지, 사람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두 번째의 유혹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기적을 하라는 말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신앙인들이 받는 유혹입니다. 기적한다고 소문이 나면 사람들은 많이 몰려옵니다. 가톨릭교회 안에도 교회 밖에도 그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론매체가 그런 사이비 종교집단들에 대해 보도하는 바를 가끔 봅니다. 기적은 모든 사람에게 탐스럽고 사람을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이 보이는 술수입니다. 오늘 이야기의 예수님은 이 유혹도 거절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신명 6,16)는 구약성서 말씀을 인용하여 거절하셨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생활 무대로 주신 이 세상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초능력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과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한계를 지니고 그들과 더불어 삽니다.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하셔서 자기도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려 노력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받으신 세 번째 유혹은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역시 탐스러운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도 한 마디로 거절하셨습니다.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이사야서(42,1)의 구절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이용하여 먹을 것을 얻고, 하느님을 이용하여 초능력을 발휘하고, 하느님을 이용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필요한 의식주(衣食住)는 우리 스스로 노력해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권력과 부귀영화를 탐하고 그런 것을 위해 사생결단 뛰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인은 주변의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봅니다. 형제자매는 자기 자신을 뽐낼 대상도 아니고, 지배할 대상도 아닙니다. 형제자매는 위해주고 감싸주면서 더불어 살 대상입니다. 우리에게 탐스럽고 우리를 영리하게 해 줄 것 같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형제자매는 우리의 경쟁상대로만 보입니다. 우리가 쉽게 빠지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겪으셨다는 유혹은 우리가 일상생활 안에서 겪는 일들입니다. 재물이 소중하고, 남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능력을 탐하고, 부귀영화를 꿈꾸는 우리들입니다. 성서가 유혹이라고 말할 때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사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받으셨다는 유혹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빵을 주고 기적을 주고 부귀영화를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의 두 주인공과 같이 선과 악의 기준을 자기 안에 두고 자기에게 탐스러운 것을 택하는 사람이 되라는 유혹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야기 다음에 즉시 유혹의 이야기를 갖다 놓았습니다. 이 이야기에 나타나는 예수님을 본받아 재물이나 기적이나 부귀영화를 주는 하느님을 찾지 말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그런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사람은 자기 환상을 좇아 살지 않고,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며 하느님의 다른 자녀들과 더불어 삽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생명이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광야와 같이 황량하게 살아야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가까웠던 사람의 배신, 감수할 수밖에 없는 각종 실패와 병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독 등은 우리가 광야에 내던져진 순간들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상실의 순간들입니다.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했다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같이 우리에게도 우리가 기진하여 허덕이는 광야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이때 빵과 기적과 부귀영화를 꿈꾸지 않고 하느님을 택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선하고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믿고 그 자비를 실천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 능력, 부귀영화도 우리는 언젠가 결정적으로 버리고 이 세상을 하직하여 하느님에게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1. 사순절은 기도에서 시작되고 기도로 끝맺어야 한다.
지난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다. 사순절(四旬節)이란 교회 전례 안에서는 속죄의 재계(齋戒)를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며 부활축일을 준비하는 40일을 말한다. 교회는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신자들의 머리에 재(災)를 뿌리며 "사람아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하며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도록 초대한다.
막연히 "이번 사순절은 좀 잘 지내봐야지!"하는 결심만으로는 부족하다.
우선 조용히 하느님 앞에 머무는 기도의 시간을 통해 "하느님 보시기에 나는 어떤 모습인가?"를 비춰봐야 한다. 자신의 빚이 얼마인지 모르면 빚을 갚을 수 없듯이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는 그 허물을 벗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인간다움을 손상시키는 벗어버려야 할 악습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위해서도 먼저 기도의 시간이 요구된다.
때로는 분명히 이것은 죄인데도 죄라고 느껴지지 않는, 아니 죄(罪)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경우도 있다. 죄(罪)는 인간을 비인간화(非人間化)시키고 왜소(矮小)하게 만드는 것이다. 죄(罪)를 죄(罪)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도 기도는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마음의 교만은 죄를 죄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자신이 끊어버려야 할 악습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그것을 넘어서기 위한 구체적인 결심을 해야한다. 아무리 구체적인 결심을 했더라도 그 결심을 살아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의 결점을 고치기 위한 자신과의 진검승부(眞劍勝負)를 할 때마다 내 자신의 힘만으로는 악(惡)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도를 통한 위로부터 오는 은총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결심을 살고 악습을 쳐 이기기 위해서도 기도는 너무나 절실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옛날부터 '기도'와 '재계(단식, 고행)'와 '희사'를 속죄의 방법으로 제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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