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가치 있는 일상의 하룻길
완도 방주교회 시찰 예배 가는 날이라 일찍 일어났다.
말씀 묵상과 기도, 새 아침의 클래식과 근육 운동 홈트,
자전거와 운동장 뜀질, 빗자루 질과 화초 물 주어 톺아보기..
한 가지라도 빼면 다음날 발톱이 닳지 않았다.
점심 메뉴가 흑염소 전골이란 문자였다.
칼로리의 산술에 단 호박과 달걀, 참외와 요플레로 공복을 깼다.
11시 도착 위해 빈틈없이 서둘렀다.
일상을 벗어나자 배롱나무, 무궁화 꽃이 반겼다.
아내는 조수석에 앉아 피곤한 눈을 감췄다.
졸음과 싸우며 시간 내 주차장에 세웠다.
간식 자리에 사모님 표 식혜 대신 쑥떡이 쑥덕거렸다.
형님으로 환대 받으며 조용히 예배 자리로 나갔다.
최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소원 이루며 복음의 지경 넓히길 간구하였다.
은혜로운 기도였다.
‘설교 외에 잘한 것 없다’는 양 목사님이 강단에 섰다.
‘예수님을 감동시킨 백부장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눅7:1-10)였다.
눈에 보이지 않은 믿음을 삶으로 드러낸 이방인의 사랑은 동사였다.
종이 병들면 쓸모없고 하찮은 존재!
그를 팔아 치우지 않고 매우 존귀한 자로 여겼다.
병든 종을 위해 유대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냈다.
그들은 백부장의 요청이 합당하다고 전달했다.
가이사 황제에게 충성할 백부장이 주둔지에 회당을 지어 줬다.
직위를 박탈당할 위험한 일이나 유대인을 가슴으로 품었다.
그 믿음을 인정받았다.
적군 지도자 청원을 들어주려고 가는 길, 백부장이 친구를 보냈다.
‘내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이방인 가정 방문을 부담으로 안았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이 낫게 하소서.’
예수님께서 기이히 여겨 칭찬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기대보다 훨씬 큰 믿음의 소유자였다.
믿음 좋은 훌륭한 사랑의 지도자였다.
이미 종은 고침을 받았다.
유대 지도자들은 행함 없는 외식 자였다.
바울은 선한 증거 얻는 자(딤전3:7)를 장로로 세울 길 가르쳤다.
모든 자를 존중히 여기는 복음 전도자가 필요한 시대다.
하나님의 구원이 민족을 넘어 열방으로 지경을 넓히라는 교훈이다.
선교사를 보낸 나라!
하나님께서 지구를 접어 외국인 근로자를 붙이셨다.
그들을 잘 섬겨 예수 믿게 만들어 보내면 교회를 세울 것이다.
믿음의 지경 넓히는 일!
시찰 내 교회가 충만하게 펼쳐 나가길 사역이다.’
결의 다지며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찬송을 드렸다.
마지막 실족할 자리에서 불러들이는 건 사랑이었다.
넉넉함으로 청등도 화평교회 시찰 건을 다뤘다.
교회 진입로의 주유소 폐업으로 방치된 뜨락,
황칠 흑염소 식당이 들어섰다.
술을 팔지 않고 주일은 쉬었다.
방주교회에 등록해 일거양득, 님도 보고 뽕도 땄다.
다른 식당 선택 여지가 없었다.
식후에 명사십리 해수욕장 힐링 뷰 카페인 올라 코스타로 갔다.
거울 멘트에 눈이 멈췄다.
‘예쁜 척하고 있네. 안 그래도 예쁜 게’
갤러리 분위기였다.
통유리에 탁 트인 그림 같은 오션!
옆으로 보는 뷰가 기막혔다.
우거진 해송이 한 폭의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해변 가였다.
하얀 파도 소리에 물 멍을 때리며 1979년 8월 추억을 소환시켰다.
손보협회 입사 2년 차,
여섯 가정에 묻혀 찾은 해수욕장이 명사십리였다.
상고 졸업자의 열등감에 사로잡힌 시절,
퇴근 후 예비고사 준비 위해 서대문 서울 학원을 다녔다.
마포 문화 독서실 삶으로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그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피 끓은 열정은 모래에 부서지는 햇살만큼 뜨거웠다.
별빛 쏟아지는 파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기도로 별을 훔치며 장래의 일을 맡겼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뚫게 만드신 오묘한 섭리에 놀랐다.
최 목사님께서 교회 건축 후 장의자 20개 들인 소식을 알렸다.
들뜬 기분이 헤아려졌다.
23년 전 예배당 매입하고 성남에서 의자 싣고 올 때가 오버 랩 되었다.
의기양양한 세월 보내고 화기애애한 나눔의 자리였다.
사모 찬양 단을 꾸리며 운치 좋은 곳이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다음을 기약하며 일어나 장보고 대교를 건넜다.
한적한 고금도 첫 언덕에 상정교회를 봤다.
신학교 졸업 후 첫 전도사 임명받은 날,
또래로 사역한 이상정 전도사님이 떠올랐다.
염천지절에 겨울 양복 입은 장애자였지만 해맑은 천사였다.
아이들 사랑하고 같이 뒹굴어 짠 내가 날 정도였다.
담장 안에 붉은 칸나 꽃이 고개 들어 내다보듯 그리운 동역 자였다.
식당 벽 초서와 고금도 ‘으니 빌라’ 의미를 모르겠다.
끝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구름 기둥이 가렸지만 강진 마량 길을 시원스럽게 달렸다.
바다 갯바람에 차창을 열었다.
자연의 여백에 가슴이 트였다.
햇무리가 희붐하게 지는 때 보성을 지났다.
나들이는 즐거웠지만 아내가 밥때를 잊고 잤다.
방주교회 섬김에 감사의 문자가 떠 답을 냈다.
‘좋은 만남 감사합니다.
준비된 말씀에 은혜받았습니다.
사랑의 섬김에 새 힘을 얻었습니다.
따뜻한 찻잔에 멋진 추억 남겼습니다.
마음에 새기고 기도하겠습니다.’
단 호박 주신 조 목사님께 답례했더니 식탁에 펼친 사진을 보내셨다.
‘이 목사님!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조 목사님!
사실 베이커리 개점이 오전 10시라 어제 수요 예배 마치고 준비했네요.
하룻밤 재운 우리 밀 빵을 들고 갔네요.
라면은 충전소에서 선물 받은 거예요.
좋아하셔서 기뻤어요.
건강하시고 복된 사역 이어 가세요.’
쑥떡 하나 먹고 누웠다.
속 편한 잠에 일찍 깨어 더 기치 있는 일상을 맞았다.
거룩한 시너지에 ‘빵 굽는 타자기’ 작가처럼 생존하는 글을 썼다.
2024. 7. 13 서당골 생명샘 발행인 광주신광교회 이상래 목사 010 4793 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