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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기다리던 아린과 마린의 다리가 제법 아파올때쯤 죽은 이들이
들어가던 방문이 좀더 활짝 열리며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아담한 키에 차분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으며 긴 검은 머리는
오른쪽으로 모아 묶고 있었다. 흰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릴정도로
길었는데 앞을 겹쳐 입도록 되어있는 가운 형태의 웃옷은 엷은 녹색의
끈으로 여며져 있었다. 그 여인이 걸을때마다 희미하게 방울소리가 나서
보니 양쪽 손목에 얇은 빨강,노랑,파랑실로 엮어만든 작은 방울 묶음을
달고 있었다. 방울 소리는 작았지만 울리는 소리는 굉장히 청명하여
듣는이의 마음을 시원하면서도 편안히 해주었다. 바리여신은 이들 앞까지
걸어와 일행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본뒤 선궁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계화님이 계신 달만국에서 오신 선녀분이군요. 인간의 아이들과 백호족
의 아이와 같이 오다니, 무슨 일인가요?“
선궁을 보며 이야기하는 바리여신의 모습은 선녀가 인간을 데려온 이유가
자뭇 궁금한지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으나 목소리는 굉장히 차분했다.
선궁은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한뒤 일행을 소개했다.
“이들은 인간세상에서 온 아린과 마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설화호님의 아기인 호야라고 합니다.“
자신들을 소개하자 아린과 마린은 꾸벅 인사했지만 호야는 눈만 말똥말똥
뜬채 바리여신을 빤히 쳐다 보았다.
“호야?인사 드려야지요...”
선궁이 호야에게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지만 호야는 바리여신을 더
뚫어져라 쳐다볼뿐 인사할 생각은 하지도 않더니 이윽고 한마디 내뱉었다.
“뭐야, 우리엄마가 훨씬 예쁘네~ 우리 엄마도 신인데~”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 붙었고 선궁과 아린, 마린은 당황하여 어찌할바를
몰랐다.
“............설화호님이 버릇없는 후계자를 얻으셨군요. 장래가 몹시도...
기대됩니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저기 그건 취향의 차이 이니까요, 여신님. 전 은은하면서도 차분한
지적인 매력을 가지신 여신님 같은 분을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아~하하하하하하하“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호야의 등을 살짝 꼬집으며 아린이 바리여신을
향해 굽신댔다. 사실, 아린의 취향은 바리여신쪽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하국의 염라대왕을 만나러 가야하는 중요한 시기였고 상황을
보아하니 이 여신의 허가가 있어야 살은자가 지하국으로 갈 수 있는것
같아 호야가 버릇없는 소리를 하자 일이 틀어질까싶어 입에 발린 소리를
한 것이었다.
“제법 입을 나불댈줄 아는 인간 꼬마구나. 그래, 무슨일로 여기를 왔는가?”
목소리의 냉기는 거두어 졌지만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아린은 마른침을
한번 삼킨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와 여기있는 제 쌍둥이 오빠 마린은 여름방학을 맞아 강원도의 할머니
집에 가는 길이였습니다.“
......................... 그리고 그 뒤로 일어난 일들, 마린이 나무에 얻어맞은뒤
여우마을로 간것과 이호와 호야를 만난일, 선궁과 비형의 도움으로 그곳을
벗어나 설화호의 거처로 간일,인간세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상의하게 된
일들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설명했다. 바리여신은 인간세상으로 돌아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에서 고개를 갸우뚱했다가 이내 납득이
간다는 표정으로 일행을 쳐다보고 아린의 이야기가 끝나자 잠시 아린과
마린을 쳐다본뒤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이야기와 입장은 잘 알겠다. 헌데, 너희들이 인간세상으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빠졌구나. 그건 무엇이냐?“
바리여신의 느닷없는 질문에 아린과 마린은 약간 당황했다. 원래 살던 곳
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꼭 이유가 필요한 것인가?
“이곳 원천강은 인간들의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다. 그곳처럼 온갖 욕심이
난무하지도 않으며 보다 더 공정하다. 산 목숨으로 이곳까지 온것도 너희들
의 운명 일수도 있다. 돌아가려는 이유가 그 운명을 능가하는 것인지
알고 싶구나.“
바리 여신은 효와 정성의 여신인 동시에 운명의 여신이었다. 예전, 인간이었을
때 부모를 향한 지극한 효심으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조화시킨 능력을
인정받아 신이 되었던 터라 이 꼬마들도 자신과 같은 정도의 마음이 있는 것
인지 내심 시험해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그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부모님도 만나고 친구들도...”
마린이 더듬거리면서 대답하자 바리여신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
보며 말했다.
“단지 만나기 위한 것이라면 이곳에서 오래지 않아 만날 수 있다. 그들이
지옥불로 떨어지지 않는다면 이곳 원천강에서 천인으로의 삶을 살수도
있으니 어찌보면 너희들이 고생하여 이승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더
나은 방법이 아닌가?“
마린은 잠깐이지만 그럴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어
버리고는 아린을 쳐다보았다. 이곳으로 오게된 원인이 그녀에게 있는만큼
대답을 좀 해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인간세상으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그 녀석 때문이라고 이야기할수 있을까?
“여신님,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데 꼭 이유가 필요한 것인가요?”
입술을 깨물며 눈을 살짝 치켜뜨고 바리여신을 보며 아린이 말했다.
“산자가 제발로 저승으로 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것과 다름이 없다.
저승으로 가는것만이 아니라 이승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데 적어도 보내주는
이는 납득시켜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것 아닐까? 또한, 후일 내가 내
아들을 봤을때 그대들을 저승으로 보내준 이유를 기꺼이 이야기 해줄수
있을 정도는 되는 이유라야 어미로서의 입장이 서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들??”
“...저승의 열 대왕들의 어머니가 이분, 바리여신님입니다.”
“엑?? 그럼 염라 대왕도...”
“그렇지요, 그분도 열 대왕중 한분 이시니까요.”
뒤에서 소근대는 마린과 선궁의 이야기를 들은 아린은 귀가 솔깃 해졌다.
염라대왕의 엄마라는 이 여신만 잘 설득하면 돌아가는데 더 쉬울것이라는
생각에 아린의 머릿속은 이미 계산기로 바뀌어 마구 돌아가고 있었다.
[효와...정성의 여신이라 했지..?]
“사실.....저희 할머님이 몸이 안좋으셔서........훌쩍...”
아린은 표정을 최대한 불쌍하게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복잡한 도시가 싫어서 홀로 산속에 계시다가 병이 나셨어요. 부모님과
같이 오려했지만 생업이 있어 저희가 먼저 가게 되었거든요. 빨리
돌아가지 않는다면....할머니는 더 위독해 지실거에요.....흑.........“
[사기꾼..........]
마린은 밑도끝도 없이 할머니 이야기를 끌어들여 동정표를 사려는 아린을
쳐다보면서 기가 찼으나 어쨌든 집으로는 가야 겠기에 장단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저희 할머니가 많이 아프세요....”
두 쌍둥이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하며 훌쩍거리자 선궁은 설화호 거처의
일이 생각이 났다.
[할머니......? 할머니의 이름이 준혁이였던가???......가출이라는 말도 했던것
같은데.........]
잠시 생각이 헛갈려 멍해진 선궁의 옆에서 호야는 아린이 울자 괜히 따라
울었다.
“엉엉엉~~ 아린이 누나 할머니~~ 아픈 할머니~~~ 불쌍해~~~”
[요 이쁜것, 쿡쿡쿡]
우는 연기를 하던 아린은 호야가 제법 분위기를 맞춰주자 신이나서 더욱
실감나게 연기를 하느라 바닥에 주저앉아 엎드려 대성 통곡을 했다.
“할머니.......흑흑흑.......지금쯤 어찌되셨는지......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병이
악화되어 돌아가실 텐데.........죽기전에 돌아가야 할머니의 병간호를...흑흑..“
“흑.........”
아린처럼 주저앉지는 않았지만 눈을 계속 비벼 벌겋게 만든 마린은 소리를
죽여가며 눈물 연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쌍둥이들을 보고있던 바리여신은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으나 두 쌍둥이와 호야가 진정으로 우는
것 같자 이윽고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아이들이....할머니를 생각하는 효심이 매우 크구나...”
바리여신의 목소리가 변한것을 눈치챈 아린은 거의 넘어갔구나 하는 생각에
겉으로는 울음소리를 냈지만 표정은 히죽대며 웃고 있었다. 물론,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상황을 아는 이가 보았다면
아린의 뒤에 여우 꼬랑지가 붙어있는 환상도 보았을 법했다.
“너희를 기특히 여겨 저승으로 보내 주겠다.”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여신님!!!!!!!”
“가...감사합니다!!!”
쌍둥이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앗싸~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도 잠시.
“그리고............”
“........??”
“...........??”
“너희의 정성이 갸륵하니 내 특별히 할머니의 병이 나을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겠다.“
“......네?? 아, 네.....감사합니다. 할머니가 병이 나으신다면 저희도 무척...
기쁠거에요.....“
“그래, 저승가기전에 그 방법을 알아야 하니 지금 이야기 해주마. 효심이
지극한 아이들이니 능히 해낼수 있을 것이다. ...예전 인간이었을때 나의
일이 생각이 나는구나...“
엎드려 있는 아린은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능히 해내? 뭘?
마린역시 눈만 벌건채 바리여신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바리여신은 이
쌍둥이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예전.... 나의 부모님들께서 나를 버린 죄 때문에 병을 얻었고..그 소식을
들은 나는 부모님의 병을 고치고자 이곳 원천강으로 와서 험난한 여정 끝에
병이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간 부모님을 살려낼수 있었다. 우연히 이곳에
오게된 너희와는 달리 구천만리의 길을 걷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물어물어
이곳에 온뒤 지금은 나의 남편이 된 무장승의 시험에 들어 약을 얻기위해
오랜기간을 그의 수발을 들어 일한 끝에 약을 얻어 돌아갈수 있었지.
나에 비하면 너희는 운이 좋은 편인 것이다.“
“...................”
“..................”
“원천강의 남쪽으로 가면 명진국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일단
이화 아기씨에게 너희의 정성을 보이면 약을 얻을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정성을 얼마나 보이면.....될까요?”
“나는 무장승님이 그곳에서 꽃감관으로 있던 시절에 가서 수발을 들었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이곳의 시간으로.. 몇 년 걸렸던 것 같구나. 후일
무장승님이 말하시길 나에게 반하여 일부러 시간을 더 끈것이라고 하더라마는......“
볼을 살짝 붉히며 수줍은 듯이 이야기한 바리여신 이었지만 지금 아린과
마린의 머릿속은 여신의 러브 스토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여...여신님, 이곳에서 몇 년이면 할머니는 이미 죽어 뼈까지 가루로
변하셨을 텐데요??“
다급해진 아린이 바리여신을 보며 물었다.
“걱정마라, 살릴수 있는 방법과 병을 고치는 방법 둘다 얻어갈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염라대왕의 능력으로 너희들이 살던 시점으로 돌아갈수 있으니
너무 염려치 말거라. 나도 그러했듯이.“
“아...아니 그게, 저희는 그냥 염라대왕님을 만나서 후딱 가기만 하면 되는데요.”
“네...옛날보다 의학이 발달해서 ...고칠수 있는 약도 있고...저희는 그저
병간호를........“
“인간의 의학이 발달한다 한들 천계의 명약보다 더 할까. 너희들의 할머니는
다시는 병에 걸리지 않고 천수를 다할수 있게 될것이다. .........? 너희의
표정이 왜 그런 것이냐?“
아린의 표정은 똥씹은 표정 그 자체였으며 마린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아니......너무 기뻐서.....”
아린이 표정을 애써 감추며 이야기하자 바리여신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원래 너무 기쁜일이면 말이 안나오고 웃음도 없이 눈물만 나오는
법이다.“
[미치겠네, 혹 떼려다 혹 붙였다.]
[..............그냥 포기하고 여기서 사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시험이라니..]
“그럼 누나, 준혁이 나중에 보러 가는거야?? 몇 년 뒤에???”
“ㅡㅡㅡㅡㅡㅡ!!!!!!!!!!"
"ㅡㅡㅡㅡㅡㅡ!!!!!!!!!!!!"
"준혁이..?“
갑자기 말을 꺼낸 호야의 물음에 바리여신이 의아한 듯이 물었고 쌍둥이는
호야의 입을 급히 막으려 했으나 옆으로 쏙 빠져나간 호야가 다시 말했다.
“아린이 누나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 만나러 가야 한댔는데~
엄마집에서 그 사람 보고싶다고 막 울었거든요~ 누나, 그치??“
“어......으........그게.......”
“야~~ 신난다~~ 하하하 누나가 금방 안가고 여기서 몇 년뒤에 간다니,
난 좋아~ 호야는 좋다! 하하하하하“
“.........너희 할머니 이름이 준혁이.......인가?.........”
“네? 아,네, 하하하. 할머니 이름이 남자아이 같지요~ 하하하하하........”
[..........끝이다......]
마린이 바리여신의 표정을 보니 이미 그들이 거짓말 했음을 눈치챈것
같았다. 미소를 띠고 있던 표정은 돌처럼 굳어져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얼굴에 냉기가 돌고 어두워 지는 것이 여신의 주변에 금방이라도
천둥번개가 칠듯했다.
“..........난 거짓말하는 이들은 상대하지 않는다. 너희들의 수명이 다해서
이곳에 오지 않는한 결코 너희들이 저승으로 갈수는 없을 것이다! 신을
속인 벌은 너희들의 운명줄안에 걸려 있을 것이니 때가 되면 받도록 하라.
내가 지금 너희들의 명줄을 끊지 않은 것은 너희의 수명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에 끊을수 없는 것이니 수명을 적은 이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어투로 말을 내뱉은 바리여신은 몸을 휙-돌려 왔던
방으로 되돌아 갔다. 신전의 한켠에는 망연자실해 있는 쌍둥이와
무슨일이 일어난건지 잘 모르는 호야,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마에 손을 댄채로 있는 선궁만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