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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빛 어둠으로 아침이 밝아 오고 그 기운 속에 겨울 숲이 깨어나는군요.
쉼터에서 아침을 먹습니다.
아침이라고 해봐야 보온병에 넣어온 둥굴레차와 떡 한조각, 밀감 하나...
설혜(雪慧)...!
푸른 산죽잎위에 제법 많은 눈이 쌓여있습니다.
불어오는 아침바람이 차가워 모자를 쓰고 천천히 걸어요.
며칠 동안 운동을 좀 했다고 천천히 걸으면 그냥 숨가쁘지는 않아요.
뱀사골 산장이 오늘의 목적지니 지도를 보건데 여유가 있어 좋아요.
멀리 흰눈을 이고 있는 종석대가 보이는걸 보니 여긴 한 겨울입니다.
길이 가팔라지고 흰눈 사이로 맑은 계곡이 흐르고 이마엔 땀방울이 맺히네요.
설혜(雪慧)...!
도로에 올라서자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고 산은 한마디로 설국이군요.
겨울산입니다.
당신은 늘 그대로 빈 사무실 컴 앞에서 작기만한 나를 기다리고 있을테지요...
이렇게 바람이 몰아치고 추운 날 당신의 해살거림이 생각나 웃음과 미안함이 돋습니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바람과 구름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입니다.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
오늘은 눈이 많이 부시다며 옆의 등산객은 고글을 꺼내 써요.
난 자연의 빛깔을 거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몸이길 원하지요.
설혜(雪慧)...!
노고단 주위엔 온도, 습도, 바람의 조화로 서리꽃이 눈부시게 피어 흔들립니다.
바람의 속도가 빨라서 하늘이 순간 열리고 순간 닫혀요.
모든 것은 순간이지요.
한순간에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져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인가요.
설혜(雪慧)...!
이렇게 눈부시게 피어있는 서리꽃도 햇살이 좀 더 퍼지고 기온이 올라가면
순간의 이슬방울로 사라져 버리겠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며 무상만을 파는 나에게 당신은 영혼을 노래해주었지요.
설혜(雪慧)...!
무상한 나에게 영혼으로 부르는 당신의 사랑을 어찌 감당하여야할까...
모든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슬처럼 사라지리련만...
난 당신의 자신있는 장담을 받아낼 수 있는 존재련가...
설혜(雪慧)...!
구름이 정상을 가리고 있는 반야봉을 향해 길을 나섭니다.
언제쯤 이 깊은 무명(無明)에서 벗어나 반야의 지혜를 깨달아
저 언덕으로 갈 수 있을까요.
당신의 바다 같은 사랑은 잘 알고 있겠지요.
지혜를 얻으면 무명에서 벗어 날 수 있나요...?
당신이 내게 주는 하염없는 사랑의 울림은 당신의 지혜일까요? 어리석음일까요?
욕심을 버려야겠지요.
지혜를 얻겠다는 욕심도 버리고...
설혜(雪慧)...!
지금 나무들을 감싸고 있는 저 순백의 결정체들은 눈이 아닙니다.
밤새 바람에 날려온 안개, 이슬, 습기가 나뭇가지에 집을 지었어요.
참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한가지 아쉽다면 나를 날려버릴 듯이 미친 바람이 불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설혜(雪慧)...!
왜, 이 산이 처음이련만 이리도 마음이 편안해 지는 걸까요...?
당신이 주는 바다 같은 사랑의 내음만큼이나
이 산의 깊음에서도 느끼며 내 소명을 함께 일깨워서일까요...
눈 쌓인 주능선길이 포근한 아름다움입니다.
이 길의 끝은 어디일까요...?
천왕봉, 웅석봉,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마음이겠죠.
세상에서 가장 먼 곳이라도 항상 내 한편에 당신이 웃고있지요
내 가슴 온통 전부라 말하지 못하는 난 당신에게만큼은 나쁜 놈입니다.
산봉우리를 넘고 넘어도 또 산봉우리가 앞에 있습니다.
그게 이 끝없는 길, 결국은 마음이겠지요.
설혜(雪慧)...!
한 그루의 나무는 왜 홀로 저렇게 바람 속에 서있나요...?
괜히 당신이 떠올라 제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많이 외롭지는 않겠지요.
당신은 언제나 씩씩하고 푸르른 밝음의 나무니까요...
새들이 고단한 날개를 쉬었다가고, 바람이 어루만져 주고 가겠지요.
설혜(雪慧)...!
천천히 걸었는데 벌써 삼도봉입니다.
"순백의 절정으로
서리꽃이 피었습니다.
천왕봉을 바라보다
당신에게 가는 길은
돌아 돌아 가게 되려나... ...
오늘은 뱀사골에서 쉬렵니다."
설혜(雪慧)...!
뱀사골 대피소에 배낭을 풀고 토끼봉으로 갑니다.
겨울숲이 아름답군요.
"가을 가고 찬바람 불어 하늘도 얼고
온 숲의 나무란 나무들 다 추위에 결박당해
하얗게 눈을 쓰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도
자세히 그 숲을 들여다보면
차마 떨구지 못한 몇개의 가을잎 달고 선 나무가 있다
그 나무가 못 버린 나뭇잎처럼
사람들도 살면서 끝내 버리지 못하는 눈물겨운 기다림 같은 것 있다
겨울에도 겨우내 붙들고 선
그리움 같은 것 있다
아무도 푸른 잎으로 빛나던 시절을 기억해 주지 않고
세상 계절도 이미 바뀌었으므로
나간 일들을 당연히 잊었으리라 믿는 동안에도
푸르른 날들은 생의 마지막이
가기 전 꼭 다시 온다고
죽은 줄 알았던 가지에 잎이 돋고 꽃 피고 설령 그 꽃 다시 진다 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살아 있기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게 우리 생도 짙어져 간다는 것을 믿는 나무들이 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내내 버리지 못하는 아픈 희망
저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푸르른 그리움과 발끝 저리게 하는..."<도종환님의 시에서>
설혜(雪慧)...!
이제 곧 이산에 어둠이 내립니다.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오래도록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싶은...
당신도 당신의 밤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나는 머무는 곳이 어디나 집이겠지요.
그래도 늘 가슴 한편에 당신을 고웁게 재워두오리다.
2002. 11. 16. 밤에
-글과 사진 : 무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