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쉼 없이 시간이 흐르고 그 흐름이 세상을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전에는 시간이 빨리 가지 않았는데 요즘은 어찌 빨리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리적으로 그 흐르는 시간은 같은데 빠르게 느껴집니다. 이런 느낌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뭔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나 어릴 때 서울의 범위는 전자 종점이 기준이라 보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동쪽으로 청량리, 왕십리, 북쪽으로 돈암동, 효자동, 영천, 그밖에 마포, 원효로, 노량진,
전차 찻길이 좀 더 연장되어 영등포까지 서울이었습니다.
영등포에서 좁은 비포장을 따라 인천 방향으로 내려가면 복숭아 주산지인 소사(素砂).
안양 포도, 구리 배, 뚝섬 천호동 무 배추, 청운동 자하문 일대 능금 자두, 요즘 트롯트 경연대회에서
‘송가인’이 부른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그곳이 공동묘지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나 6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화신백화점 엘리베이터(승강기)를 처음 타봤습니다.
신기해서 몇 번을 오르내렸습니다. 백화점에 목마(木馬)가 있었는데 동전을 넣어주면 소정의 몇 분을
움직여 줍니다. 몇 번을 신나게 탔는데도 내릴 생각을 아니 하고 고집부리던 일.
동대문시장에서 청참외 하나 깎아주셔서 그것 먹고 배가 불쑥 부르던 일.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학교 아니 다닌다고 하던 일.
안암동에 살 때입니다. 8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입학하러 갑니다. 애기능을 지나 종암초등학교
(후에 중앙산업이 있었음)입학하려 갑니다. 가다가 고려대학교, 당시 보성전문 석조(石造)건물 본관과
도서관을 봤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리 들어가시지 않고 좀 더 걸어서 1층 목조건물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땐 시험이 있었습니다. 형식적인 절차지만 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대나, 어쨌다나, 나는 이미 심통이
나 있었습니다. 아니, 오다 본 멀쩡한 학교를 두고 하필 왜 이 초라한 하교를 다니라고 하시나...
심통을 부리는 나를 달래시느냐고 중국집을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거기서 그만 또 탈이 나버렸습니다.
주인이 달아주는 겁 물에 혓바닥을 데운 것입니다. 주문한 호떡도 아니 먹고 종일(終日) 심술 부리고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학교 아니 다닌다 했습니다. 아, 이런 일들이 엊그제 일 같은데 하마 80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8·15해방 전엔 서울 4대문 안에 들어야 진짜 서울이었습니다. 행정구역은 서울이나 문밖 지역은 시골과
비슷했습니다. 사람 인적이 드물고 논밭만 즐비했습니다. 내가 살던 안암동, 용두동이 한적했고 홍능(洪陵)
쪽은 전부 논이었습니다. 천호동, 뚝섬 쪽은 인분(人糞) 냄새 고약하게 나는 배추 무 채소밭이었습니다.
지금 경동시장은 내가 용두동에 살 때 메뚜기 잡으러 다니던 곳입니다. 경동시장에서 장사하는 분이 전에
농밭이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지금 몇 사람이나 될까요?
인분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 첫 번째 인분 이야기,
6·25 때 8군사령관으로 리지웨이장군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야전복 양쪽 가슴에 수류탄을 매달고 다니는
분입니다. 야전사령관이니 늘 전투 현장을 다닙니다. 이분이 전선시찰 다니다 구두에 인분이 묻은 모양입니다.
‘인분을 쓰는 미개한 나라에 와서 미군들이 많이 죽는다’ 불만스럽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근 70여년전 일입니다.
두 번째 인분 이야기.
나는 인분을 준 밭에서 성장한 채소를 먹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뱃속에 기생충이 많았습니다.
지금 같으면 약이 좋아 싹 없엘 수 있었겠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인분을 먹고 자란 채소가 맛이
구수하고 좋습니다. 선진국대열에 진입고자 하는 이 마당에 인분 준 채소가 맛있다니...
가당치 않은 이야기지만 맛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 인분 이야기,
옛날엔 밭에 인분을 필수불가분 사용을 한 탓에 인분을 가지고 가는 쪽에서 돈을 주었습니다.
똥 마차(馬車)가 있던 시절입니다. 그런 까닭에 똥통이 큰아이만큼 컸습니다. 보통 할머니들이 뒷간 곁에 앉아
그 숫자를 세워 얼마간의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시절이 지나고 인분을 못 쓰게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돈을 주어야 뒷간 청소가 가능합니다. 똥통이 점점 작아지더니 나중엔 조그마한 바가지만
하여졌습니다.
개당 얼마 하니 다닌 숫자만큼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것도 적지 아니 부담이 됩니다.
통만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합니다. 개당 단가도 서울시장 명의로 공시된 값이니 꼼짝없이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서울시엔 똥 청소를 담당하는 청소국장 자리가 제일 좋고 선망되는 자리라고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네 번째 인분 이야기,
‘사돈집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厠間與査家遠愈好 측간여사가원유호)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사돈집이 가까이 있으면 조그만 실수에도 흠이 되어 내 자식에게 불이익이 될 수 있고 화장실이 가까이 있으면
고약한 냄새가 나므로 멀리 있을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마는 아니한 듯합니다. 시골의 경우 밭농사를 위해 인분을 경원시(敬遠視) 아니 했습니다.
오히려 친근했습니다. 뒷간으로는 전북 고창군에 있는 선암사(禪雲寺) 해우소(解憂所)가 유명합니다.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만 가본 분 詩人의 말이 ‘세상에 똥 구린네가 매화향처럼 느껴지긴 난생 처음이라고’.
똥 이야기가 좀 길어졌으나 먹고 싸는 것이 사람 일입니다. 대소변 안 보고 사는 사람 있습니까?
우리의 일상생활이라고 생각하면 별로 더럽게 느껴지지 않을 겁니다.
지금의 서울은 말할 것도 없고 나 사는 영종도까지 크게 개발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영종도에 인천국제공항이 생겨 하루 800여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립니다. 코로나19로 3년 가까이 한적하더니
지금 다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룹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를 해도 분수가 있지 너무 빨리빨리 변모하고
달라지는 일에 현기증(眩氣症)마져 나는 듯합니다.
옛날 분이 다시 살아나 변모된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 다시 죽을 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놀이 문화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나 어릴 적에는 동네 친구와 어울려 집 밖에서 주로 놀았습니다.
놀이감이 없어 땅바닥에서 하는 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자치기를 많이 한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보기 어렵습니다. 밖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 놀아야 할 아이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모두 학원에 가 있거나
집에서 공부하거나 전자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이들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과외 수업을 4~5개
받는 것이 보통이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불쌍하고 가련하기도 합니다. 공부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생각건대, 추억할 과거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그때가 그립기도 하고 가끔은 다시 돌아가고 싶기도 합니다.
과연 지금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그 감정이 어떠할지 궁금합니다.
나름의 추억은 있겠지만 옛날 나의 추억만 못 할 것 같은 생각 듭니다. 추억에 사로잡혀 옛날에 너무 집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반추(反芻)할 추억 걸이가 없다는 것은 더 슬픈 일입니다.
나의 추억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무엇이든지...
온고지신(溫故知新) - 옛날이 그립습니다. 아, 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