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이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늘푸른언덕
2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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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속담 중
‘잘 되면 제 탓, 잘못되면 조상탓!’
이란 말이 연상되는 격한 공감이 가는 글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해 봅니다.
‘내로남불!’
마치 사자성어처럼 일상 대화에서 흔히 쓰이며 이젠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 말은 ‘내가 하면 로맨스(Romance), 남이 하면 불륜!’의 줄임말로 이중잣대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일컫는 신조어입니다. 1990년대 신한국당 국회의원 박희태 씨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 사용한 이후 정치권에서는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 비판 등에 널리 사용되더니 이제는 일상에서 평범하게 쓰이는 상투어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 말은 ‘올해의 사자성어’를 채택하는 2020년 교수신문에서 이 뜻을 살려 한자어로 바꾼 ‘아시타비(我是他非)’란 성어를 선정함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21세기 최대의 흑역사인 전대미문의 ‘코로나19 팬데믹’이 그 종식을 앞두고 일상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이제 다시 살만한 세상이 되는가 싶었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더 암울해 보입니다.
올해 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발된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지금 세계 경제는 고금리와 미 달러화의 환율 폭등으로 인해 위기의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이로 인한 도미노 파급 효과로 고물가 시대가 도래했으며 주가는 세계적으로 일제히 바닥을 치며 경제가 파탄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민 통합과 상생의 새역사 창조’를 표방하며 올해 새롭게 문을 연 대한민국의 신임 정부는 출범한지 불과 100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오만가지 구설수에 휘말리며 연일 파행 정국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서로가 비방만을 일삼으며 국론은 양분화되면서 연일 남의 탓만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의 형국입니다. 이 모든 책임을 ‘내 탓이오!’라며 깊은 각성과 잘못을 인정하는 곳은 그 어디에서도 눈을 씻고 찾아 볼 수 없음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너무나 잘났고 그 똑똑함이 하늘을 찌를 듯한 집단지성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서 온전한 진리라고는 온데간데 없이 실종된 현실입니다.
정치보복이니 적폐 청산이니 하는 영문도 모를 사자성어를 써가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정당화하려는 모습에 이를 바라보는 우리 민초들의 시각과 감성은 그들의 모습이 안타깝고 불쌍하기 보다는 실망스러움과 슬픔을 지나 분노의 감정으로까지 바뀌고 있습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잘못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한 법의 심판을 받거나 받을 사람들이 준엄한 법의 결정 앞에서 단 한 명도 ‘이 모든 게 나의 부덕한 소치입니다. 다 나의 탓입니다!’라고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떨군 그들의 모습에서 뱉어지는 단 한마디의 말이 하나같이 “국민들께 죄송합니다!” 허울좋은 변명뿐입니다.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 습관적인 말이 추호의 반성의 기미가 없는 영혼이 상실된 말이라 있는 그대로 수용이 되지 못하고 안타까움을 넘어 화가 치밀기까지 합니다.
<이 모든 게 다 제 탓입니다!!>
이 한마디를 진정으로 회개하며 고백하는 것이 정말 어려운 모양입니다.
어린 시절 친구를 따라서 제가 살던 동네 근처에 위치한 성당에 잠시 다닌 적이 있습니다. 성당의 미사 중에 다 함께 <고백의 기도>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미사를 인도하는 사제가 먼저 “전능하신 하느님과” 라고 시작하면서 운을 띄우면 성도들은 이어서 일제히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면서 가슴을 세 번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성당의 미사의 모습이 아직까지 생각나는 것은 그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은 그 어린 나이에 제가 제 가슴을 세 번씩 치면서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지?’라는 의문을 가졌다는 사실과 한편 가슴을 치며 반성하는 성도들의 모습에서 다는 아니겠지만 대개는 영혼 없이 습관적으로 가슴을 치는 듯한 모습에서 진지했다기 보다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음이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영혼이 있던 없던 간에 일단 세 번씩 가슴을 치면서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완전수 ‘3’이라는 숫자가 주는 회개의 의미라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도 잘못을 사하여 줄 때 ‘3’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예수그리스도의 제자 중 가장 충성스러운 사도였던 베드로가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다가 예수 부활 후에 그를 찾아 오신 예수님이 그 앞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묻고 베드로가 회개하며 그에 세 번 응답함으로 그의 죄가 사함을 받는 상황을 보게 됩니다.
참된 뉘우침과 회개는 용서를 받습니다. 그 회개와 뉘우침이 상대의 관점이 아닌 나의 관점으로 돌려질 때 용서를 받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고 죄를 짓게 됩니다. 다만 그 잘못을 남의 탓이 아닌 나의 부족한 탓으로 돌릴 때 새로운 변화와 성장의 발판이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어느 누구도 <내 탓입니다>라고 회개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재수 없다> <운이 없었다>는 등 나의 탓이 아닌 <남의 탓> 또는 <더러운 재수 빨>로 치부해버리는 태도입니다.
셰익스피어 연극 <리어 왕>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이와 유사한 우리 속담으로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고 한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내 눈의 들보는 못 보고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를 지적하는데 예민한 우리들의 삶의 태도를 돌아보며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은 자신의 가난과 허약함, 못 배운 것을 하늘로 받은 세 가지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의 유명한 어록으로 ‘나는 가난했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했고, 허약해서 특별히 건강을 돌보며 90세까지 살았고, 어려서 못 배운 탓에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려고 노력했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부족함을 자신의 탓으로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남다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앞에 놓인 많은 문제들을 대하며 그저 남의 탓으로 돌리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속담에 ‘북풍이 바이킹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는데 어떠한 난관이나 시련은 나의 탓이고 나의 문제로 보고 그것을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오늘 새롭게 시작하는 한 주간의 첫 날의 아침!!
잘 되면 <당신 덕분입니다> 혹여 안 되면 <그것은 나의 탓입니다>라는 용기 있는 한 마디를 건네시기를 권해봅니다.
첫댓글 " 제 탓입니다! "
" 당신 덕분입니다! "
살아가면서 감사의 대상은 상대의 잘못의 원인은 자신에게서 찾는
삶의 미덕과 겸손을 스스로 배우고
깨우칠 때 세상은 살만해 집니다.
<늘푸른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