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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와 섭라(涉羅). 탐라(耽羅)는 섭라(涉羅)가 될 수 없는 이유(理由)
○ 제주(濟州)는 옛적에 :《탐모라국(耽牟羅國)·섭라(涉羅)·담라(儋羅)·탁라(乇羅)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
➠ 반도(半島) 제주(濟州)가, 「조선사(朝鮮史)의 제주(濟州)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자연환경(自然環境)과 지형지세(地形地勢) 및 동식물(動植物)과 기후(氣候), 토산품(土産品)등으로 고찰(考察)해 보면서, 설명(說明)하였다. 오늘의 이야기는 : 십년(十年)은 된 것 같은데, 그 때 나온 “섭라(涉羅)”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새롭게 조명(照明)해 보고자 한다.
○ 오늘의 주제(主題)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說明)한 대로, 「조선사(朝鮮史)에 등장(登場)하는 ‘제주(濟州) 또는 탐라(耽羅) 또는 섭라(涉羅)’는, 반도(半島) 제주(濟州)일 수 없다.」는 논리(論理)를 원전(原典)에 의거(依據), 고증(考證)하면서 설명(說明)하려 한다.
말로만 떠든다고,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조선사(朝鮮史)가 복원(復元)되는 것은 아니다. 증거(證據)를, 고증(考證)을, 유물유적(遺物遺蹟)을 찾아, 내 놓아야 한다. 이렇게 해도 조선사(朝鮮史)의 복원(復元)은, <반도인(半島人)+열도(列島)아이들+대륙(大陸)아이들의 방해(妨害)>로, 어려움이 많을 것임은, 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다.
○ 또, 우선(于先) 반도인(半島人)들의 역사인식(歷史認識)을 살펴보자. 필자(筆者) 역시(亦是), 수십(數十)대 선대(先代)로부터 반도(半島)에서 살았다고 하지만, 증거(證據)가 있는 것인지는 확언(確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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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탐라국(耽羅國)
지금의 제주도에 있었던 옛 나라 / 탐모라국(耽牟羅國)·섭라(涉羅)·담라(儋羅)·탁라(乇羅)라고도 표기되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및 조선 초기까지 오랫동안 불려졌던 칭호이다. 고려사(高麗史)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제주도 3성(姓) 시조신의 하나인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과 그 아우 등 3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는데, 이 때는 신라 성시(盛時)였다. 3형제가 들어와 조공하자 신라(新羅)왕(王)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맏아들에게는 성주(星主), 둘째에게는 왕자(王子), 막내에게는 도내(都內)라는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耽羅)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서 탐라국(耽羅國)이라는 명칭은 유래했으며, 실제로는 ‘섬나라’라는 뜻이다. 성립연대는 신라 성시(盛市)라는 시기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이므로 문무왕 때로 추측된다. 그 이전의 사회는 3성씨족의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高氏) 씨족이 군장(君長)으로 군림해 국주(國主)가 된 것으로 보인다.
설화에 의하면, 처음에는 고을나·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등 3성의 시조가 모흥혈(毛興穴, 三姓穴)에서 나타나 그 자손들이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사람은 키가 조금 작고 언어는 한(韓)과 같지 않으며, 개나 돼지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또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하며, 여름에는 초옥(草屋)에 살고 겨울에는 굴실(窟室)에 산다고 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東夷)전의 한조(韓條)에는 “주호(州胡)"라고 지칭하면서 배를 타고 중국과 한(韓)에 내왕하며 교역을 한다고 하였다. 최근에도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등의 중국화폐가 발굴되었다.
대외관계는 제일 먼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백제와 밀접해 476년(문주왕 2) 4월에 사신을 파견해 방물(方物, 토산물)을 바치고 그 사신은 좌평(佐平)의 관등을 받았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다가 백제동성왕이 친히 정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고 공부를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고구려와는 가옥(珂玉)을 수출하는 등 교역을 했으나 백제에 복속된 이후로는 교섭이 두절되었다. 한편, 신라와는 662년(문무왕 2) 2월에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함으로써 이때부터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뒤에 일본과 가깝게 지내다가 678년 2월에 신라 사신의 경략을 받았다. 이 뒤로는 신라와 활발하게 교섭하였다.
한편, 중국 당나라와는 661년 8월에 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 일본과는 661년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일본사신의 배가 풍랑을 만나 탐라국에 대피했다가 귀국할 때,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에 간 일이 있은 뒤로 매우 교섭이 활발해 많은 왕자와 좌평이 일본을 다녀왔다. 또 680년 9월과 686년 8월에는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 말기에는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신진세력인 고려에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여 925년(태조 8) 11월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다. 938년 12월에는 탐라국주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해 입조하고, 고려로부터 신라의 예에 따라 성주·왕자의 작위를 받아 고려의 번국(蕃國)으로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그 후 1105년(숙종 10)고려의 지방행정구획인 1개의 군(郡)으로 개편되면서 반독립적인 체제는 사라졌다.
1153년(의종 7)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이 된 뒤로는 고려조정으로부터 파견된 현령이 탐라의 행정업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이에 탐라국 체제는 없어지고, 성주와 왕자의 관직만이 남아 상징적 존재로 유지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4년(태종 4) 5월에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어 존속하다가, 1445년(세종 27) 6월에 이것마저 폐지되어 이 때부터 탐라의 귀족계급은 완전히 평민화되었다. <인용/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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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위키 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탐라국(耽羅國)
면적 : 1833.2㎢ / 탐라국(耽羅國), 기원전 57년은 제주도의 왕국이었다. 통일신라 때까지 한반도의 나라들과 교류를 하고 후삼국 시대에 고려가 분열된 삼국을 통일한 뒤 현으로 복속되었다가, 15세기 초반에 조선의 태종 시기에 완전 병합되었다. <탐모라국(耽牟羅國)또는 섭라(涉羅), 탁라(乇羅), 담모라(耽牟羅), 담라(憺羅)>라고도 지칭되었으며, 삼국지(三國志)동이(東夷)전에서는 <주호(州胡)>라고 적고 있다. <인용/끝>
※ 백과사전(百科事典) 또는 백과사전(百科辭典)이든, 위키 백과든 간에, 조선사(朝鮮史) 이야기만 나오면, 모든 것이 반도(半島)로 귀결(歸結)된다. 그 이유(理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논자(論者)들이 이처럼 만들어 놓은 거겠지.
➠ 이기동【1943년 10월 3일 (만 72세)】: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란 자(者)가, 국회(國會)의 국감(國監)에서 : “보좌관에게 내가 안 하고 말지, 이 새파랗게 젊은 것들한테 수모당하고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해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기동 원장」은 역사(歷史) 교과서(敎科書) 국정화에 찬성(贊成)하는 보수(保守) 성향(性向) 원로학자(元老學者)로 알려져 있는데, “뉴라이트역사학자”라는 이야기도 뉴스에 보인다.
겨우 72살 나이에 무슨 일백(一百)살 노인(老人)처럼, 이런 추태(醜態)를 보이니, 젊은이들로부터 노인(老人)들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거다.【농촌(農村)에 가보면 70정도는 마을의 막내라서 온갖 시중을 다 들어야 한다.】국회(國會)에 나와 국감(國監) 받기 싫으면, 처음부터 그 자리를 꿰차지 말았으면 될 일 아닌가! 나이가 들면 더 조심(操心)하고, 머리에든 것이 있으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정도(正道)가 아닐까!
이 자(者)가 바로 <이병도·이기백·이기동>이라고 하는, 세 사람의 역사학자(歷史學者)중의 한 사람이다. 하는 짓이라고는 이런 짓만 골라하니, 욕먹어도 싸지. 72살이 뭐 자랑인가? 이기동! 이 양반은 욕바가지로 먹고, 먹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은 자(者)인데…제 잘난 맛에 사는 게 인생(人生)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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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皆髡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豬.其衣有上無下,略如裸勢.乘船往來,巿買韓中. : 또한 주호(州胡)가 있는데, 마한(馬韓)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다. 사람들이 작고, 언어는 한(韓)과 같지 않으며, 모두 머리를 깍은 것이 선비(鮮卑)와 같고, 무릇 가죽옷을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는데, 옷에는 상의는 있지만 하의는 없어, 벌거벗은 것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과 교역을 한다.》고 하였다.
➋ 일단(一旦),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살펴보기로 하자. 「마한(馬韓)의 서쪽 바다에 있는 큰 섬」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호(州胡)를 탐라(耽羅) 또는 제주(濟州)」라고 하는 것은, 어떤 증거(證據)나 고증(考證)도 없는 일방적(一方的)인 말 뿐이다. 반도(半島)의 제주도(濟州島)가 마한(馬韓)【경기(京畿)·충청(忠淸)·전라(全羅)지방, 또는 한강(漢江)이북(以北)지방】의 서(西)쪽 서해(西海)바다 속에 있는가?
➌ 지도(地圖)를 펼쳐 놓고 따져보자. 제주도(濟州島)는 남해(南海)바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냐! 「제주도(濟州島)가 서해(西海)바다 속에 있다고 하는 자(者)들은, 친일(親日)매국노(賣國奴)를 빼고는 없을 게다.」이게 식민사학(植民史學)의 한계(限界)다.
…제주(濟州 : 섭라(涉羅)가 서해(西海)바다에 있다?…
※ 後漢書 東夷 / 州胡國 :《馬韓之西,海□上有州胡國.其人短小,髡頭,衣韋衣,有上無下.好養牛豕乘船往來,貨市韓中. : 마한의 서쪽의 바다 위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그 사람들은 짧고 작으며, 머리를 깎았으며, 가죽옷을 입었는데 상의는 있되 하의가 없다. 소와 돼지를 기르는 것을 좋아하며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중에서 물건을 거래하였다.》고 하였다.
➍ 반도인(半島人)들 스스로, 원전(原典)을 핑계 삼아【원전(原典)을 보았는지 조차 의심(疑心)스럽다. 원전(原典)을 이용(利用)하여, 국민(國民)들을 현혹(眩惑)시키고, 세뇌(洗腦)시키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고 있는 판이니, 누구에게 대륙(大陸)조선사(朝鮮史)를 마음 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이건 민족(民族)의 가장 참혹(慘酷)한 비극(悲劇)이다.
➎ 후한(後漢) 또는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라면 시대적(時代的)으로 보면 : 겨우 2-4세기(世紀) 때다. 당시(當時) 제주(濟州)에서 어떤 배를, 누가 만들어 한(韓)나라와 바다를 왕래(往來)하면서 교역(交易)을 했을까? 이러한 증거(證據)자료(資料)나, 고증(考證)자료(資料)는 있는가? 전혀 아는 바 없잖은가?
또 <제주(濟州)토착민(土着民)들은, 신체(身體)가 작았다(矮小), 또는 짧고 작다는 것과, 언어(言語)조차 같지 않았다>는 것은, <한(韓)과 종족(種族)이 달랐다>는 이야기고,
윗도리는 가죽으로 만들어 입으나, 아랫도리는 입지 않아, 거의 나체(裸體)와 같은 행색(行色)을 하고 있었다는 말은, 이곳은 아열대(亞熱帶)기후(氣候)와 같이 일 년(一年)내내 따뜻했다는 이야기다. 반도(半島) 제주(濟州) 땅에 그런 흔적(痕迹)은 있는 것이냐?
● 반도사관(半島史觀)이든 식민사관(植民史觀) : 소위 학자(學者)라고 말할 수 있는 수준(水準)을 가진 자(者)들이, 매국(賣國)행위(行爲)를 했다는 것은, 가장 참혹(慘酷)한 형벌을 받아도 싼 자(者)들이다.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해도 싸다. 그 후손(後孫)들 역시(亦是), 선대(先代)의 잘못을 뉘우치며 근신(謹愼)해야 함에도, 날뛰는 자(者)들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말아 먹으려 한다. 결코 용서(容恕)받을 수 없는, 파렴치(破廉恥)한 놈들이다.
이 자(者)들을, 가장 비참(悲慘)하고, 가장 참혹(慘酷)한 방법(方法)으로 처단(處斷)해야 한다. 민족(民族)의 정기(精氣)를 되찾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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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성(黑龍江省)과 제제합이(齊齊哈爾)성(城)
(3) 黑龍江輿圖說 / 齊齊哈爾城圖說 【清 ‘屠寄’ 撰】
《齊齊哈爾城周秦漢濊貊之地.後漢三國魏屬夫餘國北境晉寇漫汗國後魏北齊豆莫婁國地.西南本屬涉羅國始光中涉羅為百濟所並當屬百濟國.中略. : 제제합이성【齊齊哈爾城 : 치치하얼성 : 흑룡강성(黑龍江省) ‘하얼빈’의 서북(西北)쪽에 있는 제 2의 도시(都市)】: 주(周)․진(秦)․한(漢) 때는 예맥(濊貊)의 땅이었다. 후한(後漢)·삼국(三國)·위(魏)때는 부여국(夫餘國) 북쪽 지경이었다. 진(晉)때에는 구만한국(寇漫汗國)이었고, 후위(後魏)․북제(北齊) 때는 두막루국(豆莫婁國)의 땅이었다. 서남(西南)은 본래 섭라국(涉羅國)에 속하였는데, 시광【始光은 : 北魏 太武帝 : 424-427年 년호이다.】중에 섭라(涉羅)는 백제(百濟)에 병합(倂合)되었으니 당연히 백제국(百濟國)에 속하게 되었다. 중략.》고 기록(記錄)하였다.
➠ 흑룡강여도설(黑龍江輿圖說) :《청(淸) 말(末)의 사학자(史學者)인 “도기”(屠寄 : 1856—1921)가 편찬(編纂), 자(字)는 경산(敬山)이며, ‘강소성(江蘇省)무진’ 출신(出身)으로, <흑룡강여도·흑룡강도설>등을 찬수(撰修)하였다고 전해지며, 저서로 몽올아사기(蒙兀兒史記)가 있다.》고 한다.
➊ 제제합이(齊齊哈爾)성(城)【치치하얼성】은, 현재(現在) 흑룡강성(黑龍江省)의 하얼빈 서북(西北)에 있는 ‘제 2의 도시(都市)’라고 한다. 이곳의 서남(西南)지방(地方)이라면 :「내몽고(內蒙古)와 흑룡강성(黑龍江省)의 접경(接境)지대이며, 몽고(蒙古)고원(高原)과 동북(東北)평야(平野)사이의 땅」이다.
➋ 이 땅에 「섭라(涉羅)」가 있었고, 서력(西曆) 424년∼427년 사이의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 시광(始光)중에 「백제(百濟)에게 병합(倂合)되었다」는 이야기다. 「섭라(涉羅)가 백제(百濟)에게 병합(倂合)되었다」는 기록(記錄)은, 여러 사서(史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섭라(涉羅)는 어디에 있었으며, 섭라(涉羅)가 반도(半島) 탐라(耽羅), 제주(濟州)였는가? 하는 것인데, 전혀 다른 땅에 있었다는 것이다.
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문자왕(文咨王) : 《十三年,夏四月,遣使入魏朝貢,世宗引見其使芮悉弗於東堂. : 13년 여름 4월, 위(魏)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세종이 그 사신 예실불을 동당에서 접견하였다. 悉弗進曰:小國係誠天極,累葉純誠,地産土毛,無愆王貢.但黃金出自扶餘,珂則涉羅所産.扶餘爲勿吉所逐,涉羅爲百濟所幷,二品所以不登王府,實兩賊是爲. : 예실불이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 소국이 황제를 섬기기로 약속한 것을 누대에 걸쳐 성실하게 지켰으며, 토산물을 바치는 조공도 어긴 적이 없었다. 다만 황금(黃金)은 부여(扶餘)에서 생산되고, 옥(玉)은 섭라(涉羅)에서 생산되는데, 부여(扶餘)는 물길(勿吉)에게 쫓기고, 섭라(涉羅)는 백제(百濟)에게 병합(倂合)되었으니, 두 가지 물품이 왕부(王府)의 창고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적국의 탓입니다. 世宗曰:高句麗世荷上將,專制海外,九夷黠虜,悉得征之,甁罄罍耻,誰之咎也? : 세종이 말하기를 : 고구려(高句麗)는 대대로 상장(上將)의 도움을 받아, 해외를 다스리고, 구이(九夷)의 교활한 무리들을 모두 정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보물이 적어졌으니, 이는 우리의 수치인데,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昔,方貢之愆,責在連率.卿宜宣朕志於卿主,務盡威懷之略,揃披害群,輯寧東裔.使二邑,還復舊墟,土毛無失常貢也. : 지난 날 조공이 충실하지 못한 것은, 책임이 지방관에게 있다. 그대는 나의 뜻을 그대의 왕에게 전달하여, 그로 하여금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잘 사용하여 나쁜 자들을 없애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부여와 섭라로 하여금 각각 옛 땅으로 돌아오게 하여 토산물의 공납을 어기지 않도록 하라하였다.》
➠《부여(扶餘)의 황금(黃金)은, 물길(勿吉) 때문에 오지 못하고, 섭라(涉羅)의 옥(玉)은, 백제(百濟)가 그 땅을 차지해 올 수 없다.》는 것이 핵심(核心)이다.
부여(扶餘)는 고구려(高句驪)의 북방(北方)에 있었다했으므로, 물길(勿吉)【읍루(挹婁)·말갈(靺鞨)】이 부여(扶餘)를 어지럽히니, 길이 통하지 않아 황금(黃金)이 올 수 없다는 것은 백번(百番) 이해(理解)되는 것이다. 그러나 섭라(涉羅)는 남해안(南海岸)의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나라이기 때문에, 고구려(高句驪)까지 왕래(往來)한다는 것은, 당시로써는 불가능(不可能)에 가깝고, 또한 제주(濟州) 곧 섭라(涉羅)가 고구려(高句驪) 땅이었다는 기록은 전무(全無)하다.
➍ 위 흑룡강여도설(黑龍江輿圖說)에서 말하는 것처럼 : 제제합이(齊齊哈爾)성(城)의 서남(西南)에 섭라(涉羅)가 있었고, 이곳을 백제(百濟)가 점령(占領)해 버렸다면, 이곳에서 산출(産出)되는 옥(玉)은 고구려(高句驪)로 갈 수 없다. 따라서 ‘섭라(涉羅)’는 ‘반도(半島) 제주(濟州)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➎ 여기서 또 중요(重要)한 것은 흑룡강(黑龍江)이 2-4세기(世紀)의 흑룡강(黑龍江)이냐? 하는 문제(問題)가 있다. 현재(現在)의 <요녕성(遼寧省)·길림성(吉林省)·흑룡강성(黑龍江省)>등지의 모든 것들은, 근세기(近世期)에 이름이 지어졌기 때문에,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곳이 아니다. 동북삼성(東北三省)지대(地帶)의 것들은, 20세기(世紀) 초(初)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보니, 고전(古典)에서는 이곳에 대한 어떤 기록(記錄)도 없다. 이게 중요(重要)한 거다.
➏ 고전(古典)에서 말하는 흑룡강(黑龍江)은, 최소한(最小限) <흑해(黑海)와 카스피 해(海) 연안(沿岸), 발하슈 호(湖)와 자이산 호(湖) 북방(北方)등지>에서 찾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것인데, 해국도지(海國圖志)로 보면 <우랄산맥(山脈)으로부터 벨루하 산(山)(알타이 산(山))사이에 있는 강(江)>으로 좁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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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사(朝鮮史)는 이렇게 알 수 없도록,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 진실(眞實)을 파악(把握)하는데, 엄청난 노력(勞力)이 필요(必要)할 것이다. 국가적(國家的)으로 거대(巨大)한 조직(組織)과 예산(豫算)을 투입(投入)한다고 해도, 수십(數十)년이 걸릴 일이며, 인접(隣接)국가(國家)들과 반도인(半島人)들의 방해공작(妨害工作)은, 상상(想像)을 초월(超越)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이게 현실(現實)이다. 지금 대한민국(大韓民國)은 경찰국가(警察國家)가 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 같고, 친일(親日)분자(分子)들은, 친일(親日)국가(國家)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努力)을 경주(競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현실(現實) 상황(狀況)이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현실(現實)은 무엇이냐?
모든 것들이 검찰(檢察)과 경찰(警察)로 통(通)하고 있으니 말이다.
● 국민(國民)을 위한 검찰(檢察)이냐? 대통령(大統領)을 위한 검찰(檢察)이냐?
● 국민(國民)을 위한 경찰(警察)이냐? 대통령(大統領)을 위한 경찰(警察)이냐?
누구를 위한, 누구를 위해 존재(存在)하고 있는지가 불분명(不分明)하다면, 그것은 니들의 책임(責任)이다. 니들은 국민(國民)들을 위해 존재(存在)하고 있는 것이지, 대통령(大統領)의 권력(權力)을 떠받치기 위해, 존재(存在)하는 것이 아님을 왜 잊으려 하는가?
2016년 10월 02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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