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탄생 110주년 특별전―쓰다 이중섭’ 전 관람 후기
<은지화에 새긴 눈물과 사랑의 문장들>
청봉 곽노연
천재 화가의 붓끝이 지나간 자리는 화려한 예술의 기록이기보다 차마 다 토해내지 못한 한 사내의 처절한 연서(戀書)였다. 조선일보와 이중섭미술관이 마련한 ‘이중섭 탄생 110주년 특별전―쓰다 이중섭’ 전을 관람하는 내내 가슴 한구석에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가시지 않는 것은 그가 남긴 것이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절규'였기 때문일 것이다. 관람 후의 그 먹먹한 여운이 너무도 오랫동안 남아있어 후기를 쓰는데도 달 반이 지나서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이중섭의 삶과 예술을 기리는 관람평을 썼다.
지난달 3월 8일 전시장 문을 나서는 순간, 서울의 하늘은 평소보다 더 어둡고 무거웠다. 이중섭, 그의 이름 석 자 뒤에 붙은 '천재'라는 수식어는 오늘 나에게 너무도 잔인한 농담처럼 느껴진다. 탄생 110주년, 그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가 꾹꾹 눌러 쓴 편지들과 은지화 속의 선들은 여전히 마르지 않은 핏방울처럼 생생하게 관람하는 나를 괴롭혔다.
중섭의 작품들을 여기저기에서 숱하게 찾아다녔었지만 이번 전시는 그가 세상을 향해 휘두른 화려한 색채보다 사랑하는 가족을 향해 쏟아부은 '쓰는 행위'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에서 화가의 처절한 절규가 더더욱 폐부를 찔렀다. 그에게 그림은 곧 글이었고 글은 곧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한 간절한 기도였다.
전시장 벽면을 채운 가족을 향한 편지들 앞에서 발길이 멈춘다. 아내 남덕(마사코)과 두 아들에게 보낸 구구절절한 사연들 속에서 화가는 거대한 황소가 아니라 한없이 작고 외로운 아버지고 남편이었다. "곧 데리러 가겠다"는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한 채 잉크 속에서 박제가 되었고, 그 미안함과 그리움이 응축되어 탄생한 것이 바로 그의 예술이었음을 깨닫는다. 곧 가난보다 무거운 것이 그리움이었을터.
담뱃갑 속 은박지에 송곳으로 새겨 넣은 '은지화'는 그 자체로 비극의 결정체였다. 캔버스를 살 돈조차 없던 극심한 빈곤 속에서도 그는 붓 대신 송곳을 들었다. 작고 좁은 은박지 안에 엉켜있는 아이들과 복숭아, 물고기들은 그가 꿈꾸던 유토피아였을까? 뾰족한 송곳날 끝이 은박지를 파고들 때마다 그의 심장에도 그만큼의 생채기가 났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중섭은 벼랑 끝에서 은박지에 꽃을 피워냈다.
전시된 작품 중 우리들에게 익숙한 ‘황소’의 기개는 이번 전시에서 유독 구슬픈 울음소리로 치환되어 들려왔다. 그것은 식민지의 아픔이자 분단의 비극이었으며, 무엇보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죽어간 한 인간의 고독한 외침이었다. 중섭의 선은 강렬했으나, 그 선이 품고 있는 색채는 슬프도록 투명했다. 역동적인 황소는 바로 중섭의 울음이었고 아버지로서 또 남편으로서의 통곡이었다.
부잣집 아들이었던 이중섭의 110년은 결코 화려한 축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방에서 아내의 온기를 그리워하며 아픔으로 예술을 빚어낸 한 사내의 고행이었다. ‘끄다 이중섭’ 전은 불우한 천재에 대한 동정이 아니다. 가장 순수한 사랑이 시대라는 거대한 파도에 부딪혀 부서질 때 발생하는 눈부신 파편들을 목격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거룩한 슬픔이었다.
<그리움을 쓰다>
붓끝에 맺힌 눈물 편지 되어 흩날리고
은박지 모진 땅에 가족 이름 깊이 새겨
평생을 다 쓰지 못한 채 박제된 그 목소리
그는 떠났으나, 그가 은박지에 새긴 사랑의 문장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이토록 지독하게 무엇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가.“
<3월 8일 관람하고 달 반이 지난 4월 16일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