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키스
여름 해변에 온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별 해프닝을 그린 단편영화
“지구 탈출”을 촬영하는 데는 꼬박 2주일이 걸렸다.
챙이 넓은 모자에 선글라스를 끼고 반바지와 헐렁한 셔츠 하나만을 걸친 채
쉼 없이 악을 써대던 미주는 촬영에 돌입한 지 사흘 만에 목이 쉬어 버렸다.
승우는 작품에 필요한 소품들을 현지에서 조달해 내느라 바다에 한 번 제대로 뛰어들지도 못하고
발바닥에 물집이 대여섯 군데라 생기고 말았다.
미주는 무서운 기세로 빡빡하기 그지없는 촬영 일정을 맞춰 나갔다.
바닷가 해변에 남자가 써 놓은 낙서 위에 게가 조그만 소시지 덩어리를 물고 들어가는 마지막 촬영을 끝내자
미주는 드디어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그 한 신을 찍는 데 무려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오케이 사인과 함께 서른 명이 넘는 스태프와 출연자들 전부는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파도가 넘실거리는 푸른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긴장이 확 풀린 미주는 그 동안 힘들었는지 모래사장에 큰 대 자로 벌렁 드러누웠다.
선배님, 모래찜질해 드릴까요? 승우구나 야, 너도 바다에 들어가 놀아. 에구 모르겠다. 니 맘대로 해라.
지금 내 몸이 내 몸이 아니다. 피로를 푸는 데는 모래찜질이 그만이죠.
승우는 여름 햇빛으로 달구어진 모래를 미주의 몸 위에 덮었다.
모자 챙으로 가린 얼굴과 목만을 남긴 채 미주의 몸은 금세 모래로 볼록하게 덮여 버렸다.
야아. 아주 묻어라. 묻어. 애가 아주 날 죽이려 드는군.
기분이 어때요.
뜨끈뜨끈한 게 괜찮군.
하지만 좀 무겁네. 나중에 다른 걸로도 덮어 줄 수 있어요.
다른 거? 뭘루?
뭐어..........장미꽃잎이나 나뭇잎 같은 걸로요. 낭만적인 것 같지 않습니까?
네가 그런 얘기하니까 닭살 돋는다. 그런 건 니 애인한테나 해주는 거야. 넌 가끔 가다 오버하는 게 탈이라구.
그날 밤은 백사장에서 밤새워 술을 마시는 술 파티였다.
남은 경비를 다 털어 인근 횟집에서 횟거리를 사오고 소주가 궤짝으로 배달되었다.
미주는 촬영 편집에 대한 조언과 우수 장비를 빌릴 수 있는 업체와 그 위치 기술진들의 전화번호 등
선배인 기출과 성호가 알려주는 정보를 받아 적느라 열심이었다.
밤이 깊어가고 작은 캠프파이어가 놓여질 때쯤 돼서는 미주는
메모 수첩을 가방에 쑤셔넣고 성호 옆에서 술을 마셨다.
자성 무렵이 되자 종놈 기수라 불리는 신입 학번인 승우는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다시 분주해졌다.
미주는 취해 있었다. 빙 둘러앉은 오비 팀 선배들과 CDS 임원진들도 영화에 대한 끝없는 난상토론과
객기 짙은 열변 속에서 하나 둘씩 취해 갔다.
미주는 근처를 지나는 승우를 불러 앉히고 소주잔을 건넨 뒤 넘치게 술을 따랐다.
승우야 수고했다. 우리 막내 없었으면 소품 미달로 박살 날 뻔했어.
맞아 제가 제일 열심인 것 같더라구.
이번 기수들 너나할 것 없이 좃뺑이 치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던데
저 녀석만은 게거품을 물면서 뛰어나니더라니까.
얼마 전에 군대에서 제대한 뒤 이번 학기에 복학한 남자 선배였다.
미주는 잔을 들고 잠시 멍청하게 서 있는 승우의 등을 손바닥으로 세게 쳤다.
쭈욱 마셔. 짜샤! 아까 너 저쪽으로 가서 게우는 것 봤다.
원래 한번 대차게 토하고 난 다음부터 쇠주 약발이 오르는 거야.
그러고 나면 담부터는 아무리 부어 넣어도 끄떡없다구. 야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긴장 풀어. 팍 퍼질러 앉으란 말이야. 여기가 무슨 조직이니? 하여튼 간에 너란 애는 묘해.
농담 따먹기도 곧잘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사리잖아. 그게 유일한 네 단점이야.
미주는 팔을 들어 승우와 어깨동무를 하려고 했지만 승우의 앉은키가 휠씬 커서 팔이 둘러지지 않았다.
승우야!
네?
어째 눈치가 없냐? 하느님과 동기동창인 이 선배님이 기분이 좋아 어깨동무 한번 하려고 했더니만
네 키가 날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잖아. 허리 좀 구부려 봐.
어쭈! 우리 회장님은 군에도 안 갔다 오신 사제 인간이면서 군물자에 속하는 용어를 빼돌려 사용하시네.
에이, 정 선배! 그러지 말아요. 좋은 건 좀 나눠 씁시다요.닳는 것도 아닌데.
그러더니 승우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승우야. 안 그러냐?
야 너 지금 하는 행동은 법에 저촉된다. 직권 남용이고 성희롱이야.
어디 다 큰 남자 모가지를 네 쪽으로 끌어당겼다 풀었다 하냐?
킥킥 성호 선배 별소릴 다하네.
이건 직권남용이 아니고 역대 CDS 회장들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야.
특히 신입생들의 능력과 의욕을 고무시키기 위해서 가벼운 스킨십은
받드시 필요하다고 열변을 토한 사람이 누구야?
내가 신입생일 때 성호 선배가 했던 말이야.
이거 왜 이래? 남자 회장은 되고 여자 회장은 안된다는 건 어느 나라 법이야.
난 딱 보면 알아. 승우 얘가 3학년만 되면 회장이 돼서 우리 CDS을 세상으로 끌고 나갈 제목감이란 걸.
모래사장에 한 쪽 손을 받치고 팔베개를 한 채 담배를 피우던 성호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킬킬거렸다.
미주야. 걔 그만 좀 놔줘라. 자고로 남자 여자란 살갗을 오래붙이고 있으면 십중팔구 정분난다는 걸 모르냐?
얼씨구! 승우랑 나랑? 말도 안 돼. 얘랑 학년은 2년 차이가 나지만 내가 한 해 끓어서 나이는 세 살 차이야.
이 짜식이 좀 괜찮긴 하지만 내 타입은 아냐.
니 타입은 어떤 남자데?
승우 애랑 반대인 남자. 왜 있잖아. 손오공에 나오는 저팔계처럼 못생겼지만 저돌적인 남자.
차이가 있다면 저돌성과 용감성에 지적인 면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거지.
취해 있었다. 그러나 미주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가 원하는 남자는 정글이나 다름없는 영화판을 함께 뚫고 나갈 수 있는 전사형의 남자였다.
하지만 승우는 검은 밤바다의 파도가 자꾸만 가슴속으로 들이치는 느낌이었다.
미주가 악의 없이 한 말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미주의 남자 영역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면
웅담을 날것으로 씹은 것처럼 혀끝이 지독히도 씁쓰레했다.
밤의 짙은 명암 때문에 들키지는 않았지만 승우는 눈물까지 핑 돌았다. 사랑이었다. 깊은 사랑.
승우는 미주가 채워 준 잔을 비우고 슬그머니 일어나 아무도 없는 해변가를 향해 걸었다.
바다를 향해 혼자서 조금 떨어져 앉아 있던 정란은 어둠에 묻혀 사라지는
승우의 쓸쓸한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갑자기 코끝이 파도 한줄기가 때린 것처럼 시큰거렸다.
남자의 뒷모습은 자기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부위였다.
승우의 등은 사랑에 상처 입은 자가 스스로 가슴을 치유해서 미소를 머금고 돌아와야 하는 푸르디푸른 등이었다.
정란은 안쓰러움과 함께 일말의 질투심까지 느꼈다.
승우가 미주에게가 아니고 자신에게 다가왔다면! 가슴이 설레였다.
정란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두렵다기보다는 행복한 것 같았다.
장애가 있을수록 간절하고 눈물겨울 것 같았다.
그것이 20대의 사랑이 주는 위대하고 아름다운 특권이 아닌가!
정란은 정직한 남자가 가지는 감정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한 여자를 향한 한 남자의 항일성의 마음,
어쩌면 승우의 사랑에는 어떤 굴곡이나 회선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주 전 강릉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 승우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나무과에 속한 사람이라고,
나무는 한번 자리를 정하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스스로 말라 죽을지언정,
정말로 승우는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이미 시작한 게 아닐까.
미주는 그를 한 남자로 보기보다는 그저 아끼고 다독거려 주어야 할 재능 있는 후배로밖에 보지 않는데.
정란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시대에 연상의 여자와 연하의 남자의 사랑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결혼은 더더욱,
정상적인 사랑이어도 웬지 불륜과 일말의 금기의 냄새가 베어 나오는............
담배 연기가 뒤에서 훅 뿜어져 나오더니 미주가 정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혼자서 뭐 하니?
바다 본다.
바다가 어디 보이냐?
하늘과 바다가 시커멓게 한 덩어리가 됐잖아. 밤에 먹혀 있을 뿐인데 뭘.
넌 이 앞에 잘게 부서지는 파도가 안 보이니? 이 파도가 대양을 건너왔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지.
잔등을 쉼 없이 밀리고 밀려서 말이야. 파도의 일생이지.
긴 여정 끝에 약간의 거품과 철썩. 하는 소리로 한순간에 잦아들고 마는
파도의 끝자락을 우린 지켜보고 있는 거야.
야아, 정란아. 너 의대 잘못 들어갔다. 철학과가 맞춤인데 말이야.
농담하고 싶지 않아.
어이구 센티멘털까지!
미주는 푸른 담배 연기를 후욱 내뿜으며 정란의 목과 어깨에 팔을 돌려 어깨동무를 했다.
평소라면 정란은 자신의 어깨에 둘러진 미주의 한 손을 꼭 잡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란은 착잡한 표정으로 몸을 동그라니 오므리곤 뼈를 꼿꼿하게 곧추세우고 있었다.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기분이 좀 그래.
기지배. 누가 전국고교생 문예대회에서 입상했던 문학 소녀 아니랄까 봐.
야 그러지 말고 우리 둘이 한잔 더 하자.
하고 싶으면 승우랑 해라. 승우? 걘 또 왜?
너 정말 모르니? 아님 모른체하는 거니?
대체 뭘?
걔가 너 좋아하는 것 같더라. 걔가 널 사랑하는 것 같더라구.
승우가?
왜?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온다 걔...........걔가 너보고 그래? 날 사랑한다구? 그런 말은 안했는데........
너 모래찜질까지 해 줬잖아. 어쨌든 틀림없어.
어떤 여자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국화 향을 애기했을 때 이미 눈치챘어.
그 여자가 미주 너냐고 물으니까 얼굴에 핏기까지 가시면서 어쩔 줄 몰라 하더라. 너라고 대답고 했구.
아. 난 또 뭐라고 그 국화?
우리 첫날 연합 서클 모임 때 지하철 안에서 우연히 승우와 만났거든 그때 애기하더라구.
내 머리카락에서 국화 향기가 난다나?
킥킥킥. 미당의 시 같은 걸거여. 나를 누님쯤으로 여기는 . 여하튼 간에 그거 비밀아냐.
좋은 영화 감독 되긴 너도 애시당초 글러먹었다.
뭐야?
영화는 인간의 감정과 심리를 다루는 거 아냐?
근데 나도 확실하게 느낀 남자의 감정을 당사지인 네가 못 느꼈다니!
남자? 정란아 너 오늘 왜 그래? 멀쩡한 관계를 왜 그렇게 삐딱하게 보고 사람을 모는 거야?
걔랑.........나랑...........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관두자. 너 취했어.
애 좀 봐. 자기가 먼저 애기 꺼내 놓구선,
너 조금 전에 내가 저기서 승우 앉혀 놓고 성호 선배에게 한 애기 못 들었어? 그게 내 진심이야.
그럼 다분히 의도적이었구나. 승우가 널 맘에 두고 있다는 것 알고 그런 거 아냐?
참 기도 안찬다. 촬영도 마치고 기분 좋기 한량없는 밤바다에 앉아
너랑 이런 영양가 없는 애기를 하게 될 줄은 정말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다. 좋아 솔직히 말할게. 나도 개 마음이 그렇다는 건 이미 눈치챘어.
바보가 아닌 담에야 내가 그걸 왜 모르겠냐? 하지만 그건 한때야. 우리도 경험했잖아.
대학에 갓 들어와서 서클이나 학과 선배 남자들 중에 괜찮다 싶으면 마구 맘이 흔들렸잖아.
분명히 얘기해. 네가 유별나게 그랬지. 난 안 그랬어.
그래. 까짓것 좋아. 아무튼 캠퍼스 분위기에 익숙해지면
그런 감정들은 씻은 듯이 싹 사라지게 마련이라구.
내가 장담하는데 승우 재 지금 눈에 콩깍지 씌어서 나를 주시하고 있지만
몇 달만 지나 봐라 늘씬하고 볼륨 있는 또래 학년의 예쁜 여자애를 꿰차고
캠퍼스며 거리를 쏘다닐 테니까. 솔직히 말해서 대학 3,4학년 여자들이 여자냐?
학교 안에서 완전 퇴물 취급받는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정란은 승우 같은 남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정신이 말짱하다고 떠벌리지만 소주 몇 병을 위에 쏟아 부은 미주가 취한 건 틀림없었다.
하앗. 이 자식 봐라. 맡은 일을 잘 해내서 귀여워해 줬더니만
잘못하면 날 루머판 위에 얹어 놓고 구이를 만들 녀석이네. 걔 어디 갔어?
이 자식 따끔하게 손을 봐야 선배한테 다신 안 기어오르지.
어디 건방지게 하늘 같은 선배의 배 위를 기어오르려고 꿍심을 먹고 있어.
정말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온다.
멀대같이 크긴 해도 아마빡에 피도 안 마른 신입생 녀석이 감히 날 넘봐?
못 참아. 걔 어느 쪽으로 갔어? 미주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미주야. 정신차려.
왜? 난 네 말대로 하려는 거야. 좀 전에 네가 걔랑 술 마시랬잖아.
그만 텐트로 돌아가자. 회장인 네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어떡하니?
술 마시고 말짱하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걱정하지 말고 너나 먼저 텐트로 돌아가 있어.
나 그 녀석이랑 딱 한잔만 더 하고 올테니까.
얘 얘! 미주야!
하지만 미주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모닥불이 사그라진 근처에서 나뒹구는 소주병을 집어든 미주는
승우가 사라진 해변가의 어둠 속으로 천천히 지워지듯이 사라졌다.
정란은 불안했다. 승우의 절제력을 믿기는 해도 승우 또한 술을 꽤나 많이 들이켰고
격한 감정이 순식간에 폭발하기 쉬운 나이가 아닌가. 더군다나 대자연인 바닷가에 야심한 밤이다.
원초적인 어둠과 밤물결 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잠들어 있는 원시성을 일깨우는.
승우는 뒤편으로 커다란 해송들이 늘어선 모래언덕에 혼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방향 모를 밤바람이 일자 깊은 여름 밤공기 속으로 솔향이 퍼져 날아갔다.
그는 고개를 젖히고 유난히 큰 해송 나뭇가지에 흰 꽃처럼 걸린 잔별들을 올려다보았다.
파도에 모래가 쓸리듯 별빛이 하늘에서 소리를 냈다.
사랑은 마치 해변을 거닐 때처럼 쿡 쿡 파인 발자국이 되어 가슴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걸까?
문득 필리핀의 한 바닷가에서 슬픈 목소리로 말하던 영은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빠, 나는 매일 밤 꿈을 꿔. 줄거리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데 깨고 나면 막 울고 싶어져.
참을 수가 없어서 엉엉 운 적도 많아. 어떤 때는 다시는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아.
오빠 믿겨져? 난 마음이 아플 때는 늘 푸른 꿈을 꾸는 것 같아.
그때 승우는 열여섯 살이었고 영은은 열다섯 살이었다.
대사관 직원 가족들이 모두 비취빛으로 둘러싸인 사바앙이라는 해변에 갔을 때였다.
당시 영은은 여자의 선이 몸매에 완연히 살아나는 귀엽고 예쁜 소녀였다.
승우는 영은을 보며 예쁘구나. 한번 만져 보고 싶다. 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영은과 뭔가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영은은 반대였다.
테니스를 치거나. 베드민턴을 치거나. 수프를 끊여 먹거나. 토스토를 구워 먹거나.
무엇을 하든 언제나 오빠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연초에 한국에 다니러 왔을 때 숙녀로 화사하게 피어난 영은은 눈부시게 예뻤다.
덧니가 배꽃잎처럼 상큼하게 보일 만큼 하지만 그게 다였다.
영은이 적극적으로 다가올수록 승우는 그 이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승우의 아버지는 영사고 영은의 아버지는 대사라는 직급의 차이 때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리 자신의 마음속을 뒤져 봐도 영은이 싫은 이유가 숨겨져 있지도 않았다.
분명히 승우는 영은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것에서 사랑하는 사이로 넘어가는 그사이 간격에는
언제나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비밀 카드처럼 끼워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승우에겐 그것이 없었다.
영은아 네 맘을 잘 알긴 하지만..........미안하다. 그래 줄 수가 없어서.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표현이 되겠지만..........
그래, 마음의 보석함이 열리고 그 광채를 느끼는 거라고 생각해.
그 빛이 사라지고 나면 페허나 다름없는 가슴으로 변할 수도 있겠지. 정말...........
어찌됐든 미안하다. 영은아, 난 너의 사람이 못 될 것 같아.
영은은 얼굴을 꼿꼿이 세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승우가 눈길을 피한 사이 그녀는 잠시 고개를 떨구었는데
다시 쳐든 얼굴은 안개비가 내린 것처럼 촉촉이 젖어 있었다.
내가 얼마나 빛이 오래가는 보석이란 걸 오빠는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난 누구보다도 오빠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어. 왜냐구?
난 오빠를 위해서라면 기껏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오빠를 사랑하니까.
이 세상에 나처럼 오빠를 깊이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없을 거야. 난 기다릴 거야.
나의 사랑이 오빠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보석이 될 때까지.
필리핀으로 돌아간 뒤 영은은 승우 앞으로 짧은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지에는 눈물 자국이 몇 군데나 나 있었다.
남녀간의 사랑에는 참으로 심술맞은 구석이 있어서 특별한 이유 없이 엇나간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승우와 영은. 미주의 관계가 그러했다. 누가 봐도 좋은 집안의 예쁘고 총명한 영은이 낫다고 할 테고 탐내겠지만,
승우는 영은이 여자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얄궂게도 승우가 사랑하는 여자는 그를 남자로조차 여기지 않았다.
하필이면 3년 연상이고 선배인 여자를 사랑하게 되나니. 정말이지 사랑은 초보자는 도무지 다룰 수 없는,
핸들 없는 자동차를 모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의 나라로 행복의 나라로 아무리 애써 몰아가려고 해도 사랑의 감정은
그를 점점 더 헤어나기 힘든 슬픔의 수렁이나 고독의 늪 속으로 몰고 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제대로 입술 한번 달싹일 수 없다니........
승우는 스스로에 대한 애잔한 슬픔이 명치 끝을 찌르는 듯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승우야! 승우야! 승우 너 어딨니?
바다의 끝과 육지의 끝 아니 바다의 시작과 육지의 시작인 해변가를 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미주였다. 신발을 벗어 든 미주는 파도의 끝자락에 발목을 적신채로 승우를 찾고 있었다.
미주 선배님! 저 여기 있어요.
야아. 너 멀리도 왔다. 뭐 한다고 예까지 나왔냐?
저기 밤하늘에 걸린 달이 아니었으면 난 벌써 포기하고 돌아갔을 거다.
금빛 달빛 아래 미주가 희미하게 웃으며 소주병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술기운에 지친 미주가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자 승우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 옆에 섰다.
미주는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그것은 성별을 떠나 선배이기를 고집하고
후배를 믿는 미주의 신념에서 비롯된 자유로운 행동이었다. 그런 활달함 속에는 자신이 여자임을
승우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의식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 버티고 있었다.
야아. 벼로 참 많다.
여름 밤은 별들이 마구 새끼를 치는 것처럼 많지 않나.
그렇네요. 별이 떨어질까 봐 무섭다는 표현이 이럴 때 따악 써먹을 만하네요.
승우의 목소리는 유쾌해져 있었다. 미주는 소주병을 놓고 두 팔을 새의 날개처럼 활짝 펼친 다음
두 손 가득 모래알들을 쥐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너도 한번 누워 봐. 살에 닿는 모래의 감촉이 좋다. 부드러우면서도 참 시원해.
남들이 보면 어떻게 해요?
야 임마! 보면 어때? 우리가 뭐라도 하니?
우린............그저 모래밭에 누워서 별을 올려다볼 뿐이야.
선배와 후배가 누워서 도시에는 없는 바다가 뒤집어져 하늘에 잔뜩 쏟아 낸
소라껍질 같은 별을 함께 올려다보는 거지,
불순한 소린 하덜 말고 어서 눕기나 하소.
야아. 어쭈, 야가 전라도 박자도 제법 맞추네잉. 그라지라? 야아, 됐어. 고만해. 야아.
그들은 나란히 누워 옥수수 알이 태양의 오븐 위에서 펑펑 튀어 팝콘처럼 별이 되어 터지는
웃음 소리를 내면 웃었다. 웃음 소리로 움푹해진 어둠 사이로 빠르게 고요가 깃들었고
이어서 파도 소리가 담겼다. 파도 소리가 별 아래 어둠에 점점이 박혀 딱지를 뒤집어쓴
조그만 게의 더듬이처럼 허공에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침묵이 갑자기 낯선 얼굴로 바뀌어지려는 찰나 미주가 갑작 키들키들
게가 미역 위를 옆으로 걸어가는 듯한 웃음 소릴 냈다.
왜요?
이렇게 너랑 별밭 아래 나란히 누워 있으니까 불현 듯 어떤 영화 장면이 떠올라서 말이야.
영화요?
“ 별들의 고향”말이야. 봤니?
승우에게 묻기 위해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던 미주는 다시 하늘을 응시하며 말했다.
외국 생활을 꽤 오래 한 탓에 미처 못 본 모양이구나. 그 영화에 정말 기막힌 대사가 나오지.
어떤 건데요?
주인공이 신성일과 안인숙인데 아냐?
신성일은 알죠.
아무튼 안인숙은 참한 얼굴이야. 그 영화에 안인숙과 신성일이 나란히 누워 있는 장면이 나오거든.
그때 신성일이 목소리를 터프하게 깔고 안인숙에게 이렇게 말해,
오래간만에 함께 누워 보는군! 그러자 안인숙이 코맹맹이 소리로........뭐라더라?
야 이거 술빨 때문에 저장된 기억이 날아가 버렸군. 아무튼 대강 이래. 아 너무나 행복해요.
아.......... 여자의 삶은 무엇일까요? 좋은 남자를 만나면 행복해지고 나쁜 남자를 만나면 불행해지는.......
선생님은 좋은 사람인가요? 대충 이런 얘기야. 안인숙 목소리를 더빙한 여자 성우가 고은정인데
그 여자의 비음 섞인 목소리는 정말 몸서리가 처질 정도지. 끔찍해.
비디어 빌려 봐야겠네요. 하도 옛날 거라 있을랑가 모르겠네.
아무튼 그 영화 주제곡이 이장희의 “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란 노래도 정말 죽이지. 그 노래 너 아냐?
몰라요.
하긴 너 같은 미성년자에겐 불러 주지 말라는 금지곡 딱지가 붙여졌던 노래니까 내가 불러 주진 않겠어.
대신 네가 아무 거나 한 곡 불러 봐. 대학 신입생이지만 법적 연령을 몇 달 못 채운 승우는
아직 미성년자란 덜 떨어진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었다.
가요요. 팝송요?
글세 아무 노래나.
승우는 가요보다도 팝송을 휠씬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잠시 주마등처럼 스치는 팝 가수들 중 헬렌 레디의 곡을 선정했다.
팔베개를 하고 옆으로 누워 미주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승우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목소리로
“YOURE MY WORLD"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하늘 한가운데서 저 별들을 찾아냈지만 나는 당신의 눈 속에서 그 별들을 본답니다.
승우는 노래를 썩 잘 불렀다. 물의 흐름처럼 매끄러운 목소리와 발음은 주위의 공기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미주는 눈을 감고 승우의 노래를 들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듯 사랑하는 여자를 향한 애절함이
저항할 틈도 없이 미주의 마음에 스며드는 듯했다.
어기 나 원 참! 혹 떼려다가 혹 붙이겠네!
미주는 분위기를 깨며 벌떡 일어나 앉아 소주병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을 삼켰다.
야아, 너 노래 정말 잘한다. 죽이는 걸. 통기타 무대에 서도 손색이 없는 실력이야.
앵콜 앵콕! 다른 레퍼토리 또 없냐?
미주는 솔직하게 찬탄을 표현했다. 승우는 연이어 상체를 리듬에 맞게 경쾌하게 흔들며
“Diana"라는 귀에 익은 노래를 불렀다. 흥겨운 리듬이었기 때문에 미주는 간간이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췄다.
따라 부르기도 했다. 노래가 끝나자 이내 밀려드는 적막감이 곤혹스러운지 승우는 몃쩍게 웃은 뒤
미주가 가슴속에 닫혀 있던 공기를 한숨인지 큰숨인지 모르게 크게 내쉬어 풀어 놓았다.
미주는 모래를 집어 사방에 몇 번 훅훅 뿌렸다.
그러더니 손을 털고는 작정을 한 듯 승우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미주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입 안에서 갈무리되어 있었다.
승우야!
네.......?
우리 그냥 지금처럼 좋은 선후배로 지내자.
처음에 선배와 후배로 만났듯이 앞으로도 선배와 후배로 가는거야.
봐. 난 네 선배구 넌 내 후배잖아. 흐음.......
좀 전에 정란이한테 애기 들었어. 네가 날 맘에 두고 있는 것 같다는.
그 얘길 들으니까 한편으로 고맙고 한편으론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더라. 그
래서 널 이렇게 찾아왔지. 물론 나도 널 좋아해 하지만........
됐습니다. 다음 얘긴 말씀 안 하셔도 충분히 선배님의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승우는 담담한 어조였다.
그래 짜샤! 긴 말이 필요없어 좋군.
남녀의 엇나간 관계에 대해 적당한 이해나 구색을 맞추려 하다가는
자칫 두 사람 모두 감정적으로 치졸해지거나 불쾌해지기 쉽상이다.
미주는 먼저 일어서서 승우의 어깨를 툭 쳤다.
안 가냐? 아침에 이동할 테데 눈 좀 붙여야지?
승우는 대답이 없었다. 미주는 그런 승우를 뒤로 하고서 몇 발자국을 떼었다.
선배님!
으.......응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
키스 한번 해도 되겠습니까?
뭐...........뭐야 뽀뽀........그건 왜?
승우는 구부정하게 일어나 허리를 쭉 폈다.
그러고는 미주를 향해 걸어오며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념 사진이죠. 뭐.
이 바다와 저 하늘의 별 저기 서 있는 커다란 해송에 대한 한 장의 스냅 사진을 찍는 것 같은.
그건 좀 곤란하다 애. 네 감정이 가볍지 않잖아. 지금 기분도 좋지 않은 것 같고.
아닙니다. 한 번만 하게 해 주십시오.
승우는 미주 앞에 섰다. 막상 헌칠한 승우의 키가 앞을 막아서자 미주는 일순 당황감이 엄습했다.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승우의 팔이 미주를 확 끌어당겼고 승우의 입술이 미주의 입술을 덮었다.
키 차이 때문일까. 미주의 발뒤꿈치가 살짝 들려졌다. 승우의 입술은 뜨거웠고 서늘했다.
윗입술이 태양에서 가져 온거라면 아랫입술은 달이 키워 낸 것 같았다.
그리고 바다를 한껏 머금은 백사장처럼 촉촉했다. 잠시 후 미주는 풀려났다.
승우는 뒤에 저만큼 서 있는 유난히 커다란 해송 한 그루처럼 우뚝 서 있었다.
미주는 일시에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따귀를 갈기거나 발로 정강이를 걷어차야 하는 게 아닐 까?
속이 약간 상한 건 사실이지만 생각만큼 불쾌하진 않았다. 이번 한번만은 참는다.
하지만 다음에 또 이런 무례한 짓을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이렇게 무슨 말인가 따끔하게 한마디 못박아 주고 싶은데 도무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상황으로선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의연하게 처신하는 게 선후배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자도록 해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이동해야 하니까.
네
오늘 너는 분명히 실수 한 거야! 나 간다!
미주 선배님!
응?
전...........언제나 여기 있겠습니다. 저기 커다란 소나무처럼요.
미주는 말없이 돌아섰다. 가슴속으로 성급한 가을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무슨 뜻이지? 언제나.........여기 있겠다고? 소나무처럼..........
아니 그 말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어. 내게는 그저 바다의 느낌으로 남을 뿐이야.
일행이 묵고 있는 텐트 쪽을 향해 건던 미주는 흘끗 뒤를 돌아 보았다.
승우는 백사장에 붙박인 나무처럼 저만치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미주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승우가 지닌 마음의 깊이와 무게와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정말 난감한 노릇이군. 미주는 밭은 기침을 토했다.
첫댓글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은 확실히 다른 모양입니다 ㅎㅎㅎ
10여년전에 읽은 소설이네요!! 읽다보니 어렴푸시 생각이 나네요!! 잼나게 다시한번 보렵니다~고맙습니다!!
스을슬 빨려 들어 가네요 재미 있어서요....감사합니다
첨부터 쭈욱 다시와서 읽어 봅니다 하도 재미가 있는지라 다시 읽으니 깊은 맛이 울어나 구수하게 구운 오징어 씹는 쫄깃한 감칠 맛같은 느낌 입니다......ㅋㅋㅋ 감사합니다
폐교 된 초등 학교를 빌려서 어쩌구 저쩌구... 읽은 것 같기두 하구~ㅎ 현디 이긋도 읽은지 몇년 안된 것 같은디 나이가 먹긴 먹나 보네요. 기억이 가물치랑 맨날 놀라고만 혀니...ㅋㅋ 수고 하셨습니당~^^*
잘~보구 갑니다~~~^^
즐감이여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