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사람은 실패했을 때가 성공했을 때보다 더 중요한 선택앞에 서게 됩니다. 이대로 좌절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일어설 것인가? 이대로 인생을 끝낼 것인가? 다시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실패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고, 그 정도와 횟수의 차이는 있지만 인생을 살면서 실패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많은 상처의 흔적을 갖고 살아갑니다. 최근에 제가 입은 화상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만 상처가 남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도 상처가 있고, 우리의 영혼에도 상처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몇 번쯤 실패했다고 인생을 쉽게 포기한다면 이 세상 사람 절반은 벌써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 희망도 없이 죽지 못해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의외로 우리 내면은 희망으로 가득하고, 그까짓 실패좀 했다고 인생을 내던질만큼 연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0월에는 수감사주일을 앞두고 감사(은혜)라는 주제로 말씀을 묵상합니다.
돌아올 믿음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룻기 앞부분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양식을 쫓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상황이나 환경을 쫓아 살기 시작하면 실패하게 됩니다. 나오미의 가족들이 살아가던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점령시 여호수아가 땅을 지파들에게 나눠준대로 살아왔습니다. 예루살렘과 그 인근의 베들레헴은 유다지파의 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기근은 인류에게는 전염병과 더불어 가장 무서운 재앙이고, 고향을 떠나게 만드는 재앙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기업을 떠난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을 부정한다는 뜻이고, 믿음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강대국 사이의 통로에 있었기 때문에 강제로 이주를 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좀처럼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달랐습니다.
나오미의 가족들은 양식이 있다는 모압 땅으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이 결정은 신앙을 따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양식을 쫓아간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이 가정의 우선순위를 알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가족은 신앙보다는 현실이 우선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고향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자는 생각보다는 당장 양식이 풍족한 땅으로 옮겨가자는 것이 이 가족의 가치관이었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리스도인은 환경을 쫓아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환경은 변하기 때문입니다. 강남이 언제까지 강남일지 모르는 일입니다. 결국 모압땅으로 이사한 나오미의 가족에게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아들들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신실한 신앙인들이었다면 며느리들을 베들레헴에서 선택했을 것입니다. 모압에서의 적응을 위한 이 선택도 신앙적인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먼저 죽고, 두 아들들도 죽었습니다.
이 시대 가정에 남자가 없다는 말은 미래의 소망도 없고, 경제적으로 빈민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이제 끝났습니다. 모압땅에서 더 기대할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가정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인생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6절 앞부분입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그녀는 베들레헴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살았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그녀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나오미의 몸은 고향을 떠났지만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이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고향으로 돌아가봐야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돌아갈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도 나오미처럼 세상을 향해 가서 어려움과 아픔을 겪고 상실의 상처를 안고 신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돌아올 수 있는 믿음을 주시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들의 친정으로 돌아가라. 그것이 너희들에게 남은 최종적인 선택이다.”현실을 보면 당연히 친정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룻은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합니다. 시어머니를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오르바는 자기 친정으로 돌아갔는데 룻은 시어머니에게 말합니다. “나에게 친정으로 돌아가라 하지 마십시오. 나는 어머니 곁에 남겠습니다.”룻은 나오미 인생의 최악의 순간에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은혜입니다. 빛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반복된 실패에도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여전히 우리를 맞아주시는 주님의 품을 떠나지 않는 믿음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고향을 지켜준 이웃이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돌아올 마음이 있었어도 고향이 사라졌다면 나오미는 어디로 가야 했을까요? 베들레헴에 10년이나 기근이 계속되었습니다. 한해를 견디기도 힘든데 10년의 기근속에 베들레헴이라는 마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룻기는 이방여인 룻의 성공스토리를 다룬 이야기책이 아닙니다.
나오미의 전회위복의 이야기를 동화처럼 담아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룻기는 10년의 기근동안 고향을 지킨 베들레헴 사람들의 치열한 생존기로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10년의 어려움이 닥친다면 견딜 수 있겠습니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연속된 시련속에 무너져 내립니다. 10년을 고난이 계속 닥쳐왔다면 견뎌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고난을 이겨낼 힘을 충분히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고난속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우리는 고난을 함께 견뎌내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 둘씩 베들레헴에 살던 이웃들이 떠나갔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3년쯤 견디다가 어떤 이는 5년쯤 어떤 이는 7년쯤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고향을 떠나야 했을 것입니다. 더 견뎌보자고 말도 하지 못한 채 고향을 떠나는 이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늘을 보면 원망스럽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에게 주시는 시련이 너무 깁니다. 우리는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 이웃들이 주님의 기업으로 주신 땅을 떠납니다. 하나님 왜 보고만 계십니까?”그런데 하나님은 베들레헴 사람들의 울부짖는 기도를 외면하며 비를 주시지 않습니다. 메마른 대지와 메마른 하늘은 변함이 없습니다.
“주여 어느때 까지 입니까?”베들레헴은 떡집(빵집)입니다. 아랍어로는 푸주간입니다. 풍요를 상징하는 마을이었습니다. 밀 농사가 잘 돼서 언제나 밀이 풍성한 지역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양식을 공급하는 양식창고의 역할을 하는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식창고가 텅텅 비었습니다. 다른 곳에 양식을 주기는커녕 자신들이 먹을 양식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남은 사람들은 부족한 양식을 나누어 먹으며 버텼습니다. 10년동안 굶주림과 싸우면서 고향을 지키자는 이웃들과 함께 하나님의 긍휼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로서 베들레헴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로 베들레헴에 양식을 주셨습니다.
고난도 혼자서 견디려면 못견디고 포기합니다. 그러나 고난속에서 손 잡아주고 위로와 소망으로 다독이는 사람이 있으면 고난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누군가 지켜주는 사람이 있기에 돌아올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오미나 룻의 신앙을 보면서 “ 야 대단하다.”하기 전에 우리는 베들레헴 사람들의 인내와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룻기의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그들이 없었더라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쟁중에 나라를 지킨 군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고난중에 가정을 지켜낸 어머니들이 있었기에 한국사회가 위기를 이겨냈습니다. 우리에게도 고난중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준 가족들, 교회의 지체들, 이웃이 있음을 감사드려야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교회를 떠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희망을 가져봅니다. 코로나에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고 기도회의 자리를 지켰던 우리들 때문에 떠났던 분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고향같은 교회가 이곳에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고, 나라를 지킨 분들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소망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렘29:1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모든 어려움이 끝나고 하나님의 보장 아래서 꽃길만 걷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말씀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바벨론으로 끌려가 70년동안 포로생활을 해야할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신 말씀입니다. 더군다나 재앙이 없는 소망이 아닌, 재앙을 통과하는 소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인 제퍼슨 버스케는 “무엇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당장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70년 동안 포로 생활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you)가 아닌 너희(복수)로 쓰였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나오미가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걸렸는지 알지 못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룻이 보아스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오벳이라는 자녀를 얻게 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나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나오미의 인생이 모압에서의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룻의 인생이 남편을 잃고 오갈데 없는 과부로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겪은 삶의 과정은 결코 꽃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기근을 만나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했습니다.
이방의 땅에서 남편을 잃었습니다. 나오미의 묵숨같은 두 아들이 먼저 죽었습니다. 남겨진 두 며느리들과 살아야하는 고된 인생의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고향으로 돌아와 남의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견뎌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든 신앙인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났지만 그들이 포기하고 떠난 베들레헴에는 하나님이 그녀의 가족에게 주신 기업의 땅이 남아 있었고, 그 땅을 돌려 받을 수 있는 그 날이 올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룻을 보아스에게로 보냅니다. 룻3:9절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기업 무를 자란 지파별로 받은 기업이 다른 지파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친족중에서 한 사람이 기업을 판 친척의 기업을 다시 사주어야 했고, 자녀가 없이 죽은 친족인 경우 그 미망인과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소망은 자기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아멘!
소망은 세상 사람들의 약속이나 말에서 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이 소망입니다. 바벨론에서 유대인들은 그들이 미워해서 죽이려고 했던 에레미야의 말을 날마다 되새겼을 것입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그리고 70년후 그 약속이 실현되는 날이 왔습니다. 우리에게도 소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고난을 통과해서 약속이 실현되는 그날을 우리 모두 보게될 것을 믿고 감사를 드립시다. 아멘!
주님을 떠나지 않도록 믿음 주심을(돌아올 수 있는 믿음주심을), 우리에게 고난을 함께 견딜 가족과 교회의 제체들 주심을, 소망주심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