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서울 지하철 2호선 전구간 개통
←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림동과 교대역 구간이 개통돼 축하 화환을 단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서울지하철 2호선중 잔여구간인 시청앞∼서울대입구간 19.2km가 1984년 5월 22일 개통, 운행을 시작했다. 이로써 서울의 강남과 강북을 한바퀴 도는 순환선인 2호선의 48.8km 전구간이 개통돼 서울은 본격적인 지하철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완공된 2호선은 1978년 3월 착공, 6년2개월 만에 개통된 것으로 투입된 공사비만 8천7백80억원이었다. 이날 개통된 구간은 시청앞 충정로 아현 이대앞 신촌 홍대입구 합정 당산 영등포구청앞 문래 신도림 대림 구로공단 신대방 신림 봉천 등 16개 역으로 2호선 전체를 한바퀴 도는 데 83분이 소요됐다. 개통 당시 요금은 1백 10원에서 최고 1백 80원으로 현재 1구간 700원, 2구간 800원인 요금에 비하면 꽤 저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2호선은 영동, 잠실, 영등포, 신촌 등의 부도심권과 도심을 직결, 도시기능분산에 기여했으며 서울대, 연대, 이대, 서강대 등 서울시내 상당수 대학가 부근을 지남으로써 학생들에게 통학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2007년] 정부, 부처 브리핑룸 3곳으로 통폐합 확정
정부는 5월 22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어 각 부처의 브리핑룸을 통폐합하고 기자들의 부처 취재를 제한하는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방안’을 확정했다.
이 방안은 현재 각 부처에 있는 37개 브리핑룸·기사송고실을 중앙청사, 과천청사, 대전청사 등 3곳으로 통폐합하는 내용이다. 정부는 다만 업무 특수성과 지리적 위치를 고려해 청와대, 국방부, 금감위 브리핑룸·기사송고실은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본청과 지방청별로 쓰고 있는 검찰과 경찰 브리핑룸도 각각 하나로 통폐합하고, 서울시내 8개 경찰서 기자실은 없애기로 했다.
이에 따라 중앙청사는 청사 인근에 있는 외교부 건물에 합동 브리핑센터를 설치해 총리실, 외교·교육·통일·행자부 등 16개 기관이 이용하고, 과천청사 브리핑센터는 재경·보건복지·예산처 등 10개 기관이 이용하도록 했다.
정부는 이와 관련, 기자들의 공무원 사무실 ‘무단 출입’을 방지할 수 있는 조치를 강구 중이라고 말했다. 또 정부가 등록 기자에게 발급한 전자출입증 소지자에게만 브리핑룸 출입을 허가하고, 이 전자출입증으로는 청사나 각 부처 사무실 출입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밝혀, 기자들의 공무원 접촉 및 사무실 출입통제가 철저하게 실시될 것임을 예고했다. 이는 2003년 6월 발표한 ‘사무실 출입금지’ 방안보다 강하게 청사 출입을 막는 것이다./조선
[1994년] 사회운동가 장일순(張壹淳)씨 별세
← 강원도 원주지역에서 지역활동가이자 사상가, 서예가로 활동했던 장일순씨.
1928년 9월 3일 - 1994년 5월 22일
사회운동가 장일순 선생이 1994년 5월 22일 타계했다. 그의 생애는 ‘민주화운동에서 생명운동으로’라는 말로 요약 될 수 있다. 6.25의 혼란중에 서울대 미학과를 중퇴하고 고향 원주로 돌아온 그는 안창호 선생이 대성학원을 설립한 뜻을 본받아 같은 이름의 학원을 원주에 세웠으나 5.16직후 혁신계로 몰려 3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60년대에는 오랫동안 농사꾼으로 지내다, 1970년대에는 고 지학순 주교와 손잡고 원주를 반 유신 운동의 진원지로 만들었다. 그는 원주 가톨릭 교구에 사회개발조직위원회를 발족, 가톨릭 농민회의 기초를 닦았고, 1980년대 들어서는 소비자 협동조합 운동을 거쳐 생명 사상을 실천하기 위한 ‘한살림운동’을 제창했다. 그는 한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사회 운동가로서 김지하 시인과 특히 각별한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타계하기 전까지 이현주 목사와 노자(老子)를 놓고 나눈 대담을 모아 노자이야기(전3권) 중 상-중권을 냈는데,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저서가 됐다. 그는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1980년대 이후 6차례에 걸쳐 서예전을 개최, 수익금을 양심수와 민주인사를 돕기 위한 기금으로 희사하기도 했다.
[2007년] 박수근作 '빨래터' 45억2천만원
낙찰된 <빨래터> 1950년대 후반으로 추정, 37×72㎝
가로로 긴 화면에 한복을 입은 6명의 여인이 냇가에서 빨래하는 옆모습을 담고 있는 이 그림은 지금까지 경매시장에 나온 박수근의 작품 중 가장 크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갈색 톤을 주조로 하는데 반해 파스텔톤의 다양한 색상이 화사하게 드러나 있다.
22일 오후 4시 서울 평창동의 모 경매장.
300석의 좌석은 이미 동이 났고 앉지 못한 100여 명이 남은 공간을 빼곡히 채운 채 연단을 주시하고 있다.
이날 경매의 관심사는 "국민 화가" 박수근(1914~65)의 유화 "빨래터"가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액을 경신하느냐였다. 추정가는 35억~45억원.
오후 4시50분 34번째 경매 품목으로 <빨래터>가 나왔다.
"33억원부터 시작하겠습니다. 5000만원 단위로 들어갑니다."
중앙 연단에 선 경매사가 말을 끝맺자마자 응찰자의 번호가 적힌 동그란 팻말이 여기저기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33억5000 나왔습니다" "34억" "34억5000"….
현장에서, 전화를 통해, 미리 써 놓은 봉투(서면응찰)까지 경합을 벌이며 액수는 숨차게 올라갔다.
"네, 서면(응찰) 40억 나왔습니다"
"44억입니다.
이제부터는 2000만원씩 하겠습니다."
이때부터 전화 응찰자 두 명의 공방이 시작됐다. 한 손에 전화기를 귀에 댄 두 명의 대리인이 번갈아 팻말을 올렸다.
"44억2000" "44억 4000"….
마침내 막바지가 왔다.
"45억2000입니다. 더 없으십니까."
"…"
"땅! 45억2000만원에 전화응찰한 손님께 낙찰됐습니다."
경매봉 소리는 객석의 탄성과 박수소리에 바로 묻혀 버렸다.
3분30초-.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에 걸린 시간이다. 기존 경매 최고액은 지난 3월 25억 원에 경매된 박수근의 61년 작 <시장의 사람들> 이었다. 소장자는 미국에 사는 80대 미국인으로, 군 관련 사업을 하느라 한국에 체류할 당시 박수근에게 직접 받은 것을 50년간 간직해 왔다고 전했다. 가난했던 박수근이 자신에게 물감과 캔버스를 지원한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했다는 것이다. 소장자는 박수근이 매년 판화 등으로 직접 만들어 보내준 성탄절 카드 6점도 이번 경매에 내놨으며 일괄 2200만 원에 낙찰됐다.
이날 경매에서는 박수근의 다른 유화 2점도 각각 5억2000만원, 4억1000만원에 낙찰돼 "국민 화가"의 인기를 실감케 했다.
이같은 박수근 작품의 고가행진은 갑자기 값이 올랐다기보다는 옛날부터 인기가 높고 비쌌지만 그동안 경매 같은 공개시장을 통해 거래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한다.
박수근 그림은 소재나 기법에서 한국의 서민적, 향토적 이미지를 가장 잘 드러내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그의 그림은 합판에 여러 가지 색을 8겹 정도 칠한 뒤 나이프로 긁어내 밑의 색이 올라오게 하는 방식을 사용해 화강암 같은 우둘투둘한 질감이 나온다.
박수근은 간경화로 51세의 많지 않은 나이에 사망하는 바람에 남긴 작품도 적다. 국내에 100여 점, 미국을 중심으로 외국에 200여 점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은 가방 속에 들어갈 수 있는 0호.1호짜리가 많다. 50년대 미군 매점에서 미국 사람들이 가져갈 수 있는 작품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품의 시세 차익으로 많은 이득을 본 사람은 미국인이며, 그 많은 값을 지불하고 작품을 되사오는 사람은 한국인이라는 점이 좀 아쉽기는 하다.
김환기가 1957년에 그린 <꽃과 항아리>(80호)도 이날 경매에서 30억5천만 원에 낙찰도돼 김환기 작품 중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 작품 역시 미국에 있는 소장자가 50년 만에 국내에 소개한 작품으로 김환기 화백이 추상화로 넘어가기 전의 작품이다.
[2004년] 스페인 펠리페 왕자 앵커 출신 레티시아 오르티스와 결혼
유럽 최고의 매력남 중 한 명으로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맨 오른쪽)의 뒤를 이을 펠리페 왕세자(36-맨 왼쪽)가 5월 22일 스페인 앵커 출신 레티시아 오르티스(31-왼쪽 두번째)와 결혼식을 올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던 염문에 종지부를 찍었다. 결혼식에는 유럽 각국의 왕실가족 40여 명과 30개국 정상이 참석했으며 등록된 취재진만 40개국 5,000여 명에 달했다. 5시간 동안 생중계된 이 결혼식에는 모두 2천1백만유로의 경비가 소요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부 오르티스는 이혼 경력이 있는 평민 출신이어서 이번 결혼은 스페인 왕실이 그간의 귀족주의에서 탈피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2004년] 세계보건기구(WHO) ‘비만과의 전쟁’ 선포
비만이 세계적 관심사가 되면서 급기야 세계보건기구(WHO)가 2004년 5월 22일 ‘비만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날 제네바에서 폐막된 세계보건기구 제57차 연차 총회에서 각국 보사부 장관들은 ‘다이어트·운동·건강에 대한 세계 전략’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WHO는 전 세계 성인 가운데 10억명 이상이 과체중이며, 이들 가운데 최소한 3억명이 비만이라고 밝혔다. 또한 오는 2020년이면 비전염성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전체의 73%를, 치료 비용의 60%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비전염성 질병에는 심장혈관계 질환, 당뇨, 암 등이 포함되며, 주로 고혈압과 콜레스테롤, 과일과 채소를 적게 섭취하는 식습관, 과체중과 비만, 운동 부족, 담배 등에서 야기된다고 WHO는 밝혔다.
이에 따라 WHO는 이번 세계 전략에 입각해 각국 정부가 비만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이에 맞춰 효율적이고 통합된 농업 및 보건정책을 수립해 국민들에게 널리 교육할 것을 권고했다.
WHO의 ‘다이어트·운동·건강에 대한 세계 전략’은 제목 그대로 균형 잡힌 식습관과 적절한 운동 그리고 지방과 소금 및 설탕 섭취를 줄이고, 과일과 채소를 많이 먹을 것을 권장했다. 하지만 회원국 간 논란도 있었다. 설탕 생산국인 브라질은 설탕 관련 조항이 어떤 형태로든 무역 거래를 왜곡하는 조치로 간주돼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달고 이번 WHO 세계전략에 동의하기도 했다.
[1877년] 독립운동가 임용상(林龍相) 출생
1877. 5. 22 경북 청송~1958. 1. 5.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충서(忠瑞), 호는 중호(中虎).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김재서(金在瑞) 등과 더불어 동해창의군(東海倡義軍)을 조직, 창의대장이 되어 청하·영덕·강구 등지에서 일본군의 주재소를 습격해 다수를 사살했다. 1907년 정용기(鄭鏞基)가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결성하자, 이에 합세해 유격장 겸 도총장이 되었다. 산남의진은 일본군 수비대가 주둔한 청하를 점령하고, 그해 8월 다시 자양(紫陽)과 신성(新城)으로 진격해 일본군을 격파했다. 그는 별동대를 이끌고 영천·경주·청하·청송 일대를 공략했으며, 강릉으로 북상하기 위해 영일군 죽장면 매현리와 입암리 일대에 진을 쳤다. 1908년 9월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정용기를 비롯한 수많은 의병이 전사하자 정환직(鄭煥直)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총장이 되어 청송·청하·영덕 등지에서 일본군을 공격했다. 1909년 경주 동대산과 울산·언양·양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체포되어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을 언도 받고 복역중 1910년 특사로 출옥했다. 출옥 후 의병진을 재정비해 청송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했으나, 1910년 6월 안평전투에서 다시 체포되어,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0년 출옥 후 우재룡(禹在龍)의 대동단 조직에 가담해 대구연락책을 맡았으며, 의열단원 이종암(李鍾岩)이 상하이[上海]로부터 입국하자 의열단과 함께 투쟁했다. 1921년 정수기(鄭守基)와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같은 해 5월 체포되어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59년] 명탐정 셜록 홈스를 만들어낸 작가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도일(Doyle, Sir Arthur Conan) 출생
1859. 5. 22 영국 에든버러~1930. 7. 7 서식스 크로버러.
명탐정 셜록 홈스를 만들어낸 작가로 유명하다. 홈스의 친구 왓슨 박사는 착하지만 약간 둔하며 홈스에 대적하는 거물급 범죄자 모리아티 교수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범주를 넘어서 독특한 생명력이 있다. 뉴욕의 'Baker Street Irregulars'와 런던의 '셜록 홈스 협회' 회원들은 셜록 홈스에 관계된 서적들을 거의 숭배하듯이 숙독했고, 그와 비슷한 모임들이 유럽 여러 나라에 생겨나기도 했다. 셜록 홈스가 사슴 사냥꾼 모자나 실내복을 입고 있는 괴짜로서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에 역사를 배경으로 한 연애소설이나 다른 작품이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도일은 에든버러대학교를 졸업한 뒤, 1891년까지 의사로 일했다. 소설 〈주홍색 연구 A Study in Scarlet〉(1887)에서 처음 홈스가 등장하며 홈스에 대해서는 연역법적 추리로 이름난 에든버러의 한 교사로부터 착상을 얻었다. 홈스가 나오는 단편소설은 1891년부터 잡지 〈스트랜드 매거진 Strand Magazine〉에 정기적으로 실리기 시작했으며 그후 몇 권의 전집으로 출판되었다. 홈스에 싫증이 난 도일은 1893년 소설에서 홈스를 죽게 만들지만 독자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교묘한 방법으로 다시 살려낸다.
도일은 남아프리카 블룸폰테인의 야전병원에서 세운 공로와 남아프리카 전쟁(보어 전쟁) 때의 활약을 인정받아 1902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아들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부상으로 죽은 뒤에는 심령술에 심취했다./브리태니커
[1907년] 무용가 조택원(趙澤元) 출생
1907. 5. 22 함남 함흥~1976. 6. 8 서울.
대한제국 때 참령(參領)을 지낸 아버지 종완(鐘玩)과 어머니 김금오(金琴梧) 사이의 3대독자로 태어났으며, 한일합병 뒤 아버지가 중국으로 망명하자 함흥군수였던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했으나 상업은행의 테니스 선수로 활약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테니스 선수로 두각을 드러내던 중 1927년 가을 일본 현대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漢]의 제2회 경성공연에 감화받고 무용계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다. 이시이와의 면담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조택원은 이시이 무용연구소에서 무용 수업을 받는 동시에 그의 공연에도 출연했다. 1932년 봄에 이시이가 실명(失明)한 것을 계기로 곧장 귀국하여 중앙보육학교(지금의 중앙대학교)에 무용담당교수로 취임하고 이어 같은 해 9월 영락정(永樂町:지금의 서울 충무로)에 조택원무용연구소를 열었다. 1934년 1월 경성공회당의 제1회 공연에서 〈승무의 인상〉을 비롯한 12레퍼토리를 발표하고, 1935년 11월 제2회 공연에서 〈만종 晩鍾〉·〈포엠〉을 비롯한 15레퍼토리를 발표했다. 1936년 봄에 도쿄[東京]의 일본청년회관에서 박외선과 이시이 문하생들이 함께 공연을 가졌다. 1937년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서양의 예술을 접하면서 여러 분야의 문화인·종교인들과 사귀었다. 이후 일본과 한국 각지에서 순회공연을 하면서 1941년 1월 도쿄 히비야[日比谷] 공회당과 나고야[名古屋]에서 〈학 鶴〉·〈춘향전〉을 발표했다. 1942년 4월 경성 부민관과 대구에서 서사적 창작무용 〈부여회상곡 夫餘回想曲〉을 발표했다. 그는 일제 총독부 정책에 따라 12명의 황군위문단(皇軍慰問團) 단장직을 맡았으며, 1945년 8월까지 조선·만주·몽골·중국 등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위문공연 후 친일행위를 스스로 비판하면서 조선무용예술협회의 위원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1947년 10월 미국 할리우드,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뉴욕시 등에서 공연하던 중, 1949년 3월 사석에서 이승만을 직설적으로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귀국하지 못하고 1960년까지 주로 미국·일본에서 머물렀다. 이때 한국의 전통춤과 창작춤을 해외에 소개했는데 1949년 뉴욕에서 〈신로심불로 身老心不老〉를 창작·공연했고 1953년 파리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공연했다. 그밖에 프랑스와 유럽 각지에서 2년간 400회의 공연을 가졌으며, 무용가 S. 데니스와 A. 리카르다에게 한국춤을 전수하기도 했다. 1960년 5월 귀국하여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한국민속예술단 단장을 맡았다. 1966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972년 예술원회원이 되었다.
이시이의 춤 기법은 조택원의 초기 작품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조택원은 한국적 정서와 몸짓을 살려내려고 노력했다. 그의 춤은 사색적인 춤보다는 명랑하며 밝은 분위기의 전원적(田園的) 이미지를 그리는 춤을 추구했고 남성적이기보다 여성적 섬세함과 서정성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그의 춤의 성격은 당시 한국 신무용이 형성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30년대말부터 착상하여 만든 〈춘향전〉·〈부여회상곡〉 등은 모음곡 형식으로 뒷날 무용극 양식의 바탕이 되었다. 또 그의 작품은 시정(詩情)의 세계를 지향했는데, 이 점은 한국 신무용의 초창기 때부터 심화되어온 낭만주의적·인상주의적 특성을 대변해준다. 그는 예술분야뿐만 아니라 종교·정치·경제 등의 여러 인사들과도 사귀면서 많은 사회활동을 했다./브리태니커
[1813년] 바그너 (Wilhelm) Richard Wagner 출생
← 바그너, Franz Lenbach가 그린 소묘(1870경)
"음악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이상적인 것이다. 음악이 말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 처한 개인의 열정·사랑·동경이 아니라, 열정·사랑·동경 그 자체이다." - 리하르트 바그너
1813년 5월 22일 태어남 / 1883년 2월 13일 죽음
바그너는 오페라를 통해 혁신적이고 독특한 음악세계를 펼친 독일의 극음악 작곡가이자 이론가이다.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18세 때부터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채권자들을 피해다니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으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1843)과 <탄호이저Tannhäuser>(1845)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849년 드레스덴 혁명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취리히로 망명했다. 1861년 특별사면으로 독일로 돌아왔고, 희가극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바이에른 왕 루트비히 2세의 초청으로 뮌헨에 머물게 되었는데, 여기서 한스 폰 뷜로의 아내이자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를 만났고 1870년 결혼을 했다. 1869년 <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 4부작의 작곡을 다시 시작했고, 1874년 바이에른의 작은 도시인 바이로이트에 <니벨룽겐의 반지>를 공연하기 위한 극장을 건립했다. 1876년 8월 13~14일과 16~17일의 4일에 걸쳐 바그너 스스로가 '반프리트'(Wahnfried:환상의 집)라고 부른 축제극장에서 <니벨룽겐의 반지>가 초연되었다. 바그너는 반프리트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마지막 작품인 종교 축제극 <파르지팔 Parsifal>을 작곡했고, 자서전 <나의 생애 Mein Leben>를 썼다./브리태니커
[1993년] 현정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여자단식 우승
← 여자단식에서 우승한 현정화가 시상식장에서 우승 트로피와 꽃다발을 흔들고 있다.
1993년 5월 22일 밤 스웨덴 예테보리. 준결승서 루마니아의 강호 오틸리아 바데스쿠에 대역전승을 거둔 현정화 선수는 잔뜩 기세가 올라 있었다. 결승 상대는 대만의 첸징. 정신없이 상대를 몰아붙이는 현정화 특유의 전진속공이 살아나면서 반 박자 빠른 스매싱이 연속으로 테이블에 꽂혔다. 관중의 박수소리에 정신을 차린 순간 스코어는 3대0. 첸징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올림픽보다 훨씬 어렵다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식 우승으로 현정화는 ‘세계선수권 그랜드슬램’을 이루며 탁구여왕에 등극했다.
1987년 양영자와 여자 복식에서 우승하며 기록사냥의 돛을 올린 현정화는 1989년 유남규와 혼합복식 정상에 올랐고 1991년엔 남북단일 코리아팀으로 출전, 만리장성을 넘어 단체전 왕관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출전했던 세계선수권에서 대망의 단식 우승을 차지해 극적이고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현정화의 우승으로 1973년 사라예보에서 시작된 막강 한국 여자탁구의 신화는 정점에 올랐다./조선
[1990년] 남북예멘 통일 선포
분단된 남·북 예멘은 같은 민족·언어·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나 왕정을 거쳐 아랍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공화정을 채택한 북부와 사회주의 체제를 채택한 남부의 이데올로기 차이가 컸다. 때문에 남·북 예멘은 1979년 2월 국경전쟁을 치를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기도 하였다.
1980년 4월 남예멘에서 온건파인 나세르 모하메드가 집권하면서 통일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81년 11월 북예멘 대통령 살레흐가 남예멘을 처음 방문하였으며, 12월에는 남북통합을 명시한 아덴협정을 맺었다. 이어 1983년에는 예멘 최고평의회가 구성되어 통일 작업이 구체화되었다.
그러나 1986년 남예멘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려는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통일 작업에 차질이 발생하였지만, 소련의 개혁과 개방의 영향으로 다시 통일 분위기가 조성되어 1987년 7월 남예멘 대표단이 북예멘을 방문하여 통일에 관한 노력을 재개하기로 합의하고, 1988년 초 국경에서 양측 군대를 철수하였으며, 5월에는 국경 지대 유전의 공동 개발에 착수하였다. 1989년 11월에는 양국 정상이 회담을 갖고, 통일 예멘공화국을 수립하기로 합의하였고, 통일 헌법을 마련하여 1990년 5월 22일 남예멘의 아덴에서 재통일을 선언하고 예멘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990년] 한국-예멘, 국교수립
북예멘은 북한과는 1963년에, 그리고 한국과는 1985년에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고, 남예멘은 1963년에 북한과, 그리고 한국과는 예멘 재통일 직전인 1990년에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통일 이후 사나로 공관을 단일화하였고 1990년 12월에는 초대 한국 주재 예멘 상주대사가 부임하였다. 1998년 공관을 폐쇄하고 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1989년부터 마리브유전 개발에 SK(주), 한국석유개발공사, 삼환기업(주), 현대 등이 컨소시엄을 형성해 24.5%의 지분율로 참여하였다. 그외에 1991년까지 총 90만 달러 정도의 물품을 예멘에 무상 원조를 실시하였다.
[1963년] 한국-오스트리아, 국교수립
한국과의 공식 관계는 1963년 5월 국교가 수립되면서부터 비롯되었으며, 1974년 12월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 되었다. 1971년 10월 한국과 무역협정을 체결한 데 이어 1979년 3월에 사증면제협정(査證免除協定)이 체결되었고 1991년 3월에 한·오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였다.
[1908년] 라이트형제, 비행기계 특허 취득
어릴 때부터 기계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라이트 형제는 독학으로 인쇄 기계와 자전거를 설계 제작했고, 릴리엔탈이 글라이더 비행 시험 중 추락하여 사망한 사실을 알고부터 기계 비행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성공적인 비행을 위해서는 세 축에 대한 운동의 조화, 즉 새처럼 선회할 때의 기울임, 상승이나 하강, 좌우 조종 등을 되도록이면 동시에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마침내 비행기의 과학적 연구에 착수했다. 1900년부터 모형으로 200회 이상 치밀한 시험을 하고, 1,000회에 이르는 글라이더 시험 비행, 비행의 기초를 만들게 된 풍동(風洞)과 그 밖의 연구, 가벼운 엔진과 효율이 좋은 프로펠러 제작 등의 여러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903년 12월 17일 키티호크에서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기를 조종하여 59초 동안 260미터의 지속 비행에 성공했다. 이는 1899년 그들이 만든 최초의 기계인 복엽연에 기계적으로 비틀 수 있는 날개를 붙인 것이었다. 형제는 약 40km를 38분 동안 비행한 기록도 세계 최초로 수립했다. 1906년에 비행기 발명 특허를 따낸 라이트 형제는 1909년 아메리칸 라이트 비행기 제작회사를 설립하여, 유럽에서의 비행기 제작에 선진적인 역할을 했다. 1912년 형이 죽은 뒤에도, 동생 오르빌 라이트는 열정적인 발명가답게 연구를 계속하여 1924년에 비행기의 내림날개를 발명했다.
[1930년] 독립운동가 장인환(張仁煥) 사망
1876. 3. 10 평양 ~ 1930. 5. 22.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숙부의 도움으로 생활했으며,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1904년 노동이민으로 하와이로 건너가 2년 동안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1906년 7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1907년 3월 독립운동을 위한 동지의 단결과 민지(民智)의 계발을 목적으로 장경(張景) 등이 만든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에 가입했다. 1908년 3월 20일 한국정부 외부고문(外部顧問)인 친일파 미국인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와 기자회견을 하면서 친일 발언을 하자 스티븐스를 처형하기로 결심했다. 1908년 3월 23일 오전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나려고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오클란드 부두 페리 정거장에 도착한 스티븐스를 저격, 사살했다. 전명운(田明雲)과 함께 거사 후 체포되었다. 미주 내 한인사회는 이 의거를 기화로,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하고 나아가 국내외를 통한 국권회복운동의 전기로 삼아, 재판비용을 모금해 변호사를 선임하여 법정투쟁을 했다. 25년의 금고형을 받고 10년간 복역한 후 1919년 1월 17일 석방되었다. 미주 한인사회는 그를 애국지사로 크게 환영했으며, 출옥 후 주위의 도움으로 세탁소를 차려 생활했다. 1927년 귀국하여 사회사업을 계획하다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1930년 5월 22일 병으로 입원치료 중 3층 창밖으로 뛰어내려 자살했다. 재미교포의 사회장으로 샌프란시스코 근교 사이프러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1975년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907년] 영국의 배우, 연출가, 프로듀서 로렌스 올리비에(Olivier, Laurence, 1907~1989) 출생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 셰익스피어를 낳은 땅이자 연극 연구 ·활동의 본고장인 스트래트퍼드 온 에이번의 셰익스피어연극제에서 첫 무대를 밟고, 1926∼28년에 버밍엄 레퍼토리극장에 소속되었다. 1935년 뉴시어터(New Theatre)에서 J.길구드와 교대로 출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와 머큐시오 2개 역으로 주목을 끌었다.
1937년 셰익스피어 희곡을 중점적으로 상연하는 런던의 올드빅극단에 들어가 위엄 있는 비극의 주역으로, 《햄릿》을 비롯하여 《맥베스》 《오셀로》 등에서 셰익스피어극의 명배우로서 위치를 굳혔고, 1944∼49년에 올드빅의 공동 감독이 되었다. 1955년 로열셰익스피어극장에서 《타이타스 안드로니카스》의 주목할 만한 부활 상연을 한 것을 비롯하여 《오이디푸스왕》(1945), R.B.셰리든의 《스캔들학교:The School for Scandal》(1948), C.프라이의 《관찰된 비너스》(1950) 등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였고, 또 현대극에서도 다채로운 재능을 발휘하였다.
영화계에서도 활약하여 《폭풍의 언덕》(1939), 《레베카》(1940) 등에서 호평을 받았다. 《헨리 5세》(1945), 《리처드 3세》(1955)를 감독 ·주연하였고, 특히 스스로 감독 ·제작 ·주연한 《햄릿》은 1948년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1947년 나이트 칭호를 받았고, 1963년에는 영국국립극장 연출가로 임명되었다. 1970년 남작의 칭호를 받았다.
[1906년] 명신여학교 설립(현 숙명)
← 순헌황귀비
숙명여자대학교는 1906년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로부터 용동궁지(龍洞宮趾, 구 교사 대지)와 경비를 보조받아 설립한 명신(明新)여학교가 모체이다. 1909년 숙명고등여학교, 1911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였고 1912년 재단법인 숙명학원을 설립하였다.
1938년 재단법인(현 학교법인) 숙명학원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로 설립하였다. 설립자는 고종황실(高宗皇室)이고, 정숙(貞淑)·현명(賢明)·정대(正大)한 한국적 여성지도자 육성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초대교장으로 임숙재(任淑宰)가 취임하였다. 1948년 숙명여자대학으로 승격하고, 1955년에 종합대학으로 개편하였다.
[1885년] 프랑스의 낭만파 시인, 소설가, 극작가 위고(Hugo, Victor, 1802~1885) 사망
← 프랑스 소설 ‘레 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
"당연히 위고지!" 영국에 셰익스피어, 독일에 괴테, 러시아에 톨스토이가 있다면 프랑스의 문호는 누구냐는 질문에 앙드레 지드가 가리킨 그 빅토르 위고가 1885년 5월22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영구차에 실려 무덤으로 가기를 원한다"는 그의 유언에 따라 볼품없는 수레에 실려 영웅들이 묻힌다는 팡테옹에 묻혔다. 그의 마지막 길을 보기위해 200만명이 그를 찾았다.
위고는 위대한 작가이면서 열렬한 공화파 정치가였고 사형폐지를 주장한 인도주의자였지만 프랑스인들에게 위고는 수사가 필요없는 ‘영웅’이었다. 왕당파ㆍ낭만주의였던 위고의 정치ㆍ문학적 경향이 공화파와 자유주의적ㆍ인도주의적으로 변신하게 된 것은 1830년의 7월혁명과 1848년의 2월혁명을 경험하면서였다.
1851년 제정(帝政)으로 복귀하려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항거, 망명길로 들어선 것은 위고의 문학적 성취를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 때 ‘레 미제라블’ 등 숱한 작품이 발표돼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3세가 퇴위한 1870년, 19년간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파리에 돌아와서는 정치인으로 빈민구제ㆍ언론자유보장ㆍ초등학교 의무교육 등을 위해 헌신했다. 특히 그 당시에 이미 유럽통합을 주창하고 유로화의 출현을 예고한 그의 통찰력과 혜안(慧眼)은 또 다른 의미에서 ‘당연히 위고지!’였다./조선
[1455년] 영국, 장미전쟁 시작
← 에드워드 3세, 수채화(15세기)
1455년 5월 22일 영국의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 간에 왕권을 둘러싸고 벌인 장미전쟁의 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양쪽 가문은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서로 왕위를 주장했다. 1399년부터 랭커스터 가문이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1422년 헨리 5세가 죽은 뒤 헨리 6세의 파당적인 소수당이 집권하는 동안 요크 가문의 워릭 백작은 리처드 네빌을 섭정으로 세웠다.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던 헨리 6세가 건강을 회복하자, 요크 일가는 자기방어를 위해 전쟁을 획책했다. 세인트올번스에서의 첫 전투는 요크 일가의 승리로 끝났으나, 1459년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오랜 전투 끝에 1485년 헨리 7세가 보스워스 평원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쟁은 끝나고 강력한 튜더 왕가 정부가 탄생했다./브리태니커
[1972년] 실론을 스리랑카공화국으로 국호 개칭
← 찻잎을 따고 있는 스리랑카의 타밀족 여인
1972년 5월 22일 스리랑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505년 지금의 스리랑카인 실론에 포르투갈 함대가 도착해 섬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지배를 받다가 1802년 영국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20세기초 실론 민족주의가 일어나 신할라족과 타밀족이 연합했고 영국은 주권을 스리랑카에 돌려주었다. 국민연합당이 정권을 잡고 있다가 1970년 스리랑카 자유당이 마르크스주의 정파들과 연합해 압승을 거두며 사회개혁을 일으켰고, 1972년 헌법을 만들어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후 신할라족과 타밀족 간의 민족갈등이 계속되어 오늘날까지 폭력사태가 끊이지 않고 있다./브리태니커
[1882년]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 체결, 최초의 쌍무협약
조미(朝美) 수호통상조약은 19세기 말 숨가쁘게 돌아가던 동아시아 국제외교의 산물이었다. 미국에 조선개항은 대(對)아시아 무역팽창정책을 펼치고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요소였다. 강제개항을 시도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포함외교(砲艦外交)를 포기하고 청의 중재를 통한 개항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청의 이홍장은 러시아의 남침과 일본의 대한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에 미국 세력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대한(對韓)종주권 유지를 위해서였다.
이홍장은 조선에 밀서를 보내 조약의 긴요성을 역설한다. ‘조선책략(朝鮮策略)’이 소개돼 쇄국정책에 대한 인식전환이 조선에 막 싹틀 때였다. 조선책략은 아라사(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防俄) 조선은 중국과 친하고(親中) 일본과 결탁하고(結日) 미국과 연대(聯美)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책.
고종은 척사파의 반대를 피해 대청(對)교섭을 비밀리에 추진, 전권을 청에 위임한다. 미국과 청이 조선을 사이에 두고 테이블에 마주앉았다. “조선은 청의 속국”이라는 속방(屬邦)조항을 조약에 명문화할 것을 고집한 청과 이를 반대하는 미국이 대립했지만 결국 별도 조회문에서 속방론을 밝히기로 하고 외교전을 마감한다.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강화도에서 체결됐다. 불평등이 배제된 주권 독립국가 간의 최초의 쌍무적 협약이었다./조선
[337년] 비잔티움 제국 창시자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 사망
← 콘스탄티누스 I세
비잔티움 제국을 건설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7년 5월 22일 사망했다. 재위 중 이룩한 업적으로 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로 불리었다. 오늘날의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해당하는 지역인 모에시아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니코메디아 궁정에 보내져 그곳에서 자랐다. 페르시아와 이집트에서 복무했고 잉글랜드의 요크에서 환호리에 부황제로 즉위했다. 그후 6년간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 황제의 부황제로서 갈리아와 이탈리아에서 지냈다.
312년에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로마를 장악해 서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고 323년에는 동로마 황제 리키니우스를 쳐부수고 그를 사로잡아 명실공히 동-서로마를 통합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의 해체를 막고, 영토와 문화면에서 이질적인 요소들을 새롭게 통합시키는 임무를 떠맡았다. 그는 음모와 계략이 난무하는 로마를 떠나, 교역의 중심지이며 파르티아인의 침입에 맞서는데 적합한 비잔티움을 새로운 수도로 정했다. 비잔티움은 330년 5월 11일 대제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새이름으로 엄숙하게 봉헌되었고 이로써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시작됐다.
제국을 위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세속적인 토대와 영적 토대를 모두 마련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로마의 위대한 정치적 유산과 헬레니즘 세계의 문화적 유산,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융합시켰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임을 공언한 최초의 로마 황제이기도 하다. 그의 개종에 힘입어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며, 이로써 그리스도교 문화는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의 중세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것은 향후 1123년간이나 지속되었고, 여든 여덟 명이나 되는 지배자의 통치를 받았다./조선
그밖에
2007년 김영삼 전 대통령, 국립 5.18 민주묘지 첫 참배
2006년 AP 계열사 평양지국 설립
2006년 이종욱 WHO사무총장 제네바서 별세
2005년 일본 제11회 노베야마 울트라 마라톤 대회에서 대우조선 근로자 심재덕씨 우승
2005년 북한 화물선 21년만에 남한에 입항
2004년 일본 14세 소년배우 야기라 유야, 제57회 칸 영화제서 최연소 남우주연상 수상
2004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제57회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2004년 일본-북한 제2차 정상회담, 국교정상화 교섭재개에 합의
2003년 일본 스키어 에베레스트 최고령 등정
1998년 ‘비아그라’ 부작용 첫 공식 확인, 6명 사망
1992년 재일교포 소설가 이양지 사망
1990년 루마니아 대통령선거에서 일리에스쿠 당선, 공산주의와 결별 선언
1980년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74년 남북적십자 제6차 실무회담 판문점에서 개최
1974년 아산만 방조제 완공
1967년 브뤼셀 백화점서 대화재 280여명 사망
1967년 미국 흑인 작가 휴스 사망
1963년 아프리카 독립제국 수뇌회담 개최
1955년 주한미군, 원조고문단 설치
1954년 제네바회의에서 변영태 한국대표 14개 통한방안 제시
1947년 남북간 물자교류 허용
1946년 소련 만주에서 철수완료를 발표
1939년 독일-이탈리아 군사동맹 체결
1914년 농공은행령.지방금융조합령 공포
1911년 청. 철도국휴화 선포
1907년 이완용 내각 성립
1905년 경성중학교 설립
1873년 이탈리아 소설가 만초니 사망
1602년 중국 남명의 황제 융무제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