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1229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탄 후 첫째 주)
있어야 할 “아버지 집”
삼상2:18~20,26; 골3:12~17; 눅2:41~52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탄 후 첫째 주일이지만, 2024년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 해를 끝맺는 마음은 각자 다르겠지만, 지금 국가적으로 맞은 위기를 생각하면 우리 대다수가 그렇게 평안하지 않습니다. 마치 오늘 누가복음에 12살 난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과 같다고나 할까요? 매우 심난하고 어지럽습니다.
마태가 전하는 성탄 후의 모습은 더욱 폭력적이고 심각하지요. 성탄 후 헤롯이 두 살배기 아래의 아기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성탄 후의 우리의 일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성탄 때 천사의 평화의 노래소리는 곧잘 현실의 폭력과 아픔 속에 묻혀 버립니다. 성탄 밤의 고요는 곧잘 일상의 소요와 고성에 묻혀 버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성탄의 기쁜 소식이 과연 힘이 있는가? 대림의 희망이 과연 힘이 있는가?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나 소란과 폭력과 아픔이 있는 이런 세상은 제멋대로 돌아가는 세상인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한 해는 하나님의 사랑에 끌려 움직였음을 믿습니다. 이것을 믿을 근거가 너무 희미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하나님의 사랑과는 너무 거리가 멀리 있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며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의 삶을 이끌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아등바등하며 뭔가 이루어 보려고 했던 나의 의지가 나의 삶을 이끌어 갔던가요? 아니면 뭔지 모를 다른 힘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려버린 삶인가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우리의 힘으로만 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연말이 되면 늘 묵상하게 되는 명백한 사실이 있습니다. 올해도 우리는 또 한번 태양 한 바퀴, 9억 4천만 Km를 도는 아주 긴 여행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방구석에 처박혀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고 해도, 올 일 년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태양을 한 바퀴씩 도는 엄청난 우주여행을 한 것입니다. 각자 “혼자” 지지고 볶으며, 전전긍긍하고 산 것 같지만, 실은 지구의 한 구석에 붙어서 거대한 우주를 날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지구와 태양의 조건 하에서 살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너무나 신비한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 한 개체의 의지만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구의 일부로 지구와 함께 움직였습니다. 이 사실을 묵상하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다시금 기억됩니다. 파스칼이 말했듯이, 우리 인간은 인간을 죽이는데는 그저 물 한 방울이면 되는 아주 연약한 갈대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이 세상의 조건에 묶여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 몸을 생각해 봐도, 우리 몸은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 몸에 세균은 100조 개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 몸에 붙어살고 있는 세균은 우리 몸의 세포보다 훨씬 많은 셈이지요. 그러니까 우리 몸의 세균을 다 떼어내고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세균은 남이 아니라 바로 나인 셈입니다. 분명히 세균은 내가 아니고 타자일 텐데, 이렇게 되면 피아를 구별하기 힘들어 집니다. 또 우리는 세균을 통해 이 세상의 자연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웬일인지 이런 감각과 의식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저 혼자서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하며 독불장군처럼 살고 있습니다. 내 삶은 오로지 혼자 살고 있다는 개체의식 속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 개체는 완전히 독립된 존재로만 인식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게 완전히 독립된 개체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너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 우리가 있어 내가 있고, 너가 있어 내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게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우리 모두” 함께 사는 것이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삶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더 큰 힘이 있으니, 그 더 큰 힘을 기억하자고 했던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던 신영복 선생님, 장일순 선생님, 권정생 선생님 등, 수많은 선생님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옥이나 질병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지내면서도, 믿음, 희망, 사랑은 놓지 않았습니다. 그 믿음, 희망, 사랑은 매우 힘이 있었는데, 그것은 남들이 전해준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꽃피운 것들이기 때문에 힘이 있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서에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일화가 하나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던 해, 일종의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부모를 잃어버린 사건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부모가 아이 예수를 잃어버린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사흘이나 지나 어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아냈습니다. “얘야,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 어린 예수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소년 시절 예수에 대한 유일한 이야기인데, 예수님의 비범함을 전해주고 있지요. 어린 나이에 성전에서 선생들 사이에 앉아서 서로 토론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의 슬기와 대답에 경탄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비범함은 단지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영특했다는 것을 말해주려는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집에 머물러 있으려는 어떤 힘에 끌리고 있었다는 말을 전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렇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까?” 예수님의 이 “아버지 집 의식”은 아버지 사랑에 끌리고 있다는 근원적인 의식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소년 예수라는 한 개체가 예루살렘 성전이라는 유한한 공간에 지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이 가진 좀더 근본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면서 어린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나는 이미 “아버지의 집”에 살고 있는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이것은 아주 우주적인 사랑의 의식이며, 아버지를 떠나서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근원적 바탕의식입니다. 우리가 각각의 작은 파도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 파도가 바로 바다 자체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살림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가 지난 일 년도 이런 저런 모양으로 애를 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한 해를 지나는 오늘은 우리의 애씀만, 우리의 분투만 보지 말고, 우리를 끌어당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요히 관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지구에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듯이, 아니, 사실은 우리가 지구 자체이듯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에 감싸여 있음을,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음을, 그리고 우리를 움직인 근원적인 힘은 바로 이 사랑의 힘이었음을 관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영적 경험을 하는 육체적 존재가 아니라, 육체적 경험을 하는 영적 존재이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은 예수회 신부이자 지질학, 생물학, 인류학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던 과학자였습니다. 우리는 육체적 존재로서 이 세상에서 영적 경험을 가끔 하는 식으로 우리 자신을 이해해 왔습니다. 그런데, 샤르댕은 이것을 바꾸어 우리는 본디 영적 존재로서 육체적 경험을 하러 이 땅에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예수님처럼 성육신을 한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는 본디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아버지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왔습니다. 우리는 잠시 세상을 살면서 육체적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의 근본 바탕은 바다이고, 잠시 어떤 형태의 파도로 존재하다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이때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가 잠시 하게 되는 육체적 경험입니다. 자신의 집을 하는 사람으로 사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올 일 년, 그리고 내년에도,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근원적인 사랑의 힘이 있음을 믿고, 가급적이면 그 사랑의 힘이 나를 끌어가도록, 그리고 내가 어떤 일을 할 때도 그 사랑의 힘이 일하는 그 방향으로 맞추어 일을 한다면, 우리의 평생의 삶은 그렇게 틀리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이 우리가 나온 집을 잃어버리지 않고 산다면, 우리 삶은 그리 틀리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말씀 51절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도 매우 훌륭하고 중요한 관상의 태도입니다. 이 태도가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했습니다.
누가복음은 1장 처음부터 마리아가 예수님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바라보면서 그 사건들을 주목하고 마음에 품고 간직했다고 말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를 방문했을 때, 외양간에서 아기를 해산하고 나서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정결례를 행하기 위해 갓난아기를 안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 늙은 시므온의 이야기를 듣고서, 또 오늘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의 성인식에서, 마리아는 일련의 사건들을 만나면서 그 사건들을 주목하고 그 사건들이 주는 의미를 마음에 품고 간직했습니다. 당시에 마리아는 일어난 사건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궁금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일어난 사건들이 주는 사건을 마음에 간직하였습니다.
일어난 일들을 모두 이해하지 못해도, 아니 받아들이기 몹시 힘들더라도, 너무 평면적으로 처리하지 않고, 다시 말하면 내 중심적으로 좋고 나쁘고를 너무 빨리 결론짓지 말고 지그시 주목하고 마음에 품고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 사건들의 숨어있는 의미를 완전히 깨닫기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사건들 속에 감추어진 사랑힘을 발견할 때까지 말입니다. 지켜볼 때 공간이 생깁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우리에게 몇 가지 권면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받는 거룩한 사람답게....”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에게 보내는 서신 앞부분에서 이미 우리가, 아니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의 사랑 즉 그리스도로 인해 존재하고 있음을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골1:16하~17)
사도바울은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거룩한 사람’으로써,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용서, 연민, 사랑, 수용, 감사, 존중)
이런 덕목들은 우리가(에고가) 우리 삶의 진짜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지긋이 지켜보고, 마리아가 그랬듯이, 지긋이 마음속에 품어 보는 일로 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이런 권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리는 표시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 권면들은 율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미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 사랑의 힘에 의해서 행하는 행동들입니다. 이 모든 행동들의 동기는 두려움이나 불안이나 싫음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여러분, 올해 우리의 행동의 동기, 행동의 동력은 무엇이었습니까? 두려움, 불안, 싫음이었습니까? 아니면 사랑이었습니까? 우리가 충분히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면, 사랑의 힘이 우리의 행동의 동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우리의 분투와 애씀만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우리의 행동의 동기는 두려움과 불안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불안과 싫음에서 나온 모든 행동들은 동정심, 친절함, 겸손함, 온유함, 오래 참음과는 반대의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오늘 16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에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분명한 길입니다. 저는 이보다 더 분명한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는 길은 기도와 묵상을 통한 길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는 길은 우리 일상을 감사함으로 사는 길입니다. 간단히 말해 기도와 일상입니다. 관상과 활동입니다. 잠시라도 고요에 머물고, 말씀 한 줄이라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붙잡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게 나게 하는 것들을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고양된 마음으로 생활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진정성 있게 만들어 갈 것입니다.
올 한 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수고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놀라운 열매를 맺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