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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아담을 사랑해도 되는 시대? |
'소수자 인권' 미명하에 동성애 미화 영화 봇물 '위험수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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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수천 년 동안 계속돼 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제 질릴 법도 한데, 그 이야기는 틀림없이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이야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다. ‘동성애!’ 최근 동성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우호적인 방향 전환은 가히 전 방위적이다. 이제는 동성애를 가족의 한 종류로 구분하고 있으며, 커밍아웃을 통해 공개적으로 동성애자임을 스스럼없이 밝히고 있다. 사회적 분위기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이 문화에 대한 억압으로 간주하려는 목소리도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특히 동성애의 비판적인 시각에 대해 성적소수자들(Sexual Minorities)에 대한 인권탄압으로 여기고 생존권 차원에서 맞대응하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아주 오래된 이야기는, 이처럼 점점 더 신선한 이야기로 바뀌어가고 있다.
동성애, 주류 문화에 대한 유쾌한(?) 반란이 시작되다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가 한국영화 관객 동원 면에서 사상 최대의 숫자로 1위를 기록했다. 이 영화는 마케팅비를 포함해 총 제작비가 60억 원 정도로 중저가형 영화였으며, 걸출한 스타도 없었다. 더욱이 사극이라는 한계도 있었지만, 작품성만으로 대기록을 일궈냈다. 대만 출신의 리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은 지난 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닥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비롯해 각색상과 작곡상 등 3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공교롭게도 이들 영화의 공통점은 이반(異般)의 사랑 이야기다. <왕의 남자>는 조선시대 당시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던 동성애를 큰 축으로 하면서도 절제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들의 사랑은 화면상으로는 거의 배제되고 적당히 감추어져 있다. 확실한 사랑의 대사나 몸짓도 없지만, 주인공들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절절하게 묘사되고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도 동성애라는 단어조차 감히 꺼내지 못했던 1960년대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미국인의 성 정체성을 파헤친다. ‘회귀’로 번역될 수 있는 브로크백(Brokeback)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산이다. 그런 브로크백산에 스물 살의 두 청년 에니스와 잭이 서있다. 좁은 천막 안에서 추위에 싸우던 이들은 취기와 체온에 이끌려 우발적인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 헤어진 두 남자는 모두 가정을 꾸리지만, 4년이 지나서야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나눌 수 없는 이들의 사랑은, 1년에 한두 번 브로크백산에서 밀회를 즐기는 것으로 질기게 이어진다. 이렇게 20년이 지난다. 이 영화 역시, 동성애에 대한 극도의 절제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들 영화들에서 그려지는 동성애는 대한 기존의 나쁜 이미지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신비스럽고 환상적이며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해서 2006년 봄은, 영화 <왕의 남자>에서 <브로크백 마운틴>까지 동성애 코드 열풍이 불고 있다. 금기의 대상 동성애가 과연 인식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지, 혹은 금기마저도 하나의 상품으로 만드는 뛰어난 상술에 불과한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기독교, 동성애를 향하여 우향우?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인류의 삶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종교시대’에나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근대에 사람이 주체로 서면서, 나는 나를 위해서 있지 누구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고가 팽배하게 되었다. 나는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 영역이 이렇게 확장되다보니, 근대에 들어서는 하나님의 뜻과 자연의 뜻이 달라질 수 있다는 유연성을 생각해 냈다. 즉 자연은 자식이 많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바란다는 측면에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성은 삶의 기쁨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며, 더 이상 생산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처럼 즐김이 생산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동성애를 다시 생각하자는 것이다. 동성애는 남을 해치지 않고 즐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20세기 들어서는 동성애를 소수자의 인권 문제와 결부시키고 있다. 인권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살 권리 또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리키는 만큼, 이러한 측면에서 동성애는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는 전통적으로 강자와 약자를 만드는 아주 뿌리 깊은 태도가 있어 소수의 동성애자들이 인권을 탄압받았다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은 색다른 자들이요, 사회의 소수이며, 그들도 인간이기에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신학교에서도 불었다. 지난 2001년 9월, 한 신학교에서는 “동성애, 한국교회는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주제로 학술발표와 토론회가 열렸다. 이때 시카고 신학대에서 동성애 학을 가르치는 테드 제닝스가 발제했다. 그는 “보수 기독교계가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경의 수천 구절 중 동성애를 언급하는 구절은 5개이고, 이 중 2구절만이 동성애를 금기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에 “돼지고기를 먹지 말고, 면과 양모로 된 옷도 입지 말 것”을 명시하는 구절도 있지만 아무도 이 구절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면서, 유독 동성애를 금기시하는 구절에만 집착하는 것은 오류라고 주장했다. 그날 함께 발표한 한 신학자는, 신학적 접근 방법을 통해 “신의 관점에서 볼 때, 이성애든 동성애든 지금의 인간 세계는 타락한 세계”라며 “동성애가 더 타락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동성애를 특별히 차별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더불어 또 다른 발제자는, “자신의 성적 지향성이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개인의 성적 지향성은 인간 의지의 문제가 아닌 신의 범위”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특정 성적 지향성의 옳고 그름을 인간 세계에서 논의하는 것이 무리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신학적인 접근보다 인권적인 접근이 더 필요하다”고 마무리했다.
동성애, 정말 포용의 대상인가? 구약성경은 창조 교리에 근거해 동성애나 성전환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반대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라는 별개의 성을 만들어 서로를 지지하고 보완하도록 만든 것은 자연의 변경할 수 없는 근본원리로 주어진 것이다. 레위기 18장 22절은 “너는 여자와 교합함과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고 분명히 정죄하고 있다. ‘가증스러운 일’이란 용어는 구약성경에서 사용되는 가장 강력한 정죄 용어다. 그래서 “누구든지 여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 찌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 20:13)고 규정하였다. 신명기 23장 1절과 22장 5절을 보면, 특별히 남자가 여자의 옷을 입는 것조차도 여호와께 가증한 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남자로 태어난 사람이 유전적인 요소이든 성호르몬의 이상이든 혹은 문화적, 정신 심리학적인 영향에 의해서든 간에 비록 여성 지향적인 ‘성 지향성’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치유하거나 극복, 교정하려는 과정이 없이 그 성 지향성을 그대로 정당화하고 심지어 동성애로 발전시키거나 더 나아가 성전환 수술을 받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바울도, 동성애는 결코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라 인간의 반역으로 생긴 비자연스러운 행동, 즉 순리를 거스른 역리적인 행동이라고 로마서 1장에서 단호한 어조로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상실한 마음에 내어버려 두자 인간은 정욕대로 행하게 되었고, 하나님이 창조 시에 만드신 순리를 거스르고 역리대로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것을 인간의 반역함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으로 분명히 말하고 있다(롬 1:27). 동성애 지지자들은 이 본문을 가리켜 바울이 이성애자인 당시 사람들의 변태적 동성애 행위를 비난한 것이지, 본성상 동성애자의 동성애 행위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을 정직하게 살펴볼 때, 바울이 비난하고 있는 바는 이성애자들의 변태적 행위가 아니라 순리를 거스르는 인간의 동성애 행위 그 자체를 비난하고 있다. 결국 성경에서 말씀하는 동성애는, 인간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기 정욕대로 살고자 하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여 인간을 방치하여 둠으로 생긴 결과라고 본다.
한국교회, 하나님의 정죄를 초래할 것인가 이러한 내면에는, 프로이드 이후 확장되고 있는 인간의 자유의식이 무의식과 내면의 성적충동(리비도)을 윤리나 가치, 혹은 종교에 의하여 억압하는 것을 독재와 인권탄압과 동등한 일종의 ‘문화적 억압’으로 처리하고, 이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예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인간내면의 욕구와 본능을 조절하고 통제하며 ‘윤리적 지향성’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무조건적인 ‘성 지향성’ 예찬론자들은 교회의 이와 같은 입장을 또 다른 억압으로 정죄하며 비판하고 있다. 21세기 문화에 있어서 자유는 이제 인간의 모든 내면의 욕구를 당당하고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지향한다. 최근에 동성애 지향성이나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 그 성 지향성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오히려 예찬하고 또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 성전환수술조차 아무런 갈등도 없이 과감히 시행하는 현실은 21세기의 무절제한 자유의식의 한 상징인 것이다. 인간의 왜곡된 성 지향성을 정죄하는 ‘하나님의 정죄’와 인간의 본능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지지하며 창조원리와 성경의 가르침을 일종의 문화적 억압으로 정죄하는 ‘동성애자의 정죄’ 사이에서 오늘날 우리는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소돔의 롯처럼 ‘인간의 정죄’에 위축되어 타협하다가 ‘하나님의 정죄’를 초래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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