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四十一
임협(林悏) 묘갈명(墓碣銘) - 김상헌(金尙憲)
임후(林侯) 타()는 내가 평소에 그가 의기(義氣)를 숭상하는 것이 속인(俗人)들과 취향(趣向)이 다른 점을 중(重)하게 여기어 오랫동안 그와 더불어 사이좋게 지낸 처지이다. 하루는 그가 가첩(家牒)을 손에 들고 나를 찾아와 부복(扶服, 어려워하는 모양)하고서 나에게 청하기를, “나의 선인(先人)을 장사지낼 때 내가 어리고 몽매(蒙昧)하여 묘도(墓道)에 비명(碑銘)을 꾸미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국은(國恩)을 입어 천양[泉壤, 구천(九泉: 저승)]에 영전(榮典)을 베풀게 되었으니, 바라건대 그대의 한마디 말을 빌리어 지하(地下)에 계신 선인을 위하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임후(林侯)의 선군(先君)이라는 점을 중하게 여기어, 비록 그를 이전에 알고 지낸 것은 아니지만 그의 백씨(伯氏)인 관찰공(觀察公, 임서(林))과 더불어 형제처럼 교유하였고 지금 또 착한 아들을 두었으니, 그 행실을 미루어 알 수 있고 믿을 만하였다. 이에 사양하지 않고 응하기로 하였다.
가장(家狀)을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협(悏)이고, 자(字)는 모(某)이고, 자호(自號)는 유호(柳湖)이며, 대대로 나주(羅州)의 대성(大姓)이었다. 공의 선고(先考)는 임복(林復)인데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지내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조부(祖父)는 임붕(林鵬)인데 좌승지(左承旨)를 지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나주의 풍속이 문지(門地, 문벌)로써 서로 자랑을 하는데, 고을 사람들이 세력 있는 거족(巨族)을 꼽을 때 임씨(林氏)보다 앞서는 집안이 없다. 판서공(判書公, 임복(林復))이 장가를 두 번 갔으나 아들이 없자, 맨 뒤에 남평 서씨(南平徐氏) 진사(進士) 서열(徐說)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여 듬직한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이 관찰공이고 막내 아들이 곧 공이다. 판서공의 윗대와 세 부인의 증직(贈職)은 모두 관찰공의 신분이 귀해진 까닭으로 말미암아 추은(推恩)한 것이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관찰공과 더불어 함께 공부를 배웠는데, 모부인(母夫人)이 비록 공을 매우 사랑하면서도 항상 가르침과 단속(團束)을 가하여 아들들이 올바르고 의로운 행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였고, 이들 형제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스승을 따라 산사(山寺)에서 독서를 하였다.
시일이 오래 지나자 어머니가 보고 싶고 그리워서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는데 그래도 감히 학업을 그만두고 지레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그것을 본 자들이 칭찬을 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효우(孝友)하고 관화(寬和)하여 남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처지가 다급하고 곤란한 사람들을 마치 자기의 친척보다 더 앞장서서 도와주곤 하였으므로, 의식(衣食)의 해결이 어려운 자들은 공을 찾아가 도움을 받는 자들이 많았다.
만력(萬曆) 정유년(丁酉年, 1597, 선조 30)에 왜구(倭寇)의 침입을 피하여 호서(湖西)의 객지에서 우거(寓居)하다가 그 이듬해 [무술년(戊戌年, 1598, 선조 31)] 2월 23일에 전염병에 걸려 홍주(洪州)의 촌사(村舍)에서 졸(卒)하였는데, 그가 태어난 계유년(癸酉年, 1573 선조 6)과의 사이가 겨우 26년 밖에 안되었다. 그해 10월 모일(某日)에 나주(羅州)에 있는 판서공(判書公)의 무덤 아래 모향(某向)의 언덕에다 귀장(歸葬)하였다.
공의 배필(配匹)은 음성 박씨(陰城朴氏)로 지평(持平) 박광옥(朴光玉)의 딸인데, 공보다 41년 뒤에 세상을 떠났고, 묘소는 함평(咸平)의 삼각산(三角山)에 있으며 따로 서문(敍文)이 있다. 공의 맏아들 임타(林)는 서산 군수(瑞山郡守)를 지내고 누차 민사(民社)를 맡아 다스렸는데 재임한 곳마다 직무를 잘 수행하였으므로 임금이 그의 재능을 듣고 특별히 이름난 고을을 맡아 다스리도록 해주었다.
또 일찍이 도감(都監)의 낭청(郎廳)으로 있으면서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므로, 추은(推恩)하여 선고(先考)는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追贈)되고, 어머니의 봉작(封爵)도 선고의 봉작에 비추어 추은되었다.
공의 차남(次男)인 임위(林)는 경양 찰방(景陽察訪)이다. 군수(郡守, 임타)는 참봉(參奉) 김우급(金友伋)의 딸을 아내로 맞아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임일유(林一儒)는 진사(進士)이고, 둘째는 임상유(林相儒)이며, 막내는 임장유(林長儒)이고, 딸은 사인(士人) 김민격(金敏格)에게 출가하였다.
군수의 측실(側室) 소생은 4남 2녀인데, 아들은 임학유(林學儒)ㆍ임달유(林達儒)ㆍ임계유(林季儒)ㆍ임표유(林豹儒)이고, 딸들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 찰방(察訪, 임위)은 오언표(吳彦彪)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임지유(林之儒)이고, 딸들은 사인(士人) 박세해(朴世楷)와 양화남(梁華南)에게 출가하였다.
임일유(林一儒)는 2남 1녀를 두었고, 임상유는 2남 1녀를 두었고, 임장유는 2남 2녀를 두었다. 관찰공(觀察公)은 임업(林)이고 뒤에 임서(林)로 개명(改名)하였는데, 나와 같은 해에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세상 사람들이 장덕 거인(長德鉅人, 덕망이 뛰어난 큰 인물)이라고 일컫는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재주와 학식을 가슴속에 깊이 쌓아두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네.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도 그 고마움을 자랑하지 않았네. 재능을 많이 지니고도 그것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였네. 수명은 오래 살지 못하였으나 후손들은 넉넉하게 두었으니, 누가 불선(不善)하다고 말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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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林悏 墓碣銘[金尙憲]
林侯㙐, 余重其尙義氣, 與俗異趨, 久與之驩。 一日, 手家牒, 扶服以請於余曰: “先人葬, 稚昧, 墓顔缺飾。 幸蒙國恩, 榮施泉壤, 願籍子之一言, 以爲地下重。” 余於侯之先君, 雖未之前識, 與伯觀察公爲兄弟交, 今爲善子, 其行可推而信也。 遂不辭而應之, 按狀曰: “公諱悏, 字某, 自號柳湖。 世爲羅州大姓。 考諱復, 承文正字, 贈兵曹判書。 祖諱鵬, 左承旨, 贈禮曹參判。 羅俗素以門地相高, 而鄕人推豪鉅族, 無先林氏者。 判書公再室無子。 最後委禽南平徐氏。 進士說之女。 有二丈夫子, 長觀察, 季卽公也。 判書以上及三夫人之贈皆由觀察貴也。
公少孤, 與觀察公同學業, 母夫人雖甚愛, 常加誨束, 不離義方。 兄弟奉慈敎, 從師讀書山寺日久, 思戀膝下, 至於涕泣, 猶不敢輟業徑歸, 見者稱之。 天性孝友寬和, 與物無忤, 喜施予。 急人之困, 甚於己, 親故之憂衣食者多歸之。
萬曆丁酉, 避島警客寓湖西。 明年二月二十三日, 病疫卒于洪州之村舍, 距其生癸酉, 廑二十六年。 用其年十月某日, 歸葬羅州判書公兆次某向之原。 配陰城朴氏, 持平光玉之女。 後公四十一年而歿, 墓在咸平三角山, 別有敍。
長子㙐, 瑞山郡守, 屢典民社, 所居善職, 主上聞其能, 特畀望郡。 嘗爲都監郞, 錄原從勳, 推恩贈考承政院左承旨, 母封竝視考爵。 次㙔, 景陽察訪。 郡守娶參奉金友伋女, 生三男一女: 男一儒, 進士: 相儒: 長儒。 女適士人金敏格。 側室四男二女: 學儒、達儒、季儒、豹儒, 女幼。 察訪娶吳彦彪女, 生一男二女: 男之儒, 女適士人朴世楷、梁華南。 一儒二男一女, 相儒二男一女, 長儒二男二女。 觀察諱𢢜, 後改名㥠。 與余同年進士, 世稱長德鉅人。” 銘曰:
蘊而不顯其積, 惠而不示其德。 才而不獲其展。 嗇於年而裕於後, 夫誰曰不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