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또(Giotto), 성전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이태리 파두아 스크로베니 성당, 1306년
지오또(Giotto), 성전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이태리 파두아 스크로베니 성당, 1306년
규례에 따라 아기 예수는 정결예식을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가셨다.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는 그저 산비둘기 한 쌍으로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믿음과 정성이니 초라한 비둘기라도 괜찮다.
하나님의 집 성전에는 두 사람의 경건한 신앙인-시므온과 안나-이 있었다. 이들의 경건은 물론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이었을 뿐 아니라 심중으로부터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시므온은 평생 눈이 진 무르도록 기다린 메시아를 안고서는 감격의 찬송을 부른다. 시므온의 노래는 구원의 역사를 담고 있다. 하늘의 천사도 직접 내려와 이 감동적인 장면에 참여한다.
르네상스의 문을 연 화가 조또(Giotto, 1267~1337년)는 아기 예수와 부모와 시므온 위에 황금빛 후광(Aura)을 두름으로써 이 장면을 찬란하게 했다. 아기 예수는 평생 그를 기다려온 노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자신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손짓하고 있다.
성경(누가 2:22~40)의 기록에 따라 우리는 시므온에게 더 집중하지만 함께 기록된 안나에 대해서도 같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700년 전 유럽은 남성의 사회였고 또 성경에 시므온을 설명하면서 성령이 그 위에 계시다고 기록하여서이겠지만 화가는 시므온은 장중하고 거룩하게 그린 반면 옆에 서 있는 안나는 무척 인색하게 표현했다. 마치 아브라함처럼 묘사한 시므온에 비해 안나는 보조자로서 훨씬 소극적이고 아우라도 없다. 메시아와의 거리나 몸짓이나 전체적인 모습이 시므온과는 대조적이다. 그럼에도 자꾸만 안나에게로 눈길이 돌아간다.
84세 노인 안나는 결혼 후 7년 만에 홀로되어 살면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삶의 초점을 모았다. 누가는 안나를 예언자라고 표기했다. 아마도 신약성경의 유일한 여성 예언자일 것이다. 안나는 시므온처럼 직접 메시아를 안지도 못했고 머리에 후광도 없었고 전반적으로 시므온에 비해 위축된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메시아에 대한 기다림과 기대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안나의 오른 손은 메시아를 향하고 왼손으로는 라틴어로 적은 두루마리를 쥐고 있다. ‘왕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 대략 이런 뜻인 것 같다.
역시 한 인간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얼굴이다. 얼굴이 곧 인격은 아니지만 얼굴 외에 인간을 더 잘 그려낼 수 있는 곳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안나의 머리는 이미 허옇게 변했고, 이마와 눈가의 주름은 그가 기다려온 세월만큼이나 깊다. 미간과 콧등과 볼까지 주름이 선명하다. 주름마다 안나는 메시아를 고대하는 간절함과 사랑을 담았을 것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오직 메시아를 대망하는 믿음과 소망은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안나는 나이에 맞지 않는 강렬한 눈빛으로 증명하고 있다.
대림절,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첫댓글 무엇을 기다리는가..
메시아를 고대하는 간절함과 사랑 ..
메시아를 대망하는 믿음과 소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