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십자가를 지혜와 능력으로 보는데, 가짜는 십자가를 어리석고 무능함으로 본다. 십자가는 죽음, 포기, 희생, 버리는 것이지만 인간적으로는 바보처럼 보인다.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요구하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지혜이고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받는 우리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다(고전1:18). 이성과 경험치와 반대가 되는 십자가의 도가 열매와 승리를 주고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든다.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전제는 자기 뜻이다. 십자가는 어리석음이고 무능함이며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 있다. 십자가를 이해 못 하면 성경에 난해 구절이 많아진다. 품꾼의 비유(마20)에서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다면 일한 양에 따라 조금씩 더 주어야 합당하다. 그런데 주인이 모두에게 똑같이 주려는 선한 뜻이 있다면 먼저 온 사람부터 일당을 지급하여 보내면 다 만족하여 돌아갔을 것인데 이는 십자가를 말씀하려 하심이다.
지금은 무인 시대다. 무인 자동차, 무인 공정, 무인 점포, 효율성만 따진다면 무인 자동화 시스템으로 우리는 다 잘릴 것이다. 결국 젊은이들이 애를 안 낳는다. 그나마 어려운 일은 외국인 노동자로 채워지고 있다.
십자가는 살리는 힘이다. 강도 만나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강도 만난 그 자리에 나는 안전할까? 위험하니 빨리 도망가야 옳다. 그 사람을 돕는다고 내게 무슨 유익이 되나? 그런데 효율, 공정, 합리를 말하니 이 시대 전체에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문명이 발달했다고 페트병에다가 물 마시는 것이 좋은가? 삼다수, 에비앙 마시는 것이 복인가? 어디서나 물을 떠서 마실 수 있었던 때가 좋았다. 환경이 다 깨진 것이다. 요즘은 카페에서 지리산 산소를 준다.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어리석다. 인간이 악인의 꾀를 추구하면 될 것 같지만 다 깨지고 난장판 된다.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일어났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라 하여 파벌이 나뉜다. 내 편을 더 많이 만들어 세력이 커지면 발언권도 세진다. 교회까지도 세상 것이 들어왔다. 파벌은 내 뜻을 관철한다.
바울은 이들이 세상의 지혜와 능력을 가져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쪼개놓았다고 말한다. ‘양희은의 작은 연못’은 두 마리 붕어가 너 죽고 나 살자고 서로 싸우다가 결국 다 죽는다는 노래다. 상대를 죽이고 제압하는 게 세상 원리인데 나도 같이 죽는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 증거는 살리는 십자가가 능력이라는 것. 이게 진짜 지혜고 능력이다.
스님들도 서로 자기 뜻을 주장하니 문제 해결이 안 된다. 그래서 서로 미루는데 한 스님이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 한다. 스님도 지는 십자가를 성도가 외면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십자가 지고 희생하고 섬기는 자가 화평을 이룬다. 십자가가 아니고서는 하나님과도, 세상과도 연결이 안 된다. 세상의 지혜와 힘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되면 그것이 우리의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되고 의로움이 되고 거룩함이 되고 구원이 된다.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있으면 다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