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당 이희영
포덕47년(1933) 경기 파주 출생
여성회본부 포덕부장, 재무부장
여성회본부 감사
"정성만 지극하면
한울이 감응한다"
저는 어려서부터 천도교에 대해서 아버지( #이민우 ) 한테 지도를 받아왔어요. 고향은 경기도 파주군 선유리에요. 거기서 살다가 피난 나갔지요. 열여덟 살에 피난 나가서 충청도 청주군 가동면에 가서 피난 생활을 했어요. 친정 아버지는 그 때 당시 교구장 하셨어요. 당시에 문산 다락고개라는 동네에서 교구장 하셨어요.
피난 가서는 충청도에서 8개월 동안 있다가 서울에 왔어요. 친정 아버지가 육십다섯에 돌아가셨어요. 그 때 당시는 환갑을 잘 못 넘겼잖아요. 전염병도 많았고. 저희 아버지는 그래도 오래 사셨지요. 피난 나갔다가 다시 서울로 온 게 열아홉, 스무살 정도 때예요.
그리고 교회 나오면서 남편( #양재호 )을 만나 스물 넷에 결혼했어요.
평안북도에서 오신 친정 아버지 친구분이 중신을 하셨어요.
이북에서 나오신 분이니까 아무것도 없었어요. 말만 듣고는 결혼을 해서 가니까는 아주 진짜 초가삼간 집이에요.
답십리로 갔는데 그래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시아버님( #양봉진 )은 종법사님이세요.
교회 활동을 많이 하셨지요. 천도교에서는 전부 알아주시는 분이세요. 청년들도 많이 따르고.
그저 저녁마다 청수 모시는 건 친정에서도 했지만 결혼해서도 했고,
종교인이 아니었으면 그 시집은 못 살아요.
저희 친정은 형편이 나쁘지 않았거든요. 피난을 와서 살았어도.
저희 그린데 없는 집으로 시집 가서 고생 많이 했어요.
시아버님은 서울에서 살기가 어려우니까 포천 일동에서 사셨는데 거기서 교구를 하나 일으키셨어요. 거기서 살면서 교회에 나갔지요. 나는 서울에서 살고 있는데 시아버님이 아무리 없어도 친정이 있으니까 데리고 가실 생각을 못 하고 아드님만 데리고 가서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마 하시더라구요. 그러는데 그 때 첫애를 낳아서 삼칠일이 됐는데 제가 따라갔어요.
저도 가야죠, 남편 가는 데 저만 서울에 있어서 뭐 합니까 했거든요. 그러니까 시아버님이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구요. 일동 가서 삼 년만 살고 오마 했는데 십년 넘게 있었어요. 그러고나서 다시 서울로 와서 자리잡고 살았어요. 그 때 당시 언니가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했어요 거기를 따라 나와서 언니하고 같이 사업을 했어요. 그래서 애들 다 공부 시키고 시집 장가 보내고 했습니다. 남편은 철물장사 하셨어 요. 제가 많이 벌었지요.
친정 형제가 다섯인데 다 네 살 터울이 에요. 아버지가 천도교를 하셨지만 저 하나만 아버지를 따랐어요. 늦게나마 큰오빠가 여든여섯인데 천도교를 믿으세요. 집에서 청수 모시고 주문 외시고 그러세요. 아버지를 나도 따라야 한다는 거지요.
우리 자식들은 천도교에 입교하긴 했지만 작은 딸 하나만 불교 집안으로 시집을 갔어요. 불화가 생기니까 너는 그냥 시아버님을 따라라 해서 지금은 불교 믿어요.
그 전에는 제가 장사를 했기 때문에 기념날이나 나왔지, 시일식에는 못 나왔어요. 그러다가 나이가 먹고 장사를 그만두면서 서울교구에 들어가서 임원을 했어요. 사업부장 시작할 때 조순화 회장님께 사업 시작하게 돈 10만 원만 달라 했더니 안 줘요. 사업하다가 다 말아먹는대요.
그래서 제가 제 돈으로 할게요, 해서 물건을 사와서 했는데 잘 되더라구요. 청계천에 가서 진열장을사왔어요. 물건을 둘 데가 없더라구요. 그 때는 양말, 스타킹 그런 걸 팔았죠 뭐. 먹는 것도 팔고 바자회도 하고. 잘 됐었어요. 별로 알력이 없어서 회장님 보필하며 순종하고 잘 했어요.
***
저희 친정 아버님이 그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정성이 지극하면 감천이라고.
저희 친정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셨어요.
젊어서 밤이면 열이 나고 잠을 못 주무시는데 친정 아버지 하고 나하고 저녁마다 어머니 다리를 주물러요.
그러면 잠을 주무시다가 또 다리 아프시다고 그러면 또 주물러요. 밤새도록.
그때가 열두세 살 때에요.
그런데 친정 아버지가 그러세요, 너 한번 청수를 청수를 모셔 보겠느냐, 네, 어떻게 하면 돼요 그러니까,
청수를 백일만 모시면 어머니 다리가 나으실지도 모른다.
사람이라는 게 정성만 지극하면 한울이 감응한다. 어머니를 위해서 한 번 해 볼래, 그래서 하겠다 했죠.
그 때가 한참 뛰고 놀 때예요.
친구들하고 놀다가 시간만 되면 올라오는 거예요.
큰 바가지를 갖고 물을 뜨러 가서 청수 모셔다가 백 일을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도 안 나으시더라구요.
피난을 나가는데 걸음을 하나도 못 걸으세요.
세 살 먹은 어린애만큼도 걸음을 못 걸으시는 거예요.
밤새껏 나는 울고 앉아서 주무르는 거예요. 내일이면 좀 가시겠느냐고.
언니, 작은 올케, 어머니, 애가 둘, 조카 하나 데리고 피난을 나오는데 어머니가 못 걸으세요.
밤새껏 주물러서 모시고 가고 모시고 가고 그랬는데,
피난지에 가서는 다리가 안 저려요. 병을 놓으셨어요. 그러고는 일흔일곱에 돌아가셨어요.
젊어서부터 그렇게 편찮으셔서 저시집도 못 보내고 돌아가신다고 그랬는데 오래 사셨어요.
***
피난 나갔을 땐데 진짜 기적이라는 게 있더라구요. 오빠가 철도국 승무원이었어요. 그래서 난리나면서 부산으로 내려갔어요. 그러면서 가동면 올케 먼 친척집에 가 있으라는 거예요. 오빠가 그 집에 많이 도움을 줬대요. 그 집에 가면 박대는 안할 거다, 해서 갔더니 그 집도 피난 가고 없잖아요. 그래도 그냥 거기 눌러 사는데 오빠가 피난민이 다 가도 안와요. 그러니까 나가래요. 언제까지 있을 거냐구 먹을 것도 없죠. 자기네 신세는 안 지워 주는데도 그러더라구요.
눈이 하양게 온 엄동설한이에요. 조카애가 네 살 먹었어요. 그 애를 데리고 친정 어머니 모시고, 밤새껏 살 길을 열어 달라고 심고를 했어요. 한울님한테 매달렸어요. 오빨 만나야지 되는데 여길 떠나면 어디 가서 만나느냐고 밤새껏 울며 매달렸어요. 그러고 아침 먹고 보따리 싸 갖고 나왔는데, 그 동네가 안동네인데 개천 하나 건너면 큰 길가예요.
추우니까 어떤 집 뒷마루에 앉아서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 집이 우리 올케 외할머니 하인으로 있던 집이래요. 우리 올케는 뭐라 말을 못 하고 우리 친정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야 하는데 아무개네 집에서 내쫓아서 이렇게 나왔다구. 우리가 여기서 떠나면 우리 아들을 못 만날 텐데 큰일났다구 하셨나 봐요.
그러니까 그러냐구 하면서 방 하나 줘요. 그게 얼마나 기적입니까. 방 하나 주고 솥 하나 걸어 주고 그렇게 살으라구. 그 집이서 불러 낸 것 같애요. 바로 그 집에 들어가서 짐을 다 풀고 살았어요.
국민병에 나갔던 사람들이 새까망게 나올 때예요. 그 사람들 상대로 하는 장사들이 많은데 제가 보니까 떡가래를 가지고 팔더라구요. 그래서 밤새껏 잠 안 자고 쌀 한 되를 담가 빵아서 쩌서 했더니 곱쟁이가 나와요. 그래서 그거 다 팔고 올케하고 조카하고는, 엿을 받아서 엿을 팔고, 쌀도 한 가마 사고 보리쌀도 사고 하면서, 오빠를 기다리는데 오빠가 영 안 오는 거예요.
그냥 검은 륙색만 지고 가는 사람 있으면 오빠 같애요. 개천에 앉아서 조카 기저귀 빨고 있으면, 지나가는 사람이 오빠 같애요. 그래서 쫓아가면서 조카 이름을 부르면 안 돌아봐요. 그러면 아니구나, 하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런데 얼마 동안 있다가 오빠가 진짜로 왔어요. 국민병 나갔던 사람들이 다 들어가고 없어서, 장사도 안 되서 쌀을 한됫박 해다가 떡을 해 놨어요. 그런데 오빠가 왔어요. 오빠가 그거 뭐냐구 그래서, 그 동안에 한 번 먹어 보지도 못한 거를 오빠가 설탕을 갖고 와서 찍어서 먹었어요. 사람들이 다 못 먹다가 먹으니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요. 그때가 열아홉이었어요. 참 그런 기적이 있었다는 게 그렇게 고마울 데가 없어요.
교인 자손들이 많이 좀 따라 줬으면 좋겠는데, 옛날 없던 시절에 부모님들이 교회만 주로 하고, 땅이고 뭐고 살림은 하나 돌 보지 않고 이렇게 지내셨나 봐요. 그래서 자손들이 못 믿으시는 거 같애요.
천도교 진리가 좀 좋아요.
다 좋은데 그래서 하기가 힘든 것 같애요.
막내아들도 저희 큰아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내가 했던 거니까, 네가 해라 해서 교회 나오고 있어요.
큰 딸은 사위하고 같이 교회 나오고, 그런데 교회와 보면 젊은 사람들이 없고
연세 많은 분들만 있고 하니까 썩 내키질 않나 봐요.
저는 그게 안타까운 거예요.
저는 지난 여름 우이동에서 수련을 하고 와서는 하루에 사십 분 이상 수련을 해요. 아침 저녁으로.
그러니까 몸도 가뿐하고 좋은 거 같애요. 그 전에는 다리가 아파서 20분을 못 앉아 있었어요. 구부리고 앉질 못했어요. 수련도 다리 뻗고 했어요. 그런데 수련 하고 와서는 다리가 안 아파요. 그래서 계속 수련을 하고 있어요. 책상다리 하고 앉아 있어도 쑤시질 않아요. 한 시간도 좋고 그래요.
바람이 있다면 그저 교회가 많이 활성화 되야지요. 교인으로 서 그게 첫째 바람이죠. 가정포덕 하면서.
제 마음에 자부심은 갖고 있어요. 그런데 교회가 잘 안 되니까 그게 걱정이죠.
■ 구술일 포덕 147년(2006년) 9월 17일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