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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이 글에서 인용되는 김상수, 김갑수, 목수정, 양창섭(이름 가나다 순)의 글은 여러 매체를 통해서 발표된 것이다. 이 중 목수정의 경우에는 당초 자신의 블로그에 글을 올렸다가 갑자기 블로그를 닫아버렸는데, 인용한 글의 경우 레디앙에서 이미 기사화한 부분이라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중간에 한번 더 등장하는 목수정의 글은 블로그에만 올라왔지만 가지고 있는 캡쳐 파일을 통해서 문언 그대로 인용하였다.
언론 지면이나 블로그에 올라온 글들은 큰 따옴표로 인용하며 필자의 이름을 기록했고, 트윗의 내용은 작은 따옴표로 인용하였다. 김상수의 경우에는 워낙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기에 발표일자를 병기했다. 모든 인용문은 볼드체로 처리했다. 이 글에서 주로 인용한 글들의 목록은 시간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김상수, 2011.12.02 정명훈, ‘토목공사식 성과주의’ - 한겨레
김상수, 2011.12.06 정명훈은 왜 MB 취임식에 '환희의 송가'를 지휘했을까 - 미디어오늘
양창섭, 2011.12.06 김상수 씨의 칼럼에 대해 - http://blog.naver.com/leclair/
김상수, 2011.12.07 정명훈 연봉,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 - 미디어오늘
김상수, 2011.12.12 서울시는 서울시향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발전을 위한 제언 1 -미디어오늘
김상수, 2011.12.12 박원순 시장, 정명훈 연임 결정할까 -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발전을 위한 제언 2 -미디어오늘
김갑수, 2011.12.22 정명훈과 진중권, 우리를 착잡하게 만든다 - 오마이뉴스
김상수, 2011.12.23 "박원순 시장에게 묻는다, 정명훈 재계약이 최선이었나" -미디어오늘
**번거로우시겠지만, 첨부파일인 pdf파일로 읽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오타나 비문, 논지전개 흐름을 정리한 다음 웹문서에 이를 반영하는 것은 시간이 걸려서 pdf파일이 가장 정확합니다. 다시 한번 번거로움드려서 죄송합니다.
“정명훈 사태”에서 정명훈을 걷어내자 -
김상수, 김갑수, 목수정에 대한 반박과
향후 발전적 논의를 위한 제언
황종욱(@yocla14)
김상수가 프레시안을 필두로 미디어오늘, 한겨레 등 여러 매체에 정명훈에 대한 칼럼을 기고하면서 불붙은 논쟁이 이제 20일을 훌쩍 넘겼다. 그 와중에 진중권, 목수정, 김갑수 등이 제각각 트위터나 블로그, 칼럼 등을 통해서 말을 보태고 있는 가운데, 현재까지의 논쟁 상황을 요약해보면 초반의 문제제기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오로지 정명훈에게 모든 담론의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평소 고전음악에 대해서 언론이 보였던 관심에 비하면 지난 20일 동안 고전음악이 온 국민으로부터 받은 관심은 부담스러운 수준이었지만, 논의의 폭은 오로지 정명훈이 누구인가의 문제로 축약되어 있었다.
논의의 과정에서 소위 진보 미디어들이 담론의 축적을 심각하게 무시하는 행태를 보인 것이 작금의 상황에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진중권의 트윗들을 가지고 아예 그를 제목으로 소환하면서 “정명훈을 서둘러 옹호한 서울시향 상임작곡가 진은숙의 동생 아닌가?”(김갑수)라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이, 정작 서울시향의 직원이 김상수에게 답한 블로그 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다. 목수정과 진중권의 고공난타전에서 그들의 메일 내용, ‘낙서장’에 쓴 글들까지 기사화되었지만 블로그 생태계에서 자라난 담론들에 대해서 진보 언론들은 무관심했다.
굳이 언급하자면 미디어오늘은 김상수에게 양창섭의 포스트에 대해 질문하긴 했다. 불행히도 김상수의 대답은 참담했다. 그가 빠져나가기 가장 쉬운 구멍을 찾은 것을 비판하지는 않겠다. 그는 자신이 떠든 내용들이 모조리 허물어지는 파국 앞에서 매우 인간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다. 그는 ‘자선음악회’라는 표현을 곡해한데 대해서 사과하지 않았고, 1년 내내 단 하나의 오케스트라만 맡는 지휘자란 없다는 반박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아니, 자신의 인터뷰에서 그 주장을 반복했다. 그 문제에 대해 내가 트위터 상에서 문제제기를 하자 그는 ‘내가 네티즌으로부터 일부만 받았어요’라는 말로 빠져나가려 했다. 일반적으로 일부만을 읽었을 때 “나도 그 글을 봤다. 내 팩트는 정확하다”(김상수, 2011.12.23)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더불어 김상수가 ‘기사의 댓글이 나의 의도를 잘 요약했군요’라는 말을 한다는 게 글 쓰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비참한 자백인지를 알았으면 한다. 그 ‘의도’가 어떤 자명한 섭리가 아닌 이상에야, 글의 ‘의도’가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전적으로 논지전개 과정의 명징함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그의 ‘의도’는 불행히도, 그것을 떠받치는 논거들이 줄줄이 파산하면서 함께 침몰했다. 그와 어떤 섭리를 공유하는 이들에게는 계시였는지 몰라도 다른 이들에게 그의 글은 그저 순수한 지면낭비에 불과했다.
이 글의 목적은 간단하다. 문화와 공공분야가 어떤 관계를 설정해야하는가를 고민하는 예비 연구자로서 하고 싶은 말 많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야겠다. 나는 김상수가 미디어오늘, 프레시안, 한겨레를 통해서 주장하는 내용들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그것이 그의 논지를 어떻게 약화시키는지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이를 검토하고 나면, 김상수가 문제를 제기하는 프레임은 이미 심각한 수준으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유의미한 논의가 전개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글의 마지막의 세 개 장에서 나는 ‘정명훈’에 가려져서 제기되지 못한 문제, 즉 공공영역이 어떤 방식으로 고전음악에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였다.
1. ‘세계적이지 않은’ 정명훈.
이런 민망한 표제를 달고 나는 김상수가 자신의 칼럼과 인터뷰를 통해서 구구절절 주장하는 내용인 “그는 세계적인 거장이나 마에스트로가 아니다”(김상수, 2011.12.23)라는 명제를 검증하려 한다.
많은 이들은 ‘세계적’이라는 말에 이력이 난 것 같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말이 떠다니는 이 담론의 풍경은 실로 그로테스크하다. 사실 이번 논쟁에서 수많은 말들이 본디의 개념을 이탈해서 흉기와 같이 쓰이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세계적’이라는 말, 정확히 말하면 ‘세계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부정형으로 뭔가를 정의하려니 참으로 갑갑한 일이 벌어지는 셈이다. 그렇다고 ‘세계적’이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정의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김상수는 그것을 해냈다. 온갖 잡다한 사실관계들을 소환해가면서 말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중에 진실인 것을 찾기는 어렵다.
김상수가 “세계 4대 오케스트라”를 운운하면서 “내년 시즌 정례 연주회에 초청받아 지휘하는 지휘자 명단에 그는 없다”(김상수, 2011.12.23)는 주장을 한 것은 자신이 그렇게 비판하는 “문화적 식민지” 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 분류가 희극적일 뿐 아니라 세계 몇 대를 꼽아가는 그 자체가 이미 문화적 식민지 의식에 포섭되었을 때나 가능한 것 아닌가.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고 그 세계 4대 오케스트라 운운하는 이야기를 받아준다고 해도, 정명훈이 2008년 자신이 언급한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로얄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독일에서 투어를 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이 문제를 제기한 트위터리안(@britz0641)에게 놀랍게도, ‘내가 쓴 글엔 2008년은 언급 안했음’이라는 말로 정신승리를 시전했다! 2012년 동 오케스트라의 아시아 투어 전체를 정명훈이 지휘한다는 사실을 내밀어도 그는 요지부동이다. 2010년 암스테르담에서 정명훈이 동 오케스트라를 여러 차례에 걸쳐 지휘한 것까지 누락한 걸 보면 도대체 김상수는 무슨 자료조사를 한 것일까 의구심이 든다. 왜 하루만에 들통날 거짓말을 하는가? 다른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고전음악 동호회인 고클래식의 동호인들이 작성한, 1969년부터의 정명훈의 연주 목록 아카이브를 덧붙여둔다.(http://t.co/ES4yHztm)
더불어 좀 늦게 논전에 뛰어든 김갑수는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는 않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는 이상한 가정을 설파하는데, 미안한 이야기지만 김상수보다도 피상적인 논의다. “대략 10명 정도의 세계적 지휘자를 선택해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세계4대 오케스트라에 못지않은 황당한 이야기인데, 더 웃긴 건 김갑수는 자기는 그 열 명에 정명훈을 넣을 것이지만, “외국인일 경우 얼마든지 나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을”거란다. 정명훈이 훌륭한 지휘자라는 판단을 얻기 위해서 ‘외국인들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건 불행히도 그들이 그토록 ‘토목 중심의 성과주의’라는 이름으로 단죄하는 행태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조차 그들에게는 중요치 않다. 김갑수는 프랑스 출신의 음악인들이 지나치게 시향에 많다는 비판을 하기 위해서도 “서양악기 연주를 전공하는 친구”(김갑수)의 권위를 굳이 빌리는데, 수사의 한 방식인지는 몰라도 이런 식으로 ‘서양음악의 논리’를 타자화시키는 것이 논의에서 전혀 유익하지 않다는 것은 뒤에서 설명하겠다.
나는 정명훈이 ‘세계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므로 김상수의 논변들의 잔해 위에 정명훈이 왜 세계적인지를 추가적으로 논하지는 않겠다. 현재까지 많은 이들이 제시한 사실들은 김상수가 굽히지 않고 반복하는 ‘정명훈은 세계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반박하기에 충분한 것 같다. 사실 다소 희극적인 이 문제제기는 그가 ‘시장’이라는 말을 하면서부터 심각해진다.
2. 시장으로 나온 정명훈.
김상수는 중앙일보에 대해서 반론을 하면서 “시장(market)”이나 “경제”라는 개념을 몇 차례 반복하는데, 그 중 주목할 만한 말은 “이것이 시장의 논리다”라는 단정이다. 그의 논의에서 특이한 고리는 “한국 말고 미국이나 일본, 또 그가 거주하는 프랑스 어느 도시에서 연 20억원 이상의 돈을 한 도시가 운영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겸 예술감독 1년 보수 및 경비로 정명훈씨에게 지급할 수 있을까?”라는 말과 바로 다음 문장, “해외 클래식음악 ‘시장’에서 정명훈은 그 위치에 있지 않다. 이것이 시장의 논리다.”의 연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에서 그가 왜 그렇게 ‘세계적’인 것에 집착했는지가 드러나는데, 한마디로 그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에게, “한국에서만 말하는 세계적인 지휘자”(김상수, 2011.12.02)에게 왜 그렇게 큰돈을 주냐는 것이다. 김상수에게 시장에서 얼마나 가치 있는가는 얼마나 세계적인가와 동일한 문제다.
시장에서 어떤 상품이 받고 있는 평가가 온당한지를 판단하는 것 역시 세계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김상수의 문제는 계속 이렇게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 논의를 진행한다는 것인데, 그는 다른 오케스트라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이 곤경에서 탈출하려 했다. 더불어 프레시안의 허환주는 자신의 기사에 “정 감독의 연봉은 이전에 지휘했던 바스티유 오페라단과 라디오 프랑스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고 서술했는데, 그렇게 알려준 게 도대체 누구냐고 묻고 싶다. 가급적이면 믿을만한 소스를 사용하시라.
양창섭은 자신의 포스트에서 1992년 정명훈이 바스티유 오페라와 재계약을 하면서 연봉을 점차 높여 2000년에는 800만 프랑, 당시 환율로 13억을 받을 예정이었다는 기사를 인용했는데, 김상수는 여기에 대해서 ‘근거를 대고 못하면 책임지라’고 윽박질렀다. 물론 ‘내가 그 근거를 제시한다면 당신은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라는 양창섭의 공개적인 멘션에 그는 답을 하지 않았다.
1992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는 Le Point지를 인용하여 정명훈의 재계약조건을 인용하고 있으며, 이는 양창섭이 글에서 언급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나는 1994년 정명훈이 바스티유 오페라와의 지리한 공방 끝에 돌아와 마지막 공연을 지휘한 뒤에 나온, 동일한 재계약 내용을 다룬 L'Express지의 기사를 김상수에게 링크해주었는데, 그는 대뜸 ‘내용이 틀렸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그는 정명훈이 바스티유 오페라와의 분규에서 받은 배상금(indemnités)과 그의 연간소득(gain annuelle)조차 혼동하고 있었다. 김상수는 자신이 프랑스어를 읽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렇게 당당했던 것인가? 허환주가 알고 있는 정명훈의 연봉은 어디에 있는 연봉인가? 설마 1992년이라 해도 ‘13억’이니까 20억보다는 작다는 논리인가? 지적 성실성이 결여된 이러한 비판에 대한 혐오감을 누르면서 정명훈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고자 한다. 팩트의 측면에서 김상수가 정명훈에 대해 제기한 쟁점들의 대부분은 허위다.
막간극 하나. 서울시의원 민주당 장정숙은 “‘서울시민에게 찾아가는 음악회’는 시향교향단이 마치 서울시민에게 봉사와 무료의 공연인 듯한 인상을 주지만 내막에는 세계 최고의 개런티가 회당 숨겨져 있었다”는 수준 이하의 지적을 하는데, ‘무상급식이라고 해서 급식 노동자들도 무료로 일하라는 이야기냐’는 촌철살인의 반박(@socio59)을 옮겨두는 것으로 더 이상의 말을 줄인다.
막간극 둘. 목수정은 뜬금없이 자기 블로그에 “문화적인 공로와는 무관하게, 정치적인 의미에서” 주불 한국대사관이 정명훈에게 한불문화상을 주려다 한국문화원장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내용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일전에 트위터에서 반박되었듯이 정명훈은 이미 2001년 그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쯤 되면 한숨 나온다. 최소한의 팩트 검증을 하고 문제를 제기해야 웃음거리는 안 되지 않겠는가?
3. ‘언터쳐블’한 정명훈 - 김상수의 문제제기 방식
지금까지 길게 이어진 사실관계를 보며 어떤 이는 통쾌할 것이고, 어떤 이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반MB선동의 소재 중 하나로만 정명훈을 인식해왔다면 그들에게는 다소 지루할 것이다. 물론 정명훈이라는 ‘사상의 오물덩어리’에 대한 근원적 증오를 불태우는 이들에게도 저 사실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리라 예상한다. 그분들에게는 진지하게 권하고 싶다. 실체적 진실을 외면하는 방식의 문제제기는 잘해야 진영 내 결속을 도모했는지는 몰라도 진영 바깥에 있는 이들을 아무도 설득하지 못하며, 진영 내부에서조차 이탈을 양산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양창섭이 지적했듯이, “정명훈이 00보다 많이 받는데, 00보다 나은 지휘자냐? 라고 묻는 것은 그 자체로도 우문이지만, 토대가 허약한 사상누각”이다. 김상수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겠지만 그가 여기저기에 발표한 글들은 오히려 정명훈을 더욱 건드릴 수 없는 영역으로 보내버렸다. 최소한 이런 식으로 팩트 전쟁을 하고 싶었으면(그가 인용한 여러 수치들이 논의의 장식품 이상의 효과를 노린 거라면) 조사라도 더 했어야 했다. 김상수가 ‘상식’을 요구하며 기를 쓰고 허구의 팩트를 전달할수록 정명훈을 옹호하는 이들은 김상수의 오류를 정정하고 그가 알지 못하는 클래식 음악계의 특수한 관행을 지적하면서 점점 멀어져갈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김상수가 자신의 모든 글들에서 정작 비판하고자 하는 “토목공사식 문화성과주의”의 논지전개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스스로 제시한 사실관계에 번번이 걸려 넘어진 결과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무리하게 정명훈의 ‘시장가치’를 재단하려고 한 그의 문제제기 방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는 정명훈의 발언을 입맛에 맞게 잘라서 인용한다. “이번 투어를 하면서 서울시향에 투자하면 확실한 수익을 책임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다. “수익은 정명훈씨[sic]에게만 해당됐다.”(김상수, 2011.12.02)
사실 예술에서 성과와 수익을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예술인들 일반에게 폭력적으로 작용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애당초 이런 문제제기를 하지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아마 김상수는 정명훈과 서울시향은 특권적인 존재이므로 문제제기가 그다지 폭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비판하는 서울시의 전임 시장들이 세계10대 오케스트라라는 허언을 뿌리고 다녔으니 그 정도는 “음악을 지휘하던 지휘봉을 이명박에게 활짝 웃음 띤 얼굴로 선물한”(김상수, 2011.12.06) 정명훈이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수익이 “서울시향이 투어나 레코딩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레코딩을 통해 세계의 좋은 지휘자들을 객원으로 모시고 더 좋은 연주를 관객에게 선사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양창섭)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거나 아예 존재하는지조차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김상수는 자신이 미디어오늘에 실은 칼럼의 마지막을 장식하면서 ‘서울시향’에 대한 거창한 제언을 하는데, 앞으로 발전적 논의를 원한다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의 오케스트라 상황과 서울시향을 등치시키는 논리는 그만 폈으면 한다. 빈 필하모닉이나 베를린 필하모닉과 같은 오케스트라들이 상임을 따로 두지 않는다거나 투표를 통해서 지휘자를 뽑는다는 등의 사실을 새삼스럽게 제시하는 모습을 보면 한심스럽다. 그들 오케스트라가 많은 음악인들의 조합의 성격을 가지고 시작되었다는 것, 그러한 실행이 적어도 백년을 훌쩍 뛰어넘는 역사 속에서 특수하게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김상수 등에게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쯤 되면 도대체 누가 “문화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김상수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사이먼 래틀의 시도를 길게 인용하면서 “예술의 힘이 사회적 양극화나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행동할 것”(김상수, 2011.12.12)을 요구하는데, 서울시향은 이미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구로구 등지에서 한국형 엘시스테마 사업인 ‘우리동네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 있다. 자기 눈에 안 보인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비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이 현실감 없는 제언들 중 가장 황당한 것은 “젊고 패기 있는 한국인 지휘자를 상임으로 두고, 수 명의 국내외 객원 지휘자를 선정해 교향악단이 과거처럼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 단원 경쟁 체제보다 지휘자 경쟁 체제로 가는 방식으로 전환”(김상수, 2011.12.12)하자는 것인데, 경쟁을 통해 매너리즘을 극복한다는 저 획기적(!)인 발상이 그가 그토록 청산하고 싶어 하는 개발독재 시기의 잔재와 얼마나 다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서울시향은 그런 ‘경쟁’가는 관계없이 이미 수많은 객원 지휘자들을 불러서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 객원 지휘자들을 부르기 위해 정명훈과 예술자문 마이클 파인이 판공비로 쓴 돈을 ‘배임’ 운운하며 비판하던 것이 김상수 아니었는가?
이제 읽는 이도 쓰는 이도 지루해진다. 김상수의 글에 등장하는 사실관계와 논리의 오류는 이제 자명하며, 그의 문제의식 중 유효하게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논의를 좀 더 생산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4. ‘고전음악의 논리’ - 소외를 넘어 이해로.
김갑수는 “'예술은 예술의 논리로 풀어야 한다'면서 왜 이 경우에는 스포츠의 논리를 가져다 대는지”라는 말로 진중권의 ‘예술의 논리’라는 표현을 비판하는데, 스포츠계와 비교했을 때 정명훈의 몸값이 ‘비정상적으로 높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냐는 반론에 대해 별로 생산성 있는 대답은 아니다.
김갑수가 사실 김상수와 차별성을 가지고 던지는 논점이란 “진중권이 사려 깊다면 최소한 서울시향 문제에 관해서만은 언급을 자제했어야 한다”는 것과 “악장뿐 아니라 단원의 15% 이상이 고액의 외국인 초빙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정도다. 스포츠의 논리를 가져오지 말라고 하니 현재 한국의 프로 스포츠 팀에서 뛰고 있는 수많은 용병 선수들을 이야기한댔자 그는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 같다.(나는 그 문제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그가 현재 외국에 나가서 관현악단의 단원으로 활동 중인 수많은 한국 국적의 음악인들을 알고 있다면 서울시향에 대해 “‘서울시민의 오케스트라’라고 하기는 좀 민망하지 않은가?”(김갑수)라는 표현을 쓰기 전에 좀 더 망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다 던져놓고라도, 김상수가 문제삼는 진중권의 그 ‘예술의 논리’라는 표현은 모호하다. 그 모호성은 표현을 한 당사자가 보론을 통해서 해소할 일이지만, 그 표현이 다른 이들의 담론까지 막을 우려가 있다고 생각되기에 여기에서 생각을 더 진행해보기로 하자. 최소한 김상수와 목수정은 저 트윗을 정명훈의 정치적 지향과 그의 행위 일반을 모두 그가 ‘예술가니까’ 이해해야 한다는 도피적인 의미로 이해한 것 같다. 나치와 푸르트벵글러, 프랑코와 카잘스가 난무하는 김상수의 칼럼이나 “예술가들은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위로 기어올라가[sic] 권력자의 엉덩이를 핥든, 시민들의 손 때 묻은 돈을 횡령하든, 자유롭게 냅둬야[sic] 한다는 건 당신의 몹시 잘못된 생각일 뿐”이라는 목수정의 격앙된 코멘트를 보면 그 혐의는 짙어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나, 현재까지 김상수를 반박해온 누구도 정명훈의 정치적 지향에 대해서 말하지도 않았고 말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한다. 그걸 끊임없이 말하는 것은 김상수 김갑수 목수정 이 세 사람 뿐이다.
수많은 고전음악 수요자들이 ‘예술의 논리’를 말할 때는 이 분야가 가지는 특수성에 대해서 고려하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 특수성을 이해하지 않고 고전음악계 일반을 단죄하는 것은 오히려 그것이 가지는 공공성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김상수 김갑수 목수정을 반박하는 것은 ‘예술의 논리’로 도피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고전음악이 ‘계급음악’이라는 좌파의 고정관념을 일소하고 이 문제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더불어 정명훈이라는 상징에 대한 화형식만 거행할 것이 아니라, 도대체 공공영역이 고전음악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5. 공공영역과 고전음악 -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예술을 위하여
사실 이 문제는 지방선거 이후 조선일보의 심층 분석 보도를 통해서도 제기된 바 있다. 이 기사는 공공영역 중에서도 지방자치단체가 이제껏 고전음악에 대해서 아무런 철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과시적인 전용홀을 지어놓고 애물단지로 전락시키는가 하면, 지역 예술가들에게 대관료도 받지 않고 공연장을 내놓으라는 명령이 지자체장으로부터 하달되는 방식으로 문화계와 지자체는 ‘소통’했다. 정직하게 이야기하여 공공영역 전반은 지금까지 고전음악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최소한 지난 10년간 시정에서 서울시향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오케스트라에게 넓은 자율권을 보장했던 사실은 칭찬받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서울시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시민들의 품 가까이로 돌아왔다.
반드시 우리동네 오케스트라 같은 적극적인 사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명훈이 들어온 이후, 오케스트라의 기량이 극적으로 향상되고 그런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볼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고전음악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증거이다. 찾아가는 음악회는 말할 것도 없다. 좋은 음향조건을 갖춘 공연장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왜 대형교회로만 가냐는 김상수의 불평은 설득력을 잃는다. “서울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서울시향은 기독교 선교악단이 아니다. 서울시향은 순복음교회 등 특정 종교를 위해서 음악을 들려주는 악단이 아니”(김상수, 2011.12.07)라는 비분강개는 고작 오세훈 시장과 종교인 몇몇의 사려 깊지 못한 발언을 가지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전음악이 얼마나 시민들에게 높은 접근가능성을 가지는지는 한 사회의 분배와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김상수가 “정명훈씨[sic]가 언론 인터뷰에서 “자선음악회”라 말한 ‘찾아가는 음악회’의 내막을 보면 정기연주회 지휘료로 계약한 4200만원의 반값인 2100만원씩을 지휘 때마다 꼭 챙겼다.“(김상수, 2011.12.02)는 말을 한 데 대해서 나는 실소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자선음악회’라는 표현 자체가 김상수의 착각인 것은 양창섭이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거니와(그가 주장의 출처로 밝힌 주간한국 기사에서 정명훈은 찾아가는 음악회가 아니라 유니세프 자선음악회를 언급한 것이다.) 찾아가는 음악회가 ‘자선음악회’라는 인식 자체가 복지를 자선 정도로 생각하는 수많은 수구우파들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케스트라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전적으로 공공재원에만 의존하는 것은 이제 시대적인 추세가 아니”라 말하는 김상수의 지적은 일견 타당한 듯하지만 공공영역이 고전음악에 대한 지원을 줄일 경우 그 과정에서 개입하게 될 대기업들이 음악 생태계에서 어떤 파괴적인 영향을 행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가 없다.
SBS 김수현 기자는 취재파일(http://curtaincall.tistory.com/91)을 통해, 지난 11월 15일에 있었던 ‘삼성전자와 함께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공연’을 비판하며 대기업들의 문화마케팅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 자세하게 지적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유명 연주자의 대규모 내한공연 위주로 재편되고 있는 고전음악 공연시장에서, 기획사와 대관극장 측은 생존을 위해서, 공격적 문화마케팅을 전략으로 하는 대기업의 스폰싱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고전음악의 공공성 자체가 기로에 서 있는 마당에 왜 그 부담을 공공영역이 져야 하냐는 말은 냉소적으로 말하면 앞으로 고전음악 수요자와 생산자들은 시장에서 책정된 가격에 군말 없이 따르라는 일종의 사형선고와도 같다. 최소한 경제 생태계에서 공공성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공유하는 이들이라면 도무지 동의할 수 없는 말이다.
참고로 이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대구시에서는 대구시향의 곽승 지휘자의 몸값이 논란이 되었는데, 문제를 제기한 대구시의회 한나라당 배지숙 의원은 “대통령의 연봉이 1억 5천만원인데, 곽승 지휘자의 연봉이 적정한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진영을 막론하고, 고전음악 수요자들에게는 사회의 잉여자원이 남았을 때나 시민권을 인정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은 비슷하다.
5. 고전음악을, 그것도 좋은 고전음악을 들을 권리를!
글을 맺으면서, 나는 고전음악 ‘애호가’라는 말 대신 의식적으로 ‘고전음악 수요자’라는 표현을 쓸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고전음악이 어떤 취향의 영역에 있다는 인식을 주는 저 표현은 고전음악의 공공성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희석시킨다. 또한 ‘어마어마한 돈을 받는 정명훈’을 반복해서 기사화하여 고전음악이 마치 유한계급의 전유물인 것처럼 취급하는 일부 논객들과 언론들에게, 고전음악을 듣는 이들을 폄하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자는 의미이다.
과장이라고 생각한다면 김갑수의 이 언급을 읽어보시길. “서양음악, 그것도 오케스트라 음악의 애호가는 얼마나 될까? 불과 수만 명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1000만 명 서울시민이 예외 없이 1년에 1300원씩의 돈을 내는 셈이라면 이것은 합당한 것일까?” 내 세금 그렇게 쓰지 말라는 말에서 무서운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나뿐인가?
문화정책은 단순한 정부의 통제를 넘어 사회의 부를 어떤 식으로 효율적이고 합목적적으로 배분하느냐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린다. 그중 처음으로 고전음악에 문제가 제기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논의의 장에 남은 것은 엉터리 사실들의 잔해와 천박한 인식들의 흔적 뿐이라 다소 허무하지만, 어쨌든 그 장에서의 논의를 발전적으로 끌어가야 할 의무가 많은 이들에게 주어진 것 같다.
문화와 예술의 논리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은 정치의 논리로부터 탈출하기 위함이 아니라 정치적 논의의 장에서 그것이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기 위해서이다. 이제 왜 고전음악이 중요한지, 왜 공공영역이 고전음악에 투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 이 상황을 보며 ‘어떻게 정치의 논리가 예술의 논리를 잠식할 수 있는가’라고 개탄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고전음악계는 지금까지 그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 자체에 대해서 별로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논의를 이끌어감에 있어 기본적인 지적 성실성을 놓치지 말고 진영논리를 경계하자. 그리고 모든 예술이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한다는 자명한 전제를 서로 잊지 않는다면 향후 진행될 논의는 훨씬 생산적일 것으로 믿는다.
*이 글은 나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동시에 많은 분들이 제보해주신 정보들이 아니었으면 결코 나올 수 없었던 글이기도 하다. 며칠 동안 지속적으로 제기한 문제제기에 호응해주시고 지식을 나누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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