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無我)와 무량(無量)..
인터넷은 불교에 대한 많은 지식을 담고 있어 불자님들은 과거와 달리 엄청난 불교 교학을 알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울러 불교가 융성하던 시대는 교학이 발전했다고 하지요
종교인이 현대 과학에 밀려 유행처럼 절대적으로 줄어드는 시대에
우리가 교학에 조금이라도 더욱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 주위에 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무아와 무량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아는 무아대로.. 무량은 무량대로 이해하는 게 훨 낫지요.
그런데 이미 둘 관계에 의심이 일어났다면.. 풀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둘을 통해 우리는 교학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간다고 보면 됩니다.()^^.
무아는 소대승불교 관계없이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에 비해 '부처님은 무량하시다' 하는 법은 대승불교에서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말 뜻만 보면
무아는 자아가 없다는 자아 부정이요,
무량은 자아가 있지만 헤아릴 수 없다는 자아 긍정으로
무아와 무량은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것인데
두 낱말이 모두 부처님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우리에게는 모순처럼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하듯
두 불교는 다른 것인가.. 아니면 다른 목적을 향하고 있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무아와 무량은 소통할 수 있는 것인지..
<법화경> 곳곳에 마치 기존의 (무아) 불교를 벗어나는 듯한 암시를 보여주고 있으니..
회삼귀일이나.. 법회를 시작하자 자리에 앉았던 제자 일부가 자리를 떠난 것이나..
하나의 세계에는 한분의 부처님 뿐이라 했는데 수많은 부처님이 같은 공간에 출현한 것이나..
16품의 시작을 보면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서너 번 강조하는 것..
무아가 아닌 무량의 부처님은 그 당시 무아인 부처님을 믿는 불자들이 받아들이기에 결코 쉬운 게 아님을 보여준다.
그런데 석가부처님은 존재 세계를 무시하지 않았기에 무아를 가르치셨으나..
결국은 존재가 아닌 마음 법을 가르치시듯.. 마음에 대한 관찰이 있어야 한다.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은 멸한다고 하는데.. 멸하는 마음은 일어난 마음일 뿐으로..
마음이 일어나기 전에 무엇이 있는가에 이르게 된다.
만일 아무것도 없다면 마음이 일어날 수 있을까?.
텅빈 마음이라 하는데.. 텅 빈 마음은 있는 것인가 아닌가..
존재적으로는 없어 무이지만.. 비존재인 법으로는 있다고 하겠다.
법으로 있다고 할 때.. 생멸도 있지만
생멸이 없다고 할 무량이 떠오른다.
헤아릴 수 없다고 하니 존재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비존재인 법으로 있다고 할 뿐이다.
비존재를 달리 말하면 마음보다 더 가까운 표현은 없는 것 같다.
하여 무량인 부처님을 우리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누군가가
'부처님은 무아'라는 것은 존재적으로는 물론 비존재적으로도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 나간게 된다.
무아인 안-아트만에서 석가세존께서 지적한 아트만은
우파니샤드에서 주장하는 존재물의 실체로 영원불멸하는 존재다. 그러기에 몸은 죽지만 아트만은 윤회를 하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런즉 안아트만이란 영원히 존재하는 아트만이 없다는 것이지..
비존재인 법으로도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잡아함경>을 보면 석가세존은 스스로는 '나'라고 지칭한다.
그때 '나'는 존재가 아닌 비존재인 법으로써 '나'가 된다.
석존께서 '일체는 무아'라 하셨다.
이 말 뜻은 일체에는 항상 존재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법화경>을 설하자 자리를 떠난 불제자들은 비존재인 법을 존재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던 자들이라 하겠다.
지금도 비존재인 법을 존재인 법으로 오해하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않다.
더 길게 말하면 지리멸멸해 질 수 있으니..
정리하여..
무아는 존재의 눈[육안]으로 보는 것이요,
무량은 비존재인 법의 눈[법안]으로 보는 게 된다.
<법화경>이 묘한 것은 육안의 세계와 법안의 세계가 미묘하게 섞여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