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다리 저 너머에는 / 김성출
굴다리 저 너머에는 어떤 세상일까. 그 너머의 너머는 무엇을 하는 세계일까.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굴다리 너머 하늘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이 반짝였다.
부모에게서 독립한 후 삼십여 년 동안 전세방 2층, 아파트 전세 2층, 첫 내 집이 된 아파트도 2층, 2층에서만 살아왔다. 인생 2막은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흐르는 강물처럼 보이는 고층으로 이사했다.
늦은 밤 안개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멍한 눈으로 자동차 불빛이 꼬리를 물고 달리고 있는 도로를 내려다보던 중 차 한 대가 직각으로 차량 행렬을 향해 돌진한다. 사고를 직감했는데 차는 도로를 건너 아스라이 켜진 가로등 사이를 달리고 있다.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자세히 보니 도로 밑 굴다리 안으로 지나간 것이다. 시 외곽을 개발하기 위해 자동차 전용도로가 설치되었고 촌락을 드나들던 차와 경운기 등에 길을 내주기 위해 굴다리가 만들어졌다.
며칠 후 새롭게 둥지를 튼 동네가 궁금하여 마실 삼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십여 분 거리에 있는 그곳을 찾아갔다. 개천을 가로지르는 편도 1차선의 다리가 마을을 경계하듯 설치되어 있고, 다리 건너에는 개발제한구역 표지석이 덩그러니 서 있다. 금목서 군락지인 도로변을 걸어 굴다리 앞에 섰다. 굴속을 지나가는 바람을 타고 금목서의 향이 찐득하게 달곰함으로 코끝을 스쳤다.
굴다리 너머 추수를 기다리는 누렇게 익은 벼와 감나무밭이 이어진다. 포장한 지 오래되어 허옇게 드러난 아스팔트 길을 걸어가니 버스 승차장이 있다. 도심처럼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도, 버스 현황판도 없고 찌그러진 의자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먼지를 털어내고 의자에 앉아 길게 늘어선 감나무밭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북면초등학교 승산분교 이름표를 붙인 노랑 버스가 굴다리로 들어간다. 내 추억도 함께 빨려 들어간다.
유년 시절 초등학교가 굴다리 건너편에 있었다. 무궁화꽃이 만발하고 매미가 요란스럽게 울어대면, 굴다리 안에는 동네 아주머니 두세 사람이 나무 의자에 앉아 손부채로 더위를 식히며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는 커다란 럭비공 모양의 나무통을 실은 손수레가 여름 내내 자리를 차지했다.
뙤약볕을 직선으로 맞으며 걸어가는 하굣길은 등허리를 타고 땀방울이 줄줄 흘렀다. 굴다리 안으로 들어서면 나도 몰래 손수레에 멈추어 섰다. 손수레 위 통 안에는 조각난 얼음덩어리 사이로 우윳가루에 단물을 섞은 달걀 모양의 틀이 들어 있었다. 아저씨가 통에 달린 손잡이를 돌리면 틀 안의 물이 얼어 얼음과자가 되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이스 케키, 아이스 케키를 외치던 아저씨가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달걀 모양의 틀을 꺼냈다. 가운데 있는 노란 고무줄을 벗겨 내고 틀을 반으로 가르면 우윳빛의 동그란 얼음과자가 쏙 빠져나왔다. 친구 중 누군가가 사서 입에 넣고 빨다 국물 한 방울이라도 떨어지면 빙 둘러선 우리는 아쉬워하며 침을 삼켰다.
학교 앞 사진관을 하는 육성회장의 둘째 아들 J가 같은 반이었다. 가끔 아버지에게서 탄 용돈으로 열댓 명의 반 아이들에게 얼음과자를 두서너 개 사주고 대장 노릇을 하였다. 놀이 중 하나가 깜깜한 밤에 모여서 굴다리를 지나 학교까지 갔다 오는 것이었다. 밤에는 가로등도 인적도 없고 미나리꽝만이 길게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철부지 꼬맹이들은 하늘에 대고 뜻 모를 소리를 지르며 하릴없이 뛰어다녔다.
어느 날 밤, J가 혼자서 갔다 오는 친구는 얼음과자 한 개를 사주겠다고 했다. 달콤한 얼음과자를 오롯이 혼자서 먹을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나는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내 차례가 왔다. 칠흑 같은 밤에 겁에 질려 뛰어가다 미나리꽝에 다리가 빠져 넘어졌다. 흙 범벅이 된 검정 고무신을 움켜쥐고 본능적으로 학교 가는 길을 달렸다.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친구들이 모여있는 곳에 도착하니 진땀이 목덜미와 어깻죽지에 흥건했다.
다음날 나는 얼음과자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먹었다. 입은 너무나 달콤했지만, 가슴이 먹먹해졌다. 중학생이 되어서 굴다리 앞에 섰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그곳에 다시 섰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역경은 계속 있을 것이지만 세상 풍파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자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힘차게 흔들었다.
이순이 지난 나는 고향 굴다리에 다시 섰다. 초등학생 마음속 먹먹함과 중학생의 주먹과 고등학생의 다짐이 굴다리 사이로 보였다. 성인이 되어서도 힘들게 굴다리를 지났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내가 보았던 굴다리 너머가 전부가 아니었다. 문짝으로 켜켜이 쌓여 지나가면 또 굴다리가 있고 그 너머의 세상이 또 있었다.
새롭게 이사 온 동네 굴다리 앞에서 나를 돌아본다. 가지 못한 길은 아깝고, 가지 않은 길은 못내 아쉽다. 지나온 삶에서 어느 쪽을 택했어도 어떻게든 내 삶은 이어져 왔을 것이다. 삶의 길이 달라지는 중요한 선택들이 순간순간 있었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그때 느꼈던 요동치는 감정은 그다지 겁낼 만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굴다리 너머 하늘을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은 아직도 반짝이고 있다.
첫댓글 송진련 선생님
좋은수필 올려 주셔서 반갑고 감사드립니다.
방학특강 시간에 합평한 작품인데 이 공간에
서 접하니 더 감명깊게 다가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송진련 선생님
좋은 작품 잘 읽었습니다
감명갚은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