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으로 선교 120주년을 맞는 한국감리교회는 존 웨슬리 회심 267주년 기념과 성령강림절을 계기로 영적 대각성운동을 통해서 감리교회가 급변하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하는 미래교회가 되고자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계획의 진행을 보면, 먼저 4년제 전임 신경하 감독회장의 주관 아래 전국임원대회가 ‘민족과 교회에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 만들기 위한 케치프레이즈로 전국 단위의 일천여 명 임원들이 모여 기도의 함성을 올렸다. 이어 남부연회는 희년준비위원회 주관으로 ‘남부연회 희년대회’(5월 22일)를 개최하고 남부연회의 모든 교회들이 희년공동기도회주간을 선포한다.
또한 서울연회는 서울연회 부흥전도단 주관으로 ‘웨슬리회심 267주년기념 연합성회’(5월 26일)를 개최한다. 이 기간에 감리교회는 연회별 행사 외에도 많은 지방회별 및 개교회적으로 웨슬리 회심주일행사를 갖는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행사를 통해서 한국감리교회가 대각성운동으로 이 시대에 진정한 감리교회와 감리교인으로 변화 될 수 있도록 웨슬리 회심의 의미와 영적 대각성운동의 본래적 의미를 밝혀 보면서 큰 성과와 역사적인 업적을 나타내고 사회를 변화 시키는 감리교회의 행사가 되기를 기대한다.
얼마 전에 한국교회를 다녀간 미래교회학자 레너드 스윗 박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교회를 말하면서 미래교회에는 큰교회와 작은교회 사이에도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화 될 것이지만 작은교회는 소규모의 장점을 살려 소규모 모임의 다양한 프로그램 제공과 큰 교회는 재정을 지원하는 둘 사이의 협력 방식을 예로 들고, 작은 것의 소중함을 웨슬리에게서 배우라는 권고를 들은 바 있다. 또한 스윗 박사에 따르면 앞으로 세계교회는 한국교회가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말도 남겼다.
■ 웨슬리 회심주일
웨슬리 회심주일은 한국감리교회에만 있는 특별한 기념행사이다. 한국감리교회가 회심주일과 회심주간 행사를 하는 것은 한국 감리교회의 자랑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웨슬리의 회심이해를 올바로 하는 일은 중요하다.
감리교회의 전통에서 볼 때, 존 웨슬리의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잇 체험은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던 바울의 체험이나 밀란의 정원에서 있었던 어거스틴의 회심과 동일한 위치에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회심’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며 믿음과 순종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권하는 그리스도의 초청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인 것이다(T.H. Runyon). 회심의 참 본성은 우리 삶을 그리스도와 연결 짓고, 우리 서로 간에 연결 지어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이 세계와 연결시켜주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다.
회심이란, 엄격히 말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시는 변형의 역사로 볼 수 있으며, 문자 그대로 말한다면, ‘우리를 돌아서게 하는 것’이다.
첫째, 회심은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것이다. 우리는 웨슬리의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영원하신 사랑의 손길을 우리를 향해 내뻗으사, 우리의 회심을 가능케 하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하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회심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연결하는 것’이며,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것이다.
둘째, 회심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결하는 것이다.
신약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인의 실존은 개인과 공동체, 개인과 사회간에 대립되는 긴장관계를 그 특징으로 한다. 신앙고백은 단수형태(“나는 믿습니다”)로 말하지만, 고백되는 내용은-그것이 예배 중이든 어디서든 간에-바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이어야 한다. 회심이란 하나님의 영과 신자가 함께 개입하는 과정이다. 이로써 믿는 자는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다.
셋째, 회심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세계와 연결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회심은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환상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제거해 버리고, ‘우리의 세계’의 중심으로 자리를 바꾸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다. 즉 이제 인류의 삶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 중심을 두는 것이다.
기독교의 회심은 그리스도를 향한 회심일 뿐 아니라, 우리 이웃을 향한 회심이기도 한 것이다. 기독교윤리학자 본회퍼는 기독교인의 회심은 그리스도께 향한 첫 번째 회심 뒤에 세상을 향한 두 번째 회심이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 대각성운동
지금 한국감리교회는 선교 120년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민족과 교회에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가 되고자 한다. 창의적인 프로그램 개발과 미래지향적인 교회로서 세계 감리교회와 함께 앞을 향해 나아가며 초대교회의 성령강림의 역사를 21세기의 문화 속에 새로운 복음전도로 접목시키는 교회로써 대각성운동을 주도하는 교회가 되고자한다.
‘복음전도’란 용어는 감리교회의 생명이고 그리스도 교회의 선교역사와 함께한다. 서구교회의 현대선교 역사에서, 1970년대는 에큐메니즘의 시대라 했고, 1980년대는 갱신의 시대라 했고, 1990년대를 전도의 시대라고 하였다. 그러면 2000년대를 어떤 시대라고 불러야 했던가.
그런데 나는 아직 이 시대에 대하여 적당하게 붙여진 명칭을 보지 못했다. 여기에 한국 감리교회의 몫으로 생각하고 2000년대를 대각성의 시대라고 붙여보자. 한국감리교회는 세계선교의 역사에서 앞으로 한 세대를 통하여 대각성 운동의 좋은 기록을 역사에 남겨야 할 것이다.
교회분석가들은 전도운동에 있어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말한다.
사도시대의 교회는 교회와 사회를 엄격하게 구별하던 시대였다. 선교하는 백성은 세상에 나아가 전도했다.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어 보낸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한다는 위임이 함축되어 있었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신앙으로 연합하여, 공동식사를 하면서 자신의 소유를 서로 나누고, 낯선 땅으로 들어갔다.
‘사도직’을 받은 사람은 곧 ‘보냄을 받은’사람들이었다.
콘스탄틴 도래와 함께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였다. 기독교세계(Christendom)로 알려진 패러다임이다. 이것은 사도시대의 패러다임과는 뚜렷하게 다르다. 기독교세계로 알려진 패러다임은 사도적인 패러다임과는 뚜렷하게 달랐다.
기독교공동체의 문화와 기독교인들을 발견한 사회 사이는 뚜렷하게 달랐다. 1960년대의 복음전도는 ‘모이는’(come) 교회의 구조와 ‘흩어지는’ (go) 에큐메니칼 교회의 모형이었다. 이 시기는 교인수가 감소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1980년대는 교인수가 현상유지였다.
■ 웨슬리 복음전도의 유산
웨슬리 복음전도의 역사에서 1739년은 문화적으로 지성적으로나 엄청난 전환기였다.
1739년 영국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혁명적 전환기에 모든 동요와 사회적 불안이 성행했고 풍기가 문란했다. 부자와 가난한 사이의 불균형, 도덕 폐기론자의 부도덕성, 노동시장에서의 아동학대, 빈민주거지의 생활조건, 비인간적인 공장노동조건, 불합리한 교도소 관행, 참담한 아프리카 흑인노예 매매 등 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했다. 웨슬리의 눈은 이런 현실을 지나치지 않았고 또 묵과하지 않았다. 그는 은둔적인 신비가들의 종교를 옥스퍼드에 남겨두고 떠났다.
웨슬리는 그의 전도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신도회와 속회를 적용했고, 제2차 대각성운동은 야외집회를 개척하였다. 웨슬리 설교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값없는 은총’, ‘자유의지’, ‘회심’이었다.
웨슬리 복음전도의 내용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학적 온전성을 갖춘 복음주의였다. 웨슬리의 신학은 성경적이며, 체험적인 종교였다.
둘째, 웨슬리의 복음전도는 개인의 책임을 수반하는 것이다. 웨슬리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 소그룹을 만들고 평신도 지도 아래서, 구도자들을 모이게 하고 야외집회보다는 속회에서 더 많은 회심이 일어났다.
셋째, 사회적 양심을 수반하는 복음전도였다. 노예폐지, 빈민들의 곤궁한 처지 여성의 참정권에 대해서 동적으로 도와주었다.
장종철 목사 (전 감신대 교수)
위대한 감리교회 건설을 위해
왜 위대한 감리교회인가?
나는 위대한 어머니 감리교회의 아들
"나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 완전히 헌신하는 것이다."(1881년 2월 26일자 아펜젤러의 일기)
나는 지난 40여 년 간 수많은 선배와 동역자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아펜젤러의 야망을 가지고 목회를 해왔다. 결코 쉽지 않았던 목회 초년, 오랜 굶주림과 어려움 속에서도 이 땅에 주님의 씨앗을 심었던 그분의 야망 때문에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젊은 생을 바치게 했던 아펜젤러의 야망과 그 야망을 따라 이 민족을 얽어맨 결박을 끊기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선배 감리교도들의 삶 때문에 나는 결코 좌절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분들의 삶은 내게 거대한 자부심으로 남았고 내가 감리교도란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가 누린 뿌듯함은 한이 없었다. 그렇기에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 완전히 헌신하는 것" 그것은 노년에 들어선 지금까지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야망이자 사명이 되었고, 위대한 어머니 감리교회의 아들이 가지는 끝없는 열정의 표현이 되었다.
나는 학창시절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모자의 이야기를 감명 깊게 들었다. 가난하고 병들고 천대받았던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세우고 약국을 세웠던 이야기, 계급사회의 하층민을 깨우치고 평등과 정의를 가르치기 위해 세웠던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모습을 통해 어머니 감리교회가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던가! 수많은 박해에도 주님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졌던 한국 최초의 목사 김창식, 김구 선생조차 그의 죽음을 애도할 만큼 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전덕기 목사, 3.1운동을 일으켰던 민족 대표 7인과 유관순 열사, 어린아이들의 교육만이 민족의 살길임을 자각하고 헌신했던 김창준 목사, 그리고 그렇게 감명 깊게 읽었던 심훈의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던 감리교회의 위대한 선배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감리교인으로서, 감리교회의 목회자로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자부심을 가졌다.
나는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의 헌신, 그리고 수많은 한국 감리교회 선각자들의 삶이 바로 웨슬리 전통에서 비롯된 것임을 또한 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삶은 그 자체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는 정적이며 소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단호히 배격하고 "뜨거운"가슴을 안고 살았다. 올더스케잇의 체험을 통해 이전의 메소티스트의 모습을 넘어 역동적이고 살아있는 신앙의 주인공이 되었다. 영국교회에 의해 설교권이 박탈되고 나서도 그의 열정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치며 극장이며 무덤가, 길거리나 그 어디든 가리지 않고 말씀을 전파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
말씀으로 무장된 뜨거운 열정, 그것은 감리교회의 참된 모토이며 지난 40여 년 간 내 삶의 초석이 되었다. 그의 이러한 영(holy ghost)의 계발을 통한 뜨거운 삶은 내적 성찰에만 머물지 않고 곧바로 사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생활습성의 개혁, 가난한 자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 나눔 운동, 노동조합운동, 교육사업 등을 통해 영국사회를 변화시켜 나갔다. 오죽했으면 영국 사가들 중에 영국역사를 "웨슬리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이들이 있겠는가! 원래 개혁교도였던 아펜젤러가 웨슬리의 열정과 헌신 때문에 감리교도가 되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하지만 아펜젤러의 삶이 웨슬리의 삶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그 흡사함은 바로 감리교회의 전통이며 위대한 감리교회의 초석이다.
그러면 웨슬리의 삶은 어디에서 왔나? 내가 아는바 그것은 바로 웨슬리가 그렇게도 닮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왔다. 하늘의 위대한 보좌를 버리시고 목수의 아들로 구유에 나신, 그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충성하신 그분께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분이 사셨던 삶을 따라 웨슬리는 살았고 그분이 죽으심을 따라 아펜젤러는 죽었다. 그분을 따라 베드로도 스데반도 바울도 살았으며 또한 죽었다. 그들은 부자도 권력자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위대하다고 부른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았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을 살았고 수많은 감리교 선배들이 또한 그렇게 살았다. 우리의 위대한 어머니 감리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하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위대한 어머니 감리교회의 아들로서 기꺼이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데 완전히 헌신하는 것"에 내 삶을 걸었고 그렇게 죽을 것이다.
우리 감리교회는 웨슬리가 "감리교의 원리"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교리적으로 특별하거나 말로 어떤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렇게도 예수님을 닮고 싶어했던 웨슬리의 삶이, 아펜젤러의 삶이, 그리고 수많은 감리교 선배들의 삶이 있다. 참으로 위대했던 그들의 삶이 배어있는 감리교회, 이 위대한 감리교회의 전통을 다시 살리고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나의 소망이며 수많은 동역자들의 바램일 것이다. 다같이 힘을 내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자. 주여 도우소서.
하나님을 닮아 가는 감리교회
위대한 감리교회 운동은 "회복"운동이지 결코 자기 과시나 선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는 감리교회의 위대했던 선배들이 닮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원한다. 현재의 우리 모습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회복해야 될 우리의 모습을 역사 속에서 찾고 힘을 북돋우기 위함이다. 분명 위대한 감리교회는 우리가 회복해야될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그려낸 원대한 꿈(vision)이다. 하지만 말의 어감 때문에 많은 분들이 거북해 하는 것 같다. 나는 그분들이 참으로 그리스도 앞에 겸손한 분들이며, 자신의 현재를 볼 줄 아는 선각자들임을 믿는다. 특별히 한국사회의 겸손의 미덕과 상충될 수도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나는 잊혀져 가는 우리 감리교회의 역사를 볼 때, 위대하다고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웨슬리의 삶, 아펜젤러의 삶, 그리고 수많은 감리교 선배들의 삶이 얼마나 위대했었는가! 그분들의 삶은 우리의 뿌리이며 "위대한 감리교회"는 우리의 "뿌리 의식"이다. 면면히 우리의 가슴속에 이어져 오는, 그래서 우리들의 현실과 삶을 참으로 부끄럽게 하고 회개케 하는 뿌리 의식 말이다. 나는 이 "뿌리 의식"을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소박한 마음에서 이 운동을 시작했고 이 "뿌리 의식"을 현실에서 구현해 낼 때까지 이 운동을 계속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것 자체가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감리교회 운동을 전개하면서 웨슬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분의 사상과 글을 통해 나는 위대한 감리교회란 결코 말과 교리의 독특함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오직 말과 교리를 온전히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위대한 교회요 위대한 감리교회인 것이다.
"내가 감리교인이라고 할 때, 그들은 마음과 생활의 성결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내적 및 외적 일치를 추구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신앙을 그것의 위대한 대상과 완전히 유사하게 되는 것, 다시 말하면 그들이 예배드리는 그 분에 대한 지속적인 모방과 모방할 수 있는 완전에 둔다.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신앙은 정의, 자비 및 진리 또는 마음에 충만하고 삶을 지배하는 우주적 사랑에 있다고 한다."
"만일 당신들이 이 원칙을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위대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사랑하고 닮아가며 복종하려고 계속적으로 노력한다면, 그리고 만일 당신들이 이 사랑하고 복종하는 신앙의 원칙에 따라 모든 악을 극복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들과 친구들과 또는 원수들에게까지 선을 행하고자 노력한다면, --(중략)-- 당신들은 내가 뜻하는 바 감리교인들이라고 하겠다."
웨슬리는 우리에게 위대한 감리교회와 관련해서 상당히 주목할만한 개념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즉 감리교인이란 위대한 하나님을 닮아가고 그 분께 복종하여 참된 신앙의 원칙을 지키며 이웃들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위대한 감리교회"란 "위대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높이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가는 교회, 즉 겸손과 성실의 개념이다.
웨슬리 자신이 비록 "위대한 감리교회"란 용어를 직접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그는 위대한 하나님을 닮아 가는 자들이 분명 감리교회이며 그 감리교회는 당연히 위대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위대한 감리교회"는 충분히 역사성을 가지는 용어이며, 하나님을 닮아 가는 자들이 가지는 프라이드를 표현한 말이다. 이것은 세속적 개념에서 말하는 자기 과시나 교만의 의미가 아니라 위대한 하나님을 닮아 가겠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현이다.
웨슬리는 감리교인의 특징(The distinguishing marks)을 "감리교인의 원리(The Principles of a Methodist)"와 "감리교인의 성격(The Character of a Methodist)"이라는 글에서 몇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감리교인의 원리나 특징은 결코 독특하거나 새롭지 않다. 하지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전혀 새롭지 않은 원리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할 원리에 대한 실천이다. 해설의 형태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을 지니고 하나님을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이다.
둘째, 쉬지 않고 기도한다.
셋째,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며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돕는다.
넷째, 깨끗한 마음을 가진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복적인 감정, 질투, 악의와 분노, 모든 불친절함, 교만과 불손을 버리고 "자비, 친절, 온유, 사랑"으로 옷입는다.
다섯째, 자기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준수한다.
여섯째, 항상 의의 도구로 쓰임 받기 원한다.
일곱째, 진실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철저하게 성화 되는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사상을 몸소 실천했다. 이것은 아펜젤러도 그러했고 선배들도 그러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한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감리교회를 회복하는 길이다.
지금은 하나 될 때
누차 강조하지만 위대한 감리교회를 말한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위대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 모습이 위대하지 않다고 해서 그 말을 쓸 수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위대한 전통이 있고 지금은 그 전통을 다시 회복해야 할 때이다. 이 회복을 위해서는 뼈를 깎는 자기 반성이 있어야 됨은 물론이다. 나는 감독회장으로서 뼈아픈 참회를 결코 비켜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 참회는 우리 모두에게 실존적으로 요구되는 측면이기도 하다. 남을 이야기 하기이전에 자신의 모습을 진실되게 들여다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감리교회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책임이 막중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140만 감리교도는 모두 하나가 되어 위대한 감리교회의 건설을 위해 중지를 모아야 한다. 무엇이 잘못되고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 모두가 바르게 보고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위대한 감리교회의 후예임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이 케치 프레이즈 앞에 모여 대화하고 반성하며 다짐해야 한다.
타락과 멸망의 길에 섰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보물"이라고 불렀던 사실은 그들을 진짜 보물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었다. 우리도 하나님의 참된 보물이 되기 위해 함께 모여야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모여서(gathering) 함께(with together) 논의하고 나아갈 바를 정해야 한다. 위대한 감리교회의 회복을 위해 모이는 교회(gathering church)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흩어졌을 때, 진정한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모이고 함께 하나가 됨 그 자체가 위대한 감리교회의 전통임을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2001년 5월
감독회장 장광영
존 웨슬리, 그 성화의 걸음 따라가기
가문의 영광
- 가정에서 싹튼 청교도 영성
박창훈
Drew University Ph.D,
온양교회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겸임교수
존 웨슬리의 아버지인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는 그가 태어나던 해(1662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영국국교회에 의해 목회강단에서 쫓겨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청교도의 전통을 따르고, 국교회에서 정한 기도문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결국 웨슬리 가문은 국교회의 감시를 피해 계속 이사를 다녀야 했으며, 그들이 인도하는 비국교회의 집회가 발각되었을 때는 감금생활도 감내해야만 했다. 그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정치적인 탄압에도 이 가문은 청교도의 이상을 지키려 노력했다.
독일에서 경건주의가 건조한 이론신학 중심의 정통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일어났듯이, 영국의 청교도주의는 칼빈주의에 입각한 철저한 종교개혁을 원했다. 이 청교도들은 성경을 그 무엇보다 우선하여, 국교회 내에 만연한 가톨릭의 잔재들(화려한 복장, 의식, 미신적인 예식)을 완전히 청산하여 교회를 정화하려는 운동을 일으켰다. 마침내 이들이 100여 년의 노력으로 잉글랜드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청교도혁명(1648년)을 이루었다. 그러나 왕정복고가 되면서 상황은 반전되어 청교도들은 비국교도로서의 험난한 고난을 당해야만 했다.
특히 비국교도인의 자녀들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훌륭한 교육기관(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등)에서 공부할 수 없었다. 사무엘 웨슬리는 비국교도 사립학교를 졸업한 후, 비국교도인 부모와 함께 겪었던 어려움 속에서 그의 양심에 따라 국교회의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이 결정으로 인해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한편,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잔나(Susanna)의 아버지도 청교도의 중요한 지도자였고, 1662년 같은 이유로 인해 목회를 그만두어야 했다. 수잔나도 사무엘과 같은 청교도 가족의 고난과 어려움을 겪고, 국교회로 복귀하였기에 두 사람의 결합에는 청교도 가문의 배경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그러하기에 사무엘과 수잔나는 개인적인 경건생활을 위해 사용한 시간만큼만 육체적인 휴식을 스스로에게 용납할 정도로 영적이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존 웨슬리의 성결과 성화의 이상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청교도 가문의 가정교육에서 움텄던 것이다.
실제로 존 웨슬리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청교도적 가정교육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기에, 후에 어려서 배운 중요한 규칙들을 따로 정리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가족 내에서 기독교적 경건의 의무를 실천하려는 것은 청교도의 오랜 가르침이었다. 수잔나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가 자녀들을 위해 사용한 방법을 자세히 열거하며, 성화를 위한 기독교교육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아이들의 마음을 형성하기 위해, 제일 먼저 그들의 의지를 꺾어야 한다... 나는 늦기 전에 아이들의 의지를 꺾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이 기독교교육을 위한 유일한 기초이고, 이것만 철저히 된다면, 자신이 스스로 생각할 때까지 아이는 부모의 이성에 의해 지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수잔나는 그녀가 엡월스(Epworth) 목사관에서 사용한 몇 가지“규칙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1. 잘못을 저지른 사람, 죄가 있는 사람이 그것을 솔직히 자백하고 고치겠다고 약속하면, 체벌해서는 안된다. 이 규칙은 거짓말을 남발하는 것을 막는다.
2. 거짓말, 도둑질, 교회에서나 주일의 장난, 불복종, 말다툼 등 어떤 죄된 행동이든 벌하지 않고 넘겨서는 안된다.
3. 어떤 아이도 같은 잘못에 대해 두 번 꾸짖거나 체벌해서는 안된다.
4. 복종으로 보이는 모든 행동에는, 그 이유의 경중에 따라 항상 칭찬해야 하며, 자주 보상을 해야 한다.
5. 어떤 아이가 복종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일을 했다면 그 결과가 잘못되었을지라도, 그 복종과 의도는 친절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후에 더 잘 행동할 수 있는 방법을 애정 있게 가르쳐야 한다.
6. 공손함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져야 하며, 핀같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타인의 소유물을 훼손하거나 피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7.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며, 선물을 받을 때 선물을 준 사람으로부터 직접 주어야 하며 빼앗아서는 안된다.
8. 여자 아이들은 잘 읽을 수 있을 때까지 일하는 것을 배워서는 안된다. 일을 하게 되더라도, 읽기는 계속해야 한다. 이 규칙은 매우 잘 지켜져야 한다. 아이들이 완벽히 읽을 수 있기 전에 바느질을 배우게 되면, 옳은 말을 사용할 수 없고 제대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웨슬리 가문의 교육방식이 현대적인 교육방식에서 보자면, 매우 거칠고 완고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이 교육받은 웨슬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말년에 웨슬리는 어머니로부터 배운 가르침과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성화를 위한 지침을 제시하였다. 웨슬리는 어머니처럼, ‘자기 의지’(self-will)를 신자 자녀들의 성결한 생활을 가로막는 우상으로까지 여겼다. 그리고 이 자기 의지를 사탄의 첫째 자녀라고 불렀다. 웨슬리는 특별히 성화를 가로막는 세 가지 악덕을 자만심, 자기 의지, 세상 사랑이라 보았는데, 자기 의지를 자만심과 동의어로 정의하였다. 그리고 자기 의지와 자만심이 세상 사랑이라는 죄를 낳는다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결국 여기서 자기 의지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고집과 갈망에 따라 살려는 욕구이며, 죄를 짓게 만드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청교도 영성의 전달자로서 어머니에 대한 웨슬리의 기억은 아주 특별하였다. 목회를 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나 신학적인 의문이 일어날 때, 어머니는 그의 변함없는 멘토이자 스승이었다. 특히 웨슬리에게 어머니는 여성에게 새로운 지위와 역할을 부여했던 성결운동의 모범으로 보였다. 가끔 아버지가 출타 중일 때, 주일 오전 예배를 인도하던 다른 목사보다도 어머니의 주일 밤집회는 훨씬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목회에서 여성의 영적 지도력을 입증한 예였다. 사실 남편이 부재중일 때, 수잔나는 영적인 필요에 따라 주일 저녁집회를 목사관의 부엌에서 드렸다. 처음에는 가족을 위한 기도회였으나, 곧 많은 이웃들이 이 모임에 참여하였다. 수잔나는 견실한 지도력을 가지고, 시편을 노래하고, 기도문을 읽고, 사무엘의 서재에서 발췌한 한 편의 설교를 감동적으로 읽었다. 이러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후에 웨슬리로 하여금 여성들에 대한 교육의 기회를 넓히도록 했고, 여성들에게 성결운동에서의 중요한 위치를 할애하게 만들었다.
웨슬리의 성화의 강조점에서 나타나는 견실함, 섬세함, 그리고 자상함은 남성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여성적이다. 이것은 성화에 대한 웨슬리의 경험과 기억이 어머니 수잔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는 아버지를 더 닮아서 낭만적이고, 우발적이고, 정열적이었고, 그래서 산문(저널이나 설교)보다는 운문(찬송시)을 즐겼다. 그러나 존 웨슬리는 어머니와 같은 성정을 갖고, 평생을 통해 침착하고 섬세하며 사려 깊은 영성을 통해 성화의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어린 시절 어머니를 통해 청교도 영성을 체득했던 웨슬리는 그가 장성한 후에 겪게 될 그 어떠한 영적 침체기에도 결코 기독교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어머니 수잔나는 자신의 분신인 아들 웨슬리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낼 때, 다음과 같은 위로의 말을 담은 편지를 적어 보냈다: “낙심하지 말거라. 해야 할 일을 하고, 공부에 진력하며, 좋은 날들을 소망하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가 가기 전에 너에게 얼마를 보내마!”
18세기 감리교회라는 위대한 신앙공동체를 남긴 존 웨슬리는 그 유산을 ‘메소디스트’(Methodist:감리교인)라고 부르는 후예들에게 맡기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메소디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단지 능력없는 종교의 형태만을 갖고 있는 죽은 단체로서 남아 있지 않을까 염려한다. 만약에 메소디스트들이 처음 출발할 때 가졌던 그 교리와 그 정신, 그리고 그 훈련을 다같이 지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이 말을 잘 살펴보면, 웨슬리는 이 땅에 ‘감리교회’라는 조직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보다 처음 ‘메소디스트’들의 신앙과 정신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 문제는 웨슬리에게 있어서 장래에 대한 커다란 관심사이면서 동시에 걱정거리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 세상에 감리교회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된 유래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웨슬리가 20대의 젊은 시절 목사안수를 받고 옥스퍼드대학교 링컨대학의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신성회’(Holy Club) 운동을 지도하던 일에서 유래한다.
사람들은 이 모임이 철저한 성서연구와 경건운동을 통해서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규칙쟁이 혹은 규칙벌레라는 뜻으로 ‘메소디스트’라고 불렀다. 이 칭호 속에는 약간의 비아냥거림이 섞여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규칙적 경건생활과 엄격한 헌신생활이 너무 훌륭하였기 때문에 흠모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불려졌을 것이다.
또 다른 유래로는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잇교회에서 있었던 웨슬리의 복음적 성령체험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뜨거운 회심사건이야 말로 성서적 체험신앙과 성화운동, 그리고 이신득의 구원론 등 감리교회의 신앙과 교리형성에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유래 속에 오늘의 우리가 다시 점검하고 지켜나가야 할 메소디스트의 정신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메소디스트 정신이란,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예배, 기도, 질서, 규범, 양심 같은 영성의 원리에 따르는 철두철미한 실천적 경건생활에 있으며, 내적으로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 칭의, 성화, 완전을 통하여 완성되는 철두철미한 구원론과 그것을 세상에 전하는 뜨거운 선교적 열정에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자신과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철저한 회개, 거듭남, 성화의 신앙을 통하여 구원의 확증을 찬찬하고 꼼꼼하게 점검해 나가면서,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웨슬리의 정신에 맞추어 세계선교를 위한 뜨거운 열정의 소유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의 메소디스트들, 아니 세계의 메소디스트들에게 이러한 정신이 과연 살아있는 것일까? 웨슬리가 처음에 그토록 염려하였던 것처럼, 오늘의 감리교회가 단지 영적 생명력을 상실한 채 교회의 메마른 형태만을 유지하는 형식적 교회, 아니면 세속적 목적을 추구하는 정치지향적 인간집단으로서의 교회로 전락되어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의 이익과 교권 추구를 위해 메소디스트의 정신을 훼손시켰고, 때로는 우리들의 약속과 법으로서의 교리와 장정을 유린하기도 하였으며, 자신들의 양심을 속이기도 하지 않았는가?
만일 웨슬리가 오늘에 다시 오신다면, 이 후예들의 부끄러운 모습 때문에 얼마나 실망하실까? 이제 우리는 과거의 감리교회로 머물지 아니하고 미래의 위대한 감리교회를 만들기 위하여, 더욱 처절한 눈물의 회개와 뼈를 깎는 개혁의 결단으로 새 출발을 다짐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단 본부는 2006년 서울 세계감리교대회(World Methodist Conference) 준비에 한창 분주하다. 메소디스트 전통을 가진 세계 각국의 교회와 기관으로부터 무려 6천여 명이 참여하는 이 매머드 국제대회에는 많은 시간과 인력, 재원이 투입될 전망이다.
아무쪼록 좋은 대회가 되어서 한국교회의 좋은 모습이 비쳐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거대한 모임이 어떤 형식적 이벤트 모임이나 관광잔치로 끝나지 않고, 감리교회의 정신과 유산을 확실하게 회복하는 진지한 역사적 대회가 되도록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정일 목사 (부평중부교회)
존 웨슬리의 생애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28일 영국의 소읍 에보트(Epworth)에서,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의 목사이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 (Samuel Wesley)와 엄격하면서도 슬기로운 신앙의 여인이었던 어머니 수산나(Susanna) 사이에서 태어났다.
웨슬리의 부모는 열 아홉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열명은 어려서 죽고 여섯 명의 딸은 뛰어난 교육을 받았으나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난 이유로 평범한 사람들과 결혼했다. 세 아들 사무엘, 존, 챨스는 모두 목사가 되었다. 죤 웨슬리는 15번째이며, 찬송가 작가이고 죤의 동반자가 되었던 챨스는 18번째 였다.
존이 다섯 살 때인 1709년 2월 9일 한밤에 돌연 불이 났다. 존은 무사히 구출되었으나, 이 사건 이후 어린 죤은 양친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수산나 부인은 생전에 그 밤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존을 '타는 불에서 끄집어낸 부지깽이' (스가랴 3:2)라고 부르며 그의 영혼을 특별히 보호하기로 결심 하였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기 위해 그를 구출 하셨다는 섭리와 소명을 강하게 느꼈다.
화재 사건후 부모의 특별한 배려로 자라온 존은 그가 10세 때인 1714년 런던의 챠터 하우스(Charter House)에 입학하게 된다. 집을 떠나 16세에 졸업하기 까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챠터 하우스의 6년은 그렇게 행복스럽지는 못하였는데, 이유는 그가 어려운 처지의 학생이었기 때문에 부유한 학생들로부터 가끔 모욕을 당하기도 하고, 또한 식사 때에 고기는 모두 큰 학생들에게 빼앗기고 야채만 먹었다. 후일 그는 채식으로써 건강의 근원을 삼았다. 그는 그리 튼튼치 못하였으므로 아버지는 그의 폐를 걱정하여 매일 아침 교정을 세번씩 뛰라고 했으며 그는 이를 잘 실행 하였다.
이 시기의 종교생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성경을 읽고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하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 처럼 불량하지 않고, 종교에 대하여 선의를 가지며, 성경을 읽고 교회에 출석하며 기도함으로 구원 얻기를 바랐다'
웨슬리는 16세에 챠터 하우스를 떠나 옥스포드(Oxford) 대학으로 향하였다. 당시의 옥스포드는 학교라기도 어려울 정도로 심히 미약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스스로 훈련하고 스스로 수양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얻은 교훈, 챠터하우스에서 받은 수양을 그대로 계속 실행 하였다.
그 후 15년 동안은 대부분 옥스포드에서 학생으로 혹은 조수로 있었는데 그 동안에 그는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21세 때 영국교회의 안수를 받았다.
또한 여기서 유명한 옥스포드 구락부 곧 신성회(Holy Club)를 조직하여 자기 자신과 그의 전도인들의 독특한 생활 습관을 형성하였다. 사람들은 그 클럽을 가리켜 '규칙벌레','성경클럽','엄격한 종교 주의자 (Methodist)'라고 놀렸는데 후일에 '감리교회'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 되었다.
당년 31세의 웨슬리는 15년 동안 옥스포드 생활을 하여왔다. 이제는 주님을 위하여 좀 더 열성 있고 희생적인 활동을 하려는 생각이 났다. 그리하여 그는 1735년에 선교사로 자원하여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 죠지아주로 가서 아메리칸 인디언에게 선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북미 선교 활동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마침내 2년 만에 웨슬리는 중생의 대 경험을 앞에 두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1738년은 웨슬리 형제에게 중요한 해가 되었으니, 동생 챨스 웨슬리가 먼저 마음에 큰 감동을 받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죤 웨슬리는 엘더스게이트(Aldersgate)의 한 집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인도자가 마틴 루터의 로마인 서 서문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9시 15분 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 심령 속에 역사하시는 변화에 대한 부분을 읽을 때에 웨슬리는 '그의 심령이 이상하게도 뜨거워 짐을' 느꼈다. 그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또한 자기 죄가 속량 되어지고 구원 받은 줄 확신하게 되었다.
1738년 엘더스게이트 경험으로 부터 1791년 임종 시 까지의 웨슬리의 생활은 항상 말 타고 여행하며 기회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웨슬리는 성령의 능력, 곧 인간생활에 들어와 그 인격과 경험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목사님들이나 일반회중은 이러한 설교를 싫어하여 교회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1739년 4월 2일 월요일 밤 브리스톨(Bristol)에서의 첫 노천 전도이래 50여 년간 그는 매주 열 다섯 번 설교하며 3,4백 리를 여행하였는데, 교회를 얻어 쓸 수 없으므로 옥외나 감리교인 들의 집이나 집회소에서 전도하였다. 그가 자라난 에보트에서도 교회사용을 거절당하여 웨슬리는 부친의 묘석 위에 올라서서 밤마다 집회를 가지기도 했다.
웨슬리는 찬송에 힘을 썼다. 영국교회의 성가란 옥외 대중용으로는 적당치 않으므로 웨슬리와 그 동생 챨스 웨슬리는 특별히 찬송을 지었다. 챨스 웨슬리의 지은 찬송이 6천 편 이상이라 한다. 웨슬리 형제는 해마다 찬송가를 발행하였으며 감리교인은 노래 잘하기로 유명하여졌다. 그 노래들은 대개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표시하는 것으로 '만 입이 내게 있으면/23', '천부여 의지 없어서/338', '구주여 크신 인애를 /170' 등이다.
웨슬리는 새 교회를 세우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기 전도를 듣고 들어온 사람들을 붙잡기 위하여 그들을 어떤 단체로든지 조직해야 할 필요는 느끼었다. 옥외 전도, 즉석기도, 평신도 전도, 찬송, 연회, 속회, 전도인의 안수 등 이 모든 것은 영국교회가 웨슬리의 구령 사업을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에 의하여 생긴 계단이다. 이 각 계단을 밟아 나가는 것은 곧 영국교회와의 인연이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영국교회와 분리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신앙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이와 같은 운동은 신대륙 미국에까지 건너가 감리교회가 조직되었다. 이제 존 웨슬리는 갔지만 그가 세운 교회는 확연한 존재를 가지게 된 것이다.
통계로 본 요한 웨슬리
전도생활/ 50년간 말을 타고 지구 10바퀴이상 되는 거리를 다님
선교거리/ 40만Km
하루평균 다닌 거리/ 32Km
저술 / 200권이 넘음
설교회수/ 4000번 이상 설교
60년간 변함없는 생활/ 새벽4시 기상 기도와 설교
찬송생활/ 동생 챨스 웨슬리와 함께 만든 찬송가중 525곡을 선정 찬송가만듬
사망5일전 생활(88세)/ 32Km떨어진 곳에 복음 전도
함께한 사역자/ 죠지 휫필드, 챨스 웨슬리 등
♡ 부르면 달린다 ♡
이 문구는 한 자선기관의 행동 지침 이다.
언 듯 보기엔 군대 구호 인듯하고,
명령과 복종만 있는 삭막한 구호 같으나,
생각 하면 생각할수록 우리 삶 속에서
필요한 깊은 의미가 있다.
많은 공동체가 애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1. 민첩성이다
부르면 즉시 움직인다는
활동적이고 신속한 의미가 있다.
2. 준비성이다
언제 불러도 즉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준비되어 있음을 뜻한다.
3. 대담성이다.
즉시 행동으로 옮기게 되면
대담한 마음이 없으면 어찌
움직일 수 있겠는가! 대담해야
언제 불러도 즉시 뛸 수 있는 것이다.
4. 긍정성이다.
항상 불러만 주십시오.
불러만 ‘주신다면 무슨 일인 듯 못 하겠습니까?’
라는 뜻이 있다.
5. 명랑성이다.
언제나 웃음의 준비, 기쁨의 준비,
행복의 준비가 된 희망의 모습이다.
6. 순종성이다.
순종이 백번의 의미 없는 절보다 낫다.
일은 순종하는 이에게 맡겨지는 것이다.
7. 일체성이다.
듣기만 해도 하나로 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고, 하나가 되어야
무슨 일이나 되는 것이다.[奉].
진정한 성공의 의미
성공이란 무엇인가? SUCCESS의 의미
성공의 진정한 의미!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원합니다.
그리고 성공할 뿐만 아니라 행복하게 살기 원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성공본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렇다면 성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성공개념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공의 영어단어 SUCCESS의 머리글자를 통해서 성공의 개념을 정확하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공 SUCCESS의
첫 번째 글자 S는 Salvation, 즉 구원입니다.
인생의 최대 성공은 죽음앞에서 결정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을 벌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한다 하더라도
최종에 승리를 하여야 만 진정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성공했다 하지만 나중에 성공을 잃어 버린다면 결국 실패자입니다.
잠시 잠깐은 성공했을지 몰라도 영원한 인생은 결국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성공하는 사람은 항상 그 마음속에 메멘토모리 즉 죽음을 항상 생각합니다.
죽음앞에서 후회하지 않는자가 진정한 성공한 사람이다. 오늘의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라
보기 힘듭니다. 최종 성공의 골인지점을 생각하며 준비하는 자는 진정한 성공입니다.
두 번째 글자 U는 Understanding, 즉 올바른 이해와 깨달음입니다.
성공은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요 참 지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느 영역에서나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이 성공합니다.
사물과 상황과 현 상태를 올바로 판단하는 통찰력이 성공의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을 원하는 사람은 앞으로 사회의 흐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야 하며
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개발해야 합니다.
세 번째 글자 C는 Confidence, 즉 자신감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감, 신념, 확신,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우유부단한 사람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들은 항상 신념을 가진 자들입니다.
절대절망의 위기 가운데서도 절대희망을 가지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라는
자세를 가지고 줄기차게 전진하는 자들입니다. 자신감은 성공에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네 번째 글자 C는 Commitment, 즉 헌신입니다.
헌신과 충성은 모든 성공의 필수 요소입니다.
헌신은 사람에 대한 헌신, 일에 대한 헌신으로 나누어집니다.
모세와 예수님과 성경의 지도자 뿐만 아니라 세상의 역사적 인물들도
한결같이 그 공통점이 바로 지속적인 헌신의 삶이었습니다.
성공은 심은대로 거두는 열매입니다. 영어에 No sacrifice, no success.”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희생없이 성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공하기 원하는 자는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섯 번째 글자 E는 Enthusiasm, 즉 열정입니다.
열정은 성공의 견인차입니다. 열정없는 사람이 성공한 예는 거의 없습니다.
열정과 열심은 실패조차도 성공으로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에디슨은 1052개의 특허를 따낸 세계적 발명가이지만
역사상 가장 많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에디슨은 전구의 필라멘트를 발명하기 위해
무려 만 천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상상을 초월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구를 발명하는 성공을 거두어 온 인류의 밤을 밝힌 것입니다.
열정이란 단어 enthusiasm은 en과 theos의 합성어입니다.
en은 “안에”, theos는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즉 열정이란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만큼 열정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성공(SUCCESS)의 여섯 번째 글자 S는 Smile, 즉 웃음입니다.
웃음이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내적으로 즐거움과 기쁨이 있는 인생을 의미하고
외적으로는 다른 사람과의 좋은 대인관계를 암시합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매사를 즐거운 마음으로 일해야 합니다. 일을 취미화시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잘 하는 사람은 그 일을 좋아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웃음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를 좋아하게 만듭니다.
웃는 얼굴에 침뱉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명랑하고 친절한 사람은
모든 사람의 환영을 받아 자신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효과를 가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글자 S는 Service, 즉 봉사입니다.
가장 위대한 성공은 봉사입니다.
남을 성공시키는 사람이 성공하고,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행복해집니다.
많이 가진 자가 성공한 자가 아닙니다.
많이 누리고 더 나아가서 많이 베푸는 자가 성공한 자요 진정으로 축복받은 자입니다.
웨슬레가 말했듯이 많이 벌고 많이 저축하고 많이 주는 자가 복받은 자입니다.
사회활동에 자원봉사하는 비율이 영구과 미국은 각각 51% 이상이고, 일본도 30% 인데
아직까지 한국은 5.5% 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우리의 성공개념이 바뀔 때 한국사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선진국 나라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성공의 개념을 영어의 머리글자를 따서 설명했습니다.
성공 즉 SUCCESS란
구원(Salvation)이요
마지막에 성공하는자,
지식(Understanding)이요,
자신감(Confidence)이요,
헌신(Commitment)이요,
열정(Enthusiasm)이요,
웃음(Smile)이요,
봉사(Service)입니다.
이 성공의 요소를 가진 자는 반드시 성공합니다.
어느 분야에서나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공요소를 충분히 갖추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개발을 해야 합니다.
성공을 위한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奉]
출처:스피치와 리더쉽
같은 말 스무 번
같은 말을 스무 번 이상을 하면서 자녀를 교육시킨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자녀는 얼마나 ‘짜증나는 잔소리’로 받아들이며 싫어할까. 그것을 알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하게 자녀를 양육, 큰 효과를 거둔 역사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감리교를 창설한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다.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수산나의 자녀교육 방법은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그녀는 가난과 질병, 절망적인 환경에도 불구하고 신앙 안에서 자녀들을 잘 키웠다.
그녀의 철저한 교육에 남편도 탄복할 정도였다.
하루는 남편이 “당신의 인내심은 정말 놀라워. 아니 똑같은 말을 어떻게 스무 번씩이나 하면서 아이들을 교육시키지? 나 같으면 스스로 지겨워서 포기할텐데 말이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보, 만일에 내가 그것을 열 아홉 번만 말하고 포기했다면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