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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식량난 해결한 ‘한국인 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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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 2021
1971년 나이지리아는 주식인 카사바에 바이러스와 박테리아가 퍼져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식량이 씨가 마르자 기아 문제도 심각했다. 카사바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주로 제배되는 세계 8대 작물 중 하나로 8억명이 주식으로 삼고 있다. 당시 이 식량난을 해결한 식물학자가 있다. 5년간 나이지리아는 물론 카사바 원산지 브라질에 있는 종자를 모아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저항성이 있는 수퍼카사바 개량에 성공한 것이다. 나이지리아 식량난을 해결한 주인공은 바로 한상기 박사다.
한 박사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나이지리아 한 부족의 정식 추장으로 추대됐다. 영국 왕실은 그를 생물학술원 명예회원으로 임명했다. 세계식량기구는 고문으로 임명했다. 그는 영국 기네스 과학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수퍼 카사바로 한 나라를 살린 한상기 박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한상기 박사. /조선 DB
◇서울대 교수·케임브리지대 연구원 포기하고 나이지리아로
1933년 8월 충남 청양에서 나고 자란 한상기 박사는 어려서부터 자연의 영향을 많이 받는 농사에 익숙했다. 농사를 짓다가 가뭄 등으로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 그로 인해 얼마나 힘들어 지는지도 몸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농업을 배우리라 마음먹었다고 한다. 1953년 대전고를 졸업하고 같은 해 서울대 농과대에 입학했다. 서울대 농학석사로는 국내 최초로 ‘잡초학’을 연구했다. 이후 1967년 미국 미시간주립대 식물유전육종학 박사 과정을 마쳤다.
1971년 38살의 나이에 서울대 농과대학 조교수로 일했다. 또 영국 케임브리지대 식물육종연구소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그리고 당시 나이지리아에 세계 3번째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가 설립됐다. 농업 연구로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싶다는 생각에 지원서를 넣었고 연구소 부소장의 합격 편지를 받았다. 한상기 박사는 선진국보다 열악한 제3국을 택했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1970년대는 식량난이 제일 심했던 때다. 인구는 증가하고, 자연재해는 많았다. 농학으로 인류에 기여하고 싶어 나이지리아 행을 택했다”고 말했다.
당시 나이지리아는 1967년부터 1970년까지의 ‘비아프라 내전’이 끝난 직후였다. 전쟁 후 50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했고 농토도 황폐해져 기근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신문에는 기근이 창궐했다는 내용이 연일 1면에 실렸다. 이곳에서 한상기 박사가 맡은 임무는 카사바 개량이었다. 카사바는 나이지리아 주 식량이었지만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로 씨가 마르고 있었다.
◇수퍼 카사바 개량 성공, ‘농민의 왕’으로
카사바를 생전 처음 본 한상기 박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같은 뿌리 식물인 토란과 카사바를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동시에 몰라서 더 부딪히기 쉬웠다고 했다. 나이지리아 전역에 있는 카사바 종자는 물론 원산지인 브라질에서도 우수한 종자를 수집했다. 그러던 중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항체를 가진 작물을 우연히 발견했다. 카사바처럼 생겼지만 카사바는 아니었다. 한상기 박사 말에 의하면 ‘카사바 먼 친척쯤 되는 작물’이었다고 한다.
한 박사는 그 작물과 브라질에서 가져온 카사바 종을 교배해 수많은 개량종을 만들어냈다. 그중에서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항체를 가진 동시에 수확량이 좋은 종을 골라 ‘수퍼 카사바’ 개량에 성공했다. 여기까지 약 5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 수퍼 카사바를 만드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직접 수퍼 카사바를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나이지리아 전역에 카사바 줄기를 심었다. 카사바는 쉽게 자라기 때문에 땅에 줄기만 꽂아도 자란다.
이렇게 한상기 박사가 개량한 수퍼 카사바는 41개 아프리가 국가에 보급돼있다. 지금까지도 내병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또 이 밖에 고구마 품종은 66개국에서, 얌은 21개국, 식용 바나나는 8개 국가에서 재배하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한 박사를 추장으로 추대하면서 감사함을 표했다. 1983년 나이지리아 요루바족 이키레 마을이 한상기 박사를 추장으로 추대했다. 그의 칭호는 ‘세리키 아그베(Seriki Agbe)’다. ‘농민의 왕’이라는 의미다. 추장은 사람뿐 아니라 산천초목을 다스리는 존재로 인정받기 때문에 이방인이 맡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은퇴 후 미국, 그리고 한국으로
한상기 박사는 1994년 IITA에서 은퇴했다. 아내 김정자씨가 그동안 떨어져 지낸 아들곁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한 박사의 가족은 그가 나이지리아 행을 결정했을 때 함께였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의 환경 때문에 자녀들이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미국과 영국으로 유학을 보냈다고 한다.
“학회 때문에 콜롬비아에 갔을 때 문득 가족 생각이 났습니다. 생각해 보니 저는 콜롬비아, 아내는 나이지리아, 아들 셋은 영국과 미국에, 딸들은 서울과 영국에 있었어요. 모두 따로 떨어져 있는 걸 보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싶어 미안했죠. 한편으로는 잘 커줘서 고맙기도 했습니다.”
한 박사는 아내와 미국 클리브랜드에서 살다가 2015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내가 치매에 걸려 함께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 박사는 아내 간병에 몰두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의 헌신적인 간병에도 김정자씨는 2020년 9월 한상기 박사의 곁을 떠났다.
평생의 동반자를 떠나 보낸 후 한상기 박사는 “아내와 가족의 희생이 없었다면 식량난 해결에 집중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어요. 제가 출장을 가면 아내는 위험한 나이지리아에서 홀로 지내며 아이들을 돌봤죠. 치매에 걸린 이유도 나 때문일 거예요. 고생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23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함께해 준 아내가 그저 고맙고 미안합니다.”
이후 한상기 박사는 인간에게 필요한 작물의 역사를 보여주는 책 ‘작물의 고향’을 냈다. ‘자신의 옆에서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한 아내에게 바치는 책’이라고 한다. 한 박사는 현재 연구 활동을 멈추고 쉬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 경험하고 배운 내용을 정리하면서 집필 준비도 하고 있다고 한다.
한상기 박사에게 5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아프리카와 영국을 택해야 하는 기로에 선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냐 물었다. 그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겁니다. 아프리카행을 택할 때 불안하고 걱정이 앞섰지만 그것이 내 길이었습니다. ‘시체로 돌아오더라도 꼭 식량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각오가 돼있었습니다. 그 각오 없이는 갈 수도 없던 곳이었습니다. 2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했고 식량 문제 해결에 일조했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글 CCBB 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