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버스를 타려고 정류장으로 나갔더니 오래 기다리지 않아 9번 버스가 왔다. 증심사 종점에서 내리려는데 나종만이 보였다.
나종만과 같이 부곡정으로 걸어갔다. 윤정남과 장덕균이 먼저 와 있었다. 이어서 김영부 이용환 강공수 등이 도착하였다. 우리가 출발 할 10시가 되어도 박남용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10분쯤 늦게 도착하였다. 8명이 산행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의 승용차 뒷바퀴 타이어가 펑크가 나 있었다. 펑크가 아니라 타이어가 찢어져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처리하여야 하지! 계속 고민하면서 올라갔다.
박남용이 오늘 늦은 이유는 부곡정으로 오는 도중에 휴대폰을 안 가지고 온 것을 알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가 오느라 늦은 것이라 하였다. 다른 날 같았으면 휴대폰 없이 그냥 와도 되는데, 자기가 오늘 점심을 쏘기로 하였는데 휴대폰과 함께 있는 지갑이 없으면 낭패여서 다시 돌아가야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실수가 어찌 그에게서만 일어난 해프닝인가! 나이 든 우리들이 늘 겪는 일인걸. 나도 시골에 갔다가 농막에서 자고 올 때, 이것저것 빠뜨리고 와서 다음 주말까지 그 물건 없이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부곡정에서 기다릴 때, 이용환이 우리 회원들의 생년(生年)을 일일이 묻더니 수첩에 적는 것이었다. 금년이 다 가고 오는 2026년 2월에 구정(舊正)이 되면, 자기가 신도로 등록되어 있는 약사암에 우리 회원들의 복(福)을 빌겠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동명이 자기는 그 계획에서 빼달라고 부탁하였다. 독실한 신앙인인 동명은 다른 종교의 성전(聖殿)에 자기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는 뜻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응 그렇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 폭력 이야기가 나왔다. 내 숙부는 일제(日帝) 치하(治下)에서 경성 공업학교를 졸업하였다. 해방이 되어 광주 전신전화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학교에 재학 중이었을 때부터 사회주의 이념에 물이 들었었는데, 광복이후 국가에서 이런 이념을 가졌던 자들을 보도연맹(保導聯盟)에 가입시켰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터져 국군이 후퇴하면서, 혹시라도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던 사람들이 북한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하여, 정부에서는 모든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전국의 경찰서에 소집하여 가두었다. 경찰이 후퇴하면서 그들을 도망하지 못하게 끈으로 줄줄이 묶어 총살해 버리고 후퇴해 버린 사건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국가 폭력으로 인해 민간인이 희생된 대표적 사건이었다.
2000년이 되자 시민 사회에서 이런 국가 폭력으로 희생된 영령(英靈)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합동 추도행사(追悼行事)를 추진하였고, 국가 폭력에 희생된 영령들을 국가가 위로해 주고 보상해 주도록 하는 법령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그 법이 시행되어 내 숙부가 돌아가신지 70년이 지난 후, 20대에 청춘과부가 되어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70년을 살아 온 우리 숙모님이 국가로부터 상당히 많은 보상금을 받기도 하였다.
춘강의 형님도 바로 한국 전쟁 때, 중앙대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에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 왔다가 억울하게 경찰에 희생되었다고 한다. 국가가 정한 법률에 의해 재판을 받고 죽지 않고, 경찰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바로 국가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이다. 이번에 국가폭력에 희생된 사람들을 조사하여 그것이 사실로 인정되면, 희생자 가족으로 책정된다. 춘강의 형수님 역시 청춘 과수댁이 되어 혼자서 자식들을 키우며 사시다가 몇 년 전에 고인이 되셨는데, 이번에 춘강이 서류를 작성하여 제출하였고, 누님과 자신이 증언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박남용의 형님이 국가 폭력으로 희생된 것이 확인 되면,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약사암에서 하산하여 다시 부곡정으로 돌아왔다. 오늘의 식사는 박남용이 내기로 하였다. 지난 여름에 노대동 노인타운에서 〈반려동물과 공존하며 사는 인간생활〉을 주제로 강의를 하였는데, 그 강의료가 나와서 밥을 사게 된 것이다. 그 날은 강공수가 식당에서 점심을 사 주어서 먹었고, 또 윤정남의 지인이며 우리들과 동기생(同期生)인 목포사범 출신 박종례(朴鍾隷)씨가 카페로 가서 음료수를 사 주어서 얻어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이 생각났다.
요즘 몸에 이상이 있어서 우리 산행 모임에 불참하고 있었던 김상문도 함께 하여 우리 회원들의 마음도 훈훈하고 화기애애한 가운데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지 애호발찌개의 맛도 다른 날보다 더 감칠맛이 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장덕균이 자기는 창억 떡집에서 ‘호박 인절미’를 사오겠다고 하였었는데, 그 말을 하고 집에 가서 달력을 보았더니, 바로 오늘 12월 18일(음력 10월 29일)이,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의 생일이어서, 온 식구들(1남 5녀)이 오늘 아내의 영혼을 모셔 둔 절에 가서 생일상을 차리고 추도행사를 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아내가 서울 아산 병원에 입원해 있을 동안, 아내에게 갈 때마다 ‘창억 떡’에서 호박인절미를 사다가 담당의사와 간호사들에게 돌렸는데, 아내가 간호사들이 맛 잇게 떡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나도 먹고 싶어’하여, 아내에게 먹이려고 하였더니, 간호사들이 목에 삽관(揷管)을 하여 음식물을 공급받고 있기 때문에, 떡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떡 맛을 보게 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까운 마음이었다고 회상하면서, 오늘 가족들이 차릴 아내의 생일상에 이 인절미를 올리겠다고 하였다.
이 인절미는 오늘 ‘창억 떡’에서 30박스를 주문하여, 우리 모든 회원들(결석자 포함, 11명)에게 돌리고, 식당 종업원들에게도 한 박스, 그리고 항상 우리 식탁에 음료수를 제공해 주었던 13회 리정훈 선배에게도 한 박스를 돌려서 동석한 선배님들도 맛을 보게 마음을 썼다. 나머지는 아내의 영혼을 모셔 둔 절과 지인들에도 돌릴 것이라 하였다. 또 한 박스를 풀어서 밥을 먹기 전에 한 개씩 나누어 먹으면서 시장 끼를 풀었다.
오늘 박남용이 타이어 때문에 고민하던 차에 보험회사에 긴급출동을 요청하였다. 무슨 요청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견인을 요청하는 것인가 아니면, 타이어의 교체를 요청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박남용은 동물학에는 권위자인데, 자동차에 관해서는 나보다 범벅이었다. 자기 차에 스페어타이어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가서 트렁크를 열어보았더니 다행히 스페어타이어가 있었다. 그래서 타이어 교체를 용청하였다. 그랬더니 긴급출동이 와서 타이어를 교체하고 공기를 주입해 주기까지 10분 만에 해결되었다. 박남용이 감탄하였다. 그 골칫거리를 단 10분 만에 해결해 버렸으니 얼마나 가슴이 시원하였겠는가! 말이다.
오늘은 우리 회원들이 다른 날보다 더 즐겁고 개운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다음 주는 십오야 합동 산행이다. 동창생들이 많이 나와야 할 터인데…….
일 시 : 2025.12. 18(목)
참 가 : 강공수 김상문 김영부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정남 이용환 장덕균 장휘부 등 10명
식 사 : 강공수 김상문 김영부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이용환 장덕균 장휘부 등 9명
불 참 : 윤상윤(내자의 병원 동행)
당 일 회 비 : 0원
식 대 : 박남용이 지불 72,000원(애호박찌개 6, 떡국 2)원
금 일 잔 액 : 0원
이월 잔액 : 738,000원
총 잔 액 : 738,000원
장덕균의 호박인절미(18,000원) 우리 회원 몫 12상자 희사 + 2상자 = 14상자
박남용 장덕균 두 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