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조약은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라고도 하고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라고도 하는데 강화도 조약은 1876년 2월 27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으로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에 있는 연무당에서 체결되었다.
19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세계는 산업혁명으로 힘없는 나라를 신민지화 하는데 각축장이 되고 통상교섭으로 시장개방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일본은 근대국가로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면서 1865년 천황 친정 체제를 마련하고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일본은 동아시아를 제패하기 위해서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국교 관계를 맺기 위해서 사신을 보내고 교섭을 하기 시작했다.
1868년 일본은 조선에 국서를 보낸는데 이전의 외교 관례를 무시하고 세로운 국교 관계를 맺자고 하자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했다.
그 무렵 조선은 무능한 고종을 대신해서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여흥 민씨들이 서로 권력을 잡기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쇄국양이정책(鎖國壤夷政策)을 고수하던 대원군에게 미국은 1871년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 대통령의 국서를 가지고 와서 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개항을 요청해 오자 상호도감 별간역을 지내고 있던 오경석은 개국의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흥선대원군에게 개항할 것을 요청했으나 쇄국양이정책을 고수하던 대원군은 오경석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873년 일본의 급진파들은 중국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부터 정벌을 해야 한다는 정한론(征韓論 :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한다는 침략적 팽창론)을 주장을 하였다. 반면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고 귀국한 온건파들은 서구열강들과 강제로 맺은 불평등 조약으로 조약이 실패하는 것을 보고는 정한론을 내세워서 무력 침략을 주장하는 급진파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온건파들이 조선침략을 반대하자 일본 정부는 조선정벌을 보류하고 1874년 5월 대만정벌을 단행하였다.
대만정벌을 단행한 일본은 조선침략을 다시 거론하자 일본의 위협을 느낀 청나라는 일본이 장차 조선정벌을 단행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조선정부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일본은 5,000명의 군사로 대만을 정벌하고 앞으로 조선을 정벌하려고 한다. 조선은 서둘러서 프랑스, 미국과 통상관계 를 체결하고 프랑스와 미국으로 부터 안보를 보장받으면 일본은 조선을 넘보지 못할것이라고 하였다.
청나라가 경고를 하자 조선조정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대일교섭을 진행하고 있던 동래부사와 부산첨사의 관직을 삭탈하고 파면하였다.
그 후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과 민씨 정권이 권력을 잡자 영의정 이유원과 우의정 박규수, 동지중추부사 오경석은 더 이상 일본과의 교섭을 거절하는 것은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건의하였다.
대원군이 실각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자 일본은 조선 현지의 사정을 정탐하고 쇄국양이정책을 펴고있는 조선이 개항을 하라고 1875년 5월 운요호(雲揚號)와 군함 3척을 부산 앞 바다에 파견하고 함포사격을 하면서 위협을 하다가 돌아갔다.
그 해 8월 20일 일본은 운요호에 군사를 중무장 시켜서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했다. 초지진에서 해안 경비를 서고 있던 조선군은 일본군이 초지진으로 상륙하자 일본군을 향해서 사격을 가하자 일본군과 운요호에서도 함포로 대응하였다. 일본은 강화도와 영종도에서 공격을 계속하여 관청과 민가를 불지르고 조선인 35명을 사살하고 16명을 포로로 잡고 일본은 2명이 경상을 입고 8월 29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이 운요호 사건으로 일본은 이후에 운요호 사건을 강화도 조약의 빌미로 삼았다.
1876년 1월 30일 일본은 강화도에서 일어난 운요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고 부산 왜관에 체류하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함 8척과 군사 400여 명을 육군 중장 구로다 키요타카(黑田淸隆)를 전권대신으로 하여 부산과 강화도로 파견했다. 부산과 강화도에 정박한 일본 군함은 무력 시위를 벌이면서 조선 조정에 회담을 강요했다.
조선 조정은 판부사 신헌을 접견대신으로 삼고 성균관대사성 겸 도총부부총관 윤자승을 신현의 부관으로 삼아서 강화도로 보냈다. 신헌 일행이 강화도에 도착하자 일본 군함에서는 함포 사격을 하면서 일본이 요구하는 13개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강화도와 인천으로 상륙하겠다고 협박을 하였다.
조선 조정은 일본과 조약을 맺을 것인지를 놓고 연일 회의를 하자 사헌부장령을 지낸 최익현은 지부상소(持斧上疏 : 도끼를 옆에 놓고 상소를 올리는데 상소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도끼로 자신의 목을 처서 죽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최익현은 지부상소 내용
1) 일본과의 강화협상은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으로 강화협상의 방어와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로 강화를 맺으면 일본의 탐욕을 당해낼 수 없다. 2) 일본의 물품은 화려하여 우리나라의 농업생산품과는 경쟁이 될수없어서 일본과 교역을 하면 조선의 경제는 반드시 파탄을 초래할 것이다. 3) 일본은 금수와 같아서 일단 강화협정이 성립되면 서양의 문물을 들여와서 우리의 전통과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다.
최익현은 이런 세가지 이유를 들어서 일본과의 강화협상을 반대하고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반면 판중추부사 박규수와 일부 대신들은 일본 군대를 막을 수 없으니 일본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무렵 일본으로부터 협박을 당하고 있던 청나라는 조선에 시신은 보내서 조선은 일본이 요구하는 통상조약을 거부하면 이후의 일은 청나라도 책임질 수 없다면서 일본과의 통상조약을 권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