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조직의 전국화를 닦은 송담(松潭)
송담(松潭)은 아버지 춘강(春江) 휘 인규(仁奎)와 어머니 영광김씨 사이에 5남 1녀 중 장남으로 1935년 장흥 텃골에서 태어났다. 장흥고교를 졸업할 때 전체수석을 할 만큼 수재였다. 이는 할머니 남평문씨의 영향이 컸다. 텃골 어귀에 세워진 남평문씨 행적비에는 남편과 사별한 후 ‘長孫 滋炯을 비롯 孫子孫女의 敎育을 위한 길쌈 등으로 세간을 꾸리면서 평생 비단옷은 물론 색깔 있는 옷을 입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시골 고교를 나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진학, 졸업했다. 서울대 보건전문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육군대위로 예편 후 본격적인 사회생활에 접어들었다. 보건복지부 공무원과 이화여대 교수로 정년 했다. 그의 훌륭한 덕성과 문중에 대한 투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운암공파에서는 마을 앞 저존각 경내에 공적비가 세워져있다. ‘대학교수 위자형 모선 헌성비(大學敎授魏滋炯慕先獻誠碑)’가 그것이다.
그의 숭조와 돈종의 정신은 대학재학시절부터 시작된다. 의대를 다니던 1950년대 말부터 그는 전남대와 조선대생을 규합해 「장흥위씨 학생회」를 조직해서 운영한바 있다. 그리고 대학에 있을 때인 1980년 중반부터 재경종친회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재경종친회장 12년(1990∼2002), 씨족문화연구소장 7년(2003∼2009)을 했고, 대종회장을 2010년부터 8년째(임기는 2018년까지임) 맡아 일하고 있다. 송담과 종친회는 반세기의 역정이 묻어있다.
송담(松潭)의 덕목(德目)은 중용(中庸)과 치밀(緻密)이란 단어로 함축된다. 단순히 가운데가 아니라 대종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며 발전시켜나가는데 가장 적절한 상태 즉 적중, 명중처럼 정곡을 향한 핵심파악 능력이 뛰어나다. 논현동 대종회관 집무실에 빼곡하게 적어 놓은 종친현황, 수시로 발생되는 종친들의 일을 해결하는 방식에서 조금만 옆에 앉아있어도 금방 느낄 수 있다. 지역, 학교 및 좌우로 치우침이 없고 인성을 최우선시하면서도 개인별 특수성을 최대한 배려하는 성품을 지녔다.
사람을 대하는 덕목은 인내(忍耐)와 자애(慈愛) 그리고 현장(現場)이다. 종친을 마주하면서 인내라는 두 글자가 송담의 마음과 삶에 뿌리내리지 않았다면 대종회는 유지조차도 어렵고 더구나 풍성한 열매를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나 따사롭고 인자한 모습의 언행은 모든 종친들로 하여금 송담을 따르는 마력으로 작용한다. 구상을 실천하는 현장 중심형으로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전국 곳곳 세거지와 유적을 찾아 동분서주(東奔西走)했다.
1) 대종회 회관(부동산)을 구입하다
(1) 22년 동안 월세 사무실을 전전하다
1990년 발족한 대종회는 사람도 부족했지만 자금도 부족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무실은 마련해야겠고 돈은 턱없이 부족하여 궁여지책으로 초대 대종회장인 범곡(汎谷)은 자신의 사무실 한쪽인 서울 용산구 동자동 43-59번지 금주빌딩 4층, 6층 일부를 얻어 꾸려가야 했다. 그 후 2011년 서울 동작구 사당1동 1005-53번지로 이사하여 월세 사무실을 전전해야 했다. 초라한 생활은 2012년 5월까지 22년이나 지속되었다. 새로운 종친이라도 사무실을 찾아오는 날이면 민망하기가 그지없고 서로가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안정적인 사무실을 마련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2) 대종회 사무실을 구입하여 입주하다
2010년 송담은 대종회장에 취임했다. 취임 시 대종회관 구입을 공약하고 2011년 대의원총회 때 재차 필요성을 강조했다. 2012년에 이르러서야 서울 강남구 논현동203-1번지 소재 거평타운 1715호(40평)를 매입하여 문중 명의로 등기 후 동년 5월 31일 전국에서 모인 종친들과 함께 성대한 입주식을 가질 수 있었다. 송담의 대종회장 공약실천 의지와 리더십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수도 서울의 최고 중심인 강남 논현동을 선택한 것은 미래의 우리 문중의 중흥을 이루기 위한 원대한 포석이었다. 대종회관 부동산 구입으로 인해 자산증대는 물론 안정적인 문중발전의 토대를 이루게 되었다.
(3) 거액의 사재를 출연하다
구입비용 약3억5천만 원을 마련하려고 노심초사했다. 여러 차례 대종회 발전기금조성위원회를 가동했다. 구입비용 3억5천만 원은 상당한 거액이다. 2013년 4월 기준 모금액은 7천만 원에 불과했다. 2014년 4월 기준은 1억4천만 원, 2015년 4월 기준은 1억7천만 원, 2016년 4월에는 2억2천만 원(이상 누계기준)에 이르렀다. 전국의 수많은 종친들의 눈물 어린 정성이 모인 자금이었다. 그래도 아직 1억 원 이상이 모자랐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그때 희소식이 들려왔다. 도문회 운연위원회에서는 송담과 여러 종친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 부채상환용으로 1억 원을 출연키로 결의했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 입증되는 순간이다. 그간 대종회의 부채를 안타깝게 여긴 많은 도문회 회원들은 여러 방면으로 원로들을 설득하여 화합의 물꼬를 트게 되었다. 앞서 송담은 1억 원이 넘는 거액의 사재를 출연하여 회관구입의 부채를 줄이기 위해 모범을 보였다.
늘 문중사를 앞장서 챙기시고 종친들을 사랑과 배려로 지도하시는 송담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위문중 종친분들을 위한 일이라면 아무 조건없이 사랑하시고 챙기시는 송당회장님을 존경하고 고맙고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