튜브 / 손원평 / 창비
소설의 제목은 209쪽의 "지푸라기가 튜브가 될 때까지! 아니 튜브를 타고 떠오를 때까지! "라는 곳에서 나온 듯하다.
모든 지푸라기가 튜브가 되어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물에 빠진 자들이 모두 지푸라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지푸라기를 잡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주인공 김성곤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면, 이 소설은 완전히 "꽝"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주인공이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그렇게 살다가 그 대가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로 풀어내지 않는다. 망했고 망한 자리에서, 다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시작하려는 모습을 제시하면서 소설을 마친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망했어도, 최고급 오토바이 정도는 있어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일까? 작가가 일부러 언급한 듯이 보이는, 집 없이 혹은 어떤 연유로든 서울역에서 소주병을 안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과 김성곤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언급했어야 하지 않을까? 지푸라기가 그 사람들에게는 필요하지 않았을까? 가난에도 실패한 사람들에게도 계급이 있음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이다.
그 실패한 사람들의 가운데, 희망을 제시해도 좋을 만한 계급을 대상으로 써 내려간 응원의 이야기 정도라고 생각되는 소설이지만 누구에게는 희망을 앗아가는 내용은 아닐까? 상관없다. 그 사람들은 어차피 이 소설을 읽지 않을 것이 분명하므로?
차라리 분수에 넘치는 꿈을 이루려고 발버둥 치다 사라지는 한 사람을 순수하게 그렸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작가가 독자에게 꼭 "희망"을, 희망의 메시지를 주어야 할 책무는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다른 메시지도 있을 텐데, 꼭 옛날 건전가요를 대하는 기분이랄까...
굳이 김성곤을 통해서 자신을 찾는 과정, 깨닫는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회복하는 과정은 주의를 가지고 읽어볼 만하다.
* * *
삶이 다채로운 맛과 향으로 구성된 서랍장이라면 성곤은 계속해서 한가지 서랍만 열고 있었다. 분노, 짜증, 울분, 격분, 우울, 좌절이 가득담긴 서랍. 어느새 그는 다른 서랍을 여는 방법을 망각했다. 155
그렇다. 나는 바라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느끼지 못한다. 봐도 보지 않고 맛봐고 맛보지 않으며 들어도 듣지 않는다. 155
인생이 운전 같은 거라면, 차를 운전해봐. 적어도 네 차는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네가 원하는 속도만큼 갈거야.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질주하고 싶을 때 달리면서. 209
당신이란 사람에게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거야.234
삶을 관통하는 단 한가지 진리는, 그것이 계속 진행된다는 것뿐이다. 238
그거 알아? 정말 어려운 건 힘든 상황에서도 어떤 태도를 지켜내는 거야. 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