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젊은 디자이너는 휴대전화를 생산하는 대기업에 들어갔다. 애플의 디자인 책임자 조너선 아이브를 롤모델 삼아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기만을 꿈꾸던 그는 2006년 손수 디자인한 휴대전화로 ‘차세대 디자인 리더’에 선정되는 등 실력을 입증했다. 그렇게 키워간 내공으로 2009년 드링클립(Dringklip)이라는 작품을 출시하면서 다시금 자신만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바로 빈 컴퍼니 김빈 대표 얘기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의 전통 디자인을 접목한 생활용품 회사를 차렸다. 한지로 된 바구니, 단청문양을 응용한 컵받침 등이다. 자체 개발한 브랜드 ‘미츠(Meets)’라는 이름을 달고 맨해튼 ‘MoMA 디자인 스토어’와 파리의 ‘메르시(Merci)’, 뉴욕의 트리니티 백화점과 도쿄의 생활용품 디자인 백화점 ‘로프트’ 등에 진출했다. 국내에서는 청와대 기념품 매장과 유수의 박물관 아트 숍에 자리하고 있으며 기업의 요청을 받아 제품을 주문·생산하기도 한다. 디자이너로서, 청년 사업가로서 그의 전환은 꽤나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첨단 산업디자인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그가 전통의 영역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가 뭐였을까? “외국에서 전시할 때 이런 질문을 자주 받았어요. ‘한국의 디자인은 어떤 거야?’ 정말 당황스럽더군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뭔가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물음이었던 거죠.” 그들의 입장에선 당연히 궁금한 걸 물었을 테지만, 그에게는 발길을 멈추고 잠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한 순간이었다.
‘오래된 미래’의 가치에 눈뜨다 평소 알렉산더 맥퀸 같은 세계적 디자이너의 길을 동경해 왔던 그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전통예술 장인과 전수자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디자인 수련 프로그램을 밟아 가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한지의 매력에 푹 빠져 보기도 하고, 교과서에서나 보던 전통 단청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오기도 했다. 휴대전화 대신 일상의 공간을 채우는 바구니, 테이블 매트, 브로치, 디퓨저, 노트, 파우치 등의 작품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멀찍이 감상하는 용도가 아닌,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소소하고 친밀한 물품들이 대부분이다. 그가 내놓은 한지 작품을 처음 본 사람들의 반응은 “이걸 대체 어떻게 만든 거야?”였다. 이음새가 전혀 없는 입체 바구니. 한지 고유의 따스한 질감을 그대로 살린 이 새로운 물건은 평면 단청무늬를 입체화시킴으로써 전통적 감수성의 원형과 현대 디자인의 세련미를 하나로 담고 있었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국이 유독 열등감을 갖는 부분이에요. 힘겨운 경제난 속에서도 유럽인들이 자존감을 견지할 수 있는 이유는 오랜 세월 쌓아 온 빛나는 문화적 전통 때문이죠.” 경제발전의 논리 아래 홀대받고 버려지던, 우리에게도 분명히 있었던 전통! 이제라도 되돌려야 제대로 된 시작이 가능할 것 같았다. 구들장을 마감하던 장판지와 양반의 서책에 쓰였던 한지, 명료한 아름다움을 가진 단청의 무늬들을 일상 깊숙이 끌어들이는 그의 디자인 작업은 바로 그런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한국의 디자인에 대해 묻던 사람들에게 던진 답변이기도 하다.
명품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서구가 이룩한 문화적 성과를 동경하기보다 우리의 삶 속 깊숙이 새겨진 전통의 아름다움을 새로운 시대에 맞도록 재창조해 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김빈 대표. 헤르메스와 샤넬이 세계적인 명품 디자인 브랜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디자인 자체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가치를 존중하며 지켜낸 역사적 자부심과 시간의 가치를 볼 줄 아는 리더들이 있어 가능한 결과인 것이다. 젊은 디자이너이자 기업인으로 성장 중인 김 대표의 꿈은 여전히 훌륭한 디자이너. 하지만 그 의미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차원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그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문화적·역사적 성과들을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누리는 세상을 디자인하는 일에도 관심이 많다. “주말이면 나들이 나오는 것처럼 찾아와서 다양한 생활디자인 작품들을 감상하고 즐길 수 있는 프로젝트를 꿈꿔요. 독일의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처럼 사람들이 대대로 이어온 시간의 가치를 발견하기도 하고, 문화적 풍요를 경험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먼 훗날 빈 컴퍼니의 작품들이 가득한 박물관에서 수많은 미래 세대들이 전통과 더불어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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