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 洪道場홍도장(홍맑은샘)
일본
아사가야역을 빠져 나오니 홍맑음샘 프로가 건
강한 얼굴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준다.
역에서 나와 왼편 주택가 쪽으로 길게 걷다가,
우측으로 꺾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좌측으로 건
넜던가 했을 때, 아담한 2층 집이 홍도장 이었다.
방에는 일본기원 연구생 시합에 간 나머지 원생
들이 남아 대국을 하고 있었다.
일본기원 연구생 시합 가고 난 홍맑음샘 도장 원생들.
‘인간의 가장 위대한 대목은 넘어지지 않는 게 아
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듯이 저 아이들은 해낼 것 같은 느
낌이 왔다.
홍(홍맑음샘) 도장은 주택을 사용하다 보니 여느
바둑 도장처럼 탁자보다는 다리 달린 바둑판에서
대국하는 게 특이 했다.
서적 위에는 원생들이 받아온 트로피가 즐비하
고, 복도에는 신문에 난 기사가 빼곡히 스크랩 되
어 있었다.
원생 대국 대진표가 있는 계단을 올라 방마다 자
세하게 소개를 시켜준 홍사범은,우리 일행을 2층
조용한 방으로 안내하더니 차를 내왔다.
바둑도 연구하고 밤에는 바둑판을 가장 자리로
밀어놓고 원생들이 잠을 자는 곳이라 했다.
밤에는 원생들이 이부자리 펴고 잠도 자는 방.
차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다음, 타이젬 7단 두는
필자가 원생과 바둑 한 판 두고 싶다고 했더니
옆방으로 옮겨가 제자를 불러내 주었다.
일본 초시계 놓고 홍도장 원생과 대국하는 필자.
다다미방에서 일본 초시계를 놓고 제법 높은 바
둑판을 마주하고 보니 저, 1980년대 조치훈 9단
의 전성기 때 대국 모습이 잠시 클로즈업 되는 건
왜일까.
원생은 옹골찬 모습에 흐트러짐이란 눈곱만치도
없고 단호함만 있었다.
도약을 꿈꾸는 저 원생에게 희망이 깃들길.
홍사범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2005년, 주머니에 달랑
120만원만 넣고 한국을 떠나왔다.
왜 어려움이 없었겠는가.
라멘으로 끼니를 때운 적도 있었을 것이고, 낯설
고 물선 땅에서 시기와 견제도 받았을 것이다.
일본기원 앞에서 바둑도장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
치다가 일본 관서기원에서 특별 입단하는 행운을
얻었다.
자신의 이름을 건 ‘홍도장’에서 15년 동안 23명의
제자를 입단시켰는데, 급한 대로 3명의 제자만 나
열하면, 한국 여자 바둑리그에서 선을 보였던 후지
사와 리나(후지사와 손녀)는 현재 일본 여류 1인자이
고, 시바노 도라마루는 현재 일본 명인인데다, 몇
년 전 세계 바둑 U-20에서 정상에 오른 이치리키
료는 국내 팬들에게도 익숙하다.
일본 기원 연구생 시합을 가고 나머지 원생들과 함께.
맨 뒤가 홍맑음샘(일본 프로)원장이고, 앞줄 앉은 손자, 딸(김은선 프로 5단),
필자, 사위(박병규 프로9단),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 홍도장을 물러
나와 아까 내렸던 아사가야역 쪽으로 이동
했다.
洪道場 홍도장 이라고 쓴 문 앞에 선 필자.
식당으로 이동하기 위해 뒤에 걸어나오는
홍맑음샘 원장.
홍사범의 단골집인가 싶은 식당으로 들어
가 생선초밥 등 여러 음식과 술을 시켜 제
법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
바둑도장을 운영하는 일은 아무리 재능 있
는 아이들이 모였다 해도, 부모의 심정으로
아끼고 지도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
다.
그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은 돈을 번다기보다
는 사명감에서 일 것이다.
부모, 형제, 친지, 친구를 멀리 두고 낯선 일
본 땅에서 혼자 해내는 용기가 대견하다 못
해 전율이 인다.
고국의 향기를 품고 온 우리 바둑 일행이
었기에 오고가는 이야기에는 그리움이 묻어
있었다.
더군다나,
홍맑음샘 프로와 박병규 프로는 같은 시기에
한국기원 연구생 생활을 겪었고, 나이도 같다.
홍맑음샘 프로는 일본에서 ‘홍도장’을 운영
하고 있고, 박병규 프로는 한국에서 ‘장수영
바둑도장’ 을 운영하는 것까지도 닮았으니 더
욱 그러하였을지도 모른다.
홍사범은 시원시원한 성격에다,자기가 하
는 일 ‘최고가 아니면 시작도 안했을 것’이라
는 다짐은, 아버지(아바사 홍시범 대표)를 쏙 빼
닮았다.
필자가 홍맑음샘 사범을 처음 만난 게, 1990
년 언저리였을 것이다.
‘KBS 바둑큰잔치 전국 최강전’ 박윤서 사범
對 양덕주 사범의 결승전 생중계 장면을, 영
등포 ‘영기원’ 에서 故 전영선 프로 사범님이
랑 같이 들여다보았을 때니까.
당시,
영기원에는 전영선 사범님이랑 양덕주 사범
님이 지도하고 있었다.
전영선 사범님이 어린 이창호 학생을 지도
하다 조훈현 사범님 내제자로 보낸 뒤라,지도
자로 명성이 자자해 많은 학생이나 일반인들
이 영기원을 찾던 시절 이었다.
전영선 사범님이랑, 양덕주 사범님이랑 친한
필자가 가끔 놀러가곤 했었는데, 그때 전영선
사범님 주선으로 우연히 이붕배 우승하고 올
라 온 홍맑음샘 어린이하고 두 판을 두었었다.
그때 어린 학생이 당돌하게 첫 점을 외목을 두
었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 재능 있는 학생으로만 알고 있던 홍사범
을, 江山이 3번이나 바뀐 시절의 얘기를 물 건
너 온 일본 땅에서 잠시 회상 하노라니 콧날이
시큰하다.
그리고
1999년 쯤인가, 필자가 자식을 이끌고 지금은
없어진 전통의 부산 ‘롯데 배 전국 최고위전’
을 참가했을 때, 거기서 홍사범의 시합에 같
이 내려온 아버지 홍시범 씨를 처음 만났다.
보통 자식을 시합장에 들여보낸 아버지는 자
식이 열심히 두어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만 바
라는 심정이기 마련인데, 홍시범씨는 일반 아
버지랑은 다르게 바둑대회 진행이나 방법에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 중에 참, ‘특이한 학부모 한 사람
있구나’하고 서울로 올라온 몇 년 뒤 2003년
이었던가, 바둑행사 디자이너로 변신해 종묘
‘길거리 다면기’로 첫 선을 보였다.
낭중지추囊中之錐(주머니 속의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남의 눈에
띄게 됨을 이르는 말)라 했던가.
그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홍시범
A7 대표는, 웬만한 바둑人이라면 다 알 정도
로 바둑행사 디자이너로 확고히 자리 잡아가
고 있다.
몇 년 전 아바사 신년회에서 사회 보는 홍시범 대표.
오늘날,
아버지 홍시범 대표가 한국 바둑계에 한 획을
그은 일이나, 아들 홍맑음샘 프로가 일본 바둑
계에서 명예를 덮히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두 父子부자 에게 건투를 빈다.
일본 홍도장에서 제자들을 지도하기에 바쁜
홍맑음샘 사범이 이번 달 한국을 방문한다.
매년 그의 이름을 건 ‘제8회 맑은샘배 어린이
최강전’ 이 서울 은평구 아마바둑 사랑회관에
서 2월 29일~3월 1일 양일간 열리기 때문이다.
어려웠던 어린 날을 회상하며 꿈나무들을 돌보
는 삶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다.
홍사범이 우리 일행에게 대해준 융숭한 대접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으리라.
홍맑음샘 프로가 지금까지만 해도 국위선양한
일이지만, 가슴 벅찬 앞날이 되기를 기원하며
아사가야역을 떠나왔다.
한국人의 긍지를
일본 땅에 심어주고
있는 그에게 찬사를 보낸다.
첫댓글 변방에서 일하고있는 샘군을 찾아주심에 감사드립니다.오래기억하겠습니다.고맙습니다.
일본 기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