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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83편 1절.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질 때, 그래도 구하라
사람이 살다보면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때로는 멀게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실망감이 매우 크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실망감은 대체로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큰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큰 실망의 대부분은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느낍니다. 자녀들은 으례히 부모님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기대한 것이 크면 클수록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실망감이 큽니다. 그러면서 그 부모조차 왠지 자신의 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시 말해서 멀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꼭 해줄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안해줄 때, 꼭 들어줄줄 알았던 사람이 들어주지 않았을 때 그 실망감은 매우 큽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누구에게서 실망하셨습니까? 만일 여러분들이 사람을 기대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든 면에서 부족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실망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가 누군가로부터 실망을 당한 것은 매우 크게 여기지만 누군가를 실망시킨 것은 기억조차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기가 누구를 실망시켰으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러분들로부터 어떤 부분에 대하여 실망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문제는 항상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망을 주고받는 문제는 항상 따라다닙니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들의 마음은 자꾸만 멀어집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역시 하나님께 대한 많은 기대를 했다가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이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시기를 원했습니다. 항상 풍족하고 안전한 삶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풍족한 삶을 위해서는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거나 다른 나라의 신을 섬겼고, 안전을 위해서는 이방인들과 섞여서 그들의 마음에 맞추는 삶을 살았습니다. 재물과 인간관계를 통해 풍요와 안전을 도모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른 나라 사람들이 강해지면 자기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안전을 자기 나라에 왕을 세움으로써 찾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사사시대에 대한 불만족을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우리에게 왕을 세워주시오”하고 강하게 요구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문제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외부로부터 채움받지 못할 때 그들은 불만족스러운 것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그 대상과 멀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다니던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길까요? 자기들이 원하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영적인 욕구라면 그들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심으로 인해 영혼에 진리를 알게 하시고, 기쁨과 능력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영적인 삶보다는 이 땅의 풍요로움 만을 구하는 사람들이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는 영적인 풍요를 주시는 성령을 구할 리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권세를 잡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세상의 육체적인 풍요를 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심령과 인격을 가지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충만하다고 해서 이 세상의 것들이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업을 하거나 가게를 하거나 직장생활을 하거나 정치를 하거나 의사가 되어 환자들을 치료하거나 하나님이 주신 재능으로 개인적인 일을 하거나 농사를 하거나 가정 주부로써의 일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의 삶을 하나님은 풍족하게 하시고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해주시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8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때문에, 또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 재물 얻을 능력을 부어주시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재물을 얻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재물을 얻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풍요로운 삶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교회와서 기도를 하건 예배를 드리건 설교말씀을 듣건, 무슨 봉사나 전도를 하든지 간에 자기가 얻고자 하는 물질이나 명예나 건강이나 권세를 목적으로 행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그런 것들을 요구하게 되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다른 교회로 가거나 아니면 교회를 안다니거나 아니면 그 교회에 다니면서 목회자나 교회를 힘들에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마치 철없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이것저것을 당연히 하며 원하는 것을 요구하다가 안들어주면 떼를 쓰면서 울기도하고, 방에 박혀서 나오지도 않기도 하고, 가출을 하기도 하면서 부모를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교회는 다니고 예배는 빠지지 않아도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고, 예수님이 지라고 하신 십자가와도 멀고, 예수님의 몸인 교회로부터 먼 것입니다. 그려면서도 자기들이 구하는 것만은 얻기 위해 열심을 내면서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렇게 하는데도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같이 느껴지면 이들은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줄때까지 나름대로 방법으로 하나님께 그리고 목회자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사용한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상에게로 갑니다. 우상은 아무 말도 못하고 도와줄 수도 없는데도 그들은 그 행위를 통해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만들어갔습니다. 그를 통해 거래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재물을 얻을 수 있었고, 어느 정도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사사기나 사무엘상하, 그리고 열왕기와 역대기를 보면 그런 시도들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심은 힘이 넘치면 그 힘을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그 나라 사람들이 애써 농사지은 것과 모은 것들을 빼앗아 가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은 항상 일어납니다. 그리고 전쟁은 엄청난 피해와 상처를 입힙니다. 그 상처는 자기 주변에 대하여 서운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고, 자기들이 부를 때마다 응답하시지도 않고, 자기들이 요구하는 것도 다 들어주시지도 않는 하나님을 너무나 쉽게 버리고 멀리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욥기 34장 29절을 보면 “주께서 침묵하신다고 누가 그를 정죄하며 그가 얼굴을 가리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으랴 그는 민족에게나 인류에게나 동일하시니”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먼저 찾지 않으시는 한은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해서 누가 그를 정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감추신다면 누가 그를 뵈올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든지, 민족이든지, 온 인류에게든지 간에 이것은 부인할 수 없이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으셔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아삽은 성전에 찾아가서 노래합니다.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소서”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없이 신앙생활이 가능할까요? 다른 종교처럼 신상을 만드는 사람들이 만든 눈에 보이는 신을 찾아가 아무런 응답이 없어도 상관없이 자기들에게 힘든 일이 있거나 또는 바라는 소원이 있을 때 찾아가 기도하고 내려오는 종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신들이 자기들의 정성을 들으셨을거라고 믿으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 예전과 똑같은 생활을 지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가고 싶고, 가야할 일이 있을 때 신을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들어주셔도 신의 뜻, 들어주지 않으셔도 신의 뜻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믿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 방식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내내 교회를 나가지 않다가 어떤 어려움을 겪거나 힘든 일이 있거나 소원이 있을 때에야만 교회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매주 교회에 나가기는 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찾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아도 그것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의 신앙이 여러분 자신이나 가정만을 위한 것에 머무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자기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힘들면 그만두는데 있습니다. 힘들면 그만둡니다. 이것이 요즘 젊은 사람들의 특징 아닙니까? 그것이 얼마나 부모를 힘들게 합니까? 좀 꾸준히 인내하면서 직장을 다니던가, 아니면 해야할 일을 해야하는데 이것도 조금하다가 힘들다고 말고, 저것도 역시 조금하다가 힘들다고 그만 둡니다.
제가 아는 어떤 청년은 누군가의 소개로 그 회사에 들어갔는데 한달도 되기전에 일이 힘들어 그만 두어야겠다고 했다가 귀퉁배기를 한 대 얻어맞고 그 다음부터는 그런 말을 안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귀퉁배기도 안때리십니다. 인내하시면서 그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날마다 도우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겨보셔서 아시겠지만 하나님은 아쉬울 때만 찾아야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으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실 떼 다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서 만드셨습니다. 인간은 그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 안에 그 마음을 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53편 1-4절을 보면 사람들의 어릭석음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마할랏에 맞춘 노래]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부패하고 가증한 악을 행합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더러운 일을 피하고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계신 것같고 계셔도 너무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주변 사람들처럼 같이 악을 행하며 함부로 말을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렇게 멀리계신 것처럼 느껴질까요? 에스겔 8장 6절을 보면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하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멀리 떠나실 수 밖에 없으셨던 이유는 그들의 가증한 죄때문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증한 것은 겉과 속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겉은 선한 척하는데 속은 완전히 불법이 가득한 것입니다. 겉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같은데 속은 자기 욕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십니다. 사울왕은 그런 절차를 따랐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왕이 되었습니다. 마음의 가증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가증함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시게 한 사울왕은 악신에 들려 괴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으니 악인들의 말과 행동을 함께 따라하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어찌 그렇게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나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불신자들 가운데도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도 전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는 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성도에세서 괴롭히고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무지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불러도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본문의 아삽은 하나님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편 83편 1절은 말씀합니다. “[아삽의 시 곧 노래]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하나님께 “침묵하지 마소서”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오랫동안 기도를 했는데도 하나님이 침묵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지금 자기에서 멀리 떠나가신 것처럼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원수들은 자기들을 괴롭히는데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멀리 떠나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시편 83편 1-8절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아삽의 시 곧 노래]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사람이요 앗수르도 그들과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 (셀라)”
사방이 적입니다. 그리고 그 적들이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합니다. 여러분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사방에 깔려 있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가서 그들을 멸하고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이런 상황 가운데 놓였던 예레미야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레미야애가 1장 16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생명을 회복시켜 줄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의 사정을 알고 계시는지 모르고 계시는지 아무리 기도해도, 아무리 울어도 마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저 멀리계신 것처럼 침묵하고 계십니다. 이런 때의 그리스도인들은 견디기 참 어려운 때입니다. 그런데 아삽은 이러한 때에도 하나님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잠잠하지 마시고 침묵하지 마소서” 이렇게 애타는 기도는 시편 10편 1절에도 나타납니다.“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그리고 이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이 환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연결됩니다. 시편 22편 1절을 보면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아얠렛샤할(사슴이란 곡조)에 맞춘 노래]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들 앞에서 예수님을 구해내지 않으셨습니다. 온 세상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백성들을 살리셔서 그들의 죄를 제거하시고 영원히 함께 사시기 위해서는 아들이 죽어야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속량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섞여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죄에서 건져 내시기 위해서 그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어려움 가운데서 죽어가도록 버려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원수들이 총공격을 하며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를 시편 94편 17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하나님이 도움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환난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은 도움이 되셨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이 구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셨습니다. 여러분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때부터 얼마나 많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기도를 하셨습니까? 그때마다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여러분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여러분들의 도움이 되셨습니까? 이것을 기억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신앙생활하시는 동안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심을 나타내신 많은 도우심의 순간들을 기억해내는 것은 여러분들이 멀리 계신 하나님께서 다시 가까이 오셔서 여러분들을 건져주시고 회복시키시며 더욱더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는 이유가 됩니다. 거기다가 여러분들을 영원토록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실 성령님의 증거가 여러분들 안에 있기에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박해와 곤고함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여러분들과 함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또다른 이름이 임마누엘이라고 하신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증거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하나님이 언제나 여러분들과 함께 계시길 구하십시오.
그러면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이던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시 가까이 다가오셔서 그 모든 원수들의 문제, 고통의 문제, 죄의 문제, 얽히고 설킨 문제들을 바로 잡으시고 놀라운 은혜를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멀리계신 것같아도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께 구할 이유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