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14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7. 선악과로 영혼이 죽게 됨을 믿습니다. 》
창 2:17
〈 핸드폰 vs 걱정 〉
손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 핸드폰을 사 주기로 했습니다.
어린이가 사용하기에 합당하도록 여러 가지 제약을 걸어서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는 핸드폰에 “빠지고” 어른들은 걱정에 “빠졌습니다.”
우리말 참 재미있습니다.
아이는 핸드폰에 “빠지고” 어른들은 걱정에 “빠졌습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 아이가 이것을 해도 괜찮을까?”라는 의문에 봉착합니다.
아이를 잘 키운다는 것은,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는 일입니다.
성장단계에 맞추어서 ‘해야 할 것은 하고, 안 되는 것은 못 하게’ 해야 합니다.
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어른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해서는 아니 되는 것” 이것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해도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너 하고 싶은 것 다 해라!”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_ 하나님은 사람이 해도 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셨습니다.
_ 그래서 우리는 늘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지으실 때, 첫 번째 제약으로 걸어두신 것이 있습니다.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 에덴 동산 안에 있는 모든 실과는 먹되, 선악과는 따 먹지 말라!
☞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선악과 약속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 첫 번째 약속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 “최초 언약”입니다.
〈 부모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녀 〉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피조물 사람과의 최초 언약으로 선악과를 금지했습니다.
선악과 언약에 대하여 지난 주 설교했습니다.
《 6. 선악과 타락의 원죄를 믿습니다 》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을 창조하여 이 땅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과 약속을 하십니다. “너희와 내가 이렇게 살아가자!”
그 약속 중에 첫 번째가 선악과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왜 첫 번째 약속으로 선악과를 금지하셨을까, 묵상합니다.
☞ 부모가 자녀를 낳았습니다.
☞ 부모도 태어난 자녀에게 ‘네가 이렇게 살아가기를 바란다’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_ 여러분은 자녀를 낳으면서 자녀에게 바라는 첫 번째 약속, 무엇으로 하셨습니까?
_ 많은 부모들이 “개구쟁이라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이러한 바람을 가집니다.
_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바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는 내 자녀이다!”입니다.
_ “나는 부모이고, 너는 나의 자녀이다. 이것만은 꼭 지키자!” 이것이 ‘최초 약속’입니다.
_ 부모는 부모이고 자식은 자식이다! 대단히 중요한 약속입니다.
_ 자녀가 자라서 만일 부모를 부모로 인정하지 않으면 어찌되겠습니까?
_ 부모와 자녀 관계가 깨지는 겁니다.
_ 부모 입장에서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돌아서면 어떤 심정이 될까요?
_ “자식 하나 안 낳은 셈 치겠다!” 이렇게 됩니다.
_ “안 낳은 셈 치겠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은 최초 언약을 하시고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_ 거역한 자녀에게 “안 낳은 셈 치겠다” 이 말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_ 생각해 보십시오! 두 가지에 공통점이 있지않습니까?
_ “안 낳은 셈 치겠다” 이 말은 “네가 죽고 없는 것으로 알겠다” 이 뜻이 아닐까요?
_ 거역하고 의절한 자녀에게 부모는 “네가 죽은 것으로 알겠다”라고 단정합니다.
_ 하나님의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첫 사람 아담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딨어? 하나님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이렇게 되었습니다.
☞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죽은 것입니다.
〈 영혼의 회복 ‘구원’ 〉
자녀들아, 부모를 거역하지 말라, 거역하면 너희는 부모 앞에서 죽은 자와 같다!
_ 부모의 장례식장에도 끝내 나타나지 않는 자녀가 있습니다.
_ 그러한 자녀는 낳아준 부모에게 이미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최초 언약,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인정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효심’이라 합니다. ‘효심’이 사라지면 그 자녀는, 부모에게 죽은 자녀입니다.
피조물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촉’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촉’이 ‘영혼’입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의 ‘최초 언약’을 어기는 순간 죽게 됩니다.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담과 하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하나님을 인정하는 ‘촉’은 끊어졌습니다.
그때로부터 인류는 매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했다!” 이렇게 말하면 “흥~”하고 콧방귀를 뀝니다!
비웃고 돌아서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학문을 발전시키고, 이론으로 무장하고 사상과 철학으로 에워쌉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이 팽배하고, 하나님의 창조론을 무너뜨립니다.
인류의 역사는 점점 하나님을 거역하는 ‘영혼이 죽어버린 상태’로 굴러가는 중입니다.
☞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촉’이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이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고후 2: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첫사람 아담과 하와가 최초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아는 영혼’이 죽었습니다.
☞ 그 영혼의 회복이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혼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 영혼 3분설 〉
오늘 설교 제목이 《 7. 선악과로 영혼이 죽게 됨을 믿습니다. 》입니다.
이 신앙고백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그동안 선악과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말씀 때문에 갑론을박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반문하기를,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는데 안 죽었다는 것입니다.
보편적인 죽음 개념으로 비춰보면, 선악과를 따 먹고도 죽지 않았습니다.
이후로 아담 하와는 왕성하게 자녀를 낳았습니다.
창 5:3~5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무려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아담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었음에도 죽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와 신학자들도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논란이 많았습니다.
아주 쉽게 산술적으로 접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영, 혼, 육으로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3분설’이라 합니다.
영은 하나님을 아는 ‘촉’이고, 혼은 일반 사람들이 가진 ‘멘탈’이고 육은 몸입니다.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 하나님을 아는 ‘촉’ 즉, 영이 죽었다는 해석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혼과 육, 2가지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2분설이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는 ‘영’의 회복이 구원이라는 설명입니다.
실제 이렇게 신학을 전개하고 목회를 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아마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고 믿는 분들, 꽤 있을 줄 압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2분설, 3분설로 접근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근거가 희박합니다. 그래서 논란이 많습니다.
〈 유비(類比) analogy 애널러지 〉
☞ 저는 2분설이나 3분설보다는 ‘유비(類比)analogy’를 주장하는 편입니다.
[유비] 어떤 사물 상호 간에 대응적으로 존재하는 동등성 또는 동일성.
로마서 1장의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롬 1:18~20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이중에서 특히 19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하나님은 창조한 세상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넣어두셨습니다.
이를 흔히 ‘일반 계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반 계시’는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창조주를 알 수 있습니다.
지구를 비롯한 태양과 별들이 치밀하게 운행하는 것을 보고 창조주를 알 수 있습니다.
들에 피는 꽃 한 송이도 참으로 아름답게 철따라 핍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자연 계시’라 합니다.
이에 비해 성경책은 우리에게 특별히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특별계시라 합니다.
‘자연계시’에 대해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자연 현상’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읽어냅니다.
그러나 ‘자연계시’는 자연적인 현상만을 일컫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꼭 자연 현상 속에만 하나님을 계시할까요?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는 모습 속에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이곳 저곳에 두셨습니다.
이를테면,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람 사이를 매우 극명하게 드러냅니다.
부모가 자녀를 낳아 기르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사랑에 대한 유비입니다.
부모의 가이 없는 자녀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자기 백성에게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셨는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 관계 〉
하나님이 사람과의 최초 언약으로서 선악과를 택하셨습니다.
최초 언약, 선악과!
선악과는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 사이,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관계’를 상징합니다.
선악과 언약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자녀!
아버지와 자녀!
이 관계의 유지를 위해서는 최초 언약을 지켜야 합니다.
만일 사람이 이 최초 언약을 깨뜨린다면,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가 되는 관계는 파괴됩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과와 함께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택권을 주십니다.
이 선택권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남을 것인지, 하나님을 거부할 것인지 결정합니다.
과연 최초 언약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게 되면, 아버지와 자녀 됨은 깨어집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람 사이 관계는 깨어집니다.
결국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 먹는 선택을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관계를 스스로 파괴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관계의 파괴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는 영혼의 죽음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이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학문, 사상, 철학의 바벨탑을 쌓아 올립니다.
이는 “견고한 진”(고후 2:5)이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 선악과로 영혼이 죽게 됨을 믿습니다 》
이 고백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선악과로 영혼이 죽게 됨”을 믿는 순간부터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믿는 순간 선악과로 죽은 영혼이 마치 ‘에스겔 골짜기 마른뼈’가 살아나듯이 소생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외쳐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관계가 되살아납니다!
할렐루야~